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과학을 통해 세상 보기
‘工’이나 ‘夫’나 어느 것 할 것 없이, 앎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과 소통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그건 곧 학문에 대한 관점이 지금보다 훨씬 넓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으며, 과학공부라는 것도 그런 마음가짐에서 출발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강의가 아닌 활발하게 카드로 의사를 관철하며 이야기 나누느 강의이기에 활기가 솟는다.
원래의 의미에 가까운 공부란?
지금의 공부는 ‘남보다 선두에 서기 위한 수단’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 때문에 앎의 범주가 협소해지니 삶 또한 비루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진정한 공부는 세상과의 합일을 추구하여 앎의 촉수가 내면의 그윽한 곳에 머물기보다 외부와 사물로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것이다.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자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이다.
미숙한 영혼의 소유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세계 속 특정한 하나의 장소에 고정시킨다. 강인한 자는 그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고자 한다. 완벽한 자는 그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린다.
-빅토르 위고, 『공부』
▲ 냉철한 듯, 또렷한 듯, 반짝이는 눈을 지닌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의 작가로 유명한 빅토르 위고Victor Hugo(1802~1885)가 공부론을 피력한 『공부』란 책에서 공부는 ‘고향을 지워내는 것’이라 했다. 웬 공부를 이야기하다가 ‘고향타령’을 하느냐고 황당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향’을 지워내고 익숙한 것과 결별할 때, 비로소 공부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황당한 말만은 아니다.
그때의 ‘고향’이란 내가 알고 있는 세계, 나의 고정관념으로 가득한 것들을 말한다. 즉,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것들과 사회적인 편견에 사로잡혀서는 공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정 공부를 하고자 한다면,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용감하게 들어가야 한다. 미지의 세계를 헤매는 것만으로도 강인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 하면, 미지의 세계도 어느 순간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공부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장소를 없애며 어느 곳이든 새로움이 샘솟는 타향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공부란 미숙한 초보자에서 강인한 자로, 강인한 자에서 완벽한 자가 되어 가는 도정道程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공부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면, 과학 공부에 대해서도 어떤 특정 영역의 공부라 하여 기피하지도, 선을 긋고 삐딱하게 볼 필요도 없게 된다.
▲ 과학이란 무엇일까? 가장 기초이기에 쉬운 듯하지만, 알쏭달쏭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과학은 세상을 보고 궁금해 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과학 공부란 무엇일까? 그건 당연히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세상을 보면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우리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전 사람들은 무지개를 보면서 그 너머에 어떤 새로운 세상이 있다고 상상했고,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신의 섭리를 이해하기도 했다.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이해하려다 보니, 자연히 종교의 초월론적인 해석에 의지하여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과학과 종교는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탄생한 게 ‘천동설’과 ‘지동설’이다.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엔 ‘천동설’로 세상을 해석했으며, 과학이 지배하던 시대엔 ‘지동설’로 세상을 해석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1564~1642)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은 지금에 와서는 당연한 말이 되었지만, ‘천동설’로 세계를 해석하던 시대엔 해석의 틀을 완전히 바꾸자는 것이었기에 위험한 발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면 천동설은 황당무계한 궤변에 불과하며 갈릴레이의 말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그건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틀이 바뀌면 세상에 대한 이해도도 달라지며, 이해도가 달라지면 해석이 달라져 사물에 대한 판단 기준 또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건 곧 지금 우리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미래에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세상을 보고 판단하지만, 그 가운데 의심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의심하는 속에서 ‘과학’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수님은 “발견이란 모두가 본 것을 보고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Discovery lies in seeing what everyone sees, but thinking what no one has thought). -앨버트 센트 디외르디”란 말을 인용했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의 틀이 필요한데, 그런 해석의 틀이 되는 것이 과학이며 그런 과학은 일상을 보면서 끊임없이 묻고 대화하려는 의지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 '천동설'의 시대에 갈릴레이의 발언은 황당한 말로 들렸을 터다. 하지만 해석의 틀이 바뀌면 황당함은 당연함이 된다.
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과학이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이야기 한 후에, 본격적으로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질문에 대부분은 중립, 부정카드를 들었다.
Q: “과학으로 모든 것은 예측 가능한가? 그냥 하나의 설명일 뿐인가?”
A: (긍정카드를 든 경우)
박주원: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난제도 다 풀린다고 생각한다.”
A: (중립카드를 든 경우)
오현세: “과학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밝혀내지 못하는 것이 있다.”
김송라: “나중 일은 모르기 때문에 중립카드를 들었다”
A: (부정카드를 든 경우)
김민석: “앞으로의 세상이 어찌될지 모르는데, 어찌 예측이 가능하나?”
박근호: “말이 안 된다. 인간이 어찌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복제 인간 등의 황당한 소릴 하니 당연히 부정적인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이에 대해 교수님도 “예전엔 그 물질을 알기 위해서는 최소 단위까지 쪼개면 알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물질을 가장 작은 단위까지 쪼개어 보니 무려 90% 이상이 공간이라는 것을 밝혀냈다”는 말을 해주셨다. 공간은 수많은 가능성은 될지언정, 그게 물질의 특성을 드러내는 원인은 될 수 없다. 그 말에 이어 “과학엔 결정론과 불확정성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결정론은 ‘위치를 알면 속도를 알 수 있고, 속도를 알면 위치를 알 수 있다’는 논의이고, 불확정성은 ‘위치는 알지만 속도를 모른다. 오로지 확률분포만 알 뿐’이라는 논의인데, 이런 문제는 아인슈타인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그건 곧 과학이 절대불변의 진리일 수 없으며,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 또한 달라지는 것임을 이야기 하신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박준규 선생님에게 들었던 “과학은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라는 말과 상통한다. ‘천동설’로 세상을 보느냐, ‘지동설’로 세상을 보느냐의 차이처럼, ‘고전역학’으로 세상을 해석하느냐, ‘양자역학’으로 해석하느냐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과학의 해석체계가 달라지면,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솔직히 과학을 전공한 교수님에게 이와 같은 논쟁이 분분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했다. ‘과학자들은 정답을 찾으려 하고, 인문학자들은 정답을 없애려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편견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예를 제시하는 교수님을 보고 있으니, 두루두루 섭렵하여 학문의 영역을 종횡무진 누비던 조선시대 학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 양자역학은 '확실하다'는 생각에 균열 가했고 '불확실함만이 확실하다'를 받아들이게 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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