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난간에 기대어
그리워 난간에 기댔죠
한시에서 자주 보이는 표현 중에 하나가 누각에 올라 난간에 기댄다는 표현이다. 누각 위에는 왜 오르는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때문이다. 난간에는 왜 기대는가? 기다림에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루(登樓)’, ‘의루(倚樓)’, ‘의란(倚欄)’ 혹은 ‘빙란(憑欄)’ 등의 표현 속에는 ‘그리움’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난간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그곳에 올라보면 먼 곳에서 오는 사람을 잘 알아볼 수 있는 까닭이다.
이경(李璟)이 「탄파완계사(攤破浣溪沙)」에서 “보슬비에 꿈을 깨니 닭울음소리 아득하고, 작은 누대 위에서 부는 젓대 소리 서늘해라. 구슬처럼 지는 눈물에 한(恨)은 끝이 없어, 난간에 기대이네[細雨夢回鷄塞遠, 小樓吹徹玉笙寒. 多少淚珠無限恨, 倚欄杆].”이라 한 것이나, 이욱(李煜)이 「낭도사(浪淘沙)」에서 “홀로 난간엘랑 기대질 마오. 끝없는 강산, 헤어지긴 쉬워도 만나보긴 어렵나니[獨自莫憑欄, 無限江山, 別時容易見時難].” 등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사미인곡(思美人曲)」에서 “하라밤 서리김의 기러기 우러 녈 제 사찰에 혼자 올나 수정렴을 거든마리 애믁 산의 달이 나고 북극의 별이 뵈니 님이신가 반기니 눈믈이 절로 난다.”고 한 것도 다 한 뜻이다.
그리움이 자연에 스며 더욱 증폭되네
向來消息問如何 | 그동안 소식은 어떠하온지 |
一夜相思鬢似華 | 하룻밤 그리움에 머리가 다 쇠겠네. |
獨倚雕欄眠不得 | 난간에 홀로 기대 잠 못 드는데 |
隔簾疎竹雨聲多 | 주렴 밖엔 성근 댓닢 치는 빗소리. |
김육(金堉)의 딸이 지은 「상사(相思)」란 작품이다. 님께 소식이나 전하려고 ‘그간 어떠하신지요’라고 말하고 나자 그만 목이 메이고 만다. 창밖에선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주렴 밖 대 숲에선 빗줄기가 댓닢에 부딪쳐 소리를 낸다. 비 오는 밤님을 향한 하염없는 그리움은 그녀의 머리칼을 하룻밤 사이에 백발로 만들어 버릴 것만 같다. 깊은 밤 그녀는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예 누각 위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다. 댓닢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마치도 님의 발자욱 소리인 것만 같다. 혹시나 싶어 발을 걷어 보지만, 댓닢에선 빗물만 눈물인양 뚜욱 뚝 떨어지고 있을 뿐이다.
雲鬟梳罷倚高樓 | 검은 머리 곱게 빗고 누각에 기대 |
鐵笛橫吹玉指柔 | 쇠 피리 빗겨 부는 부드러운 손. |
萬里關山一輪月 | 관산월 한 가락에 그대 그리워 |
數行淸淚落伊州 | 두 줄기 맑은 눈물 떨구었다오. |
강혼(姜渾)이 은대선(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준 「정성주기(呈星州妓)」란 작품이다. ‘관산월(關山月)’ 구슬픈 피리 곡조에 얼음 같이 맑은 눈물이 떨어진다. 가녀린 손가락도 알지 못할 슬픔에 하릴 없이 곡조 속으로 잠겨만 간다. 윤기 나는 머리를 곱게 빗어 땋고서 누각에 기대 앉아 피리 부는 여인. 피리 소리는 달에까지 사무치고, 그 소리에 달빛조차 흐느끼며 서쪽 나라로 떠내려간다. 넷째 구의 ‘낙이주(落伊州)’는 당나라 때 어느 여인이 멀리 벼슬살이 가서 소식조차 없는 님을 그리며 지었다는 「이주령(伊州令)」이란 노래에 출전을 둔 말이다. 여기서도 ‘의루(倚樓)’는 그리움의 정운(情韻)을 담고 있다.
君居京邑妾楊州 | 그대는 서울 계시고 첩은 양주에 |
日日思君上翠樓 | 날마다 그댈 그리며 취루(翠樓)에 오릅니다. |
芳草漸多楊柳老 | 방초(芳草) 우거질수록 버들은 늙어가고 |
夕陽空見水西流 | 석양엔 쓸쓸히 흐르는 강물 뿐이어요. |
조선 중기의 시인 최경창(崔慶昌)의 「무제(無題)」란 작품이다. 대개 한시에서 ‘무제(無題)’를 표제로 내거는 것은 마땅히 붙일만한 제목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목을 붙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독자의 적극적인 독시(讀詩)를 요구하기 위함이다. 또한 무제시(無題詩)는 이상은(李商隱) 이래로 염정풍(艶情風)의 분위기를 담는 것이 보통이다.
서울 계신 님을 그리며 날마다 부질없이 누각에 오르는 여인의 하소연을 담았다. 누각에서 내려다보면 방초(芳草)는 날마다 더욱 푸르러 가는데, 님과 헤어질 때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며 가지를 꺾어 주었던 버드나무는 날로 늙어만 간다. 즉 꽃다운 봄날은 어느덧 가버리고, 계절은 여름의 번화(繁華)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님은 오실 줄 모르니, 이 아니 안타까우랴. 그녀는 날마다 누각 위에 올라 목을 빼어 님 계신 곳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러나 날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길로 뚜벅 뚜벅 걸어오시는 님의 모습이 아니라, 그녀의 슬픔처럼 출렁이며 흘러가는 강물뿐이다. 또한 한시에서 ‘가는 봄’은 아름다운 청춘의 때가 스러짐을, 좋은 시절이 다 가버림을 뜻하는 의미로 쓰인다.
江潭芳草綠瓩瓩 | 못 가엔 방초(芳草)가 우거져 푸르르니 |
別恨幹人路欲迷 | 이별의 한(恨), 심란하여 길 잃어 버리겠네. |
想得洞房春寂寞 | 생각하매 동방(洞房)은 봄에 적막했었지 |
杏花零落子規啼 | 살구꽃 떨어지고 소쩍샌 울었었지. |
역시 「무제(無題)」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지은이는 권필(權韠)이다. 이 작품에서도 무성하게 짙어오는 방초(芳草)가 이별의 한과 맞물려 노래되고 있다. 기억 속의 희미한 봄날에도 님은 내 곁에 계시지 않았다. 살구꽃은 뜨락에서 적막하게 꽃잎을 떨구고, 소쩍새는 밤마다 피를 토하듯 울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봄이 가기 전에 님이 내 곁으로 돌아오시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님은 봄이 다 가고, 초록이 짙어오는 여름이 되도록 돌아올 줄 모르고, 상심한 그녀는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들길을 헤매이고 있다. 여기서도 ‘가버린 봄’은 실제로는 스러져 버린 그녀의 청춘의 때로 그려지고 있다.
인용
2. 버들을 꺾는 마음
3.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4. 난간에 기대어
5. 저물녘의 피리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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