제111장
하늘과 땅이 두루말릴지라도 살아있는 너희는 죽음을 보지 아니 하리라
제111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늘들과 땅이 너희 면전에서 두루말릴 것이다. 2그러나 살아있는 자로부터 살아있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보지 아니 하리라.” 3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아니 하느뇨?: “자신을 발견한 자는 누구든지, 이 세상이 그에게 합당치 아니 하리라.”
1Jesus said, “The heavens and the earth will roll up in your presence, 2and whoever is living from the living one will not see death.” 3Does not Jesus say, “Whoever has found oneself, of that person the world is not worthy.”
역시 막판에 나옴직한 로기온이다. 제2절은 이 도마복음서의 서장과 제1장의 내용이 다시 요약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막이 내려갈 즈음에 그 서두의 메시지를 다시 상기시키는 수법은 로기온 배열이 어떤 전체적인 의도 속에서 오케스트레이션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제3절에 나레이터가 비로소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배면에 나레이터가 숨어있다는 것을 암시했었는데 여기 막판에 그 목소리를 드러낸다: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아니 하느뇨?” 이러한 ‘삐에로(pierrot)’와 같은 나레이터의 목소리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추구자들과 독자들이 궁금증을 총괄적으로 풀어버리면서 이 복음의 궁극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선포하고 있다.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이 노리고 있는 궁극적 의도는 신앙이나 계시나 죽음이나 부활이 아니라 도반들 ‘자기 자신의 발견’이다. 이 자신의 발견은 결국 세속적 가치로부터의 초월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합당치 아니한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할 것이라는 운명도 암시하고 있다.
제1절의 표현을 두고 많은 주석가들이 아포칼립스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포칼립스가 아니라 무엇의 중요성을 말할 때 상투적으로 하는 관용구적 표현일 뿐이다. 우리도 상식적으로 ‘이 땅이 꺼져도 내 말은…’ 이런 식으로 ‘내 말’의 중요성이나 불변성을 나타낸다.
팔레스타인의 유목민족은 이동생활을 하기 때문에 텐트를 두루마리 형태로 휘감는데 익숙해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두루말린다 하더라도’와 같은 표현이 생겨난 것이다. 이사야 34:4, 시편 102:25~27, 히브리서 1:10~12 등등의 표현을 참고해보라. 중동사람들은 땅은 한 겹이지만 하늘은 여러 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땅은 단수로, 하늘은 복수로 표현되고 있다. 주희(朱熹)도 『어류(語類)」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산하대지가 다 꺼져도 필명 리(理)는 거기에 그대로 있다.
且如萬一山河大地都陷了, 畢竟理却只在這裏. (卷一. 胡泳錄)
마가 13장 31절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마 24:35, 눅 21: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을 없어지지 아니 하리라.
제2절의 ‘그러나’는 원래 ‘그리고’인데 문맥을 살리기 위해 의역하였다. 2절의 ‘살아있는 자’는 서장에서 기술된 ‘살아있는 예수’이다. 따라서 ‘살아있는 자로부터 살아있는 자’는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에 의거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죽음이 없다. 죽음을 보지 아니 한다.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한다. 즉 삶의 모든 순간에 죽음의 체험이 없는 것이다. ‘죽음의 반찬’이 없는 식사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Th.1).
나레이터가 다시 한 번 전체의 주제를 상기시킨다. 예수가, 살아있는 예수가 우리에게(추구하는 자들 = 독자들) 끊임없이 말하고 있지 아니 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너 자신을 발견하라! 그리하면 너는 세상을 초월할 수 있으리라. 이미 이 세상이 너에게 합당치 아니 하리라.”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108장의 메시지를 상기해야 한다: “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나와 같이 되리라. 나 자신 또한 그 사람과 같이 되리라.” 나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내가 예수와 같이 된다는 것이며, 예수가 나와 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와 나의 온전한 융합, 그 하나됨, 그 박(樸)으로의 회귀야말로 나 자신의 발견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세속적 영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 벌둥지 집 속은 꽤 넓고 쾌적하다. 하란이 지금은 매우 영락한 빈촌이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가장 앞서간 상업도시였다. 따라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가나안 촌 여자보다는 개명한 하란의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지금도 하란의 여자들이 인물이 좋다고 한다. 호베스(인도의 난)를 만들고 있는 밧단 아람(하란)의 여인들, 96장의 빵만드는 여인들이 연상된다.
▲ 하란 동네 한가운데 버려진 채로 있는 중세기의 성채. 히타히트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라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카이로 중심으로 번창한 파티마 이슬람 왕조(Fāṭimid Dynasty)가 1059년에 이 지역을 복속한 후에 재건한 것이다. 원래 이곳은 대상들의 숙소였는데 방이 150개나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주목하는 사람이 없이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다. 군데군데 훌륭한 조각이나 명문이 남아 있다는데 불행하게도 시간이 없어 자세히 돌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아쉬움이 남는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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