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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버들을 꺾는 뜻은, 한시의 정운미 - 6. 이해 못할 「국화 옆에서」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버들을 꺾는 뜻은, 한시의 정운미 - 6. 이해 못할 「국화 옆에서」

건방진방랑자 2021. 12. 5.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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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이해 못할 국화 옆에서

 

 

특정 어휘의 속뜻을 알아야 시를 맛볼 수 있다

 

앞서 어떤 시인이 부른 노래가 사람들의 정서를 파고들어 깊은 공감을 일으키면, 이것이 자주 여러 시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어떤 특정 단어 위에 사전적 의미를 넘어선 정운(情韻)이 얹히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남포(南浦)’절류(折柳)’, 그리고 추선(秋扇)’의루(倚樓)’ 등이 다 그런 예들이다. 한시에는 이런 정운(情韻)이 풍부한 어휘들이 유난히 많다. 한시의 언어 특성 상 이러한 어휘들은 시가(詩歌) 언어의 함축을 더욱 유장하고 깊이 있게 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한시 감상에 있어 이러한 어휘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면, 전혀 엉뚱하게 읽어 시의 의미를 곡해할 염려가 크다.

 

대개 특정의 어휘가 정운(情韻)을 머금게 되는 과정에는 동질의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의 내적인 교감이 전제된다. 같은 어휘가 다른 문화권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읽혀지는데, 외국시를 읽을 때는 특히 이 점이 어렵다. 말하자면 이러한 어휘들은 시가(詩歌) 속에 감춰둔 암호와도 같아, 이의 이해를 통해서만이 그 시가(詩歌)에 올바로 접근하는 코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한시도 오늘의 우리와는 다른 문화권에 속해 있는 시가(詩歌) 양식이 되고 말았다. 요즘 시인들이 번역서를 통해 한시에 접근해보려 하다가도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한 채 책을 놓고 마는 것은, 번역의 문제도 없지 않지만, 바로 이러한 정서 교감의 단절에서 기인한 바 크다.

 

 

 

그 나라만의 정서가 식물에 반영되어 있다

 

예전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1915~2000)국화 옆에서를 불어로 번역하여 프랑스 시인에게 한국의 대표시라고 소개했더니,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거리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국화(菊花)하면 도리(桃李)야 곶이온 양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 뿐인가 하노라등의 예처럼 추위를 아랑곳 않는 매운 절개를 상징하는 꽃으로 배워왔다. 그러기에 머나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라는 시인의 언급은 자연스런 변용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프랑스에서 국화는 장례식 때나 쓰는 죽음을 의미하는 꽃이다. 그러고 보면, 그 프랑스 시인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는 언술이 봄부터 죽으려고 작정하고 소쩍새가 울었다는 의미쯤으로 접수되었을 법하다.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에 이르러서는 도대체 죽지 못해 아우성이로군!”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여기에서 무슨 감동이 피어나겠는가.

 

무궁화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궁화를 피고 지고 또 피어 무궁화라네라고 하여, 저녁 때 졌는가 싶으면 다음 날 아침 어느새 나무 가득 꽃을 피우는 그 모습에서 무궁(無窮)’의 의미를 읽어, 나라꽃으로 기리고 있다. 이에 반해 중국 사람들은 이를 조개모락화(朝開暮落花)’, 즉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는 꽃이라 하여 인간의 덧없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으로 폄하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무궁화 운동가가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무궁화 시가 별반 없음을 통탄하여, 중국 시인이 노래한 무궁화 시를 잔뜩 모아 보았자, 자신이 바라는 무궁화를 예찬한 노래는 한 수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맹교(孟郊)심교(審交)에서, “소인배 같은 근화(槿花)의 마음, 아침엔 있다가도 저녁엔 없네[小人槿花心, 朝在夕不存].”라 한 것이나, 백락천(白樂天)방언(放言)에서 천년 사는 소나무도 종당에는 썩어지고, 무궁화는 단 하루 삶을 홀로 영화롭게 여기네[松樹千年終是朽, 槿花一日自爲榮].”라 한 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조금 딴 이야기지만, 무궁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여 둘 말이 있다. 일제 치하에서 일제가 민족혼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무궁화에다가 눈에피꽃이니 개똥꽃이니 부스럼꽃이니 하는 더러운 이름을 붙여 제 손으로 이를 뽑게 하고, 대신 그 자리에 사쿠라 꽃을 심어 놓았다. 3.1 운동 직후 사이또(齋藤實, 재임 1919~27, 1929~31)란 자가 총독이 되어 부임했을 때, 제일성(第一聲)사나이가 되려면 사무라이가 되고, 꽃이 되려면 사쿠라 꽃이 되라는 것이었다던가. 그래서 창경궁(昌慶宮)에도 진해(鎭海)에도 충무(忠武)에도 사쿠라가 잔뜩 심겨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충무공의 호국얼을 선양한다는 단체의 주관으로 해마다꽃 축제가 열리고, 신문은 아무 생각 없이 충무공의 얼이 깃든 진해시에 벗꽃 축제 만발을 헤드라인으로 뽑고 오늘이다. 이것은 만발이 아닌 망발이다. 이제 와서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자는 것이 흠될 것은 없겠다. 그렇기는 해도,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 주었던 충무공의 얼이 깃든 그곳에, 누가 사쿠라를 그렇게 잔뜩 심어 놓았는지는 알아 두어야겠기에 하는 말이다. 시대가 바뀌면 꽃에 대한 관념도 이렇듯 희미한 기억 속으로 지워지는 것인가. 그러고 보면 앞서의 조경학자가 버들의 은유를 이해 못하는 것도 괴이한 일이 아니다. 말이 조금 옆길로 가고 말았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한시에는 한시 문화권에서만 통용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어휘들이 많이 있다. 앞서 살펴본 남포(南浦)’절유(折柳)’, ‘추선(秋扇)’의루(倚樓)’ 외에도 이런 예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다른 한 예로, 도연명(陶淵明)음주(飮酒)에서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캐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이라 한 이래로, 은사(隱士)를 자처하는 이들은 자신의 집 울타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 있건 간에 모두 동리(東籬)’라고 하였다. 덩달아 화가들이 채국동리도(采菊東籬圖)’를 다투어 그리게 되자, 이 말은 세상을 피해 사는 고상한 선비의 거처를 상징하는 의미로 굳어지게 되었다.

 

특정 어휘가 특수한 정운(情韻)을 띠게 되면 요즘 식으로 말해 사은유(死隱喩, dead metaphor)가 된다. 이것이 진부한 표현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시인은 늘 새로운 감성(感性)과 참신한 생각으로 이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나게 하는 것, 이것은 시인의 창조적 정신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마술이다.

 

정선(鄭敾), 동리채국(東籬彩菊), 18세기, 22.7X59.7cm, 국립중앙박물관

빠끔히 열린 사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캐다 말고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 저물녘이다. 햇살이 곱구나.

 

 

 

인용

목차

1. 남포(南浦)의 비밀

2. 버들을 꺾는 마음

3.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4. 난간에 기대어

5. 저물녘의 피리 소리

6. 이해 못할 국화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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