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의 내용
강의를 듣기 전
수학적인 지식은 한 개도 없고 이번에 오면서도 책을 제대로 끝까지 읽고 온 게 아니기에 어떻게 강의 내용이 다가올지 안 다가올지 나도 잘 모르겠다. 과연 여기선 무엇을 알게 되며 어떤 것을 배워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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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훌륭한 연주가가 많아서 친숙한데 수학은 그런 연주가가 없어서 아쉽다.”
지금부터 우리 안의 연주가를 찾기 위한 오리엔테이션.
우리 안의 원초적으로 들어 있는 수학을 발견하는 오리엔테이션.
활동을 통해 수학이 신체화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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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양의 강 건너기’
1. 인간이 가진 자원이 부족하기에 이런 류의 문제가 만들어짐.
2. 9세기부터 계속 문제가 만들어져 나옴.
3.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 시간 절약이 됨. 복잡다단한 문제를 할 때 두 가지 문제를 함께 찾아 해결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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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망과 수학
한국 경력 공부 30분밖에 되지 않기에 오늘은 일본어로 강의를 하겠다.
음악은 늘 접하는데, 수학은 표정도 밝지 못하고 음악은 폭넓게 접하지만 수학은 전문가만 하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 있다.
음악은 작곡가와 연주가가 있는데, 수학은 작곡가만 있기에 음악과는 달리 인식된다. 음악과 수학은 전혀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앞에서 한 수학의 음악화, 수학의 문제해결화는 어찌 보면 수학의 특성을 제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ratio(비율)- 수학과 음악은 마찬가지로 비율이 중요하다. 수학의 연주회는 3시간 동안 마구 얘기하는 것. 오늘은 중간에 통역이 있어 쉴 수 있기 때문에, 통역자에 대한 신뢰가 간다.
비율을 만들려면 단위가 있어야 한다. 거리 면적, 등은 단위인데 이것이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2배’와 같은 측정물이 있어야만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수학의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박노자의 <인드라의 망>처럼 이 세상은 그물로 만들어져 있다. 인드라의 그물엔 보석들이 달려 있는데 그건 빛난다. 그건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기에 빛나는 거지 그 하나가 빛나서가 아니다. 관계 속에서 빛나는 거다. 어디가 어디서 원인이 되어 결과가 되었는지 모르는 게 바로 인드라의 망이다. 이 세상에 근본적인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근본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궤도에 오르면 물을 컴퓨터에 쏟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다른 사람의 컴퓨터를 망가뜨리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왔다 갔다 하느라 쏟게 됐다’고 원인을 찾으려 하고 그 원인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한다. 배상을 했는데, 내가 집중하다 보니 여러분이 너무 재밌게 들어주는 거야, 번역된 책이 재밌는 거야, 그런 식으로 원인을 찾으려면 수많은 원인들이 엮여 들어간 것뿐이다.
원인과 결과의 속에서 나무의 모양 같은 것이 만들어짐. 인드라의 그물망엔 원인 결과가 보이지 않는데, 우리가 흔히 보는 것엔 원인과 결과가 심플하게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인공적으로 누군가가 시작을 정한 거다. 1이란 단위를 정해야만 시작할 수 있고 거리를 정해야만 거리를 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공물 덕분에 그것이 마치 이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느껴져 수학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는 없지만, 이렇게 정하면 어디서 무엇이 잘못 됐는지, 무엇이 잘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인간의 두 가지 지성
1. 글로벌한 세계 속에 인간이 참가하는가?(글로벌, 전체, 막연)
2. 찢어와 정해진 세상 속에서 인간이 시간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어 가는가?(로컬, 부분, 극명)
2살에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에 살며 농구를 했는데, 그때 신체가 어떻게 변해 가는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다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며, 그러다 그게 어디가 맞는지, 틀린지 알지 못해 우울에 빠지게 됐다. 데카르트 책을 읽는 이유도 틀린 부분을 알기 때문에 서서히 고쳐가며 진보해나갈 수 있듯이, 수학도 틀린 부분을 알기에 고쳐 가며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이 두 가지 지성을 어떻게 모두 포괄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모순을 내 안에서 하나로 포괄해가는 과정 속에 만든 책이 바로 『수학하는 신체』다.
수학은 인공물적인 세계이고, 신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인데 그걸 모두 포괄하며 나온 책이 바로 『수학하는 신체』다.
수학은 문화적인 행위다. 아주 강렬한 불변성, 아주 강렬한 보편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성 ‘5+7=12’라는 것을 알면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기에 아주 강렬한 보편성이라 한다. 이건 어느 나라든 어느 사람이든 똑같이 말하기에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친구집의 자녀가 5+7=11이라고 쓰더라. 초등 1학년생은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아이에게 12가 아닌 11이라 해도 목숨을 좌우할만한 아무런 문제도 없다. 우리는 이미 특수한 상황을 만들어 ‘5+7=12’라는 걸 만들어 그게 아니면 안 되는 걸 만들었을 뿐, 그건 절대적인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가 그런 걸 당연히 공부해야 하고, 그게 아니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되며, 학교가 매우 낯설게 보이게 된다.
그건 보편적이지만, 그러려면 특수한 문화적인 실천에 참가해야만 한다. 세금의 분배, 시험의 정답, 순위의 보편화를 당연한 듯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 속에 내몰려야 한다. 특수한 문화적인 실천을 공유해야만 5+7=12임을 알게 되는 건데, 그러다 보니 특수성을 잊고 보편적인 걸로 받아들이게 됐다.
예술을 보면 사람마다 판단하는 기준이 다른데, 수학은 아주 보편적으로 좋은 게 옳은 게 확실히 정해져 있다. 수학의 보편성은 인정하나, 어떻게 보편성이 등장했는지 알아보자는 거다. 거기엔 사회와 문화, 그리고 관계가 작용하고 있다.
인간의 뇌를 문어에게 이식해보면 문어가 문어로 기능할 수 있냐 하면 문어는 죽고 회가 될 거다. ‘인간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의 지성이다. 비고츠키의 학자인 루리야라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에 읽지 못하는 사람을 실험했는데 그때 삼단논법으로 실험했다. 삼단논법 ‘고온다습한 곳에서 벼가 잘 자란다 / 남쪽은 고온다습하다 / 남쪽은 벼가 잘 자라나?’와 ‘북쪽엔 흰곰이 산다 / 북쪽에서 곰을 잡았다 / 곰은 무슨 색인가?’라고 물으니, 벼는 잘 자란다, 내가 잡아봤기에, 무슨 색인지 모른다, 곰을 본 적이 없기에.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서 축구를 하면 지성이 발휘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참여하지 못하는 바보가 된다.
우리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배우는 수학은 매우 특이한 수학일 뿐, 수학사를 배우면 다른 시대엔 다른 수학, 다른 관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와규, 와~ 일본화된 독특화된 것에 와를 붙인다.
근대 수학의 탄생
‘두루미(다리 수 2)와 거북이(다리 수 4) 모두 8마리가 있다. 그러면 다리가 모두 22개다. 그럼 두루미와 거북이는 몇 마리인가?’
옛날엔 이 문제를 가르쳤지만, 지금은 가르치지 않는다. 막상 보면 금방 알 수 있기에 성립될 수 없는 문제라 생각하여 가르치지 않게 함.
어떻게 하면 거북이의 다리를 2개로 만들 수 있는가? 거북이에게 “일어서주겠습니까?”라고 정중히 말한다. 그러면 다리가 2개인 동물이 8마리가 있게 되는 거다. 그러면 다리 개수는 16개이고 22-16=6이기에 거북이는 3마리인 걸 알게 된다. 거북이가 서는 바람에 확실하게 보이는 방법이 있고, 이건 특수한 계산방법이다.
민속자료관이 있는데 예전엔 두부나 콩을 넣는 자료관이 있다, 근대 수학이란 무엇이든 넣을 수 있는 도구를 만들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근대 유럽수학은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수학, 언제든 통용되는 것을 만들자는 거다. 모르는 건 X나 Y로 하자고 만들어 놓아
X+Y=8 / 2X+4Y=22라는 식으로 보편화되는 문제를 만듦. 이건 데카르트가 만든 것임. 보편성, 언제든 계산 가능한 것으로 만듦.
모든 것에 적용 가능한 게 좋은 거다라는 건 근대가 만든 것일 뿐. 특수하고 로컬한 것이 더 재밌다고 하는 게 와산 즉 일본수학이다.
semantics와 syntax
1870년에 일본에 근대화 수학이 들어옴. 1873년부터 와산이 아닌 서양의 수학을 배워야 한다고 발표하나 아라비아숫자(산용수학)로 수학을 가르칠 교사가 없음. 왜 계산이 필요했냐 하면 그건 기록하기 위해서다. 물리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계산을 하더라도 그건 기록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예전엔 주판이나 다른 걸 사용하여 계산을 했는데 이제부턴 숫자가 숫자로 계산하게 됨. 이젠 다른 건 몰라도 수의 운용만 알면 계산을 할 수 있게 됨. 그 전엔 의미와 하나하나의 뜻을 알아야만 했는데 그게 사라진 거다. 의미(semantics)와 문자(syntax)가 분리된 거다. 궁극적으로 컴퓨터가 의미와 문자가 사라진 것의 대표명사다. 그러다 보니 필산을 하다 보면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암묵지). 일본은 이렇게 분리된 역사가 겨우 150년 밖에 되지 않는다.
‘사과 2개에 하나를 더 한다면 3개다’라는 건 의미다.
근데 2+1+3은 문자가 되는 거다. 2-4는 현실적으론 일어날 수 없지만 기호로선 충분히 가능하다.
‘팡세’를 쓴 파스칼 때는 0-2=0 / 2-4=0가 당연하다 생각했다. 파스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의미보단 문자만을 강조하여 (2-4)+4=2라는 걸 알아냄. 의미를 생각하면 2-4=0이어야 하지만, 문자만 강조하면 2-4=-2가 됨. -2와 같은 걸 불가능한 수라고 데카르트는 불렀는데, 이 새로운 수를 발견함으로 인식을 확장했다고 생각함.
워리스라는 사람은 대각선이란 걸 발명했고, 그 사람은 위치의 관념으로 음의 개념을 알아냄. 그래서 데카르트는 불가능한 수지만, 워리스에겐 가능한 수였음. 이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함. 수직선을 발명함으로 의미가 없었던 세계가 의미 있는 세계로 다가옴.
씨멘틱과 씬텍스는 다이내믹한 관계인데, 직선과 평면이란 개념을 도입하므로 의미가 있는 세계가 됨. 19세기에 들어가며 가우스는 평면 속에 살고 있는 숫자를 발명함. -1X-1=1의 의미는 잘 알지 못한다. 3에 -1을 곱한다는 건 180도 돌아가는 거다. -3에 -3을 곱하면 360도 돌아오기에 원래대로 오는 거다. 고등학생들에게 강연을 했는데 그때 “수학에 대한 생각이 360도 바뀌었습니다”라고 하더라. 웃음. 수가 180도 회전이 가능하다면 90도 회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우스의 발상이다. 90도의 가상 수를 놓고 곱하면 바로 수가 나옴. 그러다 보이 루트와 같은 것도 나옴. 90도에 존재하는 수가 있다는 걸 생각하는 순간, 전혀 다른 수학이 등장함. 직선에만 숫자가 있다고 보았으나 평면 어디든 숫자가 있을 수 있다는 19세기에 나옴.
도미와 마구로 중 무엇이 좋나?라고 할 때 랭킹을 메길 수 없다. 그건 대상이 다르니 말이다. 1~10단계를 나누며 등급을 메기는데 그게 아니라 넌 옥수수를 닮았고, 넌 오이를 닮았네라는 평가도 충분히 가능하다.
의미세계에서 씬텍스로 나갔다가, 그러다 의미세계를 부활시키는 게 있었고, 그러다 Hamilton이 새로운 개념을 발전시키며 더 확장되어 감. 현대 수학에서 숫자는 의미가 없는 기호에 불과하다. 의미는 없지만 어떻게 이걸 조작할 수 있는지만 중요하게 됨. 숫자가 의미를 상실하는 데에 컴퓨터의 발전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 보니 무의미한 숫자에 어떤 의미든 부여할 수 있게 됐다. 의미를 담당하지 않는 인공물이 20세기에 달성됨.
씬텍스가 혼자 걸으며, 이것만으로도 다할 수 있게 됨. 컴퓨터로 인간의 마음을 연구해보자는 게 1950년부터 하게 됐고, ‘단기, 장기, 설단’를 보게 됨. 인간을 컴퓨터와 같은 것으로 보고 연구하고 정리하기 시작함. 인공지능으로 인간의 마음을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하게 됨. alan turing 순수한 계산방법을 만든 사람. 컴퓨터로 재현 가능한 인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다는 등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짐.
인공지능이란 컴퓨터로 재현 가능한 인간은 있어라는 것을 비판하며 나온 것이 A.I 발전의 역사임. 앨런 튜닝의 한계는 기호조작에만 신경 썼을 뿐, 인간이 어떤 상황인지, 관계인지를 배제한 것임. 기호는 신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럴 때 기호가 만들어진다는 것에 대해 A.I 연구자들은 머리속에 넣기 시작함. 순수한 계산으로 출발했는데, 여러 한계에 부딪혀 정서 신체, 역사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수학으로 무의미함을 견뎌내는 힘을 기르다
인공지능은 기계를 인간을 모방시키려 하는 건데,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이 기계를 모방하려는 게 더 많았음. 생명체는 상황에 따라 느낌이나 반응이 다르다. 기계는 명령에 따라 하게 되지만, 인간은 그러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이란 수도관 메타포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은 신체적인 접속으로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다(안녕하세요라는 말). 생명체는 5+7을 들으면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거다. 수학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사람은 수학에 지배된 사람이다. 그런 계산은 오랜 훈련을 통해 가능한데, 그러다 보니 무의미한 세계에 더 빠져들게 된다. 인간은 의미를 살아가는 존재인데도 그러지 못하는 거다. 계산을 통해 무의미한 세계를 열어내는데, 무의미한 세계를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인간은 두 가지 측면 무의미함을 견뎌낼 수 있는 힘, 무의미함 속에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섬세함을 가지고 있다. 그 두 가지 동시적인 측면을 끈기 있게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공부와 맞닿은 얘기로 들린다. 한문공부는 의미 있는 텍스트를 읽지만 누구에게도 그게 의미 있는 글로 다가오지 않아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학이 문제가 아니다, 공부가 문제다, 아니 좋은 성적 정해진 답을 얻으려는 그 과정이 문제다)
2. 질의응답
Q
일본의 기적의 계산법이 한국에서도 유행했다. 기계적인 방법으로 수학 달련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A
알고리즘은 반복을 통해서 된다. 그것을 통해 무의미한 것들을 반복하게 되며, 그 속에 의미를 찾게 되는 건 그런 걸 통해 가능하지 않다. 의미에서 씬텍스로 갈 수는 있지만, 씬텍스에서 의미로 가는 건 단절(상상력)이 필요하다.
Q
씬텍스의 세계에서 씨멘틱스로 던지는 것엔 어떤 것이 있는지. 이 두 세계가 서로 주고 받으며 성장해왔다고 보았기에, 그렇다면 무의미의 세계가 의미의 세계로 보내는 메시지는 뭔가?
A
20세기는 캣취볼이 멈춘 건 아니지만, 인공지능과 같은 단독적인 게 만들어졌다. 씬텍스 세계가 독립하면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 그러다 보니 의미가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 예전엔 경험을 쌓아야만 따라갔는데 이젠 대학원생의 수업인데 고등학생도 들을 수 있게 됐다. 씬텍스만 추구하다보니 경험이나 의미는 불필요한 게 됐다. 이론이 만들어지면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10명 뿐이라, 그러다 보니 수학은 매우 협소해졌다. 그러다 『수학하는 신체』를 통해 인간을 위한 학문으로, 의미를 위한 학문으로 가려 하는 거다.
Q
저는 고등학교도 대학도 문과로 선택했다. 수학이 고통스러웠다. 짧은 시간에 더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되는 그런 방향성 때문에 수학을 필요하게 됐다. 이공계 전공자가 아닌데도 수학을 왜 이리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알려줬으면 좋겠다.
A
수학을 양적으로 보는 건 알고리즘이고, 그걸 통해 출세하고 직업을 갖는 거다. 컴퓨터가 만들어지기 전엔 말이다. 수학의 본질은 새로운 개념의 창조다. 자연현상엔 없는 개념을 만들수록 수학은 힘이 있음. 우린 근본적인 수학교육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새로운 개념 맺기다.
Q
수학 연주라는 표현이 감사했다. 수학으로 감동을 전해줘서 고마웠다. 수학도장은 어떻게 운영하는지?
A
문자는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의미의 세계는 천천히 가야 한다. 대학교수는 업적을 내야하고 논문을 내야하기에 인디밴드 스칼라를 만든 거다. 절이 만들어질 때 원하는 사람끼리 만나 하게 되듯, 산을 빌려줄 사람을 수소문하여 우치다 타츠루의 입소문까지 타게 되며 도장이 만들어졌고 8년 정도 하며 지금의 도장이 만들어졌다. 사람이 많아지니 후쿠오카 주인이 안 된다고 하여 지금은 집에서 머물며 하는 방법으로 함.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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