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저물녘의 피리 소리
예전 진(晉) 나라 때 향수(向秀)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다. 뒤에 칠현(七賢)이 죽거나 뿔뿔이 흩어진 후 예전 함께 노닐던 산양(山陽) 땅 옛 벗의 집을 지나다가 이웃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 옛 생각에 사무쳐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다. 이후 석양 무렵의 피리 소리는 지나간 옛날을 그리워함, 또는 가고 없는 벗을 그리워함의 의미가 되었다.
當時逐客幾人存 | 그때에 쫓겨간 이 몇 이나 남았던고 |
立馬東風獨斷魂 | 봄바람에 말 세우니 홀로 애가 끊는다. |
烟雨介山寒食路 | 안개 비 자욱한 개산 한식 길에서 |
不堪聞笛夕陽村 | 저물녘 피리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 |
신광한(申光漢)이 참판 김세필(金世弼)의 옛 집을 지나며 지었다는 「과개현김공석구 유감(過介峴金公碩舊 有感)」라는 시다. 김세필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를 사사(賜死)한 일의 부당함을 중종에게 간하다가 귀양 갔던 인물이다. 돌이켜 보면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말 한 마디 거스르면 쫓겨나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벅찬 세월이었다. 하나 둘 떠나가고, 새로 맞은 봄바람 앞에 나 홀로 가슴 아프다. 개자추(介子推)의 넋을 기려 찬 밥 먹는 한식 날, 문득 그대 그리워 그대 옛집 찾았으나 그대 자취 찾을 길 없고, 저물녘 피리 소리만 그리움의 애간장을 녹이는구나. 『현호쇄담(玄湖瑣談)』에 보인다.
沈貞作己卯士禍, 後出居逍遙亭, 作題咏, 釘板于壁上, 其一聯曰: “靑春扶社稯, 白首臥江湖.” 一日夜, 有俠少, 持劍, 開戶而入, 捽貞髮, 數之曰: “汝作士禍, 善類殆盡, 宗社幾覆. 汝何敢以, 扶社稯, 臥江湖等語, 作詩懸板乎? 汝若不亟改扶臥兩字, 吾當斬汝.” 貞顫伏謝曰: “當如敎扶字改以危臥字改以蟄何如?” 俠少曰: “否!” “然則當改何字耶, 願敎之.” 俠少曰: “扶字改以傾臥字改以汚宜矣.” 貞只曰: “唯命是從.” 其四代孫, 「逍遙亭感古」詩, 一聯曰: “舊恨波難洗, 新愁酒欲春.” 盖追其先愆, 有無限歎嘅底意, 句亦淸新可喜.
夕陽江上笛 細雨渡江人 | 저물녘 강물 위엔 피리의 소리 보슬비 맞고서 강 건너는 이. |
餘響杳無處 江花樹樹春 | 남은 소리 아득히 찾을 길 없네 나무마다 봄 맞아 강 꽃이 폈다. |
백광훈(白光勳)의 「능소대하문적(陵霄臺下聞笛)」이란 작품이다. 저물녘 피리 소리엔 그리움이 묻어 있다. 보슬비에 그리움을 묻혀 강을 건너가는 사람. 어디서 들려오는 피리 소릴까? 허공은 그 소리를 삼켜 버린다. 능소대(陵霄臺) 위인가 올려다보니 피리 부는 사람은 보이질 않고, 나무마다 강 꽃이 활짝 폈구나.
春風玉笛洛陽城 | 봄 바람에 옥피리 낙양성을 울리니 |
腸斷難堪聽一聲 | 애 끊는 그 소리 차마 듣기 어려워라. |
滿樹梅花零落盡 | 만발했던 매화도 다 떨어지고 |
碧天如水月輪明 | 강물 같은 푸른 하늘 달이 밝구나. |
권벽(權擘)의 「춘야문적(春夜聞笛)」이다. 삘릴리 피리 소리가 낙양 밤하늘에 울려 퍼진다. 가고 없는 옛 친구가 문득 그립다. 그리움 담아 활짝 핀 매화꽃도 떨어지니 내 마음 허전하여 둘 데 없는데, 올려다 본 하늘엔 달이 떴구나. 그리운 벗의 얼굴이 거기 있구나.
春陰漠漠向黃昏 | 봄 그늘 아득해라 해도 지려 하는 때 |
空巷無人雀自喧 | 빈 골목 사람 없고 참새만 조잘댄다. |
獨有山陽舊儔侶 | 산양(山陽) 땅 옛 벗은 아무도 없어 |
不聞隣笛也消魂 | 피리 소리 없어도 애가 녹는다. |
권필(權韠)의 「과성산구용택(過城山具容宅)」 두 수의 둘째 수이다. 세상을 떠난 벗의 옛 집을 지나다가 앞서 향수(向秀)의 고사를 떠올린 것이다. 석양 무렵 쓸쓸히 가고 없는 벗의 옛 집을 찾았다. 주인 잃은 골목은 텅 비었고, 참새가 제 집처럼 떼를 지어 시끄럽다. 막막한 것은 봄 그늘이 아니라 내 마음이다. 예전 같이 놀던 벗들은 어디 있는가? 나 홀로 여기 서니 이웃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 없어도 스산한 마음 가눌 길 없다.
인용
2. 버들을 꺾는 마음
3.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4. 난간에 기대어
5. 저물녘의 피리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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