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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술, 백악시단의 진시연구 - Ⅴ. 진시의 시사적 의의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김형술, 백악시단의 진시연구 - Ⅴ. 진시의 시사적 의의

건방진방랑자 2019. 12. 2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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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시(眞詩)의 시사적(詩史的) 의의

 

 

백악시단의 진시는 조선후기 한시사의 전개 속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성취를 일구어냈다. 먼저, 백악시단은 성리철학의 천기(天機) 개념을 시론으로 변용시킴으로써 복고 일색의 시단에 신시(新詩) 창작의 길을 개척하였다. 백악시단의 천기론은 대상에 오묘하게 발현되는 천기와 조우하여 천리를 체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 까닭에 시적 대상은 흥취나 비애와 같은 주관적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종속물이 아니라 물() 자체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그들에게 대상[]은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 대상이 아니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탐구대상으로 심화되었다. 시적 대상[]의 위상이 이렇게 설정되면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대상을 통해 발현되는 천기와 조우하고 그것을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들이 숱한 위험을 무릅써가며 명승의 기경(奇景)을 찾고, 바보처럼 앉아서 관조의 삼매에 들었던 것은 바로 대상의 진면목[天機]과 조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백악시단의 진시는 시적 대상[]을 이지적이면서도 심미적인 활물(活物)로 되살려냈다. 그들의 산수시는 흥취 위주의 전대 산수시를 넘어 손에 생생한 형사(形似)와 심원한 신사(神似) 양 측면에서 빼어난 성취를 이루었다. 또한 대상[]이 지닌 의미를 중시하고 그것과의 교감을 강조하는 그들의 시론은 시적 소재의 확대를 가져왔다. 조정만이 안경을 형상화하며 노년의 게을러진 공부를 경계하고, 김창업이 배추를 형상화하며 열심히 일한 보람을 생동감 있게 전한 시편들은 그 예시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완물상지의 물()을 궁리(窮理)의 매개물로 전화시킨 백악시단의 천기론은 후대로 내려가면서 시 창작에 있어 물성(物性)을 더욱 중시하며 다채로운 형상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한편, 천기론은 대상의 천기(天機)와 조우하기 위해서 주체의 천기(天機)를 중시하였다. 이때의 천기(天機)는 하늘이 품부해준 본래적 인성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검속함이 없는 방달(放達)이 아니라, 욕망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수양된 인격을 의미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자유로운 정신을 발산하는 것이지만,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백악시단은 수양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수양된 마음은 마치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을 띠었다. 이렇게 천진난만해진 작가는 자신의 일상과 삶에 대해 가식을 버리고 더욱 진솔한 형상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이 웃음을 형상화한 시편들은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들의 웃음은 상대에 대한 신뢰와 배려가 깔린 웃음이었다. 이렇듯 백악시단은 자칫 비근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웃음을 인간내음 나는 따뜻한 감정으로 승화시켜 시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는 시적 정감을 확대한 것으로, 이러한 웃음은 조선후기 문학적 형상화에 널리 활용되었다.

 

백악시단이 이끈 의미 있는 변화 가운데 주목할 것은 시작(詩作)의 위상을 제고하였다는 점이다.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은 시 창작을 교양의 수준에서 사고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상은 시경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시도(詩道)를 진작하고 상대적으로 공소한 시학(詩學)을 도학(道學)의 수준까지 올리는 것이었다. 김창흡은 졸수재 조성기와 시도(詩道) 논쟁을 통해 조선에서 시도(詩道)가 행해지지 않은 것은 단순 교양이나 음영 수준을 넘지 못하고 철저한 시학 연구를 통해 시도(詩道)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였다若在我朝詩道之統, 盖難言哉. 雖然上下數百年, 亦豈無聡明才慧近於本色者? 而道之不行, 常由於不明故跡. 其童習而老熟之者, 大抵撝其科習之餘力, 惟副急媚俗之爲快, 故拗險韻者謂之上品’, 妥硬語者謂之能品’, 善諧謎者謂之妙品’, 詳纍列者謂之洪品’, 應速者謂之神品’,

多者謂之雄品’, 粉餙者謂之佳品’, 飣餖者謂之瓌品’, 所以鼔唱而相誇詡, 如斯而已. 忽不知詩之爲物本自何來, 亦不知己之爲業亦果何事, 而然且曰詩而詩而’, 詩之運厄, 於是乎極矣. -金昌翕, 三淵集拾遺15 與拙修齋趙公聖期. 그러면서 시인이란 이름이 세워진지 오래지만 시인(詩人)의 임무는 전문가에게로 귀속되어야 한다[詩人之名立已久矣, 詩人之任, 歸乎專矣. -金昌翕, 三淵集拾遺15 與拙修齋趙公聖期].”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성리학적 천기론을 문학론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시는 우주의 조화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대단히 고원한 경지로 상승되었다. 이하곤은 역대에 숱한 권력가와 부자들이 있었지만 대개는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데, 빼어난 시인은 그 작품을 통해 천년 뒤에도 기림을 받는다며當其世, 公卿將相富貴燀爀者何限? 而其人者名姓皆已磨滅無存, 與草木同歸乎腐朽澌盡. 而獨孟陳輩, 其文章若日星之昭灼, 至今照人耳目, 故夫誦其詩讀其辭者, 無不想像興慕於千載之下. 此與富貴燀爀於一時者何如哉? -李夏坤, 頭陀草15 送洪道長之蔚山序 시 창작의 가치를 높이기도 하였다. 김창협과 김창흡이 제시한 작시의 지향과 이상은 백악시단의 문인들로 하여금 열정적인 시 학습과 창작에 몰두하게 하였다. ‘목숨을 거는 듯이 사력(肆力)을 다하고’, ‘일상의 모든 것이 시였다고 한 신정하의 기록이나敬所之所與共爲詩者, 顧在於余, 方其發憤肆力, 捨命以爲也. 呻吟點染, 上下角逐, 以窮日夜, 甚至於酒鎗琴匣, 無一日而非詩會也, 眉毫口吻, 無一物而非詩態也. 其盈而溢則速而爲李供奉之一斗百篇, 其矜而擇則淹而爲陳無己之三年五字, 方吾兩人之得意而樂也, 不知夫聲名利祿之爲何物, 得喪欣戚之爲何事, 而其詩亦日月化矣. -申靖夏, 恕菴集10 白淵子詩藁序 시를 품평 받고자 하루에 네 번이나 시를 보내온 신정하를 보면서 세상에 매이지 않는 방외인의 풍치가 있다며 좋아한 김시민의 모습詩與札一日三度狎至, 此已足聳人. 况五紙瓊篇翩翩落地, 鏗然有金石聲, 雪屋襟懷百分增淸, 夜坐遂不能寐矣. 深宵發書, 驚我山扉, 雖云身在絆縶, 其所爲則脫然方外人風致事. 可喜可喜. -金時敏, 東圃集7 與申正甫은 그들의 시에 대한 열정을 증언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태관, 이병연과 같은 사대부 전문 시인이 등장하였다.

 

김창흡은 시인 박태관을 묘사하면서 자신보다 시와 산수에 미쳐서 천일대(天一臺)에서 아들이 죽었다는 소리에도 시 짓기를 그만 두지 못했다고 하였다自余友朴士賓相得懽甚, 兩忘所趨, 誠意氣韻味之有合也. 余於一世, 獨以狂迂自可, 而士賓則殆過之. 蓋不以功名熱中, 不以家累掛眉, 所嗜者哦詩, 所務者浪游, 意有所出, 雖瀛嶠朗岳之遐, 九淵百潭之邃, 焂忽無礙到, 或累月淹留, 嘗於天一臺, 聞其殤慘, 猶不廢嘯詠, 施施其返也, 擧其迂狀, 類多如此. -金昌翕, 三淵集14 朴士賓內室辛孺人挽. 이병연은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만수의 시를 창작했다고 하니槎川先生以詩擅天下大名. 錫儆幸及乎晩歲而爲役, 得窺詩草. 可三萬餘篇, 新警而雄渾, 盖亦幾於神化. -安錫儆, 霅橋集5 論槎川遺集事贈柳生約行中 그의 일생이 곧 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의 삶은 사천옹의 시골(詩骨)은 흠하나 없는 옥과 같아서, 머리털 하나 수염 하나가 모두 시라네[槎翁詩骨玉無玼, 一髮一毛摠是詩].”沙苑酬唱錄』 「人有嘲吾浪耽詩者作詩解之라며 시의 화신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신정하는 이병연의 작시(作詩) 삼매(三昧)의 모습을 배배 말아 올린 수염이 끊어지는 줄도 모르고 시상에 몰입하는 모습, 수십 일 동안 문을 닫고서 창작에 몰두하는 모습, 그 결과 상자에 시고(詩稿)는 넘쳐났지만 수염은 모두 끊어지고 만 모습 등으로 전하였는데一源之於詩, 好沉思苦吟, 每就一句, 必撚斷三四根髯子, 然後乃已. 以故詩絶工, 而髯苦不能長. 嘗閉戶苦吟, 數旬出, 而鬚髭皆短, 見之者不待叩之一源, 而知其詩之盈篋矣. 故余爲一源有詩曰欲知別後詩多少, 試向鬚髭檢密疎’, 此盖記實也. -申靖夏, 恕菴集12 李一源華陰詩錄跋 이러한 이병연의 모습은 시를 교양으로 사고하는 이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모습이다. 또 홍낙순은 80세의 나이에도 책상에 운서 한 권을 두고 과거시험 준비하듯 창작에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던 이병연의 모습을 증언하기도 하였다余嘗謁公於嶽下, 時公已大耋, 白髮丹頰, 披鶴氅, 聽松風, 望之如仙. 案上置韵書一卷, 吟哦佔畢, 如少年課程者. 時雨滴芭蕉, 公擊節朗咏, 興發眉宇, 老而好之如此,則其少時可知也. -槎川詩抄』 「槎川詩抄跋[洪樂純].

 

전문시인이었던 이병연은 자신의 시를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안석경이 주옥같은 작품들이 간행의 어려움으로 산실될 것을 우려하여 송나라 진사도(陳師道)가 그랬듯 스스로 미리 산정해 둘 것을 청하자, 이병연은 부모 마음에 미운 자식 고운 자식이 없듯이자기 작품을 임의로 산정할 수 없다며 자신의 창작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이기도 하였다人謂先生之蓄其詩也, 佳惡並取, 不勝其繁, 鋟而傳之者, 十可去其六七在, 錫儆亦以爲然, 而嘗微請於先生矣. ‘后山自選其詩, 不滿千首, 使來者無敢更刪, 恐爲可法.’ 先生曰: ‘后山異於人乎哉! 人不能自選其詩.’ 盖謂始爲之 勞者, 雖下而惜之, 得之容易者, 雖美而忽之, 取舍容有所不當. 譬之父母之心, 莫非子也. 姸醜皆可愛, 則取舍又有所不忍故也. -安錫儆, 霅橋集5 論槎川遺集事贈柳生約行中.

 

자신의 시를 작품으로 여겼던 이병연은 정선의 그림과 자신의 시를 합하여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을 만들기도 하였다.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은 이병연과 정선이 금강산을 함께 유람하면서 이병연은 산수시를, 정선은 산수화를 그린 뒤 성첩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에 있는 이병연의 시는 일반 제화시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러한 특별한 시화첩의 탄생은 정선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자신의 시를 작품으로 인식한 이병연은 한중 문학 교류에 있어서도 인상적인 시도를 하였다. 이병연은 자신의 시를 직접 선발한 뒤 사행단을 통해 중국 문인의 품평을 직접 구하였다. 이병연의 시가 중국 문인에 의해 품평을 받았던 사실은 사천시초(槎川詩抄)발문에 나오는 홍낙순의 글江南文士見之, 歎曰, 諷之大雅, 出唐入宋, 明以後無論也. -槎川詩抄』 「槎川詩抄跋[洪樂純]靑莊館全書에 기록된 이덕무의 글槎川嘗送其詩于中國, 評批而來. 趙后溪裕壽, 送一絶求見曰: ‘中州集不附高麗, 未遠搜羅恨裕之. 聞道東詩初入選, 後金詞伯更爲誰.’ -李德懋, 靑莊館全書35淸脾錄·4」「槎川詩入中國 등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서명 미상의 필사본 시선집을 통해 산동인(山東人) 위정희(魏廷喜)라는 구체적인 인물과 비평의 구체적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이에 대해서는 졸고, 자료소개: 서명 미상 필사본 시선집의 자료적 가치, 국문학연구21, 2010를 참조할 것.. 조선 문사와 중국 문사 간의 문학 교유는 대체로 중국 사신의 요구에 의해서 조선의 문인이 조선의 시를 선발하여 중국 문인에게 전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병연과 위정희 간에 이루어진 비평 교유는 조선의 문인이 직접 자신의 시를 모아 중국 문인에게 보인 아주 이른 시기의 것이다. 허균이 조선에 사신 온 주지번(朱之蕃)에게 자신의 누이 난설헌(蘭雪軒)의 시를 모아 전한 이래 후사가(後四家)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 나오기까지 조선 문인들에 의한 능동적 비평 교유는 쉽게 발견할 수 없다. 이병연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시를 모아 사신단을 통해 중국 문인들에게 알리려 했던 행위는 이런 점에서 의의가 남다른 것이다. 이병연의 이러한 시도 역시 시에 대한 자부와 작가의식의 소산이다. 또한 이병연과 위정희의 비평 교유는 후사가(後四家)를 비롯한 후배 문인들에게 하나의 모범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병연의 시가 중국으로 소개된 것에 대해 주목하고 이를 기사화한 인물이 바로 이덕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렇듯 이병연은 전문작가로서의 의식을 바탕으로 시와 그림이 교섭하는 양상에서도,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조청(朝淸) 비평 교유에서도 시대를 선도하는 실천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또한 백악시단의 작시(作詩)에 대한 남다른 의미부여와 열정적인 창작의 모습은 후배 문인들에게 난만한 풍류로 인식되었다槎川之時, 畵則趙觀我齋榮祏·鄭謙齋敾, 俱居白岳下, 文采風流, 輝暎一時. -李德懋, 靑莊館全書32淸脾錄·1」「李槎川.

 

백악시단의 이러한 성취들은 당대 문인으로부터 18세기 후반에 이르기 많은 문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들의 성취에 대한 공감은 18세기 이후 편찬된 각종 시선집(詩選集)에서 뚜렷하게 감지된다. 민백순(閔百順)대동시선(大東詩選), 5210)기아(箕雅)이후의 작가들까지 망라하여 청조 문인들에게 조선 시단의 역량을 선보일 의도로 제작된 시선집인데대동시선(大東詩選)의 편찬 경위와 과정은 김남기의 해제(解題)』 『(奎章閣資料叢書)大東詩選, 2001에 상세하다. 홍대용은 조선 시단의 현황에 관심을 가지는 반정균을 위해 기아이후의 작가들까지 보입(補入)한 새로운 시선집을 구상하였다. 그러면서 부친의 벗이었던 민백순과 이 일을 함께 진행하여 해동시선(海東詩選)을 편차하였다. 이후 해동시선(海東詩選)은 약간의 증산(增刪)을 거쳐 대동시선(大東詩選)으로 간행되었다. 홍대용은 해동시선발(海東詩選跋), 담헌서(湛軒書내집(內集)3에서 조선시단의 실상과 역량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민백순의 말을 인용하였다. “丹丘先生閔順之氏, 父友也. 適自灑江來, 聞余北行與中國高士交, 叩其事甚悉. 及聞蘭公意, 乃奮然曰: ‘詩固非東國所長, 而自前華人或有采者, 是不鄙夷我也. 但爲疆域所拘, 典籍不相通, 其所采者在東國未必爲精選, 而乃謂東國之詩如斯而止, 則東人之恥也. 且蘭公之意甚勤, 而子之所欲應者甚誠. 余豈不樂爲之助焉?’”, 전체 250여 명의 작가, 1829수의 시 가운데 김창협의 시 119, 김창흡의 시 235, 김창업의 시 24, 김시보의 시 56, 홍세태의 시 50, 이병연의 시 95수가 실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김남기, 「『대동시선(大東詩選)해제(解題),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1, 23면 참조.. 이는 백악시단의 주요 문인들의 시적 성취가 후배 문인들에게 어떤 위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김창협과 김창흡의 만시와 증별시를 모은 농연만별(農淵挽別), 7300김창협의 만시 65, 증별시 50수와 김창흡의 만시 200, 증별시 46수가 실려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남기, 삼연 김창흡의 시문학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153면 참조.이나, 김창흡의 시 50수와 김창흡의 시 100수를 모아 편찬한 농연시선(農淵詩選)淵詩, 世每以偏見相高下. 余謂二先生詩各極其工, 漢魏以上尙矣. 自其下古今以來論者言詩, 則必曰盛唐, 豈非以其調遠其致澹其思深而其眞見哉! 二先生之爲詩也, 其道亦如是已矣. 不能無初晩粹駁之別, 則猶風變而雅, 雅變而頌, 頌變而騷. 孔子曰: ‘先進於禮樂野人也, 後進於禮樂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 此選所以作也. 農巖詩, 五十首; 三淵詩, 一 百首. -兪漢雋, 自著19 農淵詩選跋, 전체 42인의 742수의 시 가운데 이병연의 시 234수를 선발해 놓은 서명 미상의 필사본 시선집개인 소장의 이 필사본 시선집은 42인의 선발 작가 가운데 이규보와 박은, 이항복을 제외하고는 모두 18세기 문인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병세의식(幷世意識)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 시선집에서 이병연 외에 주목을 요하는 작가는 최성대이다. 시선집에는 최성대의 시 286수가 선발되어 있는데, 이병연과 최성대를 주축으로 시선집을 구성한 점이 이채롭다. 이는 이병연과 최성대의 시적 성취를 당대 최고 수준으로 인정하고 시 감상 및 시 학습의 자료로 활용할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졸고, 서명 미상 필사본 시선집의 자료적 가치, 국문학연구21, 2010 참조. 등의 존재 또한 이들의 시적 성취를 증언해 준다.

 

백악시단의 시적 성취는 당대 정파를 달리한 문인에게도 공감되었다. 그 일례가 이병연과 김이만(金履萬, 1683~1758)의 시교인데, 정치적으로 적대적이었던 노론과 남인 문사의 사귐이라 대단히 이채롭다. 황윤석은 김이만에 대해 김이만은 김창흡의 시법을 존모하여 이병연과 시로 서로 창수하였다고 기록하였다金執義, 嶺南人, 寓居堤川二世, 聖通所師者也. 嘗爲余傳誦金詩, 其自京江行過驪州, 見金退漁子有詩云山中見宰相, 門外有江湖’, 此聯頗佳. 金自號鶴皐, 慕三淵詩法, 與李槎川秉淵相酬唱云. -黃胤錫, 頤齋亂藁10, 176866. 실제로 김이만은 한가(恨歌), 학고집(鶴臯集)3라는 작품에서 자신이 중년 이후에 이병연을 만나게 되었음을 밝힌 뒤, 이병연을 꽥꽥 울어대는 새들 사이의 봉황으로 비유하고 그 봉황에 짝할 사람은 청전(靑田)의 학[자신]뿐이라며 수준 높은 시교를 자부하였고, 이병연이 세상을 떠나자 사림은 적막해졌고 이제는 자신의 시를 품평해주고 잘못된 곳을 고쳐줄 지음(知音)이 없다며 대단히 애석해 하였다我不恨家貧甔石空 又不恨年邁桑楡薄 只恨孤唱少人和 知己于今盡零落 憶曾少與澤南生鞭弭周旋事如昨 江山風月不寂寥 金石宮商相間作 玉樓迢遞錦囊空 碧蕙秋風隕哀壑 中年又得李敬輯 古道不厭相酬酢 空餘散帙逬淚吟 蘭室淸芬已冥漠 晩歲始識槎川翁 遺我玉案報金錯 百鳥啾啾孤鳳鳴 誰其和者靑田鶴 那知一老天不遺 從此詞林便蕭索 秖應流水秘牙絃 誰復成風斲郢堊 空山歲暮雪漫漫 獨自沈吟倚虛閣 -金履萬, 鶴臯集3 恨歌.

 

이병연과 김이만의 깊은 시교는 자연스럽게 시론에 대한 공유로도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김이만은 최고 수준의 시를 천기(天機)가 절로 동하고 천뢰(天籟)가 절로 울려 억지로 하지 않고 조탁하지 않아도 시어를 하나 내면 아려(雅麗)하고 청편(淸便)하여 마치 당나라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夫我東之詩昉於鷄林, 暢於勝國, 逮于聖朝而大闡. 家握連城, 人驅上駟, 卓然爲名家者代固不乏, 而率多左袒於豫章之派, 間有學爲唐詩者, 聲調略能髣髴, 而至於體格興象則瞠乎三舍. 迺若天機自動天籟自鳴, 不矜持不雕琢, 發一語而雅麗淸便, 若自唐人口吻中出者, 求之三百年, 蓋寥寥焉. 澤南其殆庶幾乎. -金履萬, 鶴臯集8 吳澤南集序]”이라 하면서 그런 당시(唐詩)의 성취를 성당의 시는 모두가 정신으로 깨달아[神解] 천득(天得)한 것이라 혼연하게 절로 이루어졌으니 후세의 글자를 꿰맞추며 모의하는 자들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夫詩莫盛於唐, 而律詩又肇於唐. (中略)! 盛唐之詩咸能神解天得, 融然自化, 非後世掇拾摹擬者所可幾及, 而至於杜少陵殆所謂金聲而玉振之者乎! -金履萬, 鶴臯集8 律範序].”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唐詩)의 성취를 성정과 천기의 자연스러운 발현에서 구하던 김창협의 인식과 유사하다. 그리고 김이곤은 시는 식()이 중요하니 구()는 그 다음이다. ()은 마음의 거울이요 구()는 재주의 근간이니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만 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혹 두 가지를 겸전할 수 없다면 그 식()이 부족하고 구()가 넉넉하기보다는 차라리 구()가 부족하고 식()이 넉넉해야 한다[詩貴識, 具次之. 識者, 心之鑑也; 具者, 才之幹也, 之二者不可偏廢. 而或不能兼之, 則與其識不足而具有餘, 毋寧具不足而識有餘. -金履萬, 鶴臯集8 李敬輯遺稿序].”고 하면서 작시 주체가 구비해야 할 역량에 대해 말했는데, 이 또한 작시 주체의 학문과 수양을 중시하던 백악시단의 입장과 공감대를 이룬 모습이다.

 

한편 정제두의 문인으로 알려진 심육(沈錥, 1685~1753)의 문집에 박태관의 시편들이 잘못 편입되어 있는 것樗村遺稿6에는 박태관의 시 12수가 잘못 들어가 있다.도 백악시단의 시가 널리 읽히고 애호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저촌유고(樗村遺稿)6에 들어간 시들은 후대 편집자의 단순한 착오가 아니라는 점이 주목된다. 저촌유고(樗村遺稿)6에 잘못 편입된 박태관의 시와 응재유고(凝齋遺稿)의 원시(原詩)를 비교해보면, 심육의 의도적 변개가 의심되는 부분들이 있다. 가령 박태관의 연작시를 둘로 나누어 새로운 제목을 붙인 것이나박태관의 자서호범주소강한이상림수루정진피수람야도입무동도신숙내환범왕래량일수의부성(自西湖泛舟泝江漢而上臨水樓亭盡被搜覽夜棹入舞童島信宿乃還凡往來兩日隨意賦成), 凝齋遺稿卷上)이라는 시는 모두 세 수로 된 작품인데, 심육은 첫 번째 수와 두 번째 수를 나누어 강정(江亭)숙무동도(宿舞童島)라는 제목을 붙였다., 제목에 성명이 드러난 시는 그 인적 정보를 알 수 없도록 성명을 없앤 것박태관의 도심옥(悼沈鈺)도심(悼沈)으로, 저강별신선경경집(楮江別申善卿慶集)저강별우인(楮江別友人)으로 고친 것들이 그 예가 된다. 등은 의심의 소지가 있다. 심육이 박태관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편취하려 했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박태관의 작품이 널리 읽혔던 정황만은 분명하다 할 수 있다.

 

백악시단의 진시진시론은 후배 문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래 제시된 최성대(崔成大, 1691~1761)의 시론은 이러한 영향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시에 대해 법()으로 구하지 않고 격조와 성률로 구하지 않고 소리·모양·빛깔·윤기로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잡고서 즐기는 것은 바로 천기(天機)입니다. 하늘의 상은 해와 달과 별과 바람과 비와 서리와 이슬이고, 땅의 상은 산천과 초목, 조수와 어별입니다. 누가 이러한 사물을 주조하였고 누가 갈고 닦아 빛나게 하였으며, 그 누가 일없이 찬란하게 그러한 형상을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인간의 경우에는 학사(學士), 일민(逸民), 임협(任俠), 승려, 미녀, 청상과부 등의 노래와 말, 웃음과 울음 속에서 끝없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물()의 천만가지 붉고 푸른빛이 흐드러지게 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펴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은 색색마다 천생(天生)이요 종종마다 천취(天趣)니 이 모든 것이 흥관군원(興觀群怨)할 수 있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저는 살아가면서 어느 날도 시를 짓지 않는 날이 없는데 어찌 법이 있으며, 계보가 있으며, 떠받드는 것이 있겠습니까? 시경(詩經)』 「주남(周南)부이(芣苢)3장을 읽어보면 천지만물의 기상이 절로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한나라 이후로는 당나라가 시도(詩道)로 명성을 떨쳤는데, 대저 물()에 나아가 정을 풀어내고 꽃과 꽃술을 분별하여 인간세계의 무한한 취기(臭氣)와 무한한 광경(光景)이 문득 나의 뜻과 한 가지임을 알 수 있게 하였으니 곧 나의 스승인 저! 나의 스승인저! 이남(二南)에서 얻은 것은 사물을 통달하여 보는 것이요, 삼당(三唐)에서 얻은 것은 참됨[]을 취하여 즐기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시는 물()에 부림을 당하고 사건에 막히고 붉은 빛과 자줏빛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남이 가는 대로 따라가면서 자기 것으로 여겼으니 위태롭고 위태롭지 않았겠습니까! 저들은 풍파(風波) 속의 사람이라고 해야겠지요.

吾于詩, 不以䂓矩, 不以格律, 不以聲容色澤, 而所把翫者, 天機也. 天之象, 日月星辰風雨霜露; 地之象, 山川草木鳥獸魚鼈, 孰陶鑄是? 孰磨光是? 孰居無事, 粲然而成象? 其在人而爲學士逸民任俠僧胡冶女孀姬之歌泣繹如班如者與! 夫物之千紅萬碧爛熳低昂, 自然而舒, 自然而動者, 色色天生, 種種天趣, 是皆可以興可以觀可以羣且怨乎哉! 今吾所由之際, 無日而非詩, 詩何嘗有法? 亦何嘗有族有宗? 讀周南之芣苢三章, 覺自有天地萬物氣象. 由漢已下, 李唐以詩道鳴, 大氐格物沿情, 葩分蕊別, 認得人間無限臭氣無限光景便與自家意思一般, 卽吾師乎! 吾師乎! 二南得之爲通物觀也, 三唐得之爲采眞游也. 降此以往者, 爲物役爲事障爲亂朱紫, 適人之適而以爲己私, 殆哉岌乎! 彼之謂風波之人. -申維翰, 靑泉集1 筆園夜話有述五十韻 幷序

 

 

()’의 미학적 기반 위에서황수연, 杜機 崔成大民謠風 漢詩 硏究,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2000, 179면 참조. 한국적 악부시의 전통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안대회,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 소명출판, 1999, 183면 참조. 최성대는 소북(小北) 계열의 문인이었지만 일찍이 김창흡과의 시교(詩交)가 있었으며 연옹(淵翁)께서 가신 뒤로 누가 나를 이해해 준다고, 공연히 또 상나라 노래 부르느라 애써 소릴 짓는구나[淵翁去後誰憐我, 空復商歌作苦聲].”崔成大, 杜機詩集5 謝答花山의 기구, 승구.라며 김창흡을 지음(知音)으로 여겼다. 또한 최성대의 전생 남편이었다고안대회, 앞의 책, 174~175면 참조. 불릴 만큼 절친했던 신유한은 김창흡의 갈역잡영(葛驛雜詠)을 습작하기도 하고庚午秋, 崔士集寄書言: (中略)奉讀周章, 果信足下於我, 肝膽相照, 千里一席矣. 第曩習三淵翁葛驛雜咏, 雅謂麟峽風謠, 不啻桃源, 而今承部檄, 如風雨功曺胥史兔眼鼠首諸狀, 足令人代愁. -申維翰, 靑泉集3 答金麟蹄光遂書, 이병연을 사조(謝眺)에 비하기도 하는盃酒狂歌氣未衰, 手兼黃綬錦囊持. 不妨白髮稱仙吏, 且喜靑山佐客詩. 桑葚摘來參木並, 竹樓衙罷管絃宜. 澄江似練霰成綺, 謝眺宣城得句時. -申維翰, 靑泉集2 梧月樓與三陟李使君一源抽劍南韻 등 김창흡과 이병연을 先生 長者로 대우하였다.

 

최성대의 시론은 천기론에 기반하여 이루어졌다. 최성대가 말한 천기(天機)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에 깃든 하늘의 이치[天理], 즉 천리(天理)가 오묘하게 발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저 물()의 천만가지 붉고 푸른빛이 흐드러지게 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펴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은 색색마다 천생(天生)이요 종종마다 천취(天趣)’라고 한 것과 인간세계의 무한한 취기(臭氣)와 무한한 광경(光景)이 문득 나의 뜻과 한 가지[自家意思一般]’라고 한 언급에서 이러한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가의사일반(自家意思一般)’은 주렴계(周濂溪)가 창 앞의 풀을 뽑지 않고 그냥 두자 그 이유를 묻는 어떤 사람에게 저 풀이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나와 똑같다.[與自家意思一般]”明道先生曰: ‘周茂叔窻前草不除去問之, 與自家意思一般.’[子厚觀驢鳴亦謂如此.]” (二程遺書3) 朱子는 이것을 天機와 연결시켜 논의하였다. “: ‘周子窗前草不除去卽是謂生意與自家一般?’ : ‘他也只是偶然見與自家意思相契.’ 又問: ‘橫渠驢鳴是天機自動意思: ‘固是. 但也是偶然見他如此. 如謂草與自家意一般, 木葉便不與自家意思一般乎? 如驢鳴與自家呼喚一般, 馬鳴卻便不與自家一般乎?’ -朱子語類96라고 대답한 데서 온 말로, 천지만물이 하나의 리()로 매개되어있다는 리일(理一)’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는 천기 개념을 성리학적 토대에서 인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백악시단의 천기론(天機論)과 혹사(酷似)한 인식을 보여준다. 더구나 이러한 천기(天機)에 대한 입론을 통해 명대 복고파가 중시했던 법이나 수사를 거부하고, 창작에 있어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백악시단이 명대 복고파를 비판, 극복하던 논리 그대로이다. 또 최성대는 스스로 스승으로 삼은 시경의 시와 당시(唐詩)에서 수사적인 특징이 아니라 사물을 통달하여 보는 것참됨[]을 취하여 즐기는 것을 배웠다고 하였는데, 이는 김창협이 옛것을 배움에 신해묘오(神解妙悟)해야 한다며 진짜 복고의 논리를 주장한 것과 동일한 궤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성대는 이러한 시론을 바탕으로 민요풍 한시 창작에 매진하였는데, 이는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이 최성대의 세대에 이르러서 문인 각자의 중시하는 바에 따라 개성적으로 개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은 후대로 내려갈수록 더 다양한 문인층으로 확산되었다. 아래 심노숭(沈魯崇)의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대저 요즈음 시도가 이와 같이 된 것이 어찌 또한 기운과 유관하지 않겠는가? 김창흡, 홍세태가 피일휴(皮日休), 육구몽(陸龜蒙), 하경명(何景明), 이반룡(李攀龍)의 시를 잡다하게 써서 처음으로 허수아비 같은 시풍을 열었다. 이천보(李天輔), 조관빈(趙觀彬)이 그것을 따랐으며, 이봉환(李鳳煥)에 미쳐서 드디어 하나의 유파(流派)를 이루게 되어 한 시대 수재들을 거의 다 바꾸어 놓게 되었다. 근년에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등의 무리가 그 법을 이어받으니 사대부의 자제 가운데 재주가 얇고 재주가 없는 자들이 점점 그것에 물들었다.

大抵響來一種詩道之如此, 其亦有關氣運耶? 金三淵洪世泰雜用皮, 始爲俑, 李晉菴趙晦軒述之, 降及李鳳煥, 遂成一派, 幾變一時之秀才. 近年李德懋朴齊家輩傳其法, 士大夫子弟薄有才無識見者沈沈染之. -沈魯崇, 孝田散稿』 「山海筆戱·壬戌錄51

 

 

심노숭의 이 글은 백악시단의 진시가 끼친 폐단을 언급하는 것이지만심노숭이 제기한 폐단이 어떤 맥락을 지니는 지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상론하기로 한다., 김창흡과 홍세태의 시풍이 이천보(李天輔)와 조관빈(趙觀彬)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어 서얼 문사였던 이봉환(李鳳煥)에 이르러 하나의 유파가 되었고, 그것이 심노숭 당대의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천보(1698~1761)는 젊은 시절 김창흡에게 시도(詩道)를 들었다不佞弱冠時, 從三淵金公, 問詩道, 至論當世之詩, 輒稱槎川李公曰其詩非今人語也’. -李天輔, 晉菴集6 送李槎川赴三陟序. 그는 앞서 본 완암집서(浣巖集序)에서 여항인들은 권세(權勢)나 명리(名利)에 기욕(嗜慾)할 것이 적기 때문에 주체의 천기(天機)가 천부(天賦)의 상태에 더 가깝다며 정내교의 시가 천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또 간성군수(杆城郡守)로 부임하는 이병성을 전송하며 쓴 글에서는 제가 가만히 공의 시를 보니 그 바탕을 다듬어 아름답고자 하지 않고 그 외면을 과장하여 이름을 내고자 하지 않아 담연(澹然)히 그 천기(天機)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不佞竊觀公之爲詩, 不斲其質以爲華, 不張其外以爲名, 能澹然不失其天機. -李天輔, 晉菴集6 送李丈秉成赴杆城序라고 하면서 이병성의 시적 성취가 그의 높은 인격[주체의 天機]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이천보는 이렇듯 백악시단의 천기론, 특히 주체에 초점을 맞춘 천기론으로 시문을 비평하였다.

 

조관빈(1691~1757)은 김창흡을 직접 종유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창흡의 아들인 김치겸(金致謙)과 교유가 빈번하였고, 김창흡이 자신의 만시(輓詩)를 보고 평범하지 않다[不尋常]’라고 고평해준 사실을 김치겸으로부터 듣고曩者偶與金大興致謙甫閒話, 得聞三淵翁見後生輓人詩, 不尋常三字褒之. 此則少時所作, 無甚功力, 不過是孺子可敎之意. -趙觀彬, 悔軒集14 答李三陟 시를 남기기도 하였으며吾自愛吾詩, 耻居陳陸下. 淵翁昔日言, 聳動平丘夜. -趙觀彬, 悔軒集5 金大興云昔年三淵見余輓人詩, 謂之勝作. 聞來便有知遇之感, 書此一絶, 중년 이후에는 삼연집(三淵集)을 숙독하고 김창흡의 운자를 따라 대단히 많은 작품을 지었다江樓夜, 用三淵集韻書懷, 雨餘次三淵集韻, 次三淵集古詩韻, 趙醫仲興冒雪遠來, 不可忘也. 其去, 拈三淵集韻書此以示, 이상悔軒集6) 등 김창흡의 문집을 보고 차운한 시가 25수에 이른다.. 또한 조관빈은 자신의 시고(詩稿) 6책을 이병연에게 산정해달라고 청하였으며趙觀彬, 悔軒集14 與李三陟秉淵 이병연은 시를 산정한 뒤 발문까지 써 주었다趙觀彬, 悔軒集14 答李三陟. 이렇듯 조관빈은 백악시단의 문인들을 대단히 존숭했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김창흡에 대한 열독은 매우 인상적이다. 조관빈 또한 대상에 내재한 천기(天機)를 조우하려는 의식을 담을 시들을 다수 창작하였고, 자신의 시가 실정(實情)에서 나온 것이어서 진경(眞境)에 가깝다는 진시론을 피력하기도 했다若其險釁窮阨寃迫幽鬱, 發以實情, 逼於眞境者, 往往有之. -趙觀彬, 悔軒集14 答李三陟. 이봉환(李鳳煥, 1710~1770)매사오영(梅社五詠)에서 조재호(趙載浩, 17021762)의 시에 대해 연옹신운(淵翁神韻)’조재호(趙載浩)제삼집부야매취암향부동월황혼용혼자추차(第三集賦夜梅就暗香浮動月黃昏用昏字追次), 梅社五詠의 제25) 함련에 대한 이봉환(李鳳煥)의 평., ‘절사연옹(絶似淵翁)’조재호(趙載浩)청교매집후기제군(靑橋梅集後寄諸君)의 제2(梅社五詠의 제36) 수련에 대한 이봉환(李鳳煥)의 평.이라는 평을 붙였는데 이를 통해 이봉환 또한 김창흡의 시를 비평의 기준으로 삼을 만큼 대단히 존숭했음을 알 수 있다.

 

백악시단의 진시운동18세기 후반의 이른바 연암(燕巖) 그룹과도 깊은 공감대를 이루었다박지원은 평소에 김창협, 김창흡의 이야기를 많이 하였고 특히 김창흡의 풍모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平居多說農巖三淵二先生事. 又曰: ‘吾嘗永矢庵三淵湖海亭諸處, 想見其遺風, 又拜其遺像, 每夢想淵翁曠世襟期. -朴宗采, 過庭錄卷下. 박지원(朴趾源)영처고서(嬰處稿序)에서 모의를 통한 수사적 복고를 거짓이라고 반대하면서 작가가 처한 시공간에서 진실하게 지으면 대상의 진기(眞機)’가 발현된다고 하였다. 또한 조선 당대의 모습을 거짓 없이 지은 이덕무의 시는 조선의 풍토와 조선인의 성정을 살피게 한다는 점에서 조선의 국풍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였다余聞而大喜曰: “此可以觀. 由古視今, 今誠卑矣. 古人自視, 未必自古. 當時觀者, 亦一今耳. (中略)今懋官, 朝鮮人也. 山川風氣地異中華, 言語謠俗世非漢唐. 若乃效法於中華, 襲體於漢唐, 則吾徒見其法益高而意實卑, 軆益似而言益僞耳. 左海雖僻國, 亦千乘; 羅麗雖儉, 民多美俗. 則字其方言, 韻其民謠, 自然成章, 眞機發現, 不事沿襲, 無相假貸, 從容現在, 卽事森羅, 惟此詩爲然. 嗚呼! 三百之篇無非鳥獸草木之名, 不過閭巷男女之語. 則邶檜之間, 地不同風; 江漢之上, 民各其俗. 故釆詩者以爲列國之風, 攷其性情, 驗其謠俗也, 復何疑乎此詩之不古耶? 若使聖人者作於諸 夏, 而觀風於列國也, 攷諸嬰處之稿, 而三韓之鳥獸艸木, 多識其名矣, 貊男濟婦之性情, 可以觀矣. 雖謂朝鮮之風可也.” -朴趾源, 燕巖集7 鍾北小選」「嬰處稿序. 영처고서(嬰處稿序)에 나온 진기(眞機)’는 곧 천기(天機)’이다. 박지원의 주장은 고금과 지역의 현실적 차이를 인정하고, ‘지금’ ‘여기의 모습을 진실하게 담자는 것이었는데, 이는 백악시단 진시론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덕무의 시를 조선의 국풍이라 한 점은 시경의 정신을 지금에 되살려 시도(詩道)를 진작하려 했던 백악시단의 지향과 일정하게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덕무(李德懋)의 시론은 백악시단의 진시론과 더욱 닮아있다. 먼저, 창작에 있어 주체와 대상에 대한 이덕무의 인식을 살펴보자. 이덕무는 벽옥란시고서(碧玉欄詩稿序)에서 완이(莞爾) 이유수(李惟秀, 1721~1771)가 이선보(李善甫)의 꿈에 나타나 지어주었다는 벽옥란(碧玉欄)’이라는 호에 대해 벽()은 문장이고 옥()은 아름다운 자질[美質]이며 란()은 검속을 의미한다고 풀이해 준 뒤, “사군자의 언행만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짓는 도() 또한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余曰: ‘ 有三善, 其旨微矣. 夫碧者, 文章也; 玉者, 美質也; 欄者防閑也. 斐蔚以賁其躬, 溫栗以養其資, 然後禮節而撿攝, 毋或使之外馳. (中略)不惟士君子言行藉此三者, 爲詩之道亦不外此. 善甫品高而神靜, 故其詩疎朗秀逸, 無僻澁之調煩急之韻, 一讀可知其爲人. -李德懋, (刊本)雅亭遺稿3 碧玉欄詩稿序며 창작 주체의 수양된 인격을 중시하였다창작 주체의 수양된 인격을 중시하는 견해는 다음 글에서도 확인된다. “余受以讀, 果爾如其言, 以平和純雅爲大旨也. 其詩淸簡幽婉得風人之旨, 其詞賦古而潔, 其文有和正平溫奇奧典雅之軆. 余於是歎曰: ‘有德者其有言乎! 此吾所謂偃蹇於蓬蒿之下, 旣以文章自娛, 又以道學自衛者歟! 其眞見之, 尤最難也.’ -李德懋, 靑莊館全書3嬰處文稿·1」「茶溪詩文序. 창작의 대상이 되는 물()에 대해서 이덕무는, “어린아이가 울고 웃는 것과 시장에서 사람들이 사고파는 것 또한 보고 느끼기에 족하다. 사나운 개가 서로 싸우는 것과 교활한 고양이가 재롱을 떠는 것을 조용히 관찰하면 지극한 이치[至理]가 그 속에 있다. 봄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것과 가을 나비가 꽃에서 꿀을 따오는 것에는 천기(天機)가 유동(流動)한다. 개미떼는 기를 들고 북을 치지 않아도 절제되어 정돈되어 있고, 일천 벌의 방()은 기둥과 들보가 없는데도 칸의 규격이 저절로 고르다. 이것들은 모두 지극히 가늘고 지극히 적은 것이지마는 거기에는 끝없는 지묘(至妙)와 지화(至化)가 있다[嬰兒之啼笑市人之買賣, 亦足以觀感; 驕犬之相閧黠猫之自弄, 靜觀則至理存焉; 春蠶之蝕葉秋蝶之採花, 天機流動. 萬蟻之陣不藉旗鼓, 而節制自整; 千蜂之房不憑棟樑, 而間架自均. 斯皆至細至微者, 而各有至妙至化之無邊焉. -李德懋, 靑莊館全書48 耳目口心書·1].”며 만물에 내재한 오묘한 이치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주체가 대상의 외형에만 매몰되지 말고 대상에 내재된 정신을 체득해야 한다고도 하였다嗚呼! 譚詩者觀目前物, 費許多辭, 高者誕, 卑者腐, 模寫其精神者槩少焉, 有愧乎倭之墨馬翣也. -李德懋, 靑莊館全書4嬰處文稿·2」「題墨馬倭翣. 또한 이덕무는 법에 대한 김창흡의 변화된 인식이 표출된 관복고서(觀復稿序), 하산집서(何山集序)두 편의 글을 인용하면서 형식적 복고를 부정하는 논리의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李德懋, 靑莊館全書51 耳目口心書·4.

 

이덕무는 시론뿐만 아니라 실제 창작에서도 백악시단의 진시를 하나의 모범으로 삼았다.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삼가시초(三家詩抄)이다. 삼가시초(三家詩抄)는 이덕무가 직접 편찬하고 필사한 시선집으로 거기에는 이병연의 시 42, 이광려(李匡呂, 1720~1783)의 시 44, 김이곤(金履坤, 1712~1774)의 시 24수가 선발되어 있다삼가시초(三家詩抄)의 존재는 안대회 교수에 의해 학계에 처음 보고 되었다. 안대회 교수는 홍대용(洪大容) 후손가 소장 이덕무(李德懋) 필사본(筆寫本) 3종 연구, 고전문학연구42, 2012를 통해 삼가시초(三家詩抄)외에 철교화(鐵橋話), 시첩(書帖)등에 대해 상세히 보고하였다. 三家詩抄와 관련한 내용은 상기 논문을 참조하였다.. 이덕무가 삼가시초(三家詩抄)에 이병연의 시를 선발한 사실은 18세기 한시사의 전개와 관련하여 대단히 주목할 만한 사안이다.

 

이덕무는 청비록(淸脾錄)1이사천(李槎川)’ 조항을 두고 선왕(先王, 英祖)께서 즉위한 50년 이래 시인은 마땅히 사천(槎川)을 제일로 쳐야 한다.”며 이병연의 시사적 위상을 밝힌 뒤, 화원(花園), 오우(午雨), 송간(松澗), 추우(秋雨), 풍정(楓亭), 포촌(浦村), 기수홍군칙(寄酬洪君則)일곱 수와 기타 산구(散句)를 소개하였으며, 작품 예시를 이어 모두 우아한 품격과 맑은 운치가 깊고도 아름다워 암송할 만하다. 중국의 문사들이 평가하기를 당과 송의 작품을 능가한다고 하였다.”며 이병연 시의 특징과 이병연의 시가 중국에서도 고평 받았던 사실을 기록하였다先王卽祚五十年來, 詩人當以李槎川秉淵, 爲第一名家. (中略: 예시 작품 소개)皆雅品淸致, 淵韶堪誦. 中國之士有評曰出入唐宋’. -李德懋, 靑莊館全書34 淸脾錄·1. 이병연에 대한 대단한 추숭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병연의 명편·명구로 청비록(淸脾錄)에 소개된 작품이 삼가시초(三家詩抄)를 바탕으로 선발된 것이라는 점이다. 삼가시초(三家詩抄)에는 선발 시편에 대한 이덕무의 정밀한 감수를 보여주는 수묵(朱墨) 평점(評點)이 있는데, 이것은 청비록(淸脾錄)에 서술된 이병연 관련 기록이 이병연에 대한 피상적 이해가 아니라 작품에 대한 정밀한 비평을 토대로 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덕무는 이병연의 시적 성취를 실제 작품에 대한 정밀한 비평을 거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삼가(三家)의 한 사람으로 김이곤이 선발된 점 또한 주목을 요한다. 김이곤은 김시보의 손자로 백악시단의 영향을 직접 받은 인물이다. 이덕무는 김이곤을 근세의 명가로 소개하면서 백악산 아래 살았기 때문에 또한 삼연(三淵사천(槎川)의 유풍(流風)과 여운(餘韻)이 있다.”고 하였다金鳳麓履坤, 字晉卿, 官新溪縣令. 詩爲近世之名家, 家住白嶽山, 亦有三淵槎川之流風餘韻. -李德懋, 靑莊館全書34 淸脾錄·3. 이는 곧 김이곤의 시풍이 김창흡과 이병연의 시풍에서 나온 것임을 특기한 것이다. 삼가시초(三家詩抄)의 세 사람 가운데 이병연을 선발하고, 이어 그 유풍을 이은 김이곤을 선발한 사실은 이덕무가 백악시단의 시적 성취에 대단히 경도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이덕무는 백악시단의 시론은 물론이고 시적 성취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자신의 시세계를 개척해 갔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은 후대 여러 문인들의 공감을 받으며 저마다 개성적인 시세계를 이루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나 백악시단 문인들이 이룩한 시적 성취가 후대 문인들에게 긍정적으로만 인식된 것은 아니었다. 비판은 백악시단의 핵심 구성원으로 후대 문인들에게 영향력이 가장 컸던 김창흡에게 집중되었다.

 

 

상이 이르기를, “근세에 시를 말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고() 처사(處士) 김창흡(金昌翕)을 꼽는데, 나는 그의 시가 치세(治世)의 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것은 순전히 침울해하고 고뇌하는 뜻을 담은 시여서 충화(沖和)하고 평담(平淡)한 기상이 전혀 없다.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빈천한 처지의 사람과 같은 작품을 지었는데 진실로 저절로 그렇게 된 듯한 점이 있었으니, 후생 소년들은 절대로 본받거나 배우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近世言詩者, 輒推故處士金昌翕, 而予則以爲非治世之音. 其所謂膾炙人口者, 純是沈鬱牢騷意態, 絶無沖和平淡氣象. 以鐘鼎子弟, 作窮廬口氣, 固若有不期然而然, 而後生少年切不宜倣學. -正祖, 弘齋全書164 日得錄·4」 「文學·4

 

대저 요즈음 시도(詩道)가 이와 같이 된 것이 어찌 또한 기운과 유관하지 않겠는가? 김창흡, 홍세태가 피일휴(皮日休), 육구몽(陸龜蒙), 하경명(何景明), 이반룡(李攀龍)의 시를 잡다하게 써서 처음으로 허수아비 같은 시풍을 열었다. 이천보(李天輔), 조관빈(趙觀彬)이 그것을 따랐으며, 이봉환(李鳳煥)에 미쳐서 드디어 하나의 유파(流派)를 이루게 되어 한 시대 수재들을 거의 다 바꾸어 놓게 되었다. 근년에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등의 무리가 그 법을 이어받으니 사대부의 자제 가운데 재주가 얇고 식견이 없는 자들이 점점 그것에 물들었다.

大抵響來一種詩道之如此, 其亦有關氣運耶? 金三淵洪世泰雜用皮, 始爲俑, 李晉菴趙晦軒述之, 降及李鳳煥, 遂成一派, 幾變一時之秀才. 近年李德懋朴齊家輩傳其法, 士大夫子弟薄有才無識見者沈沈染之. -沈魯崇, 孝田散稿』 「山海筆戱·壬戌錄51

 

 

첫 번째 인용 자료는 정조(1752~1800)의 글이다. 정조의 이 글은 일국(一國)의 왕이 일개 처사(處士)의 문풍을 걱정하는 것이어서 이채롭다. 이것은 김창흡의 시풍이 조선후기에 얼마나 큰 영향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정조가 김창흡의 시풍을 비판한 것은 화평(和平)하고 충담(沖澹)한 기상이 담긴 치세(治世)의 음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인구에 회자되는 작품들을 읽어보니 모두 침울(沈鬱)하고 고뇌(苦惱)하는 뜻을 가진 것들이었다고 하였다. 정조의 언급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정조가 말한 인구에 회자되는 작품은 갈역잡영(葛驛雜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김창흡의 시 가운데 침울하고 고뇌하는 시풍을 가지고 있으면서 신유한이나 김익(金熤, 1723~1790)의 경우金熤, 竹下集2 閑居雜詠十絶, 用淵翁葛驛雜詠韻처럼 방작(倣作)이 존재하는 작품은 갈역잡영(葛驛雜詠)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인용 자료는 앞서 한번 언급된 심노숭의 글이다이 글은 김창흡 시풍의 영향관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글인 까닭에 논의 전개의 필요에 따라 다시 인용한다.. 이 글은 심노숭이 원인손(元仁孫), 이봉환(李鳳煥), 홍신유(洪愼猷)가 함께 지은 서경아집(西京雅集)을 보고, 그들의 시는 천박하고 경솔하다[鄙薄憸嬛]하여 시정소민(市井小民)이 필운대조(弼雲臺調)라고 부른다고 소개한 뒤, 이러한 시풍의 연원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김남기, 앞의 학위논문, 161면 참조.. 심노숭은 이러한 시풍의 계보가 김창흡·홍세태-이천보·조관빈-이봉환-이덕무·박제가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심노숭이 이러한 계보적 인식을 보인 것은 이들 작품의 어떤 점 때문이었을까? 이 연결고리를 이천보와 조관빈의 시풍으로부터 탐색해보기로 한다.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은 이천보의 문집에 쓴 서문에서 불평한 소리가 자주 시편에 드러났으니, 이것이 내가 공을 안타깝게 여기는 까닭이다.”不平之鳴, 屢形於篇什, 此余所以爲公悲之者也. -李天輔, 晉菴集』 「晉菴集序[南有容]라며 이천보 시의 한 특징으로 불평지명(不平之鳴)’을 들었다. 조관빈은 이병연에게 자신의 시를 산정해달라는 청을 하면서, “그 험흔(險釁궁액(窮阨원박(寃迫유울(幽鬱)함 같으면 실정(實情)에서 나와 진경(眞境)에 핍근(逼近)한 것이 왕왕 있습니다. 시대를 걱정하고 세상을 염려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편편(片片)이 고심(苦心)한 것이어서 또한 불평한 소리가 많습니다.”라며 자신의 시편 가운데 불우한 감정과 불평한 세계 인식이 담긴 것이 많다는 점을 밝혔다惟是若干詩卷, 未曾塵覽於當世大眼目如下執事也. 則欲趁未入山之前, 仰請斤正, 玆使迷兒袖納. 各體詩六冊于几案之下, 此盖數十年窮居中所得, 鄙俚粗荒, 未足爲詩矣. 而若其險釁窮阨寃迫幽鬱, 發以實情, 逼於眞境者, 往往有之. 至如憂時憫世, 片片苦心, 亦多有不平之鳴, 以執事忠厚惻怛之心覽至, 亦必有衋然傷憐者矣. -趙觀彬, 悔軒集14 與李三陟秉淵. 이에 이병연은 조관빈의 시에 대해 고평을 해주면서도 김창흡의 시풍을 지나치게 따른 것에 대해서는 고쳐야 한다고 조언을 해주었다淵翁平仄律法, 鄙見亦然. 當改之矣. -趙觀彬, 悔軒集14, 答李三陟. 두 문인들 모두 작시를 통해 불평한 세계인식을 표출한 점이 뚜렷하게 감지된다.

 

또한 심노숭은 김창흡의 시풍을 이봉환과 연결시키며 이른바 초림체(椒林體)’의 연원이라 인식하였다. 초림체(椒林體)는 산초처럼 얼얼한 맛을 내는 서얼들의 독특한 문체를 가리킨다신익철, 18세기 중반 초림체 한시의 형성과 특징, 고전문학연구19, 2001, 35면 참조.. 초림체의 특징에 대해 이규상은 기미(氣味)가 초살(焦殺)하고 풍운(風韻)은 번촉(繁促)하며 교사(巧思)는 예봉(銳鋒)하여 결코 중화(中和)한 성정의 표출이 아니다고 하면서 초림체의 이 같은 특징이 서얼들의 억울한 기운이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然氣味焦殺, 風韻繁促, 巧思銳鋒, 手段則高强而巧流於刻銳, 轉爲急口, 則椒粒辣舌, 遮眼則酸風射眸, 決非中和之陶寫. 鳳煥創是體, 惟己能之, 他人則畵虎不成. 所謂椒林一隊, 莫不景從於鳳煥體, 材富者, 僅藏拙, 力弱者, 枯槁彳亍, 語不成理, 幽怪孤詭, 如鬼哭魅笑. 無乃積枳之氣, 騰其光怪邪? -李奎象, 幷世才彦錄』 「文苑錄」「李鳳煥. 그런데 이규상이 초림체의 특징으로 언급한 내용은 정조가 김창흡의 시를 두고 침울하고 고뇌하여 충담하고 화평한 기운이 없다고 평가한 것과 상통한다.

 

이상의 자료 검토를 통해 우리는 김창흡의 여러 시풍 가운데 현실의 모순 을 신랄하게 비판한 갈역잡영(葛驛雜詠)과 같은 작품이 불우한 세계인식을 지녔던 일부 후배 문인들에게 적극 수용되었고, 서얼 문인에 이르러서는 초림체라는 별도의 문체로까지 발전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갈역잡영이 보인 시풍은 이전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특히 갈역잡영가운데 현실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들은 시가 지녀야할 최소한의 서정성이나 심미성을 고려하지 않고 작가가 마주한 세계의 추악상을 여과 없이 직출함으로써 전에 없이 첨예한 미감을 창출하였다.

 

그러나 갈역잡영은 김창흡의 학문과 사유가 심원해지면서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거짓 없이 드러낸 김창흡 진시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많은 문인들이 그 성취를 인정하여 그것을 따라 짓고자 시도하기도 한 작품이다. 그런데 왜 이런 시풍이 한편에서는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일까?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바라보는 입장차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김창흡의 갈역잡영가운데 현실세태를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들은 정조의 입장에서는 말세의 음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앞 장에서 예시한 작품 외에도 다음과 같은 작품들을 예시할 수 있다. “백성이 굶주려도 관아가 안 돌보니, 비쩍 마른 개를 그 누가 돌보랴? 도둑을 막아도 상 주는 이 없으니, 하늘 향해 짖기나 해야지![民飢官不養, 犬瘠復誰憐. 禦盜無勳祿, 惟應哭向天. -三淵集15, 13]”; “유학자는 이제 강례가로 변질되어, 조금만 고증할 줄 알면 문득 잘난 체. 오묘한 神明은 천지를 밝히는데, 어쩌자고 구차하게 죽은 뱀이나 희롱하는가!-儒學今歸講禮家, 差能考證便相誇. 幽通神祗昭天地, 豈止拘拘弄死蛇. -三淵集14, 48]” 기득권층인 자기 계급에 대한 여지없는 비판은 김창흡이 만년에 도달한 고매한 정신 그 자체이다. 김창흡은 갈역잡영에서 언어를 가꾸고 시상을 다듬는 일체의 시도를 방기하고 자신의 사유가 이끄는 대로 붓을 맡겼다. 그래서 소재에서도, 표현에서도, 주제 의식의 측면에서도 상궤의 시편들과는 사뭇 다른 성취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는 시는 자고로 화평한 기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보수적 문인층에게는 대단히 심기 불편한 것이었다. 반면 갈역잡영이 선보인 거침없는 세태비판은 기득권에서 배제된 계층에게는 대단히 혁명적인 시로 읽혔을 것이다. 초림체를 창시했다는 이봉환이 김창흡을 절대적으로 존숭한 사실과 심노숭이 초림체의 연원으로 김창흡을 지목한 사실, 그리고 정조와 심노숭의 김창흡 비판은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관의 차이가 아니더라도 김창흡의 시풍은 학시(學詩)의 대상으로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아래 인용문을 살펴보자.

 

 

삼연은 학문이 날로 넓어지고 안목이 날로 높아져 그의 시는 변하면 변할수록 더욱 기이하고 새로웠다. 또한 그의 성기(聲氣)와 광염(光焰)은 한 시대를 고무하기에 족하여 후배 문사들 중에서 분주하게 좇지 않는 자들이 없고, 말단의 사람들은 단서가 될 만한 말을 만들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는다. 삼연이 간재(簡齋, 陳如義)가 좋다고 하면 자기도 간재를 좋아한다 하고, 삼연이 읍취헌(挹翠軒, 朴誾)이 좋다고 하면 자기도 읍취헌을 좋아한다 하고, 삼연이 방옹(放翁, 陸游)이 좋다고 하면 자기도 방옹을 좋아한다고 할 정도이다. 간간이 한두 마디 말로 장려하고 허여하는 것을 들으면 곧 뻐기며 진정한 시인으로 자부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어(新語)와 기어(奇語)와 초어(峭語)에 능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시를 보면 조잡스럽고 비루하여 아무런 의미도 없고 기상도 초라하니, 불행히도 엄우(嚴羽)가 말한 바 하열시마(下劣詩魔)가 폐부에 든 것이고, 전겸익(錢謙益)의 이른바 귀기유(鬼氣幽) 병기살(兵氣殺)’에 가까운 것이다. ! 후생들은 재력(才力)이 본래 단약(單弱)하고 배움의 수준도 또한 대단히 천박하면서 다만 오늘의 삼연만 알고 지난날의 삼연은 알지 못하며 한갓 말단의 삼연만 배우고 처음의 삼연은 배우지 않으면서 다시는 근본을 탐구하고 근원을 파고들지 않는다.

三淵學益博, 眼益高, 膽益壯, 其詩愈變而愈奇愈新, 又其聲氣光焰, 足以鼓舞一世, 故後進 之士莫不奔趍下風, 奉其緖言, 以爲金科玉條. 三淵曰簡齋好’, 我爲簡齋也’, 三淵曰翠軒好’, 我爲翠軒也’, 三淵曰放翁好’, 我爲放翁也’, 間有一二語爲三淵所奬與, 便已岸然自大, 以眞正詩人自命曰我善新語, 善奇語, 善峭語’. 及觀其詩, 則尖纖破碎狹陋迫促, 全乏意味, 眞氣索然, 眞嚴儀卿所謂下劣詩魔入其肺腑者也, 錢受之所謂鬼氣幽兵氣殺, 不幸近之矣. ! 後生輩才力本來單弱, 學殖亦甚淺薄, 而徒知今日之三淵, 而不知昔日之三淵, 徒學下梢之三淵, 而不學初頭之三淵, 不復探究根本直截源頭. -李夏坤, 頭陀草16 洪滄浪詩集序

 

세상에서 그림을 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정선의 그림을 삼연의 시에 짝 지운다. 대개 국조의 그림은 정선에 이르러 비로소 그 변화를 극진히 하였다. 그러나 정선의 그림이 나오자 세상에서 정선을 배우려는 자들은 정선과 같은 필력이 없으면서 단지 그 방법만 훔치니, 그림의 쇠함은 정선에게서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일찍이 요즈음 시를 짓는 자들 중에서 삼연을 좇지 않으면 남들이 다투어 괴이하게 여긴다. 그러나 삼연과 같은 학식이 없으면서 단지 그 기이함만을 배우기 때문에 그 병통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러니 시가 쇠퇴한 것은 삼연 또한 그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삼연을 외복(畏服)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이 온통 삼연처럼 되는 것은 반대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듣는 이들이 모두 미친 말이라고 여겼다.

世之論畵者, 必以元伯之畵, 配三淵之詩. 盖國朝之畵, 至元伯而始極其變. 然元伯之畵出, 而世之學元伯者, 無元伯筆力, 而徒竊其法, 畵之衰, 未必不自元伯始. 余嘗謂: ‘今之爲詩者, 不步趨三淵, 則人爭怪之. 而無三淵學識, 而徒學其奇, 故適足以受其病, 詩之衰, 三淵又不得辭其責矣. 吾非不服三淵, 而惡世之羣爲三淵者也.’ 聞者皆以爲狂言. -李天輔, 晉菴集7 鄭元伯畵帖跋

 

 

첫 번째 인용 자료는 이하곤의 글이다. 이하곤은 김창흡의 시가 변화를 겪었다고 보았는데, 그 원인을 학문이 넓어지고 안목이 높아진 때문으로 보았다. 변화된 시풍의 결과는 ()’()’이었다. 그러면서 김창흡이 갖춘 역량도 없이 김창흡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세태에 대해 우려를 표하였다. 이하곤은 천박한 학식으로 김창흡 시의 기이함만 흉내 낸 시풍을 귀기유(鬼氣幽)’, ‘병기살(兵氣殺)’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규상이 초림체을 특징을 말하면서 유괴고궤(幽怪孤詭), 여귀곡매소(如鬼哭魅笑)’하다고 한 것과 통한다. 초림체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이하곤은 김창흡의 갈역잡영이 잘못 수용되면 일정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감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인용 자료는 이천보의 글이다. 이천보는 자기 당대에도 이어진 김창흡 시 열풍을 우려하였다. 우려의 핵심은 이하곤과 마찬가지로 김창흡 같은 학식이 없으면서 그 기이함만 배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세상의 시풍이 모두 김창흡의 시풍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두 인용문을 통해 우리는 김창흡의 변화된 시풍에 대한 동인(同人)과 후배 문인의 우려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김창흡의 시풍만의 문제가 아니라 백악시단의 진시론이 지닌 근본문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백악시단의 진시론과 천기론은 학문과 창작이 모두 절정에 오른 작가를 상정한다. 그러나 그렇게 설정된 창작 주체의 경지는 누구나 쉽사리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기 백악시단을 이은 다음 세대의 백악시단, 즉 제3기 백악시단의 부재는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학문도 하면서 시에도 매진하는 것은 다음 세대 사대부 문인에게는 그다지 긴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당쟁의 격랑 속에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그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현실 정치보다는 학문과 시 창작에 생애를 걸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노론 중심으로 정계가 재편되면서 정치적 격랑이 잦아들자 관직에 오른 사대부들은 치국안민의 경세(經世)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되었고, 관직에 있지 않았던 사대부들도 시보다는 도학(道學)에 헌신하는 삶을 가치 있게 여겼다. 가령, 이병연의 평생 지기(知己) 가운데 하나였던 김상리(金相履)의 아들 지재(遲齋) 김준(金焌)은 안중관(安重觀)으로부터 주역을 배운 뒤 평생을 주역 연구에 헌신했고, 이병연의 문인으로 이병연의 시를 선발하기도 했던 남숙관(南肅寬)도 주역 연구에 매진하였으며, 안중관의 아들 안석경도 이병연을 존숭하여 여러 기록을 통해 이병연을 기렸으나 시인의 길을 가지는 않았다. 어려서부터 이병연을 알고 그 영향권에 있어서 시학을 전수받을 수 있었던 인재들은 모두 시 창작을 대신하여 학문과 문장의 길을 선택하였다. 요컨대 18세기 중반 이후 사대부 문인 가운데 백악시단의 경우처럼 시에 고원한 의미를 부여하며 시 창작에 평생을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양반 사대부를 대신하여 시에 헌신할 수 있었던 문인들은 서얼과 여항인이었다. 신분에 있어 근원적 한계를 지닌 그들은 김창흡의 만년 시풍에서 비판정신을 간취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진실한 것이고 절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자칫 김창흡의 시풍을 빌려다 자신의 불우감을 포장하는 데 그치고 말 수도 있었다. 이하곤과 이천보는 이러한 점을 우려한 것이다. 학식이 바탕이 되지 않은 진시는 자칫 하나의 악시(惡詩)’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유만주(兪晩柱)는 학식 없는 천기론(天機論)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시에서 혹자는 천기(天機)를 말하면서 천기 외의 격조(格調)나 사취(詞趣)에 대해서는 모두 안배로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이를 구하는 것은 인의 단서지만 대번에 이것으로 스스로 뻐기며 말하길, ‘나의 이 마음은 곧 성인(聖人)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서 확충(擴充)시켜 나가지 않는다면 일개 범부에 그치고 만다. 천기에서 발하여 자구(字句)를 다듬지 않는 것, 이것이 진실로 시의 근본이긴 하다. 그러나 대번에 이것으로 뿌듯해하며 시의 지극한 공이라고 여겨 횡설수설 쏟아낸다면, 이것은 곧 하나의 악시(惡詩)일 따름이다.

詩歌或曰天機, 天機之外如格調詞趣, 盡擧以爲按排. 然見幼子入井而救之, 仁之端也, 遽以此自多, 吾之是心, 便可爲聖人矣, 而遂不擴充, 則一凡夫. 發乎天機, 不假點撰, 固詩之本也. 然遽以此自大, 以爲詩之極工, 而橫竪放肆, 則卽一惡詩. -兪晩柱, 欽英8己亥年 12

 

 

유만주는 천기론(天機論)의 본질과 한계를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앞서 보았듯 천기론이 본연의 의의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창작능력이나 학식, 인격 등 모든 부분에 있어 높은 경지에 이른 창작주체를 전제해야 한다. 그런데 천기론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천기(天機)를 임의로 주관화하여 이 시구야말로 천기에서 나온 것이야하며 마음에서 느껴지는 대로 시를 쓴다면 이런 시는 악시(惡詩)가 된다는 것이 유만주의 견해이다.

 

김창흡의 시풍을 둘러싼 다양한 논란과 비판은 백악시단 진시의 성취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진시의 핵심이론인 천기론은 조선후기 시풍의 변화를 이끈 다양한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천기론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깊은 학문적 역량과 천부적인 재능, 그리고 전문적인 창작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이렇듯 창작주체의 심원한 역량을 강조하는 천기론은 주체의 역량이 미진할 경우, 악시(惡詩)가 될 수 있는 한계를 시론 내부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백악시단이 개척한 진시는 그 성취를 두고 일부 보수적 문인들의 비판도 제기되었지만 조선후기를 관통하며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성리학에 기반한 백악시단의 천기론은 조선후기 시론을 대표한다고 평가될 만큼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고, 대상의 진면목을 형상화하기 위해 시적 대상을 중시했던 창작태도는 소재의 확대와 물성(物性)에 대한 심화된 형상화로 이어졌으며, 꾸밈 없는 시를 써야한다는 의식은 일상의 소소한 장면과 다양한 감정들을 시 속으로 끌어들이며 조선후기 한시의 다채로움을 선도하였다.

 

이처럼 백악시단은 전대 시단이 노정한 폐단을 극복하고 민멸된 詩道를 진작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견지한 채 그들의 시적 지향을 성리학에 기반한 진시로 개념화하였고, ‘진시창작을 위한 핵심 시론으로 천기론을 정밀하게 정비하였으며, 부단한 창작을 통해 그들의 시적 지향을 실제 작품으로 구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문학 활동은 시론에서부터 실제 창작에 이르기까지 후배 문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그 결과 조선후기 한시의 다양한 변화들을 선도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진시창작을 위한 백악시단의 문학 활동은 조선후기 한시사의 전개 속에서 새로운 시 창작을 위한 문학 운동으로서의 의의를 십분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용

목차 / 지도

강의록 / 후기

. 서론

.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2. 동인들의 문학 활동

. 진시의 기저와 논리

1. 자득의 학문자세와 진 추구의 정신

2. 진시의 제창과 복고파·공안파의 비판적 수용

3. 성리학적 천기론의 문학적 변용

. 진시의 정신적 깊이와 미학

1. 형신을 통한 산수의 묘파

2. 민생에 대한 응시와 핍진한 사생

3. 물아교감의 이지적 흥취

4. 소통의 깊이와 진정의 울림

. 진시의 시사적 의의

.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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