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현도 수장집첩서
孝子之養親也 養其體養其志 左右養無方 如扇枕如懷橘 如兒啼弄雛 如必有酒食 此誰非孝子之孝者 於以見親養之無所不殫其心竭其力也
효자가 어버이를 봉양할 적에는 그 몸을 봉양하고 그 뜻을 봉양하여 온갖 방도를 다해 극진히 봉양하였으니, 예컨대 베개에 부채질을 한 황향(黃香) 2과 귤을 품에 넣은 육적(陸績), 어린아이처럼 울고 새 새끼를 가지고 논 노래자(老萊子)와 반드시 술과 고기를 마련한 증자(曾子) 같은 이는 어느 누군들 효자 중에 효자가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온갖 방도로 그 심력(心力)을 다해 어버이를 봉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近代又有壽序壽詩 蓋皆所以推廣孝思 讚述懿美 侈當時而示後來 使人知慕悅勉勵 以效以法 則此之謂老吾老以及人之老 其爲孝也 不亦盛乎 固未可以彌文餘節而輒少之也
근대에는 또 ‘수서(壽序)’와 ‘수시(壽詩)’가 있으니, 이는 모두 효성을 미루어 넓혀서 아름다운 덕을 찬미하여 당대에 과시하고 후세에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보고 본받아 효도에 힘쓸 줄 알게 한 것이다. 이를 일러 “내 노인을 노인으로 섬겨서 남의 노인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이니, 그 효성이 또한 성대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한갓 여사인 시문(詩文)이라 하여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安定羅顯道事親孝 大夫人年高在堂 顯道之致養適志 必得其愷樂者亦至矣 其出而仕縣 入而居家 凡遇令辰喜節 必具殽饌會親友 登堂上壽 旣舞且蹈 又自爲歌章 屬賓客知舊往來 多未造筵而遙和 如尹子仁以下 皆有詩有序 前後聯成卷集 雖余之陋 亦宜在數而獨未及也 晩而顯道責余序其卷 余自見衰惰已甚 不可能 屢辭 顧責之不已 卒無以拒 則略敍其事如此
안정(安定) 나현도(羅顯道)는 어버이를 섬김이 효성스럽다. 대부인(大夫人)이 높은 연세로 북당(北堂)에 계실 적에 현도가 봉양을 지극히 하고 뜻을 잘 받들었으니, 필시 몹시 화락하였을 것이다. 현(縣)에 나아가 벼슬할 때나 집으로 들어와 거처할 때나 길일(吉日)과 명절(名節)을 만나면 그때마다 반드시 음식을 장만하고 붕우를 모아 당에 올라가 축수(祝壽)하였으며, 춤을 추고 나서는 또 스스로 가장(歌章)을 짓고 빈객(賓客)과 지구(知舊) 및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화답을 부탁하였는데,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고 멀리서 화답한 이들도 많았다. 윤자인(尹子仁 윤증(尹拯) ) 이하가 모두 시(詩)와 서(序)를 지어서 전후로 나열하여 권(卷)을 이루었으니, 비루한 나도 의당 그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홀로 빠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뒤늦게 현도가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는데, 내 스스로 몹시 쇠약하고 나태하여 이런 글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누차 사양하였다. 그런데도 굳이 요구해 마지않기에 끝내 거절하지 못한 나머지 이상과 같이 그 일을 대략 서술한다.
覽者於諸公之作而知顯道之志 有以感發於其所同 則夫其助世敎也豈淺淺哉 系之詩云 -『西溪先生集』 卷之八
이 집첩(集帖)을 보는 사람들이 제공(諸公)의 시문을 통해 현도의 뜻을 깨달아 다 같이 효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마음을 감발한다면 세교(世敎)에 도움이 되는 것이 어찌 적겠는가. 이어서 시를 쓰노라.
寸草勞心豈可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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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山日色易低斜 |
서산의 해는 쉽게 저무는구나 |
問君早誦詩三百 |
묻노니 그대 일찍 《시경》을 읽었는가 |
獨喜南陔與白華 |
安定堂中賀百年 |
안정이 당중에서 백수를 하례하니 |
諸公篇什早流傳 |
제공의 시편이 일찍부터 유전되었네 |
想知此事多欣慕 |
이 일을 흔모하는 이 많을 줄 알겠는데 |
窮苦何人獨漼然 |
인용
- 羅顯道: 현도는 나양좌羅良佐(1638 ~ 1710)의 자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明村이며, 본관은 安定이다. 저서로 《명촌잡록(明村雜錄)》이 있다. [본문으로]
- 후한(後漢)의 황향이 9세에 어머니를 잃고 홀로 아버지를 봉양하였는데, 여름에는 베개와 자리에 부채질을 하여 시원하게 해 드리고 겨울에는 몸으로 이불을 따뜻하게 해 드렸다고 한다. 《東觀漢記 卷19 黃香傳》 [본문으로]
- 효도하고픈 자식의 마음을 말한다. 당(唐)나라 시인 맹교(孟郊)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유자음(遊子吟)에 “한 치의 풀 같은 자식의 마음으로 삼춘의 햇살 같은 어머니 사랑에 보답하기 어려워라.〔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남해는 효자가 서로 부모를 봉양하도록 경계하는 것을 주제로 한 시라고 하는데,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그 편명만 보이고 가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진(晉)나라 속석(束晳)이 이러한 가사가 일실(逸失)된 시들을 보충하여 지은 보망시(補亡詩)에 “저 남쪽 비탈을 따라서 그 난초를 캐도다. 집 뜰을 돌아보며 어버이 그리노니, 마음이 편안할 겨를이 없어라.〔循彼南陔 言采其蘭 眷戀庭闈 心不遑安〕” 하였는데, 이선(李善)의 주(註)에 “비탈을 따라 향초(香草)를 캐는 것은 부모를 공양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백화 또한 《시경》 소아에 그 편명만 보이고 가사는 전해지지 않는데, 연례(燕禮)에 연주하던 생시(笙詩)라고 한다. [본문으로]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서 순(舜) 임금이 부모에게 순(順)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궁한 사람이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여겼는데, 여기에서는 아마 작자 자신을 말한 듯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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