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버들을 꺾는 뜻은, 한시의 정운미 - 3.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버들을 꺾는 뜻은, 한시의 정운미 - 3.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건방진방랑자 2021. 12. 5. 18:31
728x90
반응형

 3.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가을부채로 자신의 신세를 대변하다

 

이왕 사랑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시에서 사랑과 연관되어 상징적 의미로 쓰이는 어휘를 더 살펴보자. ‘추선(秋扇)’ 즉 가을 부채가 그것이다. 예전에도 한 번 소개한 바 있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감상해 보기로 한다.

 

銀燭秋光冷畵屛 은 촛불 가을빛은 병풍에 찬데
輕羅小扇搏流螢 가벼운 비단 부채로 반디불을 치누나.
天際夜色凉如水 하늘 가 밤빛은 물처럼 싸늘한데
坐看牽牛織女星 견우와 직녀성을 오두마니 바라보네.

 

두목(杜牧)추석(秋夕)이란 시이다. 가을밤의 애상적 분위기가 물씬한 작품이다. 방 안에는 은촉불이 타고 있고, 방에는 화사한 그림 병풍이 둘려 있다. 그녀의 손에는 가벼운 비단 부채가 쥐어져 있다. 한 눈에도 매우 넉넉한 귀족풍의 규방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제목을 가을 저녁이라 하고, 3구에서 밤빛이 물처럼 싸늘하다 해 놓고서, 손에 부채를 쥐고 있다고 했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가을 부채는 한시에서 으레 버림 받은 여인을 상징한다. 부채는 더운 여름날에는 없지 못할 소중한 물건이다. 그러나 더위가 물러가고 소매가 선듯한 가을이 오면, 여름내 애지중지 하며 손에서 놓지 않던 부채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잊혀져 버려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때 나를 너무도 다정하게 사랑해주던 그 님은 어느덧 나를 까맣게 잊고서 돌아보지 않으신다. 시인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을 부채를 손에 쥐었다는 말만 가지고 이미 그녀가 님에게 버림 받은 여인임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셈이다.

 

홀로 지새는 깊은 가을밤, 달마저 져 버린 창가로 반딧불이 날아다닌다. 옛 사람은 풀이 썩어서 반딧불이 된다고 믿었다. 반딧불은 황폐한 풀덤불에서 날아다니는 것인데, 그 반딧불이 그녀의 창가를 날고 있으니 그녀의 거처가 얼마나 황폐하고 황량한지를 알 수 있겠다. 님이 찾지 않으니 그 꽃밭엔 잡초만이 우거져 있을 것이다. 또 그녀는 반딧불을 부채로 후려침으로써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처량함과 황량함을 저리 가!”하며 몰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엄연한 현실을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물처럼 싸늘한 하늘은 밤이 어느덧 깊었음을 말하며, 앉아서 별을 바라본다 함은 아예 그녀가 잠 잘 생각을 버리고 근심에 겨워 긴긴 가을밤을 새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가 보는 별은 무엇인가. 견우와 직녀성이다. 그들은 그래도 일 년에 칠월 칠석 하루는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신세는 어떠한가. 님은 한 번 떠나신 뒤로 돌아올 줄 모르고, 이 기나긴 기다림이 끝없이 이어져도 다시 님을 만날 날은 영영 올 것 같지가 않다. 이러한 초조감과 절망감이 견우와 직녀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위에 서리어 있다.

 

 

 

버려진 신세=가을부채

 

가을 부채가 버림 받은 여인의 상징으로 쓰이게 된 것은, 한 나라 때 반첩여(班婕妤)가 지은 원가행(怨歌行)이란 작품 때문이다.

 

新裂齊紈素 鮮潔如霜雪 제나라 고운 비단 새로 자르니 깨끗하기 마치 눈 서리 같구나.
裁爲合歡扇 團團似明月 말라서 합환선을 만들었는데 밝은 달 모습처럼 둥그렇구나.
出入君懷袖 動搖微風發 님께서 출입할 제 손에 들고서 흔들흔들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네.
常恐秋節至 凉飇奪炎熱 언제나 근심키는 가을이 와서 싸늘한 바람이 무더위 앗아가면,
棄捐篋笥中 恩情中道絶 고리 속에 깊숙히 내던져 져서 사랑하심 중도에 끊어질까 함일세.

 

제나라의 질 좋은 흰 비단을 잘 말라서 둥근 합환선(合歡扇)을 만들었다. 이를 님께 드리니 님은 늘 품 속에 지니시며 더울 때마다 부치신다. 그러나 혹 가을이 되어 더위가 수그러들면 님께서 이를 버리시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이다.

 

이밖에 왕창령(王昌齡)서궁추원(西宮秋怨)에서 누가 울음 삼키며 가을 부채로 얼굴 가리고, 허전히 걸린 달빛 아래 임금을 기다리나[誰分含啼掩秋扇, 空懸明月待君王].”라 하였고, 당나라 때 어느 궁녀는 제낙원오엽상(題洛苑梧葉上), 즉 낙양(洛陽) 궁원(宮苑) 오동잎 위에다 쓴 시에서 묵은 총애는 가을 부채를 슬퍼하고, 새로운 은총은 이른 봄에 부치었네[舊寵悲秋扇, 新恩寄早春].”라 하여 잊혀진 자신과, 새로 총애 받는 여인을 대비하여 노래하였다. 유운(劉雲)은 또 반첩여(班婕妤)에서 임금 은혜는 볼 수 없으니, 첩의 신세 가을 부채만도 못해요. 가을 부채는 오히려 다시 찾을 날 있겠지만, 첩의 몸은 영영 잊혀 졌으니[君恩不可見, 妾豈如秋扇. 秋扇尙有時, 妾身永微賤].”라고 하였다. 모두 추선(秋扇)’ 즉 가을 부채를 버림받은 자신의 신세에 견준 예들이다.

 

莫道當時恩愛多 그때에 괴임 받음 말하지 마오
秋來零落似殘荷 가을 들어 영락하니 시든 연잎 같구려.
滿庭霜露寒如許 뜰 가득한 서리 이슬 칩기가 이러한데
縱有淸風可奈何 맑은 바람 있다 한들 어찌 하리오.

 

권벽(權擘)제추선(題秋扇)이다. 가을 부채가 갖는 정운의를 십분 활용하였다. 그러나 행간에 담긴 뜻은 염정이 아니라 풍자다. 지금은 서리 이슬 내리는 추운 가을날이다. 설사 맑은 바람을 지녔다 한들 쓸 데가 없는 것이다. 서리 맞아 시든 연잎 같은 한 때의 은애(恩愛)는 말하지 말라. 인간의 부귀영화도 그렇듯 하릴없는 것이다.

 

우리 고려가요 동동(動動)에 보면, “유월(六月)ㅅ 보로매 아으 별해 바룐 빗 다호라 도라 보실 니믈 젹곰 좃니노이다 아으 동동(動動)다리.”라 한 것이 있다. 머리를 많이 빗어 이빨이 빠진 빗, 쓸모없어 버린 그 빗처럼 님이 나를 버리셔도, 나는 님이 나를 돌아보실 때까지 언제나 따르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는 노래이다. 그러고 보면 가을 부채만이 버림 받은 여인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당인(唐寅), 반희단선(班姬團扇), 16세기, 150.4X63.3cm,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둥근 부채를 손에 든 반첩여의 모습을 그렸다. 봉황 장식의 머리핀을 꼽고 먼 곳을 응시한다.

 

 

 

인용

목차

1. 남포(南浦)의 비밀

2. 버들을 꺾는 마음

3.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4. 난간에 기대어

5. 저물녘의 피리 소리

6. 이해 못할 국화 옆에서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