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놀아야 나라가 산다
우연하지만 강렬하게
번개를 맞은 사람은, 그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뭐 사후적으로 여러 이유(죄가 많다느니, 예정됐다느니)를 끌어댄다 해도 번개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번개와의 만남은 우연적이지만, 그래서 짧지만 존재를 뒤집어 엎을만한 강렬한 충격을 남기고 간다.
이게 어디 번개뿐이겠는가. 사람과의 만남도 이와 같은 것을. 우연히 다가와 깊은 상처를 남기고 간 첫 사랑이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줄 알았던 존재가 떠난 뒤 그 자리가 몹시도 컸음을 느꼈던 사람은 번개와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우연한 스침이 빚어낸 놀라운 변화, 그게 바로 만남이 축복이 되는 지점인 것이다. 윤구병 선생님과의 만남을 생각할 때, 번개가 떠오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수유+너머>에서 공부하겠다고 얼쩡거리던 어느 날, 책장의 책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 책 중 나의 시선을 끌던 책들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윤구병 선생님의 책들이었던 거다. 그땐 윤구병 선생님을 알진 못했으나, 『꿈이 있는 공동체 학교』,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등의 책 제목은 하이쿠俳句처럼 깊은 울림이 있었다. 난 그걸 ‘끌림’이라 표현하련다. 왜 끌리게 됐는지, 왜 깊은 울림을 느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 순간 그게 나의 진심이었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이다.
그 우연과 같은 만남을 통해 윤구병 선생님을 알게 됐고 선생님이 내신 책들과의 접속이 이루어졌다. 편안하게, 때론 충격적이게, 때론 감명스럽게 다가왔다. 강렬하게 접속했다. 짧은 순간의 만남이었지만 윤구병 선생님과 접속하기 전의 나와 접속한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윤구병 선생님을 직접 만나다
책을 통해 만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는데 전주시립도서관 자료를 검색하다가 29일에 강연을 오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쏘냐. 바로 신청을 했고 시립도서관 강당에서 선생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40살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40년간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것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이야말로 ‘삶의 포트폴리오’라고 할 만하다. 선생님의 표정에선 어린아이와 같은 해맑은 표정이 묻어났다. 대중을 상대로 강연을 함에도 불구하고 친한 친구와 스스럼없이 이야기 하듯 편하고 화기애애하게 이야기 하셨다. 책으로 만나본 인상은 까칠하고 중후한 느낌일 것만 같았는데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님은 잘 생긴 얼굴은 아니셨지만 훈남이셨다. 자신의 얼굴에 책임질 수 있도록 열정적으로 살아오셨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력
‘구병’이란 이름에 얽힌 내막은 사람들을 배꼽잡고 웃게 만들었다. 이름엔 부모의 바람이 투영되기 일쑤다. 당연히 원대한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난 대충 두 가지 뜻 정도로 생각했다. ‘병을 고친다救病’라는 뜻을 담은 한자어여서 의사가 되라는 뜻이거나, ‘함께 어울려 살아라俱竝’라는 한자어여서 두루두루 함께 살길 바라는 뜻이거나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군대에서 유격훈련 때 번호로 사람을 구분하듯, 선생님이 아홉 번째 태어났기에 ‘九’를 붙인 것이고 ‘병’은 돌림자였던 거다. 그래서 형들의 이름은 ‘일병’ ‘이병’ …… ‘팔병’이라 했다.
이름 이야기로 좌중의 긴장을 한껏 누그러뜨리더니 연이은 가출담을 펼쳐놓으셨다. 서울대를 나와 교수를 했다는 이력만 들었을 땐 소위 모범생 같은 단조로운 인생담만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가출의 도사답게 성적이 안 좋을 수밖에. 하지만 하나의 계기(아버지가 사진에 써준 ‘실 한 오라기’라는 글이 준 울림)로 공부의 동기를 찾았고 일 년간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갔노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인생담은 버라이어티 쇼 이상의 흥분과 재미, 그리고 감동이 있었다. 그런 이력 덕에 여태도 상상하며 꿈꿀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변산공동체학교
“공부엔 동기가 필요하다” “동기만 획득되면 하지 말라고 해도 공부한다” “사람이 하루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3시간뿐이다. 그 시간만 이론 공부를 시키고 나머지 시간은 산살림ㆍ갯살림ㆍ들살림을 하게 하여 몸을 놀리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공동체 학교의 교육 목표는 ‘① 스스로 제 앞가림할 힘을 기르며 ② 더불어 살 힘을 기르는 것’이란다. 제 앞가림할 힘을 기르기 위해 학과 공부 때도 실제로 유용한 의복의 역사ㆍ주거의 역사ㆍ식용 가능한 식물 탐구 등을 배우며 실습시간엔 천연염색ㆍ집짓기ㆍ도자기 굽기ㆍ텃밭 가꾸기 등을 한단다. 몸을 부단히 움직이니 기혈이 열려 생각이 샘솟고 그런 열기는 글이나 그림, 또는 장단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단다. 이와 같은 활동은 당연히 함께 해나가야 하는 작업이기에 공동체 의식이 저절로 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커닝이 장려되며 중요한 일을 같이 의논하고 함께 최고의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시한단다
보리출판사
보리출판사의 사장으로 근무 중이시다. 출판의 신조는 ‘이 책이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낼 가치가 있는가?’란다. 『보리국어사전』, 『식물도감』, 『옛이야기 보따리』 등의 출판물은 도시 아이들에게 자연을 친근감 있게 접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해준 책들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출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무 한 그루가 베어진 자연에게 미안하지 않을 정도의 컨텐츠를 갖춘 책이란 어떤 책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이다.
윤구병 선생님은 강렬한 울림을 주고 떠나셨다. 그 울림이 내 안에서 어떻게 발아되고 발전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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