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②
1945년 12월, 미국의 주선으로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회담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1월에는 양당 간에 정전협상이 체결되었다. 일견 평화가 깃들듯 보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오로지 단독 정권만 염두에 두었을 뿐 협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먼저 배신한 측은 당연히 장제스였다. 1946년 3월에 열린 국민당 중전회(中全會)에서 장제스는 협정을 팽개치고 반공을 가결해버렸다【타고난 반공주의자라는 점에서 장제스는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비슷하다. 같은 세대의 두 사람은 완고한 성품도 비슷하고 지독한 권력욕도 닮았다. 이승만은 중국의 정황과 비슷한 해방 직후의 한반도에서 민족 지도자 김구는 물론 미군정까지도 권하는 좌우 합작을 줄기차게 거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해 결국 뜻을 관철시켰다(단독정부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가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장제스와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 조국의 분단마저도 마다하지 않은 권력의 화신이었다. 그뿐 아니라 분단 이후 집권하고 나서 독재로 일관한 것마저도 아주 잘 어울리는 동류다. 다만 장제스의 대만보다 이승만의 남한이 더 크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승만이 좀 더 성공했다고 할까?】.
하지만 공산당은 장제스의 계획과 상관없이, 또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각지에서 농민들을 사회주의 이념으로 이끌고,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 혁명을 활발히 전개했다. 국민당의 지지층인 지주들은 당연히 아우성을 질렀다.
바야흐로 내전은 출발 신호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도발은 역시 장제스가 먼저였다. 1946년 6월에 그는 공산당의 근거지인 해방구들을 향해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본이 물러갔으므로 이제는 앞뒤 잴 것 없이 무조건 전면전이다. 당시 국부군은 총 병력 430만 명에 미국의 군수물자와 미군의 지원까지 등에 업었으니, 120만 명의 병력에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구식 무기로 무장한 홍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초반에는 예상대로 국민당의 압승지세였다. 국부군은 상하이와 난징 등 강남부터 착실하게 땅따먹기를 시작하더니 1947년 3월에는 마침내 홍군의 수도라 할 산시의 옌안까지 손에 넣었다.
옌안은 12년 전 대장정의 최종 기착지이자 새 근거지였으니 그곳을 잃은 홍군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지만 그것은 홍군의 전략이었다. 모든 면에서 열세인 홍군은 처음부터 전략적 후퇴를 거듭했다. 전면전을 피하고 유격전으로 임했을 뿐 아니라 도시를 포기하고 농촌을 확보했다. 국부군은 전투마다 승리했으나,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그랬듯이 도시와 교통로만 점령하고 병참선이 늘어지면서 병력이 분산되었다. 게다가 점령지마다 장제스 특유의 독재와 억압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지역 민중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다. 그 반면 홍군은 점령지마다 농민들을 고무하고 입대시켜 오히려 패배할수록 병력이 증가했다.
▲ 연안에 온 특사 큰 전쟁이 끝났는데도 중국에서 내전이 재개될 조짐이 보이자 1946년 1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 조지 마셜이 흥군 근거지인 옌안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장제스는 미국이 추선한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내전에 돌입했다. 사진은 왼쪽부터 저우언라이, 마셜, 주더, 그리고 한 사람 건너뛰어 마오쩌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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