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개가금지란 사대부의 법이 평민에게도 확산되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당시의 가족제도 가운데 ‘개가(改嫁)’와 관련된 재가(再嫁)의 문제를 사적인 근거에 입각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녀자의 재가(再嫁)를 금지시키려는 법문(法文)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공양왕 원년(1389년) 9월의 법문에 의하면, 산기 계급(散騎階級) 이상의 처(妻)로 명부(命婦)된 자의 재가(再嫁)를 금하고, 판사 이하 육품 계급의 처(妻)는 부(夫)가 사망한 후 삼 년 이내의 재가를 금하니, 이것을 위반하는 자는 실절(失節)이라 할 것이며, 산기(散騎) 이상인 자의 첩(妾)과 육품 이상인 자의 처첩으로 스스로 수절(守節)을 원하는 자는 정표문(旌表門)을 세우고 가상(加賞)한다고 하였다【高麗史 卷八十四 刑法 1戶婚條】. 이러한 법문(法文)을 보고 이상백(李相佰)은 당시 일반 사회에서 부인의 재가가 보편적인 당연한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소위 수절하는 사람이 얼마나 드물었던가 하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여말(麗末)에 이르러 재가(再嫁)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더니, 조선조에 이르러는 재가를 더욱 금제(禁制)하려는 요청이 강해졌다【李光奎, 『韓國家族의 史的硏究』(一志社, 1990), 262쪽.】.
인용문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고려말의 흐름은 조선조에 들어서 더욱 경직성을 더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종 8년(1477) 7월 왕은 증경정승(曾經政丞), 의정부육조(議政府六曹), 사간부(司諫府) 한성부(漢城府) 돈녕부(敦寧府) 이품(二品) 이상, 충훈부(忠勳府) 一品 이상의 중신을 소집하여 부녀개가문제(婦女改嫁問題)에 관한 입법을 논의케 하였다.
이에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좌의정(左議政) 심회(沈澮), 우의정(右議政) 윤자운(尹子雲),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사흔(尹士昕) 등은 양가(良家)의 여자로서 소년(少年)하여 부상(夫喪)을 당하고 수절을 맹서하는 것은 좋으나 그렇지 못한 것은 기한(飢寒)으로 인해 부득이한 것이니, 만약 법으로 이것을 금절(禁絶)하면 위반자는 죄로 다스려야 되고 누(累)가 자손에게까지 이르니 손실(損失)이 적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전과 같이 경삼부(更三夫) 이외에는 논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하였다.
광산부원군 김광국, 영산부원군 김수온, 영돈녕 노사신, 판중추 김개 등도 년소한 조과자(早寡者)에게 재가(再嫁)를 불허하면 위로 부모가 없고 아래로 소앙(所仰)도 없으면 수절하기 어려우니, 국가는 재가를 금하지 말고 구법(舊法)에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호조판서 윤흠, 거창군 신승선, 지중추부사 정문형, 공조판서 이예, 형조판서 윤계겸, 첨지중추부사 김한, 공조참의 이륙 등은 자식 없는 과거자(寡居者)를 부모나 존장이 그 고고(孤苦)를 가련하게 여겨 재가시키는 것은 인정(人情)의 소치로 금할 수가 없으나 대전(大典)의 법에도 적삼부(適三夫)의 자손에 대해 청요직(淸要職)을 불허한다 하였고, 재가(再嫁)를 금하는 조항이 없으니 부모나 존장의 명에 의하여 재가(再嫁)한 자는 논외(論外)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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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좌참찬 임원준, 예조판서 허종, 무령군 유자광, 문성군 류수 등은 주자의 말인 “실절(失節)은 극대사(極大事)요, 아사(餓死)는 극소사(極少事)”라는 것과 장횡거(張橫渠)의 말인 “실절은 단 한번이라도 실절이니 종신불개(終身不改)가 부인의 도(道)”라 한 것을 들어 이유를 막론하고 금후 재가자(再嫁者)를 일체 금단(禁斷)하고, 재가자(再嫁者)는 실행(失行)으로 치죄(治罪)하여 그 자손의 입사(入仕)를 불허할 것이라 하였다[成宗實錄 82卷 16枚 表)].
이와 같이 대부분의 의견과는 반대로 4인만은 재가를 금지하여야 된다는 의견이었다. 성종은 다수의 의견보다 소수의 의견에 찬동(贊同)하여, 신(信)은 부덕(婦德)이니 이에 일위지례(一違之禮)가 있을 수 없으며, 만일 입법(立法)을 엄하게 하여 방지하지 않으면 음벽(淫僻)의 행위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앞으로 재가녀(再嫁女)의 자손은 사판(仕版)에 불치(不齒)케 하여 풍속을 바르게 할 것이라 하였다[성종실록 82권 20매 표 성종8년(1427년) 7월 癸未條]. 이러한 성종의 주장이 「경국대전」에 편입되어 재가를 법으로 금지하게 된 것이다【李光奎,『韓國家族의 史的硏究』(一志社, 1990), 267-268쪽.】.
인용문을 통해서도 드러나듯이 고려말까지만 하더라도 본인의 의사에 따라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개가(改嫁)의 문제가 조선조에 들어서는 법으로 금지하는 강제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처럼 개가의 문제가 법으로 금지된 것이 1427년이었으므로 향랑사건(1702년)이 발생하기 275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개가금지법이 일반 평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개가금지법은 사대부계층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가에 대한 풍속은 개가금지법이 공포된 후 300여년이 다 되어가자 개가를 부정시하는 지배층의 분위기가 일반 평민층에게까지 이미 교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향랑과 숙부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향랑의 행동과 사고를 지배하던 원칙은 개가(改嫁)는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었다. 이 같은 향랑의 태도에는 당시 규범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던 지배층의 개가금지에 대한 조항이 일반 서민사회층에도 이미 깊숙하게 침윤(浸潤)되어 향랑과 같은 개인에게는 체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향랑이 남편과의 삶을 포기하면서도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당시의 경직된 규범으로 작용한 개가금지법과 개가에 대한 부정적 시선 또한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향랑 자신이 죽기 직전에 초녀 앞에서 불렀다는 「산유화」라는 노래말을 보면, 다음과 같다.
天何高遠 地何廣邈 | 하늘은 어찌하여 높고 먼 것이고 땅은 어찌하여 넓고도 광막한가 |
天地雖大 一身靡托 | 하늘과 땅이 비록 크다고 해도 이 한 몸을 의탁할 수 없으니 |
寧投此淵 葬於魚腹 | 차라리 이 연못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 지내리라. 趙龜祥,「香娘傳」,『善山邑誌』卷二, ‘善山人物條’. |
향랑의 자결 이유가 문맥상으로는 제4구에서와 같이 자신의 “한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서[一身靡托]”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의탁할 곳이 없는 고단한 신세가 되어버린 탓에 결국은 향랑이 죽음을 택하게 된 셈이지만 그 이면에는 개가 금지에 대한 규범 등을 통해 향랑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일체의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 또한 근본적 원인이 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요컨대, 향랑이 결국에 가서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는 자신의 몸을 어느 곳에서도 의지할 데가 없었다는 점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새로운 선택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있었던 규범과 그로 인해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가 커다란 작용을 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어지는 3장에서는 이 같은 향랑의 사건을 수용한 한시에서는 당대의 가족제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한시 작품을 통해 살펴보겠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