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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보여주는 시인 당시와 말하는 시인 송시 - 5. 배 속에 넣은 먹물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보여주는 시인 당시와 말하는 시인 송시 - 5. 배 속에 넣은 먹물

건방진방랑자 2021. 12. 5.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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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배 속에 넣은 먹물

 

 

문학의 기능: 거울과 등불

 

에이브럼즈(M.H.Abrams, 1912~2015)거울과 등불(The Mirror and Lamp)이란 책에서 문학의 기능을 거울과 등불의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시인은 캄캄한 밤에 등불을 들고 어둠 속을 헤매이는 영혼들의 갈 길을 일깨워주는 선지자(先知者)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시인은 그 시대를 물끄러미 비춰주는 거울이어야 하는가.

 

보기에 따라서는 당시와 송시도 거울과 등불이라는 문학의 두 기능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나는 당시풍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송시풍의 시는 시가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내가 빨간색을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파란색을 좋아하면 안 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미덕을 갖추지 못한 작품을 두고는 이러한 논쟁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한때 우리 시단에서도 참여시니 순수시니 하는 이름으로 소모적인 논쟁이 반복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한편에서는 암흑의 시대에 거울만 닦고 있는 시인을 향해, 창밖에서 천둥번개가 치든 말든 안방에서 내방가사나 읊고 있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이라고 매도하고, 또 한 켠에선 등불을 높이 들고 무조건 따라오라고만 외치는 시인을 향해 시가 무슨 혁명의 도구냐고 항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리 시의 겉모양을 갖추었다 해도 선동가의 연설이나 삐라를 시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가슴을 저미는 감미로운 유행가의 가사도 시와는 구별되는 법이다.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당시와 송시의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호오(好惡)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優劣)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시인이 시가(詩歌) 언어(言語)의 규율을 무시하고 목청만 잔뜩 높이게 되면 그것은 한때 대학가에 요란스레 나붙었던 대자보나 근엄한 목회자의 설교와 다를 바 없다. 웅변이나 설교를 시의 형식을 빌어 듣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시는 결코 관념의 퇴적장(堆積場)이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몽환적 어휘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것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연금술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는 결코 독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이거나 암호문일 수는 없다.

 

 

 

먹물적 허위에 남아선 안 된다

 

다시 심의(沈義)기몽(記夢)으로 돌아가 보자. 꿈속의 시() 왕국에서 현세에서는 누려보지 못한 득의(得意)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심의(沈義)에게 군신(群臣)들의 시샘에서 비롯된 탄핵이 올라오고, 이에 천자는 마지못해 다시 진세(塵世)로 복귀할 것을 명한다. 이러한 결구는 대개 각몽(覺夢)을 위한 장치인데, 복귀에 앞서 이색(李穡)은 심의(沈義)를 깨끗이 목욕시키고 칼로 배를 갈라 먹물 몇 말을 붓는다. 그리고는 40년 뒤에 다시 만나 부귀를 함께 누릴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홀연 배가 칼로 찌르듯 아파, 놀라 깨어보니 배는 북처럼 불러 있고, 잔등(殘燈)은 꺼질 듯 가물거리며, 병든 아내는 곁에 누워 끙끙대고 있을 뿐이었다. 꿈속에서의 환상이 급전직하 티끌세상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심의(沈義)는 복수가 차서 배가 부른 것을 이색(李穡)이 앞으로 살 40년 동안 인간 세상에서 써 먹으라고 넣어준 먹물로 치부하는 오만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하리. 현세에서 시인의 삶이란 곁에 누운 병든 아내의 신음소리처럼 고달프고 괴로운 것을. 그러고 보면 시란 까맣게 잊고 있던 신선 세계, 또는 존재하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향한 회귀의 몸부림일 지도 모르겠다. 천상(天上)의 백옥루(白玉樓)가 준공되었으나 상량문(上樑文)을 지을 사람이 없어 옥황상제가 당() 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하(李賀)를 하늘나라로 불러갔던 것처럼, 티끌세상의 귀양살이가 끝나 천상으로 복귀할 때까지, 배 속의 먹물이 다 마르도록 시인은 다만 깨어 노래할 일이다.

 

 

 

 

인용

목차

1. 꿈에 세운 시()의 나라

2. 작약의 화려와 국화의 은은함

3. 당음(唐音), 가슴으로 쓴 시

4. 송조(宋調), 머리로 쓴 시()

5. 배 속에 넣은 먹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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