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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 文武策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이이 - 文武策

건방진방랑자 2019. 5. 24.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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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武策

問 爲國之道 文經武緯而已 唐虞三代 尙矣 表章六經 鎭撫南北軍 弘文館之建 府衛之設 果無愧於古昔作興振礪之方歟 文章性理之學 莫盛於宋室 而武略不競 其無乃創業者 偏於所尙 守成之或失於幷用之規歟 我國家聖神嗣興 敎化之具旣張 威武之烈載揚 式克至于今日休 然而豫大之極 師律漸解 自島夷竊發之後 朝廷之上 謀議處置者 無非詰戎備患之一事 旣勅藩垣之臣 以嚴統帥之體 而且遣耳目之使 遍閱州縣營堡之器械 其不輯者罪之 今之武備 可謂修矣 而議者曰 扞衛之託 實有所在 兵甲之精 非所恃也 況閫以外 自有專制之者 檢察之擧 徒爲煩擾 方鎭未必無掣肘之患也 其說然歟 儒宗文師 比肩乎臺閣之列 英材懿質 咸育於館學之中 試之以述作 考之以講誦 能者奬之 不能者勉之 右文之意 不可謂不至 而議者曰 譽髦斯士 自有其本 勵課之典 只是文具 帖括之陋已痼 詞章之華焉用 外之則守土者 不暇於治兵 而方伯餘事於學校 寒遠之士 卒不堪震薄之苦 而騰陵介胄者 意氣張皇 遂致鄕無遜悌之風 俗多鬪狠之習 裂眥而陵長 彎弓而報怨 文治優游 殆不可冀也 其說然歟 何以則載昭雲漢之爲章 鼓舞一時之人材 濟濟秉文之德 藹藹王多吉士 而干城爪牙之亦不乏用 風淸而化醇 政行而敎立 有不戰 戰則必勝 文經武緯之克盡其道 無偏墜不擧之弊歟 諸君子俱以光明俊偉之才 且得登進大庭 展盡所蘊 誠千載不可失之嘉會也 於斯二者 講之有豫 其各悉著于篇

對 縫掖之士 簡編是拘 俎豆是習 窮經尙不足以致用 則軍旅之事 固未之學也 今執事先生 策之以文武之說 誘之以展盡所蘊 愚雖面墻 安敢合喙 竊謂嚴內治而戒外侮者 有國者之所當竝用而不可偏廢者也 嚴內治則文之所以爲經也 戒外侮則武之所以爲緯也 其所謂文 不在於記誦之習詞章之學 而在於明敎化而作興之 其所謂武 不在於士馬之衆器械之精 而在於固邦本而捍衛之 竝用而各盡其道 則長治久安 而無一朝偏墜之患 竝用而不能盡其道 則雖得扶持鞏固於一時 而不能無後日之弊 二者如人之兩手 如鳥之兩翼 其用雖二 而其實則一 吾未見闕一而能國其國者也 雖然 天下之務 莫不有本而有末 道之以德敎者 爲治之本也 衛之以干城者 爲治之末也 此古之人所以勸其君以文德 而不欲其極意於武功者也 愚請因是而白之 思昔三代之盛 治隆俗美 制作郁郁 而其文至矣 有征無戰 而其武至矣 漢, 唐以下 復古者鮮 惟武帝之表章六經 近於祗述謨訓之道 文帝之鎭撫二軍 近於命掌六師之義 太宗建館聚士 而文風莫盛於貞觀 設府鍊卒 而兵農似合於古制 三代之後 彼善於此者 其不在數君歟 雖然 敎化不明 而無載道之文 徒事堅利 而非止戈之武 則不可謂能盡其道者也 若有宋之初 則揚威武於江漢之外 釋兵權於杯酒之閒 不可謂尙文而廢武也 孱孫失政 變亂舊章 不信仁賢 國以空虛 夷狄乘釁 蹂躪華夏 而濂洛羣哲 曾無一人在厥服 則其武略不競者 小人爲國之禍也 非尙文之過也 至文不可以無武 至武不可以無文 能文而不能武者 愚未之信也 噫 道德 非堯舜則不可以爲法 征伐 非湯武則不可以爲規 愚安敢以未盡之道 瀆陳於今日哉 恭惟我國家 積德重光 誕膺耿命 肇基以武 撫運以文 承以聖子 繼以神孫 內治旣嚴 外侮不入 監于成憲而周官之制靡不行 寄兵於農而司馬之政靡不擧 設學校而致風動之化 綏兆民而無匪茹之寇 巍乎其成功 煥乎其文章 式至于今 其所以覲耿光而揚大烈者 無不至矣 但以昇平日久 民不知兵 文武未免乎恬嬉 將卒或至於驕惰 蕞爾小醜 敢梗王化 陸梁州郡 刳民戮將 雖不足以疵我盛治 而其爲將相之羞者 不旣多乎 自是厥後 遠猷之士 奉算于上 超乘之夫 扼腕于下 其於詰戎逷蠻 綢繆牖戶之備 無所不用其極 旣勅藩屏之臣 又遣糾察之使 而議者猶以非扞衛之託 而徒爲煩擾爲說焉 至若凡民之俊秀 聚之于學校 選其尤者而廩之于成均 戰之以藝而昇之于臺閣 考其講誦而觀其所本 試其詞華而觀其所發 簡其能而勸其怠 於是絃誦洋洋 而文藻盛敷 鉅公碩儒 旣得黼黻皇猷於經席之前 英才美質 莫不揚眉吐氣於菁莪之側 其崇儒右文之意 亦云極矣 議者猶以非譽髦斯士之本 而難冀文治爲說焉 竝用之術 如彼其至 而議者之說 若是其不足 何歟 若不探究其本 而深得其弊 則孰不以是爲過言也哉 愚也學文而未得其要者也 請以斯文之弊 先陳于執事 可乎 聖賢之訓 載在六經 六經者 入道之門也 豈期以此爲干祿之具耶 道之顯者 謂之文 文者 貫道之器也 豈期以此爲雕蟲篆刻之巧耶 拘儒瞽生 尋擿章句之間 而無涵泳意味之實 小技末流 爭奇繡繪之間 而無英華發外之實 已失國家右文之本意矣 加之以州郡急於軍額之未充 方伯忽於黨塾之廢弛 寒士苦於震薄 武夫張其意氣 操觚挾冊者 邑罕其人 彎弓注矢者 戶連其朋 孤遠者旣難於爲儒 爲儒者又無其實行 如是而欲望作人之盛 濟濟之美 不亦難矣乎 以言其軍旅之弊 則連帥旣難於得人 鎭將多出於貨賄 師旅之苦樂 兵革之鈍銳 慢不知爲何事 徒以剝下奉上 威脅武斷爲務 故逋亡相續 徒擁虛簿 廷及平民 邑居肅條 閒遣耳目之臣 遍閱營堡 而荒遠之域 情僞難測 糾摘之際 未必盡公 而出入郡邑 煩費不貲 且連帥旣任方面之責 可以黜陟臧否 而乃以御史摠檢之 則方鎭權輕 無以整肅軍令 而寧無掣肘之患乎 如是而欲望親上死長 戰則必克者 不亦難矣乎 愚請以聾瞽之說 救斯二者之弊 可乎 愚聞古之賓士也 一曰六德 二曰六行 三曰六藝 未聞考之以講誦 試之以詞藻也 上之所取者 在於德行 則下必以德行應上之求 上之所取者 在於詞藻 則下亦以詞藻待上之需 取之以詞藻 而望之以德行 則所令反其所好矣 孟子有言曰 待文王而興者 凡民也 若豪傑之士 雖無文王猶興 當今上有周, 文之聖 而不見以士之藹藹者 豈非周, 文之敎有所未施耶 所謂周, 文之敎者 何謂也 道之以智仁聖義忠和之六德 敎之以孝友睦姻任恤之六行 試之以禮樂射御書數之六藝 有德者必有爵 有才者必有職 鼓之舞之 振之作之之云耳 夫如是則成人有德 小子有造 而佔畢浮華之陋 將不禁而自止矣 若守禦之備 則在於將得其人 卒擇其精 而其本則不過乎結人心而已 去兵之訓 載於魯論 無敵之說 出於孟氏 若使在上之人 仁以漸之 義以摩之 淪於骨髓 浹於肌膚 黎民之愛戴 若子弟之衛父兄 手足之衛心腹 則堅甲利兵 不足以爲威 金城湯池 不足以爲固 夫然後簡以蒐狩 齊以號令 入爲比閭族黨 而服親親長長之敎 出爲伍兩軍師 而懷死綏敵愾之志 則扞衛之託 其不在此歟 此三代之制 而愚之所望於今日者也 嗚呼 斯文之盛 在於明敎化 而武備之修 在於固邦本 若其明敎化固邦本之原 則又不在於人主之躬行以率之乎 愚故曰 文武之道 其用雖二 而其實則一也 人主一身 萬化之原 萬姓之所表正者也 書之稱堯曰克明峻德 稱舜曰誕敷文德 夫克明峻德而萬邦協和焉 誕敷文德而有苗來格焉 此則無所用其武 而自爲天下之至武矣 稱湯曰懋敬厥德 稱武曰敷大德于天下 夫懋敬厥德 而若大旱之望雲霓焉 敷大德于天下 而天休震動焉 此則雖用其武 而實爲天下之至文矣 今我聖主 體堯舜而用湯武 道德爲人倫之至 行帥順上帝之命 則佇見鳳凰鳴于高岡 多士生此王國 而化行俗美之餘 罝兔之野人 亦有干城好仇之材矣 尙何虞於文敎有所未宣 武略有所不競乎 愚也一布衣耳 妄談當世之務 吐出迂遠之謀 得非狂且僭耶 雖然 言及之而不言 亦君子之所不取也 願執事進而敎之 謹對 -栗谷全書

 

 

해석

 

중국에서 문을 중시하며 무를 경시한 예

 

問 爲國之道 文經武緯而已 唐虞三代 尙矣 表章六經 鎭撫南北軍 弘文館之建 府衛之設 果無愧於古昔作興振礪之方歟 文章性理之學 莫盛於宋室 而武略不競 其無乃創業者 偏於所尙 守成之或失於幷用之規歟

() : 나라 다스리는 도는 문()을 날[]로 하고, ()를 씨[]로 하는 것일 따름이다. 당우(唐虞 ()와 순()이 다스리던 시대)와 삼대(三代 ()ㆍ은()ㆍ주() 세 왕조)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육경(六經 ()ㆍ서()ㆍ예()ㆍ악()ㆍ역()ㆍ춘추(春秋))을 드러내어 빛나게 한 것과 한()나라의 문제(文帝)가 남북군(南北軍)을 진정시키고 편하게 한 것과 당()나라의 태종(太宗)이 홍문관(弘文館)을 세우고 부위(府衛)를 설치한 것이 과연 옛적의 진작시키고 연마의 방도에 비해 부끄럼이 없겠는가.

문장(文章)과 성리(性理)의 학문이 송()나라 때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으나, 무략(武略)은 힘쓰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나라를 세운 이가 자신이 숭상하는 바에만 치우쳐서 수성(守成)하는 데 있어서 문과 무를 병용해야 하는 규법을 잃어버려서가 아니겠는가.

 

 

 

무를 숭상하는 풍조가 세태를 망쳤다는 비판

 

我國家聖神嗣興 敎化之具旣張 威武之烈載揚 式克至于今日休 然而豫大之極 師律漸解 自島夷竊發之後 朝廷之上 謀議處置者 無非詰戎備患之一事 旣勅藩垣之臣 以嚴統帥之體 而且遣耳目之使 遍閱州縣營堡之器械 其不輯者罪之 今之武備 可謂修矣 而議者曰 扞衛之託 實有所在 兵甲之精 非所恃也 況閫以外 自有專制之者 檢察之擧 徒爲煩擾 方鎭未必無掣肘之患也 其說然歟

우리 국가는 성군이 잇달아 일어나 교화의 도구가 잘 갖추어지고, 위무(威武)의 공렬이 널리 발양되어, 능히 오늘의 아름다운 국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안정이 극에 달하자 군율이 점차 풀려 섬오랑캐의 도발이 일어난 뒤로는 조정에서 의논하고 처리하는 것들이 군무를 다스리고 외환을 방비하는 한 가지 일이 아님이 없다. 이미 중신에게 명하여 통솔의 체계를 엄하게 하였고, 또 어사를 파견하여 주(), (), 영보(營堡)의 병기들을 두루 검열하여 제대로 정비하지 않은 곳은 처벌을 내렸으니, 지금의 무비는 잘 정비가 되었다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라 방위를 위해 힘써야 할 바는 실로 다른 것에 있으니 병갑의 정예로움을 믿을 바가 아니다. 더구나 군영에서는 본래 전단으로 일을 처결하는 바가 있으니, 검열과 사찰을 행함은 한갓 방진(方鎭)을 번거롭고 요란스럽게 할 뿐이요, 반드시 방진의 자유를 속박할 우려가 없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니, 그 말이 과연 그러한가?

유종(儒宗)과 문사(文師)가 대각(臺閣)의 반열에 줄지었고, 영명한 재질과 아름다운 소질을 가진 이들이 모두 관학(館學)에서 길러져서, 저술로 시험하기도 하고, 강송으로 시험하기도 하여, 유능한 자는 장려하고 유능하지 못한 자는 권면하여, 문을 숭상하는 뜻이 가히 지극하지 않다고 이를 수 없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명망이 있는 선비가 되는 것은 본래 그 근본이 있으니, 공부를 권장하는 제도들은 단지 격식만 갖춘 것일 뿐이다. 첩괄(帖括 과거 공부)의 누습은 이미 고질이 되었으니, 사장(詞章)의 화려함을 어디에 쓸 것인가. 외방의 경우에는 지방관은 병사(兵事)를 다스릴 겨를이 없고, 방백(方伯)은 학교를 여사(餘事)로 아니, 빈한하고 시골에 있는 선비는 위세에 눌려 핍박받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반면에 날뛰는 무관들은 의기가 양양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골에는 겸손하고 공경하는 기풍이 없어지고 풍속은 다투고 사납게 구는 습속이 많아지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눈을 부릅뜨며 어른을 업신여기고 활을 당겨 원수를 갚기까지 하니, 문치(文治)가 흐뭇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바랄 수 없다.”라고 하는데, 그 말이 과연 그러한가?

 

 

 

문과 무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儒宗文師 比肩乎臺閣之列 英材懿質 咸育於館學之中 試之以述作 考之以講誦 能者奬之 不能者勉之 右文之意 不可謂不至 而議者曰 譽髦斯士 自有其本 勵課之典 只是文具 帖括之陋已痼 詞章之華焉用 外之則守土者 不暇於治兵 而方伯餘事於學校 寒遠之士 卒不堪震薄之苦 而騰陵介胄者 意氣張皇 遂致鄕無遜悌之風 俗多鬪狠之習 裂眥而陵長 彎弓而報怨 文治優游 殆不可冀也 其說然歟 何以則載昭雲漢之爲章 鼓舞一時之人材 濟濟秉文之德 藹藹王多吉士 而干城爪牙之亦不乏用 風淸而化醇 政行而敎立 有不戰 戰則必勝 文經武緯之克盡其道 無偏墜不擧之弊歟 諸君子俱以光明俊偉之才 且得登進大庭 展盡所蘊 誠千載不可失之嘉會也 於斯二者 講之有豫 其各悉著于篇

어떻게 하면, 밝은 은하(銀河) 같은 문장(文章)을 이루고, 한 시대의 인재를 고무하여, ()을 잡은 덕인들이 중다(衆多)하고 좋은 선비들이 성다(盛多)하며, 간성(干城) 같은 인재와 임금에게 손톱과 어금니의 역할을 하는 인재도 많아 쓰기에 부족함이 없이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풍속은 맑고 교화는 순후하며 정치는 행해지고 교령은 세워져, 싸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싸운다면 반드시 이겨서 문을 날[]로 하고, 무를 씨[]로 하는 그 도를 능히 다하여 문과 무 중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쳐 행하는 폐단을 없게 할 수 있겠는가? 여러 군자들은 모두 빛나고 준걸스러운 인재들로서, 또 조정에 올라와 쌓은 바를 남김없이 펼 수 있으니, 참으로 천 년을 두고 잃어서는 안 될 좋은 기회이다. 이 두 가지(날로서의 문과 씨로서의 무) 에 대해 미리 강구해 둔 바가 있으리니, 각기 남김없이 글로 나타내어라.

 

 

 

문의 기본이고 무는 말단이다

 

對 縫掖之士 簡編是拘 俎豆是習 窮經尙不足以致用 則軍旅之事 固未之學也 今執事先生 策之以文武之說 誘之以展盡所蘊 愚雖面墻 安敢合喙 竊謂嚴內治而戒外侮者 有國者之所當竝用而不可偏廢者也 嚴內治則文之所以爲經也 戒外侮則武之所以爲緯也 其所謂文 不在於記誦之習詞章之學 而在於明敎化而作興之 其所謂武 不在於士馬之衆器械之精 而在於固邦本而捍衛之 竝用而各盡其道 則長治久安 而無一朝偏墜之患 竝用而不能盡其道 則雖得扶持鞏固於一時 而不能無後日之弊 二者如人之兩手 如鳥之兩翼 其用雖二 而其實則一 吾未見闕一而能國其國者也 雖然 天下之務 莫不有本而有末 道之以德敎者 爲治之本也 衛之以干城者 爲治之末也 此古之人所以勸其君以文德 而不欲其極意於武功者也 愚請因是而白之

() : 도포를 입은 선비들이 잡은 것이라고는 책이요, 익히는 것이라고는 예()이다 보니, 경학을 궁구하는 일도 아직 충분히 응용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니, 군대의 일은 본디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제 집사(執事) 선생께서 문무의 설을 책문(策問)하시고, 속에 쌓인 바를 남김없이 펼치도록 유도하시니, 이 못난 사람이 비록 담벼락을 마주한 듯 견식이 없으나 어찌 감히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까.

사사로운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안에서의 다스림을 엄하게 하고, 밖으로부터의 모욕을 경계하는 것은 나라를 보유한 자라면 마땅히 병용하여 가히 한쪽을 폐하지 못할 것입니다. 안에서의 다스림을 엄하게 하는 것이 곧 문()의 날[]이 되는 까닭이요, 밖으로부터의 모욕을 경계하는 것이 곧 무()의 씨[]가 되는 까닭입니다.

그 이른바 문은 기송(記誦)의 행습과 사장(詞章)의 학문에 있지 않고 교화를 밝혀 민풍을 진작시킴에 있는 것이요, 그 이른바 무는 병사와 군마의 많음과 기계(器械)의 정예로움에 있지 않고,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여 외적을 방어함에 있습니다. 문과 무 둘을 병용하여 각기 그 도를 다한다면 길이 다스려지고 오래 편안하여 하루아침에 문과 무 중의 어느 한쪽이 떨어질 우려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용하여 능히 그 도를 다하지 못한다면 비록 한때는 공고하여 부지할 수는 있으나 뒷날의 폐단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두 가지는 마치 사람에게 있어서 두 손과 같으며, 새에 있어서 두 날개와 같습니다. 그 용()은 비록 둘이나 그 실상은 하나이니, 둘 중의 어느 하나를 버리고서도 능히 그 나라를 나라답게 한 경우는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천하의 일은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가르치기를 도덕과 교화로써 하는 것은 다스림의 근본이요, 방위하기를 방패와 성()으로써 하는 것은 다스림의 말단입니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그 임금에게 문덕(文德)을 권하고 무공에는 뜻을 극진하게 하지 않으려고 하였던 까닭입니다. 이 못난 사람은 청컨대 이를 말미암아서 아뢰겠습니다.

 

 

 

문을 숭상했기에 중국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思昔三代之盛 治隆俗美 制作郁郁 而其文至矣 有征無戰 而其武至矣 漢, 唐以下 復古者鮮 惟武帝之表章六經 近於祗述謨訓之道 文帝之鎭撫二軍 近於命掌六師之義 太宗建館聚士 而文風莫盛於貞觀 設府鍊卒 而兵農似合於古制 三代之後 彼善於此者 其不在數君歟 雖然 敎化不明 而無載道之文 徒事堅利 而非止戈之武 則不可謂能盡其道者也

생각건대, 옛날 삼대(三代)가 융성할 적에는 다스림이 성대하고 풍속은 아름다우며 제도 문물은 찬연하여 그 문()은 지극했고, 정벌은 있되 전쟁은 없어 그 무()가 지극했습니다. ()ㆍ당() 이하로는 복고(復古)한 자가 드물었으니, 오직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육경(六經)을 드러내어 빛나게 한 것이 공경히 국가의 대계가 되는 가르침[謨訓]을 계승하는 도에 가까웠고, 문제(文帝)가 이군(二軍 남북군)을 진정시키고 어루만진 것이 육사(六師)를 명장(命掌)하는 의리에 가까웠습니다.

당나라의 태종(太宗)이 홍문관을 세워 선비들을 모았으므로 문풍이 정관(貞觀 태종의 연호) 때보다 더 성한 적이 없었고, 부위(府衛)를 설치하여 군졸을 조련시켰으므로 병농 일치(兵農一致)가 옛 제도에 부합되는 것 같았습니다. 삼대 이후로 그나마 저것이 이것보다는 비교적 낫다고 할 만한 것은 위에서 말한 두 서너 군주를 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교화가 밝지 못해서 도를 실은 문[載道之文]이 없었으며, 한갓 견고함과 예리함만을 추구하여 전쟁을 그치게 하는 무[止戈之武]가 없었으니, 능히 그 도를 다한 자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若有宋之初 則揚威武於江漢之外 釋兵權於杯酒之閒 不可謂尙文而廢武也 孱孫失政 變亂舊章 不信仁賢 國以空虛 夷狄乘釁 蹂躪華夏 而濂洛羣哲 曾無一人在厥服 則其武略不競者 小人爲國之禍也 非尙文之過也 至文不可以無武 至武不可以無文 能文而不能武者 愚未之信也

송나라 초엽의 경우에는 위엄을 강한(江漢) 밖에까지 드날리고, 병권(兵權)을 술자리에서 내놓게 만들었으니, 문만을 숭상하고 무를 폐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약한 후손이 실정(失政)을 하여 옛 장전(章典)을 변란시키고, 어진 이를 믿지 않아 나라 안이 공허하게 되자, 오랑캐가 틈을 타서 중화를 유린했습니다. 이 당시 주염계ㆍ정명도 등 여러 현철들은 일찍이 한 사람도 그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았으니, 그 무략이 강화되지 않았던 것은 소인이 나라를 다스린 데 따른 화난이지 문을 숭상한 탓은 아닙니다. 지극한 문은 무가 없을 수 없고 지극한 무는 문이 없을 수 없으니, 문을 하면서 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저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噫 道德 非堯舜則不可以爲法 征伐 非湯武則不可以爲規

아아, 도덕은 요()와 순()의 것이 아니면 가히 법으로 삼을 수 없고, 정벌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것이 아니면 가히 규범으로 삼을 수 없으니,

 

愚安敢以未盡之道 瀆陳於今日哉 恭惟我國家 積德重光 誕膺耿命 肇基以武 撫運以文 承以聖子 繼以神孫 內治旣嚴 外侮不入 監于成憲而周官之制靡不行 寄兵於農而司馬之政靡不擧 設學校而致風動之化 綏兆民而無匪茹之寇 巍乎其成功 煥乎其文章 式至于今 其所以覲耿光而揚大烈者 無不至矣

제가 어찌 감히 미진한 도[未盡之道]를 가지고 오늘 욕되이 진언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국가는 덕을 쌓고 광명을 거듭하여 빛나는 천명을 크게 받아 무로써 나라의 기초를 닦고, 문으로써 나라의 운()을 열어서 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이 계승하니, 안에서의 다스림이 이미 엄해졌고, 밖으로부터 침략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선왕의 법헌(法憲)을 살펴 주관(周官)의 제도가 행해지지 않음이 없고, 병사를 농사에 기탁하여 사마(司馬)의 정사가 행해지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 학교를 설립하여 두루 백성을 풍동시키는 교화를 이루었고 온 백성을 편안히 하여 교활한 도적이 없게 하여, 높고 큰 성공과 빛나는 문장이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그 훌륭한 덕을 실현하고 위대한 공렬을 드날린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但以昇平日久 民不知兵 文武未免乎恬嬉 將卒或至於驕惰 蕞爾小醜 敢梗王化 陸梁州郡 刳民戮將 雖不足以疵我盛治 而其爲將相之羞者 不旣多乎 自是厥後 遠猷之士 奉算于上 超乘之夫 扼腕于下 其於詰戎逷蠻 綢繆牖戶之備 無所不用其極 旣勅藩屏之臣 又遣糾察之使 而議者猶以非扞衛之託 而徒爲煩擾爲說焉 至若凡民之俊秀 聚之于學校 選其尤者而廩之于成均 戰之以藝而昇之于臺閣 考其講誦而觀其所本 試其詞華而觀其所發 簡其能而勸其怠 於是絃誦洋洋 而文藻盛敷 鉅公碩儒 旣得黼黻皇猷於經席之前 英才美質 莫不揚眉吐氣於菁莪之側 其崇儒右文之意 亦云極矣 議者猶以非譽髦斯士之本 而難冀文治爲說焉 竝用之術 如彼其至 而議者之說 若是其不足 何歟 若不探究其本 而深得其弊 則孰不以是爲過言也哉 愚也學文而未得其要者也 請以斯文之弊 先陳于執事 可乎

다만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므로 백성들은 병무를 알지 못하게 되고, 문무 관원은 안일을 면치 못하며, 장졸은 혹 교만과 게으름에 이르러 볼품없는 오랑캐의 무리가 감히 임금의 덕화를 막아 주군(州郡)에 날뛰며 백성들이나 장졸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비록 우리의 성대한 치적에 흠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장수며 재상의 수치가 될 만한 것은 많지 않겠습니까. 이때부터 원대한 계책을 가진 인사는 위에서 계획을 받들고, 용맹스레 수레에 뛰어오르는 무부(武夫)는 아래에서 불끈 주먹을 쥐어 그 군무를 정비하여 오랑캐를 막을 미연의 준비에 만전을 기하여, 이미 변방의 수령들을 타이르고 또 규찰하는 사신을 파견했는데, 의논하는 자는 오히려 그런 일들이 나라 방위를 위해 힘써야 할 바가 아니요, 한갓 번거롭고 소란스러움만 될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백성 중에 준수한 이를 학교에 모으고 그중 나은 자를 뽑아서, 성균관에 올려 재예로 경쟁시키고, 대각(臺閣)에 올려 글을 강송하는 것을 살피고 그 근본 하는 바를 관찰하며, 사화(詞華)를 시험하여 그 발표하는 바를 보아서, 능한 이를 가리고 게으른 이를 권면(勸勉)하였습니다. 이에 현송(絃誦 가야금 따위를 타며 글을 읽음)이 양양하여 문채가 성대히 펼쳐지니, 학식이 많은 학자나 선비는 이미 경연하는 자리에서 임금의 도가 빛나게 도와줄 수 있고 영명한 재질을 띤 이나 아름다운 소질을 띤 이는 많은 인재들 곁에서 눈썹을 치켜세우며 기염을 토하지 않는 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유학을 존숭하고 문을 숭상하는 뜻이 역시 지극하다고 하겠는데, 의논하는 자는 오히려 위의 일들이 명망 있는 선비가 되는 근본이 아니며, 문치를 바라기가 어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과 무를 똑같이 육성하는 방법이 그렇게 지극한데, 논하는 자의 말은 이렇게 부족함을 말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만약 근본을 탐구하여 깊이 그 폐단을 알아내지 않는다면 누가 이 말을 지나친 말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못난 사람은 학문을 하여 아직 그 요체를 얻지 못한 자입니다만, 청컨대 이 학문의 폐단을 가지고 먼저 집사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聖賢之訓 載在六經 六經者 入道之門也 豈期以此爲干祿之具耶 道之顯者 謂之文 文者 貫道之器也 豈期以此爲雕蟲篆刻之巧耶 拘儒瞽生 尋擿章句之間 而無涵泳意味之實 小技末流 爭奇繡繪之間 而無英華發外之實 已失國家右文之本意矣 加之以州郡急於軍額之未充 方伯忽於黨塾之廢弛 寒士苦於震薄 武夫張其意氣 操觚挾冊者 邑罕其人 彎弓注矢者 戶連其朋 孤遠者旣難於爲儒 爲儒者又無其實行 如是而欲望作人之盛 濟濟之美 不亦難矣乎

성현의 교훈은 육경(六經)에 실려 있으니, 육경이란 도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어찌 이것으로써 녹(祿)을 위한 도구로 삼기를 기약하겠습니까. 도가 드러난 것을 일러 문()이라 하니, 문이란 도를 꿰는 그릇입니다. 어찌 이것으로써 문사의 자구나 꾸미는 기교로 삼기를 기약하겠습니까. 변통 없는 유자, 소견 없는 서생들은 장구 사이에서 문구나 분석할 뿐 깊은 뜻에 마음을 쏟으려는 실질은 없으며, 조그마한 재주꾼이나 말단의 선비들은 겉으로 문장을 수놓아 꾸미는 데에만 노력을 경주할 뿐, 속에 축적된 아름다움이 밖으로 발현되게 하는 실질은 없으니, 국가가 문을 숭상하는 본의를 이미 잃어버렸습니다. 더욱이 주군(州郡)의 수령은 군사의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것에만 황급해하고, 방백(方伯)은 고을의 학교가 황폐하거나 내버려져 해이해지는 것은 소홀히 여기며, 한미한 선비는 위세의 핍박에 고통받고, 무부는 의기가 양양하므로, 글을 짓고 책을 낀 자는 고을에 드물고, 활을 당기고 살을 쏘는 자는 집집마다 이어져 있어, 고원(孤遠)한 사람은 이미 유자가 되기에도 어려울 뿐 아니라, 유자가 된 이라도 또 그 실행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고서는 인재가 성대하게 양성되어 훌륭한 선비들이 배출되기를 기대하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以言其軍旅之弊 則連帥旣難於得人 鎭將多出於貨賄 師旅之苦樂 兵革之鈍銳 慢不知爲何事 徒以剝下奉上 威脅武斷爲務 故逋亡相續 徒擁虛簿 廷及平民 邑居肅條 閒遣耳目之臣 遍閱營堡 而荒遠之域 情僞難測 糾摘之際 未必盡公 而出入郡邑 煩費不貲 且連帥旣任方面之責 可以黜陟臧否 而乃以御史摠檢之 則方鎭權輕 無以整肅軍令 而寧無掣肘之患乎 如是而欲望親上死長 戰則必克者 不亦難矣乎

또 그 군대의 폐단을 말하자면 연수(連帥 한 지방을 지배하는 장관)는 이미 그 직책에 적격한 인재를 얻기에 어렵고, 각 진영의 장수들은 대부분 뇌물을 써서 자리를 얻으니, 군사들의 괴로움과 즐거움, 무기의 둔함과 예리함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한갓 아랫사람에게 착취하여 윗사람을 받들며, 위협하고 무력으로 억지를 쓰는 것이나 일삼는지라, 군졸의 도망이 계속해서 발생하여 텅 빈 명부만을 안고 있을 따름이며 그 폐해가 평민에게까지 미쳐서, 마을이 쓸쓸합니다. 이따금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두루 영보(營堡)를 검열하나, 외지고 먼 지역은 실정의 진위를 측정하기 어렵고, 허물을 규탄하여 지적하는 것조차 반드시 다 공평하지도 못하며, 어사가 군읍(郡邑)을 출입함에 번거로운 비용만 한량이 없게 됩니다. 또 연수는 이미 한 지방의 책임을 맡아서 가히 착한 이는 올리고 악한 이는 내쫓을 수도 있는데, 어사로 하여금 통할하고 검찰하게 하면 방진(方鎭)의 권한이 가벼워져서 군령을 바르게 하고 엄숙하게 할 길이 없으니, 어찌 방진의 자유를 속박할 우려가 없겠습니까. 이러고서도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죽으며, 싸우면 반드시 이기기를 바라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愚請以聾瞽之說 救斯二者之弊 可乎 愚聞古之賓士也 一曰六德 二曰六行 三曰六藝 未聞考之以講誦 試之以詞藻也 上之所取者 在於德行 則下必以德行應上之求 上之所取者 在於詞藻 則下亦以詞藻待上之需 取之以詞藻 而望之以德行 則所令反其所好矣 孟子有言曰 待文王而興者 凡民也 若豪傑之士 雖無文王猶興 當今上有周, 文之聖 而不見以士之藹藹者 豈非周, 文之敎有所未施耶 所謂周, 文之敎者 何謂也 道之以智仁聖義忠和之六德 敎之以孝友睦姻任恤之六行 試之以禮樂射御書數之六藝 有德者必有爵 有才者必有職 鼓之舞之 振之作之之云耳 夫如是則成人有德 小子有造 而佔畢浮華之陋 將不禁而自止矣 若守禦之備 則在於將得其人 卒擇其精 而其本則不過乎結人心而已 去兵之訓 載於魯論 無敵之說 出於孟氏 若使在上之人 仁以漸之 義以摩之 淪於骨髓 浹於肌膚 黎民之愛戴 若子弟之衛父兄 手足之衛心腹 則堅甲利兵 不足以爲威 金城湯池 不足以爲固 夫然後簡以蒐狩 齊以號令 入爲比閭族黨 而服親親長長之敎 出爲伍兩軍師 而懷死綏敵愾之志 則扞衛之託 其不在此歟 此三代之制 而愚之所望於今日者也

저는 무지한 논설로써 이 두 가지의 폐단을 구제할 방책을 말씀드리고자 하니, 괜찮겠습니까? 저는 듣건대, 옛적에 선비를 선발하는 것은 첫째로 여섯 가지 덕[六德]이요, 둘째로 여섯 가지 행실[六行]이며, 셋째로 여섯 가지 재주[六藝]였으며, 시험하기를 강송(講誦)이나 시문[詞藻]으로써 했다는 것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위에서 취하는 바가 덕행에 있으면 아래서도 반드시 덕행으로써 위에서 구하는 바에 응하고, 위에서 취하는 바가 시문에 있으면 아래서도 역시 시문으로써 위의 요구에 대응하게 마련입니다. 시문으로 취하면서 덕행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영을 내리는 바가 그 좋아하는 바에 반대됩니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문왕 같은 임금을 기다려야 흥기(興起)되는 자는 범상한 백성이니, 호걸의 선비는 비록 문왕 같은 임금이 없어도 오히려 흥기된다.” 하였으니, 현재의 상감께서 주나라 문왕 같은 성덕이 있으면서도 좋은 선비의 성다(盛多)함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찌 주나라 문왕이 베풀었던 것과 같은 교화가 베풀어지지 못한 바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주나라 문왕의 교화란 무엇을 이르는 것입니까? 지혜로움[]과 어짐[], 성스러움[]과 의로움[], 충성스러움[]과 화함[]의 여섯 가지 덕으로써 인도하고, 효도함[]과 우애로움[], 친족에의 화목함[]과 인척에의 정리[], 믿음[]과 긍휼히 여김[]의 여섯 가지 행실로써 가르치며, 예절[]과 음악[], 활쏘기[]와 말타기[], 문자[]와 산수[]의 여섯 가지 재주로써 시험하여,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관작이 있게 하고, 재능이 있는 자는 반드시 직책이 있게 하여 고무하고 진작시킴을 이르는 것입니다. 대개 이같이 하면, 장성한 사람은 덕이 있고 아이들은 진보가 있게 되어, 책을 읽기만 하고 의미를 모른 채 지나친다거나 겉만 화려하고 실속이 없는 누습은 장차 금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가령 외적을 지키고 막을 준비로 말한다면, 장수는 적격한 인재를 얻고 병졸은 정예화를 시키는 데에 있으나, 그 근본은 인심을 결속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군대를 버린다는 훈계는 논어(論語)에 실려 있고, 어진 자는 적이 없다는 설은 맹자에 나옵니다. 만약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백성을 인()으로 교화하고 의()로 어루만져, 골수나 살갗에 젖어 들게 하여, 백성들이 윗사람을 친애하여 받드는 것이 마치 자제들이 그 부형을 호위하고 수족이 심장과 복부를 호위함과 같게 된다면, 튼튼한 갑옷과 날카로운 병기를 갖춘 정병이 위형이 되지 못하고, 공고하여 쳐부수기 어려운 성지[金城湯池]가 견고할 것이 못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 뒤에 사냥놀이[蒐狩]로써 선발하고 군령을 통해 군율을 정비하여, 들어와서는 마을의 일족이 되어 어버이를 친애하고 어른을 높이는 가르침에 복종하고, 밖에 나가서는 대열 속의 군사가 되어 싸움에 나아가 죽음을 무릅쓰고 적을 무찌르겠다는 강개한 뜻을 품는다면, 국방의 의탁할 바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삼대의 제도이면서 제가 오늘날 바라는 바입니다.

 

嗚呼 斯文之盛 在於明敎化 而武備之修 在於固邦本 若其明敎化固邦本之原 則又不在於人主之躬行以率之乎 愚故曰 文武之道 其用雖二 而其實則一也 人主一身 萬化之原 萬姓之所表正者也 書之稱堯曰克明峻德 稱舜曰誕敷文德 夫克明峻德而萬邦協和焉 誕敷文德而有苗來格焉 此則無所用其武 而自爲天下之至武矣 稱湯曰懋敬厥德 稱武曰敷大德于天下 夫懋敬厥德 而若大旱之望雲霓焉 敷大德于天下 而天休震動焉 此則雖用其武 而實爲天下之至文矣 今我聖主 體堯舜而用湯武 道德爲人倫之至 行帥順上帝之命 則佇見鳳凰鳴于高岡 多士生此王國 而化行俗美之餘 罝兔之野人 亦有干城好仇之材矣 尙何虞於文敎有所未宣 武略有所不競乎 愚也一布衣耳 妄談當世之務 吐出迂遠之謀 得非狂且僭耶 雖然 言及之而不言 亦君子之所不取也 願執事進而敎之 謹對 -栗谷全書

아아, 학문의 융성함은 교화를 밝힘에 있고, 무비를 정비하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함에 있으니, 만약 그 교화를 밝히고 나라 근본을 공고히 하려면, 그 원리가 역시 임금이 몸소 행하여 솔선하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문과 무의 도는 그 용()이 비록 둘이지만 그 실()은 하나라고 했던 것입니다. 임금의 한 몸은 온갖 화육(化育)의 근원이며 온 백성의 준범(準範)이 되는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요제(堯帝)를 일컫기를, “능히 큰 덕을 밝혔다.” 하였고, 순제(舜帝)를 일컫기를, “크게 문덕(文德)을 베풀었다.” 하였습니다. 대저 능히 큰 덕을 밝히자 만방이 협화(協和)되었고, 크게 문덕을 베풀자 유묘(有苗)가 와서 복종하였습니다. 이것은 무를 쓸 것도 없이 저절로 천하의 지극한 무가 된 것입니다. 서경에서 탕왕(湯王)을 일컫기를, “힘써 그 덕을 공경하였다.” 하였고, 무왕(武王)을 일컫기를, “큰 덕을 천하에 베풀었다.” 하였습니다. 대저 힘써 그 덕을 공경하자 백성들이 마치 큰 가뭄에 비구름을 바라는 듯했고 큰 덕을 천하에 베풀자 하늘의 상스러운 기운이 진동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무를 쓰기는 하였으나 실은 천하의 지극한 문이 된 경우입니다. 이제 우리 성스러운 임금께서는 요제와 순제의 정신을 체()로 하시고, 탕왕과 무왕의 정신을 용()으로 하시어, 도덕은 인륜의 지극함이 되시고 군대를 통솔하시는 것은 상제(上帝)의 명에 따라서 하신다면, 머지않아 봉황이 높은 멧부리에서 울고 훌륭한 선비들이 이 왕국에서 배출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진 나머지 그물을 쳐 토끼나 잡는 야인 중에서도 또한 임금의 간성(干城) 같은 좋은 짝이 될 것입니다. 어찌 문교를 펴지 못하는 바가 있고 무략이 강화되지 않을 것을 우려하겠습니까. 저는 일개 포의(布衣 벼슬 없는 선비)일 뿐인데, 망녕되이 오늘날의 시무를 말하고 오활한 계책을 말하였으니 경솔하고 분수에 지나친 짓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비록 어떤 문제에 대하여 말하라고 하였는데 말하지 않는 것도 군자가 취하지 말아야 할 바입니다. 원컨대 집사께서는 이끌어 가르쳐 주십시오. 삼가 응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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