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장
나라는 보물이 숨겨져 있는것도 모르고 밭을 가는 농부와도 같다
제109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라는 그의 밭에 한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도 그것이 거기에 있는 줄을 모르는 한 사람과도 같다. 2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에 그는 그 밭을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 아들 또한 보물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했다. 그 아들은 그 밭을 상속받은 후에 곧 팔아버렸다. 3그 밭을 산 사람은 밭을 갈았고 그 보물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누구에게든지 이자를 붙여서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1Jesus said, “The kingdom is like a person who had a treasure hidden in his field but did not know it. 2And when he died, he left it to his son. The son did not know about it. He took over the field and sold it. 3The buyer went plowing, discovered the treasure, and began to lend money at interest to whomever he wished.”
많은 주석가들이 이 장에 관해서 명료한 해석을 내리기를 힘들어 한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자를 붙여서 돈을 빌려준다’라는 표현은 95장의 로기온 내용과 상치되고 있다. 우선 이 로기온을 연상케 하는 구절이 마태에 하나 있다.
(마 13:44)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물과도 같으나, 한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태는 이것을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진주를 산 상인의 이야기(Th.76, 마 13:45~46)와 병치시키고 있다. 이러한 병치는 비유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여기 ‘보물(treasure)’이나 ‘진주(pearl)’는 모두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의 더 말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말론적 맥락 속에서 규정되고 있다. 유대교의 묵시론적 전통 속에서 천국의 도래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행위에 의하여서만 시간의 종말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러나 여기 마태는 종말론을 현재화시키고 있다. 이미 예수의 재림은 현재 속에 진행되는 사건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것을 지금 발견하여야 한다. 어떠한 세속적 가치를 희생하고서라도 그 보물(=천국)을 확보할 때 그에게는 세속적 가치와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천국의 가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마태의 ‘발견’은 약간 문제가 있다. 전체적인 구성으로 볼 때 사기성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 랍비의 율법전통 속에서도 밭에서 발견한 보물은 그 밭의 소유주에게 속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도덕적ㆍ법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 발견자는 그 보물을 발견하지 않은 것처럼 그냥 묻어두고 다시 ‘숨겨둔다.’ 아마도 상당 시간 숨겨두었을 것이다. 그동안 이 사람이 취해야 할 행동은 상당히 버거운 일이다. 그 밭 자체의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밭 자체의 소유권을 획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다 팔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밭에 숨겨놓은 보물은 모든 세속적 가치를 희생해서라도 구매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 사람은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 함축되어 있는 보물의 사태는 기나긴 세월의 노력 끝에 얻어지는 가치라기보다는 우연한 행운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발견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사태가 아니라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행운이다(The ‘finding’ is not viewed as the outcome of particular effort or ability, but rather as a piece of extraordinarily good fortune. John Nolland, NIGTC Matthew 564).
종말론적인 전제가 없는 도마의 경우, 과연 이러한 종류의 비유가 동일한 의미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마복음 해석자들이 이러한 마태의 맥락과 병행하여 본 장을 해석하고 있다. 우선 그러한 일반적 해석을 따르자면, 자기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했고 발견하지도 못한 첫 주인에 대하여 긍정적인 시각이 성립하지 않는다.
자기 몸에, 자기 영혼에, 자기 삶에 엄청난 보화가 숨어있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발견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그 첫 주인의 삶은 ‘자각’ 없는 일상적 삶에 비유된다. 그 첫 주인은 그냥 그렇게 살다 죽었다. 그리고 별 생각없이 그 아들에게 그 밭을 물려주었다. 그 밭을 상속받은 아들 또한 전혀 그 밭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 ‘자각’이 없는 것이다. 그 밭을 일구고자 하는 삶의 결의나 결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곧 타인에게 팔아버렸다. 세 번째로 그 밭을 산 사람도 그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밭을 샀다. 그러나 그는 밭을 샀고 소출을 원했기에 밭을 갈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보물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무지’에 대하여 ‘자각적 발견’이 대비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각적 발견에 대하여 재산의 증식에 관한 상행위가 긍정되는 것처럼 해석되는 것이다. 64장이나 95장과는 다른 맥락에서 현실적 재산증식 행위가 긍정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마태의 상황과 도마의 상황은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다. 마태의 경우는 보물을 먼저 발견하고 밭을 샀다. 그러나 도마의 경우는 밭을 먼저 샀고 보물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두 사태에 공통된 것은 보물의 발견 그 자체는 우연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메이어는 이 장과 관련된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잠언 2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아들아, 내 말을 받아 들이고 내 훈계를 간직하여라. 바른 판단에 마음을 두어라, 슬기를 찾아 구하고 바른 판단을 얻고 싶다고 소리쳐 불러라. 은을 찾아 헤매듯 그것을 구하고 숨은 보화를 파헤치듯 그것을 찾아라. 그래야 눈이 열려 야훼 두려운 줄 알게 되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리라(잠 2:1~5).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숨은 보화를 파헤치듯 그것을 찾아라’라는 이야기는 결코 본 장의 맥락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찾는 노력이지만, 본 장의 ‘찾음’은 기실 우연한 행운일 뿐이다. 잠언의 말은 도마의 76장의 상황에 보다 잘 어울린다. 상인이 진주를 사는 행위는 매우 의식적인 신중한 노력의 결과이다.
『미드라쉬 라바(Midrash Rabbah)』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랍비 시므온 벤 요하이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그것은 쓰레기더미로 덮혀있던 밭을 상속받은 한 사람과도 같다. 그 상속자는 매우 게을렀다. 그래서 그는 그 밭을 헐값에 팔아버렸다. 그 밭을 산 사람은 열심히 일했고 쓰레기더미를 치웠다. 그러다가 그는 그 더미 속에서 엄청난 보물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그 보물로써 그곳에 거대한 궁전을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시종들을 뒤에 따르게 하며 공중 앞에서 화려한 행렬을 갖추고 위세 당당하게 돌아다녔다. 이것을 본 매인(賣人)이 숨이 막히는 듯 절규하였다. 아! 얼마나 엄청난 것을 내가 상실하였는가!” (Song of Songs 4.12.1).
아마도 이 『미드라쉬 라바』의 논조가 가장 통속적인 도마해석의 모델을 이루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엄청난 보물을 발견하여 궁전을 짓고 화려한 행렬을 하고 다니는 것이 종말론적 천국의 기대치가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러한 세속적 가치의 화려함 때문에 보물발견의 가치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도마의 예수는 본시 이러한 세속적 가치를 정면으로 거부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솝우화에는 이러한 『미드라쉬 라바』의 허황됨을 해소시키는 보다 진실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한 훌륭한 농부가 수명을 다해 가고 있었다. 그는 그의 아들들이 농삿일을 배우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그 아들들을 불러 말하였다: “아들들아! 나는 많은 농장 중 그 하나에 보물을 파묻어 두었다.” 그가 죽은 후에 아들들은 쟁기와 곡괭이를 들고 가서, 그 농장들을 모두 갈아엎었다. 그들은 결국 그 보물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 농장이 그들에게 몇 배의 수확을 안겨주었다. 이 이야기는 말한다. 수고로부터 얻은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보배라는 것을 (Aesop, Fable 42).
이제 우리는 여태까지의 서구 주석가들이 상식적으로 전제하는 어떠한 선입견적 틀을 벗어나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주 맥아리 없는 듯이 보이고 도저히 가치를 부여할 수가 없는 듯이 보이는 평범한 사태 속에서 ‘나라’를 발견하는 예수의 역설적 지혜에 우리는 새롭게 눈을 떠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사유의 아시아적 가치는 이런 비유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나라는 … 과도 같다’ 했을 때 그 ‘같다’의 대상이 꼭 인격적 주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계속 목도하여왔다. 그리고 그 주체(사람)가 곧 나라이며, 그 주체의 행위 속에 나라가 내재한다는 논리 속에 하등의 예외적 레토릭이 동원된 바가 없었다. 여태까지의 서구 주석가들의 논리를 따르자면 천국의 주체는 첫 번째 땅주인이 아니라, 세 번째 땅주인이 된다. 첫 번째 땅주인은 자각적인 삶을 살지 못했고 세속의 패턴에 따라 부유(浮遊)한 인간이며 따라서 나라의 주체가 될 수가 없다. 천국은 땅을 사서 열심히 밭을 갈다가 주체적인 노력에 보물을 발견한 세 번째 땅 주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히 본 장의 명제는 나라의 주제가 ‘그의 밭에 한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도 그것이 거기에 있는 줄을 모르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즉 나라의 주체는 여태까지 우리가 가치론적으로 폄하해왔던 첫 번째 주인인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구구한 토를 달아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엄연한 논리적 사실이다. 예수의 말씀을 우리의 상식의 편의나 선입견적인 가치의 편견에 따라 왜곡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천국은 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러나 마태에게 있어서 천국은 분명히 보물이며, 그것은 우연적으로 얻어지는 행운이며, 그 행운을 차지하는 특별한 인간들의 선택적 특혜이며, 그래서 더욱 고귀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 무엇이다. 이것은 분명히 종말론적, 선민의식적 사유의 산물이다. 살아있는 역사적 예수에게 있어서 그런 식으로 실체화된 천국은, 즉 보물 같은, 우발적으로 유혹적인 천국은 제3장에서 말하는 바 ‘사람보다 하늘의 새가 먼저 도달할’ 그러한 허상이다. 천국은 나 안에 있고 나 밖에 있는 것이다.
천국은 결코 보물이 아닌 것이다. 보물은 어차피 나의 일상성 속에 숨겨져 있다. 나의 일상적 삶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도 그것이 거기에 있는 줄도 모르고 뚜벅뚜벅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그 평범한 인간 속에 ‘나라’는 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 109장의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면 97장의 ‘아버지의 나라는 밀가루를 가득 채운 동이를 이고 가는 한 여인과도 같다’고 한 천국의 비유를 이해할 길이 없다. 밀가루가 새어나가는 것도 모르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여인의 모습이나,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도 모르고 그 밭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농부의 모습이나 그 상실의 역설, 즉 상실을 감당할 수 있는 허(虛)의 역설은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두 번째 주인의 행위를 일상적 인간의 무지(ignorance)라고 매도할 수가 없다. 그들의 행동은 완벽하게 합리적인 것이다. 땅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죽을 때까지 그 땅을 갈았고 또 죽음에 이르러 그 땅을 아들에게 물려준 그의 행위를 비본래적 자아의 모습이라고 그노스티시즘의 신화구조 속에서 폄하할 하등의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유산 받은 그 땅이 크게 소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팔아야 했던 아들의 행동 또한 합리적이다. 오히려 비합리를 말한다면 우연히 보물을 발견하게 된 세 번째 주인의 행운일 뿐이다. 도마의 예수에게는 행운의 예찬이 없다. 진주를 산 상인(Th.76)의 상황에도 일체 행운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리고 세 번째 주인이 보물을 미끼로 이자놀이를 한 것은 제95장의 논리에 비추어 볼 때 그리 아름다운 행동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 보물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것은 어쩌면 로또복권에 당첨한 인간들이 겪어야만 하는 세속적 부화(浮華)의 고통을 상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코 긍정적인 맥락에서 해석될 수 없는 욕망의 굴레일 뿐이다. 그리고 『미드라쉬 라바』에서처럼 그것을 판 사람이 배가 아파서 후회의 개탄을 하는 그러한 장면도 삽입되지 않는다. 세 번째 주인은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나라 임란이후에 성립한 한 민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빈집으로 이사간 몰락한 양반집 안주인이 부엌 바닥을 고르다가 엄청난 보화를 발견한다. 그러나 고민고민 끝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다시 고스란히 보화를 파묻어 버린다. 그리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간다. 그리고 어려운 삶을 이어나간다. 그 집안에서 과거 급제자들이 속출하고 정승이 나왔다. 이러한 우리 조상의 지혜를 예수가 따랐을까, 『미드라쉬 라바』의 화려한 궁전을 천국의 모습이라고 선전했을까? 생각있는 자들이여, 한번 판단해보라.
‘살아있는 예수’에게 놀라운 것은 살아있는 민중들의 일상적 삶의 진실과 끈기, 그리고 무의식적ㆍ무분별적 허(虛)의 동태(動態)에 관하여 집요한 긍정이 있다는 것이다. 천국을 일시적인 허황된 ‘획득’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천국은 보물이 아닌 삶의 프로세스이며, 획득이 아닌 버림이요 상실이다. 이러한 나의 해석에 대하여 의구심을 표명할 많은 서구 신학자들에게 나는 말한다. 그대들이 살아있는 예수에 도달하는 길이란 아직 멀고도 멀다.
▲ 하란(Harran) 지역은 이스라열민족의 조상들의 근거지로서 유명한 곳이다. 아브라함 패밀리가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길을 떠나다가 하란에서 자리잡고 살았던 것이다(창 11:31). 하란은 아카드말로 대상(caravan)이라는 뜻이니 고대로부터 교역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리아왕조의 정치ㆍ종교의 중심이었다. 하란은 기원전 첫 밀레니움시기 동안 상업 중심 도시로써 매우 번창하였는데 그 활발한 모습은 에스겔 27:23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곳은 달의 신, 신(Sin)에게 봉헌된 도시로서 유명하다. 앗시리아제국의 마지막 시기에는 왕의 거처가 여기 있었다. BC 612년 니느웨(Nineveh)의 합락 이후 하란으로 앗시리 아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결국 메디아, 스키타이, 바빌로니아의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한다(왕하 19:12).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부인을 가나안 여자 중에서 택하지 않고 굳이 하란 여자 리브가로 취한 것이나(창 24:3~4), 이삭이 또 며느리들(라헬과 레아)을 하란에서 데려은 것(창 28:1~2)은 모두 이 조상들의 궁극적 아이덴티티가 하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보고 있는 석회석 조각은 바로 아브라함 시대의 신상으로서 희귀한 유물이다. 아브라함이 우상으로 간주한 한 신이었을 것이다(『꾸란』 아브라합의 장에도 언급이 있다. 터키 산리우르파 박물란 제공. 그리고 현존하는 하란 도성의 규모에서 및 사진) 인류 최고(最古) 문명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한 위용을 감지할 수 있다. 장장 4m에 달하며 187개의 망루가 있었다고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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