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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문체반정과 열하일기 정리 고미숙『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10년, 109~145쪽 1. 문체반정의 전개 1784년 - 정조, 명청 문집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다 명나라와 청나라 이래의 문장은 많이 험하고 괴상하며 가시가 돋쳐 신랄함이 많아 나는 보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지금 사람은 명청인의 문집 보길 좋아하니, 어떠한 재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어찌 또한 문장의 맛이 있으나 내가 그것을 맛볼 수가 없는 건가?明淸以來, 文章多險怪尖酸, 予不欲觀. 今人好看明淸人文集, 不知何所味也. 豈亦有味, 而予不能味之耶? -『弘齋全書』 161 1. 정조의 눈에 소품체, 소설 등의 문체가 들어가 회의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행함. 2. ‘내가 그것을 맛볼 수가 없는 건가?’라는 말..
24. 김만덕 이야기를 통해 사람평가에 대해 생각하다 김만덕이 갑인흉년에 제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줬다는 훈훈한 이야기는 굳이 소문내려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입을 타고 금세 퍼졌다.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정조는 매우 흐뭇했으리라. 그래서 그녀에게 상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걸 거부한다. 어찌 보면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자신은 상을 받기 위해, 기림을 얻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 했는데 상을 받게 되면 자신의 진심이 훼손될 것을 알기에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 흉년에 제주민들에게 양곡을 구입하여 그대로 나누어준다. 만덕,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인물로 기려지다 그래서 상을 주는 대신 소원을 말하라고 하니 만덕은 “달리 원하..
3. 의주로에 경성감옥이 만들어진 이유 그렇다면 일본은 형무소를 왜 한양으로 들어서는 의주로의 초입길에 만든 것일까? ▲ 서대문 형무소가 만들어질 당시의 모습. 서대문 형무소는 왜 의주로에 만들어졌나? 일본은 청나라를 향해 시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의 사신이 들어오던 길목에 버젓이 감옥을 만들어 놓고 “청나라 너희들 이젠 조선에 대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지마!”라고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고 있으니, 연암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 황제가 왜 열하로 피서를 떠났는지 밝힌 대목과 정조의 능행(陵幸) 장면이 떠올랐다. 연암은 삼종형(三從兄)을 따라 황제 고희연의 축하사절단 자격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몇날 며칠을 고생한 끝에 북경에 도착했지만, 황..
정조正租: 1752(영조 28)~1800(정조 24) 조선의 22대 왕으로 호(號)는 홍재(弘齋)다. 1. 1794년에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문풍(文風) 개혁론을 일으킴. 2. 학문적으로 육경(六經)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하였음. 3. 예론(禮論)에 있어 ‘임금의 예는 선비와 평민과는 다르다[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해 왕권 우위의 사고를 지님. 4.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實學派)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北學派) 등 여러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문풍을 진작시켜 나감. 5. 문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 중인(中人), 중심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적으로 지원함. 패관잡기와 소품체에 대해열하일기에 대한 비판패관잡기에 대해 내린 하교동악ㆍ읍취헌ㆍ석주ㆍ눌재ㆍ삼연의 시 평가박은과 박상의 시 평가어제제증정읍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