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장
아버지의 나라는 지금 여기 이 땅에 깔려있다
제113장
1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가로되, “언제 나라가 오리이까?” 2(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라는 너희들이 그것을 쳐다보려고 지켜보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오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 있다!’ 3‘보아라, 저기 있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4차라리,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 위에 깔려 있느니라.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니라.”
1His followers said to him, “When will the kingdom come?” 2(Jesus said,)“It will not come by watching for it. 3It will not be said, ‘Look, here it is,’ or ‘Look, there it is.’ 4Rather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spread out upon the earth, and people do not see it.”
대단원의 막을 앞둔 제113장의 로기온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정은 참으로 놀라운 충격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치밀한 결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서장과 1장, 2장은 그야말로 서론적·총론적 일괄이었고 제3장에 이르러 전복음서를 이끌어가는 주제 로기온(topic logion)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진실로 나라는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라는 선포였다. 이 천국의 시ㆍ공적 현재성, 임재성, 내재성의 주제가 바로 결말 로기온(concluding logion)에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레이터와 독자의 마음속에는 3장부터 113장까지 바로 ‘나라’라는 주제가 모든 초월적ㆍ묵시적ㆍ종말적 유혹을 거부한 채 현재적으로 임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도마복음서의 전체 결구와 통관적 주제의식을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광분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보는 사람은 당연히 도마복음서의 성립연대를 1세기 말경으로 내려잡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쿰란공동체의 종말론적 대망에 대한 열광적 실태를 여실히 목도할 수 있듯이 간약시대(間約時代)에 이미 종말론적 기대는 팽배해 있었다. 엣세네파를 비롯한 다양한 종파들의 움직임이 메시아 사상과 종말론을 결부시켜 생각하고 있었다. 도마복음서의 주제는 이미 후대 기독교의 양대 반석을 부정하고 있다. 그 하나가 예수라는 역사적 개체가 통속적 의 미에서의 메시아라는 관념과 그 관념에 대한 예수 자신의 자의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 하나가 바로 천국에 대한 모든 시간적 이해(temporal understanding)를 거부하는 것이다. 여기 본 장의 로기온은 실상 바로 앞의 112장의 내용과 연속되어 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고 한다면 바로 ‘아버지의 나라’는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계’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천국과 세속이 하나이며, 영혼과 육체가 하나이며, 하늘과 땅이 하나이며, 빛과 어둠이 하나라는 이 강렬한 주제는 당대 중동세계의 모든 이원론적 사유를 거부하는 일대 혁명 중의 혁명이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들고나온 선(禪)의 혁명보다도 더 큰 파문이었다.
이러한 예수의 사상은 결코 당대에 이해될 수가 없었다. 천국이 바로 이 땅에 깔려있다! 너희들이 보지를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안타깝게 외치는 예수의 목소리는 ‘차심(此心)이 곧 부처(즉불卽佛)’라고 외치는 선사들의 방할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도마의 예수의 목소리는 유대광야에 울려퍼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외롭게 이집트 나일강 상류의 항아리 속에서 1600여 년의 성상 동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이야말로 인류에 진정한 빛을 던지기 위한 인내였고 굴종이었다. 만약 도마복음서가 1세기만이라도 일찍 발견되었더라면 도마복음서는 또 다시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황제교화된 가톨릭교회의 성세 속에서는 예수는 영원히 십자가에 못박힐 수밖에 없다. 제2차세계대전을 치르고 인류가 민주와 개화와 풍요와 자유에 관한 최소한의 제도적 보장을 마련한 시기에 도마는 어둠을 뚫고 다시 등장하였던 것이다.
본 장은 큐복음서(Q80)에 병행한다.
(눅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두 눈으로 쳐다볼 수 있는 징표들과 함께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보라!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도 말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는 도마 혹은 도마류의 자료를 비교적 각색 없이 삽입시켰다. 그리고 도마에 있어서는 예수 도반들의 질문인데, 누가는 그것을 바리새인들의 묵시론적 발상에 대한 예수의 비판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누가의 주석가들은 이 아포프테그마가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삽입되어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도마의 원의가 발현될 수 있는 자리가 도무지 아닌 것이다.
여기 113장에서 말하고 있는 궁극적 메시지는 아버지의 나라 즉 천국은 묵시론적 비젼도 아니며 시간의 종말도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이원론적 분별이 사라진 새로운 주체의 인식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재해석을 요구하는 것이다: “단지 너희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이 한마디는 매우 충격적이다. 천국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라는 것을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의 실체화는 끊임없이 거부되어야 한다. 이러한 거부는 단지 이론이성의 인식론적 과제상황이 아니라, 실천이성의 삶의 결단의 과제상황이다. 이론적 거부가 아닌 체험적 수용이다. 그것은 자아혁명이며, 예수의 말씀의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새로운 주체(new subjectivity)를 현현시키며, 새로운 사회관계(social relations)를 창조하며, 이 세계의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본 복음서의 1·2장의 문제의식이었고 그 주제가 말미에서 새롭게 결정(結晶)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최후의 한 장은 또 다시 더 본원적인 주제, ‘카오스로의 복귀’라는 동방적 사유를 재천명하고 있다.
▲ 예루살렘 성지순례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간 길을 따라가는 비탄의 길(Via Dolorosa)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 비탄의 길에는 14군데의 순례 포인트가 있다. 이 사진은 성분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er) 내의 제12역에 해당되는 곳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고 숨을 거두는 순간의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모든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가장 많이 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최초로 성지순례를 했을 때 이곳을 지정했고, 그 후 335년에 이 성분묘교회는 완공되었다. [사진=임진권 기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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