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닮은꼴
예종(睿宗)은 남이의 기묘한 반란을 진압한 것을 거의 유일한 치적으로 남기고 재위 1년을 겨우 넘긴 1469년 11월에 병으로 죽었다. 그토록 강력했던 아버지 시절의 왕권을 크게 약화시킨 게 또 다른 ‘치적’이라 할까? 어차피 그가 살아 있을 때도 실제 국정은 어머니가 맡았으니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도 그녀의 몫이다. 예종의 아들이 너무 어려 즉위할 수 없다고 본 정희왕후는 예종의 형인 덕종의 열세 살짜리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데, 모두 자신의 아들이고 손자이니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예종의 조카가 왕위를 이은 셈인데, 아직도 부자 승계의 원칙이 확고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렇게 해서 조선의 9대 왕인 성종(成宗, 1457~94, 재위 1469~94)이 즉위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7년간 할머니의 섭정이 지속되다가 1476년에 친정(親政)을 시작한 성종의 치세는 한 마디로 세종 시대의 복사판이라 말할 수 있다. 세종이 그랬듯이 성종도 왕권과 신권을 잘 조율해가며 자칫 혼란으로 치달을 수 있는 정국을 매끄럽게 이끌었다. 두 임금의 닮은꼴은 아마 전 왕들(태종과 세조)이 제2ㆍ제3의 건국자로서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며 국가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켰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뿌리가 제거되지 않는 한 평화기에도 모순은 숙성한다. 성종도 세종처럼 자신의 치세까지는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했으나, 오히려 그 시기에 더욱 익고 자란 모순은 결국 후임자의 치세에 사건으로 터져나오게 된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두 임금을 성군(聖君)이나 현군(賢君)으로 부를 수 없는 이유다.
일단 토지 문제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으므로 정치 일선에 나서는 성종은 그런 대로 홀가분한 기분이다. 그것은 친정에 나서기 전인 1470년에 시행된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이름 그대로 관에서 거두어 관에서 배급한다는 제도의 덕분이다. 앞서 보았듯이 세조의 직전법은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아무리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收租權)을 허용한다고 목이 터지도록 외쳐봤자 한 번 제 손에 들어온 토지를 순진하게 반납하는 자는 없을뿐더러 공신이 늘면서 세습 토지도 자꾸 늘어나기만 한다. 사실 수조권 개념을 유지하는 한 유일한 대책은 왕조를 교체하거나 아니면 왕조 교체나 다름없는 쿠데타 정권이 계속 들어서는 것밖에 없다. 그래야만 새 정치 세력이 이전의 모든 토지 소유를 무효화하고 새로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관수관급제는 모든 문제의 근원인 수조권을 폐기한다는, 획기적이면서도 불가피한 발상을 바탕으로 한다. 알다시피 과전법(科田法)에서는 관리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토지의 생산물을 수취하는 방식으로 봉급을 받았다. 그러나 새 제도는 모든 토지 생산물을 일단 관에서 수납한 다음 관리에게는 녹봉을 지급하는 방식을 채택한다(물론 그 녹봉은 화폐가 아니라 현물이다). 얼핏 보면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알고 보면 사뭇 다르다. 우선 정해진 수조율 이상으로 과도하게 착취하던 관행을 없애 백성들의 원성을 줄인 게 당장의 효과다. 더 큰 성과는 직전법(職田法)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과전법(科田法)의 문제점을 시정했다는 점이다. 현직에서 물러난 관리에게는 아예 녹봉을 지급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과거처럼 국가가 전직 관리의 토지를 반납받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국가에서 모든 관리의 봉급을 직접 관장하게 된 덕분에 정부의 위신과 권위가 높아진 것은 보너스 효과다.
구분 | 과전법(科田法) | 직전법(職田法) |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
시기 | 고려 말 공양왕 | 조선 세조 | 조선 성종 |
목적 | 사대부의 경제 기반 마련 | 지급할 토지의 부족 해결 | 국가의 토지 지배권 강화 |
지급대상 | 전직, 현직 관리 | 현직 관리 | 국가의 수조권 대행 |
결과 | 토지 제도의 모순 해소 | 농장 확대의 계기 | 토지 사유화 현상 진전 |
이래저래 성종은 할머니가 고마웠을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왕위를 준 데다가 토지제도의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더욱이 할머니가 섭정을 맡은 기간 동안 그는 왕이 되기 위한 ‘속성 특별과외’를 통해 세종에 버금가는 문화군주로서의 자질을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친정을 시작하면서 그의 자질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우선 세조 때 중지된 경연을 부활시켜 학자들과의 토론을 즐기며 실력을 과시한 그는 도서관에 불과했던 홍문관(弘文館)에 집현전의 직제를 도입해 본격적인 정책 토론기관으로 탈바꿈시키는 한편, 나아가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를 적극적으로 육성해 유교 정치의 화려한 부활을 부르짖는다. 불안한 정국의 안정을 타개하기 위해서, 또 비정상적으로 즉위한 데 따르는 왕권을 위해서도 유교 이념은 만병통치약이다. 이런 성종의 처지는 50년 전의 세종과 다를 바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마치 증조부와의 닮은꼴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성종의 치세에 간행된 서적들 중에는 세종 때부터 편찬이 시작된 것들이 유독 많다. 세종 때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시작했던 인문지리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노사신이 완성했고, 최항이 시작했던 역사서 『동국통감(東國通鑑)』은 서거정(徐居正, 1420~88)이 완성했다【여기서 문헌의 ‘지은이’에 관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시험문제 중에서도 가장 악의적(?)이며 유치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어떤 문헌의 지은이를 대라는 문제다. 하지만 여기서도 보듯이 『동국통감』의 지은이는 최항이기도 하고 서거정이기도 하다. 더 헷갈리는 것은 최항이나 서거정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문헌들, 나아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문헌들은 문인의 ‘문집’ 같은 것을 빼면 거의 모두가 ‘집단창작물’이다(지금까지 언급한 문헌들도 그랬고 앞으로 언급할 문헌들도 편의상 지은이를 소개하겠지만 실상은 여러 사람의 공동 저작이라 보면 된다). 물론 핵심 편찬자는 있지만 특정한 지은이는 없다. 서양의 경우에는 개인 저작의 역사가 무척 오래지만, 동양의 경우에는 전통적으로 문헌을 특정한 개인이 저술하는 경우가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문헌을 간행하는 목적이 독자가 ‘읽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위정자가 ‘참고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교 이념의 꽃이라 할 예법 교과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도 세종과 세조의 시대를 거쳐 진행되어온 작업이 성종 때 강희맹(姜希孟, 1424~83)과 신숙주의 손으로 마무리되었다. 성종 때의 독창적인 문헌 작업이라면 1493년에 성현(成俔, 1439~1504)이 편찬한 『악학궤범』 정도다(여기에는 유자광도 거들었다).
▲ 세종의 복사판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안정기였다는 점에서 성종의 치세는 여러 가지로 세종 때와 닮은꼴이다. 그런 점을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사실은 왕성한 출판 활동이다. 사진은 성종 때 간행된 대표적인 문헌들인 역사서 『동국통감』(위쪽)과 예악서 『악학궤범』(아래쪽)이다.
또한 북변을 침략하는 여진을 내몰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까지 북진을 시도한 것도 세종과의 닮은꼴이다. 이미 만주 지역의 판도도 여러 민족으로 분화돼 있어 여진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아우르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건주여진(建州女眞) 또는 야인(野人)이라 불렀다(建州란 중국 측에서 랴오둥과 만주를 가리키던 이름인데, 정작 중국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데도 마치 중국의 주현인 것처럼 불렀으니 대단한 중국인들이다). 6진과 4군으로 압박전술을 가한 세종과 달리 세조는 4군을 철폐하고 여진에 대해 회유책을 썼지만, 세종을 추종한 성종이 어떻게 나갈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미 이시애의 난이 진압된 직후 명나라의 제안으로 양국이 합동 토벌작전을 전개한 바 있었으나(어유소가 강순처럼 남이의 사건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토벌전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성종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1479년 윤필상(尹弼商, 1427~1504)을 보내 건주여진의 본거지를 쳤고 12년 뒤에는 허종(許琮, 1434~94)을 보내 두만강쪽 변경을 다지게 했다.
우상을 추종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우상의 단점마저 본받는다면 문제다. 세종은 만년에 신병으로 고생하느라 국정을 돌보지 못했지만, 자신의 치적에 지나치게 흡족해한 성종은 집권 후기에 들어 유흥과 오락에 빠져든다(영웅은 호색이라 했던가? 유달리 여색을 탐한 데서도 성종은 세종과 닮았다. 그는 최소한 열두 아내에게서 최소한 스물일곱 명의 자녀를 낳아 이 부문에서 세종과 함께 조선 국왕들 중 톱클래스에 속한다). 그에 따라 사회의 기강도 해이해지면서 퇴폐 풍조가 만연하고 공직 사회가 부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그런 왕실의 허점을 틈타 사대부(士大夫) 세력이 점차 정국의 운영권을 틀어쥐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성종이 끝까지 직무에 성실한 군주였다 해도 어차피 문제는 발생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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