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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朴世堂: 1629(인조 7)~1703(숙종 29) 본문

한문놀이터/인물지도

박세당朴世堂: 1629(인조 7)~1703(숙종 29)

건방진방랑자 2019. 11. 8.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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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朴世堂: 1629(인조 7)~1703(숙종 29)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서계(西溪).

1. 1660(현종 1)에 증광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고, 그 뒤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 등 내외직을 역임함.

2.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왔지만 당쟁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 생활을 포기하고 양주석천동으로 물러남.

3.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맏아들 박태유(朴泰維)와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를 잃자 여러 차례에 걸친 출사 권유에도 불구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씀.

4. 죽을 때까지 여러 관직이 주어졌지만 부임하지 않았고 1702(숙종 28)에는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송시열(宋時烈)을 낮게 평가했다 해서 노론(老論)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되기도 함.

5. 근본 사상에 대해서는 유학의 근본 정신을 추구했다는 견해가 있고, 주자학은 물론 유학 자체에 회의해 노장학(老莊學)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학문의 근본 입장은 당시 통치 이념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에 회의적이었다고 보는 데는 이론이 없다.

6. 박세당은 육경(六經)의 글은 그 생각이 깊고 취지가 심원(深遠)해 본 뜻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후대의 유학자들이 훼손했으므로 이를 바로잡아 공맹(孔孟)의 본지(本旨)를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며 비교적 혁신적 사고를 지녔던 소론파(少論派)와 빈번하게 교류함.

7. 소론의 거두인 윤증을 비롯해 같은 반남박씨로 곤궁할 때 도움을 준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함.

8. 1702(숙종 28)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으며 송시열의 인품이 이경석보다 못하다 새겨 노론계의 자극하게 되었고 김창협ㆍ김창흡 형제를 위시한 김진옥ㆍ종호 등과 성균관 유생 등 180여 명의 상소로 삭탈관직 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되었다가 이탄(李坦이익명(李翼明이인엽(李寅燁) 등 박세당의 문인들의 소청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석천동으로 돌아왔으나 귀환한 지 3개월 만에 죽음.

9. 저서로는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상서(尙書)·시경(詩經)등의 해설서인 사변록(思辨錄), 그리고 도가에 대한 연구서인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1책과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6책이 전한다. 편저로는 농서(農書)색경(穡經)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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