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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원, 향랑고사를 수용한 한시의 의미 - 2. 향랑의 죽음과 가족 제도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전경원, 향랑고사를 수용한 한시의 의미 - 2. 향랑의 죽음과 가족 제도

건방진방랑자 2022. 10. 23.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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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향랑의 죽음과 가족 제도

 

 

향랑의 죽음을 제도적 측면에서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향랑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자결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하는 점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1702년에 일어난 향랑의 사건을 최초로 기록한 사람은 당시 선산의 부사로 있었던 조귀상(趙龜祥)에 의해서였다. 그는 선산의 부사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약정(約正)’이란 직함을 지닌 사람으로부터 향랑의 사건을 보고 받게 되어 이를 방백(方伯)에게 보고하고 방백은 다시 조정에 상계(上啓)하였으나 아무런 조치가 없자 조귀상은 그 사실이 훗날 잊혀질까 걱정되어 이듬해인 17035월에 판각(板刻)본을 내기에 이른다. 그 기록에는 향랑의 죽음에 대한 과정이 사실에 입각하여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기에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 전문(全文)을 살펴보겠다.

 

 

무릇 목숨을 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장부도 오히려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아낙네에게 있어서랴! 옛 사람의 말에, 강개(慷慨)하여 죽는 것은 쉬운 일이로대, 조용히 죽음에 나아감은 어렵다. 하물며 시골 계집의 비천함이랴!옛 사람이 어렵다고 한 것을 판단컨대 나는 그것을 향랑에게서 보았다. 향랑은 영남의 일선부(一善府, 현재의 善山’) 상형곡 사람이다. 임오년(1702) 가을에 내가 일선(一善)에 부임한 지 수 일이 지나지 않아서 남면(南面)의 약정(約正)으로부터 글월이 이르렀는데 그 대략은 이랬다.

夫死 難事也. 丈夫 猶難 况婦人乎!. 古人有言曰, “慷慨殺身 易, 從容就事 難”. 况村女之賤! 辦古人之難者 吾於香娘見之矣. 娘 卽嶺南 一善府 上荊谷人也. 壬午之秋 余莅一善 過數日 而南面約正 文狀至 其略曰,

 

상형곡에 사는 양인 박자갑(朴自甲)의 딸인 향랑(香娘)’은 어릴 적부터 용모가 방정하고 성품과 행실이 정숙하여 비단 이웃에 사는 남자 아이들과 더불어 장난하며 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계모의 성품이 매우 불량하여 향랑을 대함이 심하게 구박하여 날이 갈수록 꾸짖고 욕하며 때렸지만 그래도 향랑은 성난 기색을 조금도 하지 않고는 오직 공손한 말로써 뜻을 이어받고 따르더니 열일곱 살에 시집을 갔는데 한 고을에 사는 임천순(林天順)의 아들 칠봉(七奉)의 아내가 되었다. 칠봉은 나이가 열넷인데 성품과 행실이 괴팍하고 어그러져 향랑을 질시하고 미워함을 원수를 대하듯 하니 향랑이 이미 혼인하여 계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또 아버지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숙부에게 의지하고자 하였으나 숙부가 장차 향랑을 개가(改嫁)시키고자 하여 시아버지에게 돌아가니 시아버지 역시 다른 곳으로 가라고 명하니, 마침내 물에 빠져 죽을 때에 인근 마을에 사는 초녀(樵女)를 만나서는 그 슬픈 회포를 설명했다.

上荊谷居 良人朴自甲女 香娘 自幼時 容貌方正 性行貞淑 不但不與隣居男兒遊戱 其後母性 甚不良 待香娘甚薄 日加叱辱毆打 而香娘 少無慍色 惟以巽言承順 十七嫁作同里居 林天順子 七奉之妻 七奉年才十四 性行怪悖 姪惡香娘 如仇讐 香娘旣不得於繼母 又不容於其夫 欲依叔父 則叔父 將改嫁之 歸于其舅 則舅又令他適 遂投水死時 遇近村樵女 說其悲懷云

 

내가 그 초녀(樵女)를 불러서 물었는데 초녀의 나이는 열두 살로 성품이 꽤 영리하여 그 사건의 처음과 끝을 깊고 상세하게 진술하였는데 열두 살의 계집아이라면 필히 꾸며대는 말은 없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진실된 행적 됨이 명백함이로다. (초녀의) 말에 이르기를,

余招其樵女 而問之 則樵女年十二 性頗伶俐 陳其首尾甚詳 十二歲女兒 必無文飾之言 此其爲實蹟 明矣 其言曰

 

96일에 제가 오태(吳泰)길 가에서 사리나무를 줍고 있는데 어떤 한 젊은 여인이 길을 따라 통곡을 하면서 오더니 저를 보고는 흔연히 울음을 멈추더니 저를 불러서는 더불어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너는 뉘집의 아이니?”하여 제가 아버지의 성명을 말했더니 여인이 말하기를, 그러면 너의 집 거리가 우리 마을과 멀지 않으니 내 말을 우리 아버지에게 전해줄 수 있겠구나, 오늘 너를 만난 것은 하늘의 도움이다. 나는 한도 없이 말 못할 고통이 있으니 이제 너에게 모두 말하고 나서 죽을 것이다.

九月初六日 兒取柴於吳泰路傍 有一年少女人 從路痛哭而來 望見兒 欣然止哭 招與握手 而言曰 爾是誰家兒乎? 兒道以父之姓名 女曰然則汝家距吾村不遠 可以傳吾言於我父 今日之逢汝 天也 我有無限隱痛 今當畢說於汝而死矣

 

나는 본래 모촌(某村)에 사는 모()의 자식이고, 모촌(某村)에 사는 모()의 아낙으로 이름은 모(), 나이는 올해 스물이고 열일곱에 시집을 왔는데 당시에 남편의 나이는 열네 살이므로 어리고 아는 바가 없는지라 나를 대우함이 원수처럼 하기에 나는 나이가 어려서 일을 해결할 수 없어서 그럴 것이므로 나이를 먹고 성장하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은인자중하며 지냈으나 세월이 조금씩 흘러도 나를 대함이 더욱 학대하여 큰 몽둥이로 어지럽게 때리고 머리를 뽑고 얼굴을 훼손함에 이르더니만 나를 쫓아내니 시아버지시어머니도 또한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我本某村居某之女 某村居某之婦 名某年今二十 十七而嫁時 夫年十四 穉孩無所知識 待我如仇 我以爲年幼 不解事而然也 年若長成 必不如是 隱忍而度矣 年稍長 而待我愈虐 至於大杖亂打 躍髮毁面而歐逐 舅姑亦不能止

 

나는 어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우리 어머니는 날 낳아주신 생모(生母)가 아니고 계모였었는데 평상시에 나를 대함이 자애롭지 않았기에 나를 보고는 성내며 질책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미 시집을 보냈는데 다시 돌아왔으니 내가 어찌 너를 기르겠느냐!”하시더니 하루하루 지날수록 꾸짖고 욕보임이 사람의 정()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고 아버지도 나를 보시고 용인하기 어려운지라 나를 숙부님 댁으로 보냈단다.

我不得而還我家 則我母非生母 而乃後母也 常時 待我不慈 見我怒責 曰 旣爲嫁遣而又復還來 吾何以畜汝乎!” 日日叱辱 有非人情之所堪者 父見我難容 送我於叔父家

 

다행히 수개월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하루는 숙부님께서 나를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떻게 백년토록 너를 부양하겠니? 네 남편이 너를 영원히 버린 것은 기필코 너의 잘못이 아닌데 떳떳하고 한창인 젊은 여자가 어찌 혼자 살아가겠니? 다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시더라. 내가 대답하기를, “숙부님께서는 어찌 차마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비록 떳떳하고 한창인 나이인데다가 또한 부도(婦道)의 덕을 행하지는 않았으나 몸은 이미 남에게 허락했건만 어찌 남편의 어질지 못함으로 다시 시집을 갈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말했다. 숙부는 기뻐하지 않으셨다.

幸得數月安接矣 一日叔父謂我曰 吾何以百年養女乎? 汝夫永棄汝 必無更推之理 常漠少女 何以獨居乎? 莫若更適他人云我答曰 叔父 何忍出此言也? 我雖常漠 且不行婦道之德 而身旣許人 豈可以夫不良而更適乎!”. 叔父不悅

 

이로부터 대우가 점차 박해지더니 의지를 꺾으려는 뜻이 있어서, 내가 다시 어쩔 수 없이 다시 시댁으로 왔더니 남편은 나를 박대함이 더욱 갈수록 심해지니 시아버지가 나의 궁박함을 가여워하시면서 다시 다른 곳으로 출가할 것을 권하시면서 분명히 약조한 글월을 만들어 그것을 내게 주기에 이르러 내가 숙부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답하고 또 말씀드리기를, “시아버지께서 만약 울타리 바깥에 흙집이라도 만들어주셔서 저를 받아주시면 저는 마땅히 죽는 날까지 그 속에서 있겠습니다.”고 했지만 시아버지는 듣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저에게 집안을 더럽히지 말라고 감계하시면서 내심으로는 아마도 제가 스스로 자결할 것을 염려하셨던 것이다.

自此待之漸薄 顯有奪志之意 我又不得已 更來舅家 則良人之薄我 愈往愈甚 舅父憐我窮迫 又勸以他適 至成明文而給之 我以答叔父者答之 且曰 舅父若造土宇於籬外以容我 則我當終身於其中矣 舅父不聽 常戒我以勿汚家 內盖慮我之自經也

 

이로써 집에서 자결할 수 없었기에 물에 빠져죽기를 결심했단다. 비록 그러하나 죽음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곧 부모님과 시부모님께서는 필히 내가 몰래 다른 곳으로 개가했으리라 의심할 것이니 어찌 원한이 깊지 않겠는가! 오늘 너를 만남은 나의 죽음을 증거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하늘의 도움심이다. 또 비록 만난 사람이 남자 아이였다면 더불어 이야기할 수도 없었고, 어른인 여자였다면 반드시 나의 죽음을 말렸을 테니 너는 나이가 어려서 너의 성품과 지혜로 나를 만류할 수는 없을 테지만 능히 나의 말을 우리 아버지에게 전달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또한 천행(天幸) 아니겠는가!

是以不能決於家 而投水計決矣 雖然死不明白 則父母舅姑必疑我潛逃他適 豈不寃甚乎! 今日逢汝 證我一死 此所謂天也 且雖逢人而男兒 則不可與語 壯女則必止我死 汝則年幼而性慧 不能挽我而能傳我言於我父 此又非天幸乎!”

 

하고 이에 저를 데리고 지주비에 이르러 못 위에서 머리를 풀고 그 치마와 신발을 벗어서 묶어서 제게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부모님께 드려서 내 죽음의 증거로써 명백히 하고 또한 강 속에서 나의 시신을 찾게끔 하여라. 그러나 내가 죽으면 부모님께는 죄인이 되는지라 비록 죽더라도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을 뵈오리오. 내 시신은 필히 나타나지 않을 것이니 내 장차 죽어서 지하에서 우리 어머니를 보게 되면 이 같은 만 가지 슬픔과 원망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仍携兒至於砥柱(砥也吉冶隱) 淵上解其髢 脫其裳與草鞋 縛束贈我曰, “持此以遣父母 以證我死之明白 而且使之覓我屍於淵中也 然而我死爲父母之罪人也 雖死何面目復見父母乎 我屍必不出矣 吾將歸見我母於地下 說此萬端哀怨耳”.

 

말을 마치고는 오랫동안 통곡을 하더니 곡을 멈추고는 노래 한 곡을 하더니 장차 물에 몸을 던지려고 하는데, 제가 무섭고 두려움을 이길 수 없어서 몸을 일으켜 달아났더니 그 여인이 쫓아와서는 저를 만류하며 다시 강의 위에 이르러 말하기를, “두려워 말아라, 내가 너에게 노래 한 곡을 가르쳐줄테니 너는 모름지기 암기하고 낭송하다가 언젠가 사리나무를 구하러 이곳에 오게 되어 이 산유화한 곡조를 노래하면 나의 혼백은 틀림없이 네가 온 것을 알 것이다. 푸른 물결을 굽어보아서 만일 소용돌이치는 곳이 있으면 나의 혼백이 그 가운데에서 놀고 있다고 알아라.” 거듭하여 강물에 몸을 던지려다 돌아와 멈추며 말하기를, “한번 죽음을 이미 결정하였으나 물을 보니 오히려 두려운 마음이 있어 차마 몸을 던지지 못하니 가련하구나. 나는 차마 물을 볼 수 없구나.”라고 하더니 마침내는 그 적삼을 벗어서 얼굴에 덮어써서 강물을 볼 수 없도록 한 이후에 한 번에 뛰어서는 영원히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語止而痛哭良久 哭止而唱歌一曲 將有投水之狀 兒不勝恐懼起身走來 則其女追至挽兒復到淵上曰 勿怖也我敎汝歌一曲 汝須記誦他日 以取柴來此地 以此 歌唱山有花一曲 則我之魂魄 必知汝之來 俯視滄浪如有洶湧處 知我之魂魄遊戱於其中也復欲投水還止曰, “一死已決而見水 猶有懼心不忍投可憐也 吾寧不見水矣遂脫其衫蒙其面 使不得見水而後一躍而永投於水中

 

초녀(樵女)가 돌아가 그 아버지에게 알리니 아버지는 곧바로 시신을 찾으러 갔으나 합쳐서 십사일 동안 시신을 찾지 못하고 아비가 어찌할 수 없어 관()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는데 시신이 물결 위로 떠올랐는데 홑적삼이 아직도 얼굴에 덮힌 채였는데 그것 또한 기이했다. 그 노래에 이르기를, ㉰ 「하늘은 어찌하여 높고 먼 것인가 / 땅은 어찌하여 넓고도 광막한가 / 하늘과 땅이 비록 크다고 해도 / 이 한 몸을 의탁할 수 없으니 / 차라리 이 연못에 몸을 던져 / 물고기 배속에 장사지내리라

樵女歸告其父 其父卽往覓屍 凡十四日而不得 其父無奈何 絻歸家而屍浮於波上 單衫猶蒙於面 其亦異矣 其歌曰, 天何高遠 地何廣邈 天地雖大 一身靡托 寧投此淵 葬於魚腹”.

 

아이의 말이 이에서 그치자 내가 듣고서는 측연하여 방백에게 알려 말하기를, 생각건대 선산이 읍이 된 옛날부터 충효절의(忠孝節義)가 대대로 있어 사람들에게 들으니 짐승에 이르러서도 또한 의로운 죽음이라 칭함이 있으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식한 촌맹(村氓)의 딸도 이같이 빼어난 절개의 행실이 있으니 비록 옛날의 열녀라도 어찌 이에서 더함이 있겠는가. 그 일을 처리함이 분명함은 죽음에 나아감이 조용한 것이라 민멸되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 있기에 감히 이렇게 가르치고 알리고자 하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조정에 알려서 그 무덤에 정표를 내려서 열()과 의()의 풍습을 세우고자 말하였더니 방백이 계()를 지었는데 듣자니 해당 부서에서 그를 두고 아직 표정(表旌)의 거행됨이 없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으리오.

兒之言止於此 余聞而惻然 報於方伯曰 惟善爲邑 自古忠孝節義之代有聞人 至於畜物亦有義死之稱 而不料無識村氓之女 有此卓絶之行也 雖此於古之烈女何以加此 其處事之明白就死之從容 有不可泯滅者 故敢此校報 伏望轉報于 朝 旌表其塚以樹烈義之風云 方伯卽爲啓聞 則該曺置之 尙無表旌之擧 豈不慨然哉

 

내 그 이름이 민멸되어 칭송됨이 없어지지 않을까 안타까워 이에 삼강행실의 예에 의거하여 그 형상을 그리고 그 사건을 서술하여 의로운 소의 그림 아래에 붙임으로써 훗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향랑이 있었음과 그 죽음은 열()이었음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안타깝도다! 할아버지께서 이 고을에 부임하였을 때는 의로운 소가 있었는데 불초한 손자가 이 고을에 부임하여서는 이 고을에 향랑이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한 일이 쌓였다고들 하더라.

余惜其名泯沒而無稱 玆依三綱行實之例圖其形而敍其事以附義牛圖之下 俾後之覽者 知有香娘而其死也烈焉 噫! 王考之莅此府也 有義牛焉 不肖之莅 此府也有香娘焉 人皆積異事云爾. -趙龜祥, 香娘傳, 善山邑誌卷二, ‘善山人物條’.

 

 

위에서 살펴본 기록과 같이 향랑의 죽음은 그리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향랑은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서 자신보다 어린 남편에게 학대를 받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이므로 세월이 조금 흐르면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참아보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남편이 나이를 먹을수록 학대와 구박은 그 정도를 더해갔다. 결국 향랑은 자신의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계모의 학대와 구박으로 인해 더 이상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아버지 또한 어쩔 도리 없이 향랑을 숙부집으로 보내기에 이른다. 향랑은 그곳에서 잠시 동안은 편히 지냈지만 얼마 뒤에 숙부가 향랑에게 개가할 것을 권하자, 향랑은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숙부집에서의 생활도 그리 편하지만은 않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향랑의 뜻을 꺾으려한다는 점을 감지한 향랑은 다시 시댁으로 돌아가기에 이른다. 시댁으로 돌아갔으나 남편의 학대는 여전하였고 이를 보다 못한 시부모들도 향랑에게 개가할 것을 권유하면서 급기야는 그러한 내용의 문서까지 작성하여 주겠다고 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랑은 끝까지 애원하면서 제발 집 울타리 바깥이라도 좋으니 살 수 있게만 해달라고 청해보지만 시부모는 이를 거절한다. 결국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어져 고단한 신세가 되어버린 향랑은 죽을 것을 결심하게 되는 셈이다.

 

 

개가에 거부감을 드러낸 향랑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숙부와 향랑의 언급을 통해 드러나는 사고(思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루는 숙부님께서 나를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떻게 백년토록 너를 부양하겠니? 네 남편이 너를 영원히 버린 것은 기필코 너의 잘못이 아닌데 떳떳하고 한창인 젊은 여자가 어찌 혼자 살아가겠니? 다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시더라.

一日 叔父 謂我曰, “吾何以百年養女乎? 汝夫永棄汝 必無更推之理 常漠少女 何以獨居乎? 莫若更適他人云

 

내가 대답하기를, 숙부님께서는 어찌 차마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비록 떳떳하고 한창인 나이인데다가 또한 부도(婦道)의 덕을 행하지는 않았으나 몸은 이미 남에게 허락했건만 어찌 남편의 어질지 못함으로 다시 시집을 갈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我答曰, “叔父 何忍出此言也? 我雖常漠 且不行婦道之德 而身旣許人 豈可以夫不良 而更適乎

 

하늘은 어찌하여 높고 먼 것이고 / 땅은 어찌하여 넓고도 광막한가 / 하늘과 땅이 비록 크다고 해도 / 이 한 몸을 의탁할 수 없으니 / 차라리 이 연못에 몸을 던져 / 물고기 뱃속에 장사 지내리라

天何高遠하며 地何廣邈인가 天地雖大라도 一身靡托이니 寧投此淵하여 葬於魚腹호리라”.

 

 

인용문 는 향랑이 숙부집에 머물고 있을 때, 숙부가 향랑에게 개가를 권유하고 그에 대하여 향랑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부분이고 는 향랑이 죽기 직전에 초녀에게 가르쳐주었다는 산유화가(山有花歌)노래의 가사말이다.

 

우선 숙부와의 대화가 오고 간 의 상황에 주목해 보면, 숙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조카에게 개가를 권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향랑의 신분은 사대부 계층이 아닌 일반 평민 계층에 속해 있었기에 개가(改嫁)를 한다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랑은 개가(改嫁)’에 대하여 상당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러기에 숙부의 개가 권유에 대해, “숙부님께서는 어찌 차마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비록 떳떳하고 한창인 나이인데다가 또한 부도(婦道)의 덕을 행하지는 않았으나 몸을 이미 남에게 허락했건만 어찌 남편의 어질지 못함으로 다시 시집을 갈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정색하면서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후에 강제로 개가를 시키려는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숙부댁을 떠나 다시 시댁(媤宅)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된다.

 

 

개가금지란 사대부의 법이 평민에게도 확산되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당시의 가족제도 가운데 개가(改嫁)’와 관련된 재가(再嫁)의 문제를 사적인 근거에 입각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녀자의 재가(再嫁)를 금지시키려는 법문(法文)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공양왕 원년(1389) 9월의 법문에 의하면, 산기계급(散騎階級) 이상의 처()로 명부(命婦)된 자의 재가(再嫁)를 금하고, 판사 이하 육품 계급의 처()는 부()가 사망한 후 삼 년 이내의 재가를 금하니, 이것을 위반하는 자는 실절(失節)이라 할 것이며, 산기(散騎) 이상인 자의 첩()과 육품 이상인 자의 처첩으로 스스로 수절(守節)을 원하는 자는 정표문(旌表門)을 세우고 가상(加賞)한다고 하였다【『高麗史 卷八十四 刑法 1戶婚條. 이러한 법문(法文)을 보고 이상백(李相佰)은 당시 일반 사회에서 부인의 재가가 보편적인 당연한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소위 수절하는 사람이 얼마나 드물었던가 하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여말(麗末)에 이르러 재가(再嫁)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더니, 조선조에 이르러는 재가를 더욱 금제(禁制)하려는 요청이 강해졌다李光奎, 韓國家族史的硏究(一志社, 1990), 262..

 

인용문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고려말의 흐름은 조선조에 들어서 더욱 경직성을 더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종 8(1477) 7월 왕은 증경정승(曾經政丞), 의정부육조(議政府六曹), 사간부(司諫府) 한성부(漢城府) 돈녕부(敦寧府) 이품(二品) 이상, 충훈부(忠勳府) 一品 이상의 중신을 소집하여 부녀개가문제(婦女改嫁問題)에 관한 입법을 논의케 하였다.

이에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좌의정(左議政) 심회(沈澮), 우의정(右議政) 윤자운(尹子雲),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사흔(尹士昕) 등은 양가(良家)의 여자로서 소년(少年)하여 부상(夫喪)을 당하고 수절을 맹서하는 것은 좋으나 그렇지 못한 것은 기한(飢寒)으로 인해 부득이한 것이니, 만약 법으로 이것을 금절(禁絶)하면 위반자는 죄로 다스려야 되고 누()가 자손에게까지 이르니 손실(損失)이 적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전과 같이 경삼부(更三夫) 이외에는 논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하였다.

광산부원군 김광국, 영산부원군 김수온, 영돈녕 노사신, 판중추 김개 등도 년소한 조과자(早寡者)에게 재가(再嫁)를 불허하면 위로 부모가 없고 아래로 소앙(所仰)도 없으면 수절하기 어려우니, 국가는 재가를 금하지 말고 구법(舊法)에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호조판서 윤흠, 거창군 신승선, 지중추부사 정문형, 공조판서 이예, 형조판서 윤계겸, 첨지중추부사 김한, 공조참의 이륙 등은 자식 없는 과거자(寡居者)를 부모나 존장이 그 고고(孤苦)를 가련하게 여겨 재가시키는 것은 인정(人情)의 소치로 금할 수가 없으나 대전(大典)의 법에도 적삼부(適三夫)의 자손에 대해 청요직(淸要職)을 불허한다 하였고, 재가(再嫁)를 금하는 조항이 없으니 부모나 존장의 명에 의하여 재가(再嫁)한 자는 논외(論外)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중략)...

그러나 좌참찬 임원준, 예조판서 허종, 무령군 유자광, 문성군 류수 등은 주자의 말인 실절(失節)은 극대사(極大事), 아사(餓死)는 극소사(極少事)”라는 것과 장횡거(張橫渠)의 말인 실절은 단 한번이라도 실절이니 종신불개(終身不改)가 부인의 도()”라 한 것을 들어 이유를 막론하고 금후 재가자(再嫁者)를 일체 금단(禁斷)하고, 재가자(再嫁者)는 실행(失行)으로 치죄(治罪)하여 그 자손의 입사(入仕)를 불허할 것이라 하였다[成宗實錄 8216枚 表)].

이와 같이 대부분의 의견과는 반대로 4인만은 재가를 금지하여야 된다는 의견이었다. 성종은 다수의 의견보다 소수의 의견에 찬동(贊同)하여, ()은 부덕(婦德)이니 이에 일위지례(一違之禮)가 있을 수 없으며, 만일 입법(立法)을 엄하게 하여 방지하지 않으면 음벽(淫僻)의 행위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앞으로 재가녀(再嫁女)의 자손은 사판(仕版)에 불치(不齒)케 하여 풍속을 바르게 할 것이라 하였다[성종실록 8220매 표 성종8(1427) 7癸未條]. 이러한 성종의 주장이 경국대전에 편입되어 재가를 법으로 금지하게 된 것이다李光奎, 韓國家族史的硏究(一志社, 1990), 267-268..

 

 

인용문을 통해서도 드러나듯이 고려말까지만 하더라도 본인의 의사에 따라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개가(改嫁)의 문제가 조선조에 들어서는 법으로 금지하는 강제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처럼 개가의 문제가 법으로 금지된 것이 1427년이었으므로 향랑사건(1702)이 발생하기 275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개가금지법이 일반 평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개가금지법은 사대부계층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가에 대한 풍속은 개가금지법이 공포된 후 300여년이 다 되어가자 개가를 부정시하는 지배층의 분위기가 일반 평민층에게까지 이미 교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향랑과 숙부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향랑의 행동과 사고를 지배하던 원칙은 개가(改嫁)는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었다. 이 같은 향랑의 태도에는 당시 규범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던 지배층의 개가금지에 대한 조항이 일반 서민사회층에도 이미 깊숙하게 침윤(浸潤)되어 향랑과 같은 개인에게는 체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향랑이 남편과의 삶을 포기하면서도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당시의 경직된 규범으로 작용한 개가금지법과 개가에 대한 부정적 시선 또한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향랑 자신이 죽기 직전에 초녀 앞에서 불렀다는 산유화라는 노래말을 보면, 다음과 같다.

 

天何高遠 地何廣邈 하늘은 어찌하여 높고 먼 것이고 땅은 어찌하여 넓고도 광막한가
天地雖大 一身靡托 하늘과 땅이 비록 크다고 해도 이 한 몸을 의탁할 수 없으니
寧投此淵 葬於魚腹 차라리 이 연못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 지내리라. 趙龜祥, 香娘傳, 善山邑誌卷二, ‘善山人物條’.

 

향랑의 자결 이유가 문맥상으로는 제4구에서와 같이 자신의 한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서[一身靡托]”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의탁할 곳이 없는 고단한 신세가 되어버린 탓에 결국은 향랑이 죽음을 택하게 된 셈이지만 그 이면에는 개가 금지에 대한 규범 등을 통해 향랑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일체의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 또한 근본적 원인이 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요컨대, 향랑이 결국에 가서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는 자신의 몸을 어느 곳에서도 의지할 데가 없었다는 점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새로운 선택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있었던 규범과 그로 인해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가 커다란 작용을 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어지는 3장에서는 이 같은 향랑의 사건을 수용한 한시에서는 당대의 가족제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한시 작품을 통해 살펴보겠다.

 

 

 

 

인용

목차 / 지도

1. 서론

2. 향랑의 죽음과 가족 제도

3. 향랑 고사를 수용한 한시와 가족제도

3.1. 유교적 열이념의 강조

3.2. 개가의 불가피성 옹호

3.3. 각박한 인정세태 고발

3.4. 질곡된 가족제도 비판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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