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에서 벌인 힘겨루기②
18세기 중반까지 인도에 진출한 영국과 프랑스는 힘이 서로 엇비슷했다. 그러나 한 집의 호주가 둘일 수는 없는 법, 먼저 호적을 정리하자고 한 것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국내에서 통한 중상주의 정책을 해외로 연장하기 위해 1741년에 뒤플렉스(Joseph-François Dupleix, 1697~1763)를 프랑스령 인도의 수도인 퐁디셰리의 지사로 파견했다. 인도에 프랑스 제국을 건설하는 게 그가 받은 지시이자 그의 야망이었으므로 그는 지사 따위에 머물려 하지 않았다. 1746년에 그는 프랑스 함대를 동원해 영국 세력의 근거지인 남인도의 마드라스를 함락했다. 이로써 인도 경영을 놓고 두 나라의 한판 승부가 불가피해졌다.
무대는 남인도의 카르나타카였다. 여기서 영국과 프랑스는 10여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접전을 벌였다. 초기에는 프랑스가 우위를 보였으나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서기 로버트 클라이브 (Robert Clive, 1725~1774)가 이끄는 영국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전황이 결정되었다. 제국주의 시대답게 실력으로 화끈하게 승리한 영국은 상품으로 인도의 단독 최대 주주라는 지위를 얻었다.
물론 인도에 강력한 정치적 중심이 있었더라면 카르나타카 전쟁 자체도 없었을 테지만, 승리한 영국이라 해도 함부로 인도를 지배하려는 욕심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영국은 인도를 정치적으로 복속하려는 의도보다는 무역을 독점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나아가 인도를 발판으로 삼아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려는 의도가 훨씬 강했다. 그런 영국의 소박한 의도를 더욱 키워준 것은 바로 인도인들이었다.
카르나타카 전쟁은 유럽의 두 강대국이 엉뚱한 동방의 나라에 와서 힘을 겨룬 것이지만, 전쟁이 길어지다 보니 자연히 인도인들도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 전쟁에는 수많은 인도인이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 고용되어 용병으로 참전한 터였다. 특히 전장이 된 카르나타카의 태수가 전쟁의 향방에 누구보다 큰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몇 차례 직접 병력을 동원해 전쟁에 참여했는데, 그 과정에서 말로만 듣던 유럽 군대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들의 무력을 빌려 지역의 맞수인 하이데라바드를 물리칠 수 있다면……. 그러나 이것은 카르나타카 태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당연히 하이데라바드도 그럴 속셈이었다.
전쟁 기간 중에 두 나라의 속셈은 현실로 옮겨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카르나타카와 하이데라바드를 돕는 것이 곧 자기 세력의 확장이었으므로 전쟁의 일환으로 두 나라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전쟁이 묘한 양상으로 변하자 점차 남인도 대부분의 나라들도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인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서구 열강을 자기들끼리의 다툼에 끌어들였으니 결과는 뻔했다.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자 영국의 지원을 받은 나라들은 물론이고 프랑스 측에 붙은 나라들도 전부 영국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해버렸다.
▲ 인도의 최대 주주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무찌른 뒤 동인도회사의 서기 클라이브가 무굴 황제에게서 징세권과 재정권을 상징하는 디와니를 받고 있다. 이로써 영국은 일개 기업을 통해 인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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