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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61장 - 침대에서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 것이다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61장 - 침대에서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 것이다

건방진방랑자 2023. 3. 25.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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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 것이다

 

 

61

1예수께서 가라사대, “둘이 한 침대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다면 하나는 죽을 것이고, 하나는 살 것이니라.” 2살로메가 가로되, “남자여! 당신은 도대체 뉘시니이까? 당신은, 마치 누가 보낸 아주 특별한 사람처럼, 내 침대에 올라와 동침하고 나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시나이다.” 3예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분열되지 않은 전체로부터 온 사람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의 풍요로운 소유물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4살로메가 가로되, “나는 당신을 따르는 자이로소이다.” 5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기에 내가 너에게 말하노라. 누구든지 분열되지 않은 전체 속에 있으면 빛으로 가득차게 되고, 누구든지 분열되면 어둠으로 가득차게 되나니라.”

1Jesus said, “Two will rest on a couch; one will die, one will live.” 2Salome said, “Who are you, mister? You have climbed onto my couch and eaten from my table as if you are from someone.” 3Jesus said to her, “I am the one who comes from what is whole. I was given from the things of my father.” 4[]“I am your follower.” 5[]“For this reason I say, if one is whole, one will be filled with light, but if one is divided, one will be filled with darkness.”

 

 

매우 수수께끼 같은 장이다. 어느 주석가도 명료한 해석을 내리지 못한다. 상당부분의 주석이 추측작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마복음서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그 대의는 명료하다. 우선 제1절은 큐복음서에도 병행문이 있다(Q81), 그러나 큐복음서는 이미 매우 종말론적 맥락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17:34~35) 3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침대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35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24:40~42) 40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날에 너희 주께서 임하실런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누가와 마가의 자료 중에서, 누가자료가 큐복음서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사료된다. 마태는 누가에 보존되어 있는 도마자료를, ‘침대에서 으로 환치시킴으로써, 완전히 변형시켜버렸다. 그리고 종말론적 맥락을 강화하는 언급(42)을 첨가하였다. 도마와 누가를 비교하여 보면, ‘두 남자, ‘안식을 취하다누워있다, ‘죽을 것이다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살 것이다데려감을 당할 것이다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그 밤에가 첨가되었다. 맷돌가는 두 여자는 친근함이나 밀착된 관계의 강도를 나타내고 있다. 맷돌을 갈 때 보통 두 여자가 맷돌자루를 같이 잡고 한 여자가 180° 밀면 한 여자가 잡아당기고, 또 잡아당긴 여자가 다시 180° 밀면 상대편의 여자가 잡아당기고 하는 식으로 밀착되어 연쇄적으로 작동하게 되어있다. 그렇게 밀착되어 있는 두 여자의 경우도 심판의 날에는, 준비되어 있는 한 여자는 구원을 얻고 준비되어 있지 않은 한 여자는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두 여자에 상응하는 두 남자의 경우에도 같은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겠으나, 전통적으로 주석가들은 한 침대에 누워있는 두 남자라는 표현에 관해 영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고 불만을 토로해왔다. 그만큼 이 파편은 맥락적으로 어색한 부분이었다. 원래는 한 농부와 그 부인이, 타인들은 새벽이 되어 다 들판으로 나가는데, 아직도 늦잠을 자고 있는 상황을 의미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구원은 유월절 밤에 온다는 유대인 신앙과 관련하여 이 구절을 해석하기도 하였다.

 

또 누가자료는 도마자료와 비교하면 그 밤에가 첨가되어 있다. 그러나 그 밤에라는 구절만으로는 그것이 최후의 심판의 때를 가리키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하여튼 이미 누가와 마태는 이 도마의 로기온자료를 이미 종말론적 맥락 속에서 변형하여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도마의 원의가 그러한 뜻이었을까? 물론 그러한 공관복음서의 변형의 맥락에서 도마를 해석할 수는 없다. 도마자료에는 그러한 종말론적 전제가 없기 때문이다. 1절을 60의 마지막 절과 연관시켜 해석하면 안식을 취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이 세상에서 안식의 자리를 구한다는 뜻이 된다. 안식의 자리를 구하는 그러한 상황에서는 나의 분열이 있으면 안 된다. 여기서 이란 심판의 날에 처해지는 두 사람의 뜻이 아니라, 분열된 자아의 모습이다. ‘하나는 죽을 것이요, 하나는 살 것이다.’ 비본래적인 자아는 죽을 것이요, 본래적인 자아는 살 것이다. 심판의 상황을 실존적 상황으로 바꾸어 말해도 마찬가지다. 하늘적인 자아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땅적인 자아는 버림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는 무대가 바로 살로메의 침대 위이다. 살로메는 마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여인이다. 예수의 십자가처형 장면을 쳐다보았던 세 여인 중의 한 사람(15:40)이요,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무덤으로 달려간 세 여인 중의 한 사람(16:1)이다. 살로메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 시절부터 예수를 지원했던 격이 높은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여자는 예수의 제자로서 규정되지 않는다. 남성중심의 가치관이 복음서 저자들의 붓길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에서는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자됨에 있어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우위는 여지없이 파괴된다(Th.114).

 

그런데 예수는 살로메의 침대에 올라와 있다. 나는 의역하면서 동침이라는 말을 첨가하였는데, 실상 한 남자가 한 여인의 침대에 올라간다는 것은 성교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 예수는 살로메의 섹스파트너일까? 그리고 내 침대에 올라와 동침하고 나의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라는 표현은 고대 헬레니즘 사회에 있어서 옆으로 기대어 누운 상태에서 식사하는 것은 보통 있는 관습이었다. 침대와 식탁은 연결된 전체이다.

 

이것은 예수의 성교장면을 암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와 살로메를 신랑과 신부에 비교하여 어떤 미분화된 하나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살로메의 합방처소(bridal chamber)야말로 나라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Th.75, 104). 티베트 불교에서 말하는 합체불(合體佛)을 연상할 수도 있다. 반야(여성성)와 방편(남성성)이 하나가 된, 진제와 속제가 하나가 된 대자대비의 부처의 모습이야말로, 여기 살로메와 합방하는 예수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에 살로메는 도대체 당신이 뉘시길래 나와 합체가 될 수 있는가?’하고 예수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예수는 살로메에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밝힌다: “나는 분열되지 않은 전체로부터 온 사람이다.” 이러한 예수의 정체성은 노자통나무[]’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모든 이름이 분화되기 이전의 무명지박(無名之樸)’이다(37), 박이 흩어지면서 모든 만물의 기물이 생겨난다[樸散則爲器28]. 그러기에 성스러운 인간은 그 만물의 분화가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復歸於樸. 28]. 예수가 말하는 전체(what is whole)’가 바로 노자가 말하는 ()’이다. 예수는 모든 분열을 초월한 원초적 통합자로서 자기정체성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로메는 그제서야 자기의 정체성을 밝힌다: “나는 당신을 따르는 자(제자)이로소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대답하는 것이다: “네가 바로 나의 제자이기 때문에 나는 말하노라. 한 인간이 전체의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그 인간의 내면은 빛으로 충만케 되고, 한 인간이 분열되면 그 인간의 내면은 어둠으로 가득차게 된다.” () 즉 무명(無名)의 세계가 예수에게 있어서는 빛이요, ()의 세계는 오히려 어둠이 되는 것이다. 24에서 해설했듯이 빛과 어둠은 요한복음에서처럼, 세상과 하늘로 이원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의 문제일 뿐이다. 나의 내면이 통합되면 빛이요, 분열되면 어둠일 뿐이다. 인간실존(Da-Sein)의 매 순간에 있어서도 빛과 어둠은 왕래하는 것이다.

 

 

괴레메계곡의 어둠교회(Dark Church, 까란르크Karanlik 교회)의 성화,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의 모습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프린스턴대학의 종교학 교수 엘레인 페이웰즈(Elain Pagels)는 무조건의 믿음을 강조하는 요한공동체가 도마공동체의 믿음사상 = 탐구, 해석, 발견, 자각을 폄하시키기 위하여 만든 설화가 요한복음에 실린 것이라고 간파한다: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 페이겔즈는 도마복음의 성립연대를 요한복음 성립시기와 비슷하게 비정하고 있는데, 페이즈는 아시아적 사유에 익숙치 못해 도마에 깔린 사유의 오리지날리티를 과감하게 인정하지 못한다. ‘의심하는 도마의 모습에 있어서도 도마공동체의 추구하고 해석을 발견하는 실증적 자세가 여실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카파도키아(Cappadocia)는 현 터키의 중앙 내륙고원 지대에 위치하는 지역으로서 기원전 제2 밀레니움 중반시기부터 히타이트제국의 한 중심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이 카파도키아와 폰투스(Pontus)로 나누어 지배했고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반 독립왕국이 되었다. 후에 셀레우코스 지배자들에게 항거하고 로마편을 들었다. 카파도키아의 마지막 왕 아르켈라우스 1(Archelaus I Philopatria, BC 36~AD 17 재위)의 딸은 헤롯 대왕의 아들(Alexander)에게 시집갔다. 아르켈라우스가 죽고 나서 티베리우스 황제가 카파도키아를 로마의 속주(province)로 삼았다. 2:9, 벧전 1:1에 언급되는데 이 지역은 사도 바울의 이방전도사업의 영역이었다. 초기기독교의 모습(동굴교회)을 너무도 잘 보존하고 있다. 사진은 카파도키아 괴레메(Göreme) 계곡, 샌달교회의 성화, 예수의 변모(Transfiguration, 17:1~9)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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