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진시(眞詩)의 정신적 깊이와 미학(美學)
이하곤은 조선중기 이후로 진행된 시단의 변화상을 폐단 극복의 연쇄관계로 개괄하면서 백악시단의 ‘진시’가 출현하게 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國朝之詩, 自明宣以後, 盖累變焉. 蘇齋、芝川才具宏蓄, 氣力昌大, 然雅俗兼陳, 體裁未純, 故其弊也雜; 孤竹、玉峰以淸新秀警矯之, 然神寒骨薄, 氣象急促, 故其弊也隘; 東岳、石洲又以渾圓和平矯之, 然思冗語膚, 格調不高, 故其弊也腐; 東溟又以悲壯整麗矯之, 然叫呶紛拏, 情境不眞, 故其弊也虗. 於是乎金三淵、洪滄浪之詩出焉. -李夏坤, 『頭陀草』책16 「洪滄浪詩集序」】. “동명(東溟, 鄭斗卿)이 또 ‘비장(悲壯)’과 ‘정려(整麗)’로써 저들의 폐단을 교정하였으나 요란하고 혼란하여 정(情)과 경(景)이 참되지 않았기 때문에 허황된 폐단을 노정하였다. 이에 김삼연(金三淵)과 홍창랑(洪滄浪)의 시가 나오게 되었다.” 이하곤이 지적하였듯 부진(不眞)한 정(情)과 경(景)을 진(眞)하고 실(實)하게 하는 것, 이것이 곧 백악시단의 ‘진시’가 혁신해 가야할 길이었다.
앞서 살폈듯 백악시단은 시적 대상에 대한 형상화에 있어서도, 주체의 정감을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도 그 진실함을 고려하지 않고 전범의 형식적 재현 정도를 성취와 역량의 기준으로 여기는 풍조를 비판하며 ‘진시’를 제창하였다. 백악시단은 시 창작을 교양의 수단이나 기예로 사고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학(詩學)을 도학(道學)의 차원까지 높이고 시도(詩道)에 대한 궁구를 통해 민멸된 시도(詩道)를 다시 진작하겠다는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백악시단의 ‘진시’는 학시(學詩)에 있어서도 창작에 있었어도 정신적 가치를 대단히 중시하였다. 백악시단은 시적 대상을 마주하면 관조와 교감을 통해 그 진면목을 포착하고, 시적 주체의 정감을 표현하면서는 총체적 관계에 대한 깊은 인식을 바탕으로 거기서 발현된 참된 감정을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천부(天賦)의 상태로 수양된 주체가 대상에 오묘하게 발현되는 천기(天機)와의 조우를 통해 천리(天理)를 체인해야 한다는 천기론은 그들 ‘진시’론의 지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에 본 장에서는 백악시단의 실제 작품들을 대상으로 대상과 주체의 眞이 어떻게 하나로 고양되고, 그러한 형상화가 거둔 미적 성취와 특징을 무엇인지 살피면서, 민멸된 시도(詩道)를 진작하겠다던 백악시단의 시적 지향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1. 형신(形神)을 통한 산수의 묘파(描破)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산수에 대한 애호가 각별하였다. 대표적 인물로, 김창흡은 19세에 금강산을 유람한 이래 모두 여섯 차례나 금강산을 찾았고, 설악산을 자신의 은거지로 삼아 만년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며, 그 밖에도 호남, 영남, 관서, 관북 등 전국의 산수를 두루 유람하였다【김남기, 「김창흡의 산수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8면 참조.】. 권섭은 스스로 “나의 성벽(性癖)은 수석(水石)과 연하(煙霞)에 있으니 세상 어떤 일로도 이것과 바꿀 수 없다.”고 할 정도였는데, 관동 유람을 네 차례, 남도 유람을 여덟 차례, 해서 유람을 두 차례 하였고, 87세에는 함경도 일대를 유람하기도 하였다. 권섭의 유람은 대개 3개월 이상 소요되는 장대한 원유(遠遊)였는데 권섭은 유람을 마치고 나면 유람과 관계된 모든 것 ― 승람의 대상과 감회는 물론이요, 거리정보, 동반한 사람, 도움 준 사람, 소용된 물목에 이르기까지 ―을 「원유록(遊行錄)」에 남겼다【권섭의 유람에 대한 기록은 권혁대, 「옥소 권섭의 한시 연구」,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79~84면에 자세하다.】. 이하곤 또한 강화도 일대, 개성 일대, 속리산 일대, 금강산 일대, 호남 일대를 두루 여행하였다【이하곤의 유람에 대한 기록은 윤성훈, 「담헌 이하곤, 산수 애호와 문예 지향의 삶」, 『태동고전연구(泰東古典硏究)』 제24집, 2008, 173면 및 이상주, 『담헌 이하곤 문학의 연구』, 이화문화출판사, 2003, 25~32면에 자세하다.】. 이 밖에도 백악시단의 대다수 문인들은 금강산, 개성 등 조선의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였고, 지방관으로 부임하면 임지의 명승을 찾아 유람하였다. 그리고 백악시단의 열정적 산수 애호는 왕성한 시문 창작으로 이어져 그들의 산수시는 ‘진시’의 정수 가운데 하나로 뚜렷한 성취를 거두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산수는 공자의 태산(泰山) 등람(登覽)과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처럼 심원한 정신적 각성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사마천의 경우처럼 창작의 수준을 제고시키는 문필 실현의 장으로 여겨져 왔다. 그렇다면,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산수 유람을 어떻게 인식하였던가?
옛날의 고인과 일사를 살펴보면 이따금 몸을 숨겨 독서하느라 명산(名山)의 이경(異境)에 사는 것을 애호한 자들이 있는데 이것이 어찌 다만 적막함을 즐기고 심지(心志)를 탐닉하여 문사, 언어의 공교롭고 화려한 것을 구하는 데 그친 것이겠는가?
대저 명산(名山)의 이경(異境)은 그 기가 광대하고 성대히 모인 것이라 반드시 청명(淸明)하고 수이(秀異)하다. 대저 (고인과 일사의 행위는) 그 청명(淸明)하고 수이(秀異)한 기운에 의거하여 욕망을 말끔히 없애고 성령(性靈)을 도야하여 리(理)의 환함과 도(道)의 깨우침에 이르기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이제 자심(子深, 李眞源)이 가는 곳은 곧 남방의 명산으로, 높고 크며 기이하고 빼어나니 청명(淸明)하고 수이(秀異)한 기(氣)가 여기에 광대하고 성대할 것이다. 부자께서 깊이 하고자 하신 바가 장차 리(理)의 환함과 도(道)의 깨우침을 구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아니면 문사(文詞)와 언어의 공교롭고 화려함을 구하려고 한 것이겠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심(子深)은 힘쓸지어다.
然窃觀古之高人逸士, 往往潛藏讀書, 而愛居名山異境者, 是豈特甘寂寞溺心志, 以求文詞言語之工麗而已哉!
夫名山異境, 其氣之旁魄而欝積者, 必淸明秀異. 盖欲資其淸明秀異之氣, 澄汰欲慮, 陶冶性靈, 以求至于理明道悟焉耳. 今子深所適者, 乃南方之名山, 而高大以奇秀, 則淸明秀異之氣, 於是焉旁魄而欝積. 可知夫子深所欲者, 將以求理明道悟歟, 將以求文詞言語之工麗而已歟. 子深勉乎哉. -李夏坤, 『頭陀草』책12 「送李子深序」
고인은 “모든 공인들은 작업장에 거하여 그 일을 완성한다.”고 하셨다. 이 말은 대개 작업장에 거하였다면 곧 그 마땅한 장소를 얻은 것이요, 마땅한 장소를 얻으면 외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 작업이 이내 정밀해짐을 의미하니 일을 이루고자 하면서도 마땅한 장소를 얻지 못한다면 일을 완성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 사대부의 업(業) 또한 그러하다. 반드시 마땅한 곳을 얻은 뒤라야 이룸이 있을 수 있는데 마땅한 곳을 얻고자 한다면 의당 고요한[靜] 곳보다 더 나은 곳은 없다. 내가 세속의 사람들을 보건대, 간혹 학업에 뜻을 두었으면서도 늘 사물의 번다함과 벗들과의 지나친 종유에 뜻을 빼앗겨 이룸을 얻지 못하는 자가 대다수이다. …(중략)… 악주(岳州)는 곧 해서(海西) 지역이다. 경사와의 거리가 먼데다가 땅도 외졌으니 사물의 번다함과 벗들과의 지나친 종유는 반드시 없을 것이다. 계달이 이 땅에 가게 된 것은 그 마땅한 곳을 얻은 것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중략)… 또 내가 듣기로 해서(海西)에는 아름다운 산수가 많다고 한다. 옛날에 글을 쓰던 자는 반드시 많은 관람(觀覽)을 토대로 자신의 흉금을 넓혔다. 옛날 사마천은 약관의 나이로 장강(長江)과 회하(淮河)를 떠다니고 원수(沅水)와 상수(湘水)를 건넜으며 연(燕), 조(趙), 제(齊), 노(魯)의 유허(遺墟)를 직접 보고 돌아왔기 때문에 그의 문장이 질탕하여 지기(奇氣)가 있게 되었으니 후세의 글쟁이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그런즉 사마천이 얻은 산천의 도움[山川之助]은 심원한 것이었다 할 것이다. 무릇 계달은 고원한 뜻을 지니고서 거처의 마땅함까지 얻었으니 여기에 사마천과 같은 유람을 더한다면, 그 문장이 마치 대붕이 회오리바람을 타고서 반드시 구만 리를 날아오른 뒤에 그치는 것과 같을 것이니 그 성취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古之人有言曰: ‘百工居肆, 以成其事.’ 盖居肆則得其所, 得其所則不遷於異物而業乃精, 欲成其事而不得其所, 鮮有能成者矣. 今夫士之於業也亦然, 必得其所而後, 可以有成, 欲得其所, 宜無大於靜者矣. 余觀世之人, 間或有志於學, 而常奪於事物之膠擾、朋知之過從, 不得有成者多矣. …(中略)… 岳州卽海西也. 去京師旣遠, 地且僻, 其無事物之膠擾、朋知之過從必矣. 季達之適玆土, 可謂得其所哉! …(中略)… 且余聞之, 海西多佳山水云. 古之爲文者必籍觀覽之富, 以廣其胸次. 昔龍門太史弱冠, 浮江、淮, 涉沅、湘, 歷燕、趙、齊、魯之墟以歸, 故其文跌宕有奇氣, 非後世操觚者所及, 則其得山川之助可謂深矣. 夫以季達高遠之志, 得其所處之宜, 而加之以子長之遊, 則其於爲文也, 猶大鵬之摶扶搖, 必將九萬里而後已. 其所成就, 曷可量哉!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23 「送季達昌直之岳州序」
첫 번째 글은 이하곤이 부친을 따라 무주로 떠나는 벗 이진원(李眞源)에게 써준 글이다. 이하곤은 이 글에서 산수 유람의 목적을 산수에 내재된 청명(淸明)하고 수이(秀異)한 기운을 얻어 리(理)와 도(道)를 깨우치는 데에 두었다. 산수의 기묘한 외형에 기대 창작의 질적 제고를 이루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입장은 종래의 도학자적 산수 인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산수의 외형적 특징을 청명하고 특별한 기를 얻을 수 있는 매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도(悟道)의 경지로 나아가는 매개로서 산수의 ‘이경(異境)’이 상당한 의의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산수도 완물상지(玩物喪志)의 대상으로 여겼던 도학자의 관념적 산수 인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하곤의 이러한 입장은 곧 산수에 오묘하게 발현된 천기(天機)를 조우하고 그것을 통해 천리(天理)를 체인해야 한다는 천기론을 충실하게 따른 것으로, 산수라는 대상 그 자체가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산수를 통해 정신적 오(悟)를 얻어야 한다는 입장은 백악시단 문인들의 일반적 견해였다. 김시보는 금강산 유람을 떠나는 조카 김순행(金純行)에게 경치 완상에만 빠지지 말고 산수의 오묘함을 관찰하여 인(仁)과 지(知)의 경지에서 마음에 갈무리 할 것을 당부하였고【噫! 善觀名山之難無異於觀聖. 汝其往矣, 毋以深搜博觀爲務, 察其流峙之妙, 會以仁智之符. 俯仰徜徉, 收之方寸, 無少流連光景, 遊玩適宜, 則其於爲學之功, 亦不爲無助也. -金時保, 『茅洲集』 권9 「與純行書」】, 김시민은 송도(松都) 유람을 떠나는 조명리(趙明履)에게 준 시에서 “자장(子長, 司馬遷)은 격이 낮아 문장에만 그쳤고, 강절(康節, 邵雍)은 오직 기수(氣數)에서 머무르고 말았네. 어약연비(魚躍鳶飛)의 이치가 충만한 곳은, 석 잔 술에 호한한 흥을 즐긴 축융봉일세.”【子長陋矣文章止, 康節惟於氣數終. 一理鳶魚充滿處, 三杯豪興祝融峯. -金時敏, 『東圃集』 권2 「贈趙姪明履仲禮遊松都」】라면서 축융봉에서 천리를 체인하고 우주와 소통했던 주자의 기상을 따를 것을 권하기도 하였으며, 박태관은 김창흡에게 보낸 시에서 김시습(金時習)과 김창흡을 비하며 김시습의 산수 유람을 문장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속견을 비판하고, 김창흡이 산수에 은거한 진정한 뜻은 산수의 고요함 속에서 도를 깨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산 아끼는 참 즐거움은 오직 고요함 탐해서니, 속세 피한 청한자(淸寒子, 金時習)는 본디 미친 게 아니었습니다. 이 노인은 정녕 알아 부끄러움 없었거늘, 사람들은 그저 좋은 문장만을 언급합니다. 산중 거처는 푸른 산봉 천 겹으로 가리시고, 도(道)의 맛은 맑은 못 백 굽에서 유장하실 터. 공께 묻길, ‘필경 무엇을 하실는지요?’, ‘복희 경전[周易] 한 부가 솔숲에 있다.’하시네[愛山眞樂惟耽靜, 避世淸寒本不狂. 此老定知無愧色, 今人但說好文章. 菴棲碧嶂千重掩, 道味澄潭百曲長. 畢竟問公何事業, 羲經一部在松林. -朴泰觀, 『凝齋遺稿』卷上 「奉贈百淵」].】.
두 번째로 제시된 김창흡의 글은 산수와 학문, 산수와 문장의 관계를 단계적으로 논하였다. 김창흡은 『논어(論語)』 「자장(子張)」편의 “모든 공인은 작업장에 거하여 그 일을 완성하고, 군자는 학문으로써 그 도를 이룬다[子夏曰: ‘百工居肆以成其事, 君子學以致其道.’]”를 화두(話頭)로 삼아 산수가 도를 이룰 수 있는 최고의 학문 공간임을 강조하였다. 그런 다음, 산수 유람이 작문을 질적으로 고양시키는 계기가 됨을 말하였다. 김창흡은 후세의 글쟁이들이 미칠 수 없는 사마천의 성취는 사마천이 산수 유람을 통해 ‘심원한’ 산천지조(山川之助)를 얻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김창흡이 후세조고자(後世操觚者)와 사마천을 대비하면서 산천지조(山川之助)의 ‘심원함’을 운위한 것은 후세조고자(後世操觚者)의 피상적(皮相的) 유람과는 달리 사마천의 유람이 정신적 감수와 체득의 과정이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단에서 ‘자장지유(子長之遊)’라고 특기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김창흡은 이상의 생각을 종합하여 아우 김창직에게 산수 유람을 권하였다. 마지막에 언급된 고원지지(高遠之志)와 소처지의(所處之宜), 자장지유(子長之遊)는 산수를 매개로 학문이 깊어지고 학문이 깊어지면 창작상의 성취도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김창흡은 산수 유람에 앞서 충분한 학문과 수양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명악록(溟岳錄)』에 붙인 글에서, 세상 사람들은 사마천이 20세에 유람한 사실만 알지, 10살 때 이미 고문(古文)을 기송(記誦)한 사실은 모른다며, 사마천 같은 하늘이 내린 준재도 10년 동안 학문과 수양의 공을 쌓은 뒤에야 주유(周遊)에 나섰음을 강조하였다. “惟太史公以善遊特聞於世, 世之喜遊子弟亦頗欲慕而效之. 然獨知其二十而遊焉乎? 而獨不聞其十歲而則已誦古文乎? 以彼奇偉之才、卓犖之識, 固天縱之, 而然且搜羅旁剔, 猶待夫十年之積, 積而有可運於所適者. 然後起而作遊, 一覽而盡天下之變, 吐其胸中之奇, 卒成一家言, 傳之無窮.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23 「溟岳錄後序」】. 이처럼 김창흡은 산수를 정신적·학문적 측면에서 접근하면서도 문학과의 연관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는 참된 시문 창작이란 학문적 식견과 정신적 해오(解悟)에 토대해야함을 강조한 것으로 자신들의 ‘진시’론이 일관되게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도학적 산수와 문학적 산수의 유기적 통합은 김창협의 다음 글에서 산수시 창작의 문제와 관련하여 더욱 정밀하게 개진되었다.
시가(詩歌)의 묘(妙)는 산수(山水)와 상통한다. 대개 청형준무(淸迥峻茂)하고 기려유장(奇麗幽壯)하여 그 모습은 변화가 많고 그 땅은 다 보기 어렵다. 바라보면 정신이 솟구치고 다가서면 마음이 녹아드는 것, 이것이 산수의 빼어남이다. 시가(詩歌) 또한 마찬가지이다. 산수와 시가 서로 만나면 정기(精氣)가 서로 모이고 경(景)과 취(趣)가 서로 펼쳐진다. 이는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물주에게는 완전한 공력이 없고 사람의 재주 역시 치우침이 있기 때문에 우주의 산수가 모두 빼어날 수 없고 사람의 시가(詩歌) 또한 오묘한 것이 드물다. 이 때문에 평범한 경치에서 기발한 말을 구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조잘대는 소리를 가지고서 아름다운 경관을 묘사하려 들면 조금도 닮지 못할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는 산수와 사람이 서로를 저버린 것이지만, 사람이 산수를 저버린 경우가 많으니 대개 시도(詩道)가 쇠한 지 오래도다.
동방에서 산수를 말하자면 금강산이 가장 뛰어나 전대부터 시인들의 가영(歌詠)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그 빼어남을 근사하게 묘사한 말을 찾으면 끝내 찾을 수가 없다. 대개 조물주가 이 산에 오로지 신령하고 빼어나며 맑고 아름다운 기운만을 모아 주어 그 기운으로 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을 만들고, 그 기운으로 맑은 샘과 깊은 골을 만들고, 그 기운으로 아름다운 나무와 기이한 풀과 금모래와 은자갈을 만들었으니, 그 뛰어남이 또한 오묘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시를 짓는 사람들은 비근한 것을 익히기를 좋아하여 진부한 것을 인습하고 한 번도 깊이 생각하여 독창적인 말을 해 본 적이 없으며 그 천기(天機)에서 움직인 것이 얕아서 흥취가 원대하지 못하여, 사물을 명명한 것이 조잡하고 묘사가 참되지 못하다[不眞]. 이런 상태로 산수에 가니 어찌 펼치는 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시가의 도가 떨쳐지지 않았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금강산을 저버린 것이 그친 때가 없었다.
詩歌之妙, 與山水相通. 夫淸迥峻茂, 奇麗幽壯, 其爲態多變, 其爲境難窮, 望之而神聳, 卽之而心融, 此山水之勝也. 而詩歌亦然, 故二者相値, 而精氣互注焉, 景趣交發焉, 是固有莫之然而然者矣. 然造化無全功, 人才有偏蔽, 故宇內之爲山水者, 不能皆勝, 而人之於詩歌, 亦鮮造妙. 是以踐常境而求奇雋之語, 則無助, 操哇音而寫瑰麗之觀, 則未肖. 是二者又交相負也, 而人之負山水也顧多, 蓋詩道之衰久矣.
語山水於東方, 金剛爲大, 而自前世詩人歌詠甚多, 然求一言之克肖其勝, 卒不可得. 夫造物者, 專以神秀淑麗之氣, 鍾之於是山, 以而爲奇峰峭壁, 以而爲淸泉邃谷, 以而爲嘉木異卉, 金砂銀礫, 其爲勝, 亦妙矣. 而世之爲詩者, 方且樂習卑近, 因陋而襲陳, 未嘗一致其深思, 以發獨創之語, 其動乎天機也淺, 而興象不遠, 命乎事物者粗, 而描寫不眞, 以此而之乎山水, 夫安能有所發! 余謂詩歌之道不振, 則東人之負金剛也, 無已時矣. -金昌協, 『農巖集』 권21 「兪命岳李夢相二生東游詩序」
이 글은 김창협이 유명악과 이몽상이 금강산을 유람하며 쓴 시에 붙인 서 문으로, 산수시 창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진시’, ‘천기론’과 연계하여 논의한 것이다. 김창협의 논리는 대단히 명료하다. 산수시는 산수라는 대상과 시인이 만나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빼어난 산수시가 되려면 대상도 빼어나야 하고 작시 주체도 빼어나야 한다. 그런데 금강산은 조물주의 공력이 가장 빼어난 산이다. 그런데도 금강산을 형상화한 시들이 범상한 데 그치고 만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금강산의 진면목을 인식하고 그것을 참되게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창협은 바로 이 지점에서 천기(天機)를 내세운다. 김창협은 금강산의 절경을 두고 “조물주가 이 산에 오로지 신령하고 빼어나며 맑고 아름다운 기운만을 모아 주어 그 기운으로 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을 만들고, 그 기운으로 맑은 샘과 깊은 골을 만들고, 그 기운으로 아름다운 나무와 기이한 풀과 금모래와 은자갈을 만들었으니, 그 뛰어남이 오묘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금강산에 발현된 묘(妙), 즉 대상의 천기(天機)이다. 그리고 금강산에 드러난 묘(妙, 대상의 천기)를 인식하고 이것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작시 주체의 깊은 천기 운용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작시 주체의 깊은 천기 운용은 앞서 「답황규하(答黃奎河)」라는 글에서 보았듯, 평상시의 ‘궁리(窮理)’와 ‘존심(存心)’ 등 학문과 수양에 의해 마련되는 것이다. 학문과 수양을 통해 주체의 천기가 천부(天賦)의 수준으로 보존되어 있을 때라야 대상의 천기(天機)와 조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체의 천기와 대상의 천기가 조우할 때, 즉 작가가 금강산의 진면목 ― 이하곤의 표현을 빌리자면, 금강산의 이경(異境)에 담긴 청명(淸明)하고 수이(秀異)한 기(氣) ― 을 포착할 수 있을 때 작가의 흥상(興象)은 원대해지고, 대상에 대한 형상화도 ‘진(眞)’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김창협의 논리를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수준 높은 산수시를 창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실재하는 대상에 나아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마주한 대상과 정신적 교감을 통해 대상의 진면목을 포착하는 과정이 이루어져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포착된 대상의 진면목을 정밀한 형용과 참된 묘사로 그려내야 한다. 이렇듯 김창협은 산수시 창작을 중심에 두고 도학적 산수와 문학적 산수를 유기적으로 통합하였다. 김창협의 견해대로라면, 실재 산수를 찾지 않고서 원리적 차원의 이념을 구하거나, 심원한 정신적 교감을 매개하지 않고 산수의 외면만을 그려내는 것은 모두 산수의 온전한 형상화가 아니게 된다. 산수시 창작이 실재 산수에 직접 나아가, 대상 산수와의 심원한 정신적 교감을 전제로 삼는 데 이르면 산수 유람과 산수시 창작은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를 비켜서게 된다. 오히려 산수 유람은 도학에서도 문학에서도 상당한 보익(補益)이 된다는 점에서 적극 권장할 일이 된다.
백악시단 문인들은 이런 논리 위에서 산수 유람에 벽(癖)에 가까운 열정을 보였다. 산수 유람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산수에서 만나는 험지에 대한 인식에서 잘 나타난다.
산수의 승경은 잠깐 동안의 눈요깃거리에 지나지 않는데 눈요기를 위해서 일신을 위태롭게 하니 이는 손가락 하나를 위해 어깨와 등을 잃는 것에 가깝지 않은가! 쇠약한 늙은이가 이번 행차를 한 것에 대해 깊이 후회하였다.…(중략)…만약 비로봉 정상에 오른다면 솟은 산과 흐르는 물, 흩어져 수많은 모양이 된 것을 하나로 관통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니 우리 부자께서 천하를 작게 여기신 뜻과 천 년 뒤에 서로 부합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이 사람의 남은 힘이 강하지 않아 그곳을 부여잡고 올라 밟을 수가 없으니 우두커니 서서 머뭇거릴 뿐이었으니 창망하고도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山水之勝, 不過片時之悅目, 爲悅目而危一身, 此不近於失肩背者乎! 深悔衰翁作此行也.…(中略)…若上毗盧絶頂, 則峙者流者, 散爲萬殊者, 庶可一以貫之, 而吾夫子小天下之意, 隔千載而相契矣. 顧此餘力不可強, 其所不能攀登躐躋, 則佇立夷猶, 悵望而已, 慨歎而已. -鄭曄, 『守夢集』 권3 「金剛錄」
작년에 금강산에 들어갔을 때 이르는 곳마다 위험한 곳을 딛고 올랐는데, 그곳에는 반드시 기이한 볼거리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미친 듯이 정신을 빼앗겨 거꾸러지는 것을 후회하지 않고 말하길, “늙은이가 일흔에 죽어 이 사이에 뼈를 묻어둘 수 있다면 다행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昨年金剛之入, 到處躡危, 必有奇觀. 故不悔狂而顚倒曰, 老七十而死, 藏骨於此中間, 幸耳. -權燮,『玉所稿』 「遊行錄·3」「耊南錄」
첫 번째 글은 수몽(守夢) 정엽(鄭曄, 1563∼1625)의 글이다. 잠깐의 눈요기를 위해 일신을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해 정엽은 깊은 후회를 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비로봉을 올라 공자와 같은 정신적 오도(悟道)를 느끼고 싶었지만, 일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로봉을 오르지 않았다. 두 번째 글은 권섭의 글이다. 권섭은 험지를 올라보니 반드시 기이한 볼거리가 있었다며 험지를 만나면 피하기는커녕, 이런 절경 속에서 죽을 수 있다면 차라리 행운이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험지에 대한 상반된 두 태도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이것을 개인적인 기질의 차이로 돌릴 수도 있지만,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공히 험지를 마다 않는 모습을 보였다. 가령, 예를 들면 김창흡은 「경차가군운(敬次家君韻)」, 『삼연집습유(三淵集拾遺)』 권1라는 시에서, “산을 오르는 데 위험은 논하지 말라! 신선경에 들자마자 혼을 씻을 만할 테니[上山危險不須論, 纔入氷壺可濯魂].”라고 하였고, 이하곤은 “사람들은 백탑동의 험난함을 말하지만, 나는 백탑동의 기이함을 말하네. 기이한 곳이라 험난함이 있지만, 기이함을 좋아하니 위험함을 잊는다네. 이미 위험한 줄 모르니, 허리며 다리 피곤한 것이야 어찌 알겠는가? 기이한 경관 때문에 목숨을 거니, 사람들은 모두 나를 어리석다 비웃네. 허나 눈을 달고 이곳을 보지 않는다면, 어리석지 않다 한들 또한 어디에 쓰겠는가[人言百塔險, 我言百塔奇. 奇處故在險, 愛奇忘險危. 旣自不知險, 寧知腰脚疲. 以奇賭性命, 人皆笑我癡. 有眼不睹此, 不癡亦何爲. -李夏坤, 『頭陀草』책5 「百塔洞」]?”라고 한 바 있다.
유람에 대한 상반된 태도는 산수에 대한 변화된 인식에 기인한다. 조선 중기의 도학자 문인들은 산수를 철리적·관념적으로 사유하였다. 이들은 산수 유람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은 산의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수 속에 내재된 리(理)라고 생각했고, 리(理)는 만물에 균분(均分)한 것이지 험지와 절승이라고 더 많이 분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기관(奇觀)을 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산수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백악시단은 천리(天理)는 만물에 균분한 것이 맞지만 천리(天理)를 체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천기(天機)는 명산의 이경(異境)에서 조우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김창협이 발언한 대로 금강산 같은 명산은 “조물주가 이 산에 오로지 신령하고 빼어나며 아름다운 기운을 모아” 주어 천기(天機)를 조우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 인식 위에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기관(奇觀)을 찾아 험지를 마다 않는 열정을 보였다.
산수 유람에 대한 분명한 논리 위에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정신으로 산수를 마주하는 법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였다.
무릇 산수를 잘 보는 자는 넓고 높은 그 가운데 정신을 응결시키기 때문에 천지의 고후(高厚), 일월의 광명을 거의 알지 못하고 사슴들이 앞에서 일어나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고, 우레와 천둥이 뒤에서 요란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릇 폐와 내장을 울퉁불퉁하게 만드는 것은 모두 나무와 바위이며 코와 입으로 호흡한 것은 모두 안개와 아지랑이니 대저 이 같은 연후에야 산수의 취(趣)를 깊이 얻었다 할 만하다. 만약 종이를 펼치고 붓을 빨며 뒷짐 진 채 주시하면서 시구를 조탁하는 데서 마음이 막히고 글자를 단련하는 데서 뜻이 분산된다면, 나의 정신이 이미 산수와 더불어 막연해져 서로 하나로 모일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어찌 산이 왜 높으며 물이 왜 맑은지를 아는 것이겠는가?
夫善觀山水者凝神於泓崢之間, 而殆不知天地之高厚、日月之光明, 麋鹿興于前而不瞬, 雷霆鬪于後而不懾. 凡槎牙腑肺者, 無非木石也; 噓吸口鼻者, 無非烟嵐也. 夫如是然後方可謂之深得山水之趣也. 若夫伸紙舐筆, 背手瞪目, 心衡乎琢句, 志分乎鍊字, 吾之精神已與山水漠然不相凑泊矣. 是焉知山何爲而高、水何爲而淸哉? -李夏坤, 『頭陀草』책16 「題沈叔平楓岳錄後」
怱怱嗟爾輩 迫暮又凌寒 | 아! 너희들 훌훌 가버렸구나! 세밑이라 다시 춥다고 하여. |
政是遊山法 惟須會意看 | 이때야말로 유산(遊山)의 방도이니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 한단다. |
留神窮變化 不瞬視巖巒 | 정신을 붙여 변화를 궁구하려면 바위 하나 뫼 하나도 집중해서 봐야 한단다. |
所以三淵老 終年雪嶽山 | 이것이 삼연 노선생께서 종년토록 설악산에 사셨던 이유란다. |
「또 ‘한(寒)’자 운을 따라 짓다[又次寒字]」, 李秉成, 『順菴集』 권4
첫 번째 인용문에서 이하곤은 삼매(三昧)의 방법을 말하였다. ‘홍쟁지간(泓崢之間)’은 산수의 외형이 아닌 이면(裏面)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하곤은 산수와 작가가 일체의 개입 없이 혼연해진 상태를 “폐와 내장을 울퉁불퉁하게 만드는 것은 모두 나무와 바위이며, 코와 입으로 호흡한 것은 모두 안개와 아지랑이”라고 비유하면서 삼매를 통해 산수와 작가가 혼연해질 때 비로소 깊은 산수의 취(趣)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산수를 마주함에 있어 창작에 대한 의사가 먼저 개입되면 산수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며 경계하였다.
두 번째 인용된 시는 이병성이 김생과 아들 이도중(李度重)이 보림사를 다녀온 뒤에 지은 시편들을 보고 지은 시이다【이병성의 문집에는 인용된 시 바로 앞에 「차김생도아유보림산운(次金甥度兒遊寶琳山韻)」이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이병성은 이 시에서 산수를 보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래도록 집중해서 보는 것이다. 수련의 ‘박모(迫暮)’와 ‘능한(凌寒)’의 상황은 통상적으로 유람이 불편한 때이다. 그런데 이병성은 오히려 이런 상황이야말로 유산(遊山)의 참맛을 알 수 있는 때라고 보았다. 직접 언술되지는 않았지만, 이때가 고요[靜]한 때이기 때문이며, 시각(視覺)의 제약으로 인해 산수에 대한 음미가 더욱 심화될 수 있는 때이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어지는 ‘의간(意看)’이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데, ‘의간(意看)’은 곧 대상과의 정신적 소통과정을 의미한다. 이병성은 ‘의간(意看)’을 이어 작가가 대상에 정신을 붙여[留神] 이치를 궁구하는[窮變化] 단계를 제시하였는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오랫동안 집중해보기[不瞬視]이다. 이병성은 김창흡이 종년토록 설악산에서 은거한 까닭을 여기에서 구하였다.
이처럼 산수를 오래도록 집중해서 살피는 것은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중시한 관람 방법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것은 주자의 산수 관법(觀法)을 따른 것이었다. 김창협은 「선유동(仙游洞)」이라는 시에서, “부자께선 상산사호(商山四皓) 아니심에도, 영지(靈芝)를 꺾으실 생각 품었네. 그 깊은 속을 어찌 측량하리까? 높은 흥 바야흐로 높아지셨네. 바위 앉아 오래도록 눈길 멈추고, 물가 임해 여러 차례 노래 불렀네. 정신은 만물의 묘리에 응결시키고, 도(道)는 천고의 유장함을 기약하셨네[夫子非綺皓, 猶懷採芝苗. 深寄詎易測, 高興方飄颻. 坐石久不瞬, 臨川屢興謠. 神凝萬物妙, 道期千載遙. -金昌協, 『農巖集』 권3 「仙游洞」].”라며 주자가 산수 유람을 통해 만물의 묘리를 깨우치고 도(道)를 체인하는 장면을 형상화하였는데, 주자가 만물의 묘리를 깨우치지 위해 취한 행동은 바위에 앉아 오래도록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대상을 관조하는 것[坐石久不瞬]이었다. 김창흡 또한 금강산 유람 중인 아우 김창집(金昌緝)에게 보낸 시에서, “마땅히 회옹(晦翁)께서 하신 법을 따라, 바위 하나 뫼 하나도 집중해서 보시게나.[須依晦翁法, 不瞬視巖巒]”【金昌翕, 『三淵集』 권11 「寄敬明蓬萊行中」】라며 주자가 그러했듯 김창집 또한 산수유람을 통해 만물의 묘리를 깨우칠 수 있기를 당부하였다. 한편, 이러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던 김창흡은 이병연의 「삼부연(三釜淵)」 시에 차운하면서 “잘 알겠네, 그려낸 것이 절묘하니 잠깐 배회한 것과는 같지 않음을[深知摸寫妙, 不似暫徘徊]”【金昌翕, 『三淵集』 권10 「次李一源詠三淵舊基韻」 3수 중 1수 尾聯.】이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이병연의 시가 오랫동안 집중해서 보기를 통해 대상의 진면목을 묘파했음을 칭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산수의 외형보다는 산수 이면의 이치를 궁구하는 데 더 많은 의의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치를 궁구하기 위해서 실재하는 산수와의 직접 대면을 일차적으로 요구하였다. 즉, 대상과 주체 간의 균형적 상호 지양을 통해 형태로서의 산수를 정신의 경지로까지 끌어 올리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대상[산수]에 대한 형상화 방식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형상화에 있어 전신(傳神)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김창흡은 김시보에게 보낸 답장에서 “사진(寫眞)은 그 신정(神情)을 얻는 것을 귀히 여기니 다만 형골(形骨)에서 그친다면 곧 그 사람이 아니네. 시를 짓는 것 또한 그러하네. 그 형체를 본뜨다가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 검고 누런 색채를 대략하고 그 정신의 빼어남을 얻는 것만 못하다네[寫眞貴得其神情, 只以形骨而已, 則便非其人. 作詩亦然. 與其摸形而遺神, 不若略其玄黃而得其神駿也. -金昌翕, 『三淵集』 권9 「答士敬別紙」].”라고 하였고, 이하곤 또한 사령운의 “산수유청휘(山水有淸暉)”라는 시구를 산수의 취(趣)를 깊이 체득한 전신(傳神)의 예로 제시하면서 산수시 창작에 있어 전신(傳神)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나는 전부터 사령운의 ‘산수에 맑고 빛남이 있다’는 말을 좋아했는데, 마침내 ‘청휘’로 정자의 이름을 삼았다. 대개 산수에는 절로 일종의 맑고도 차며 빼어나면서도 이채로운 기운이 있어 사람이 그것을 감촉하면 마치 얼음과 눈이 심장에 스미는 것처럼 저도 모르게 상쾌해진다. 이것은 산수에 대한 취(趣)에 깊은 자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 사령운의 이 시는 거의 산수의 전신(傳神)이니, 그렇다면 사령운 또한 산수의 취(趣)에 깊은 자라 할 것이다[余嘗愛康樂‘山水有淸暉’之語, 遂以‘淸暉’名之. 蓋山水之間, 自有一種淸泠秀異之氣, 令人觸之, 如冰雪沁入心腑, 不覺爽然, 此非深於山水之趣者不知也. 康樂此詩殆爲山水傳神矣. 然則康樂亦可謂深於山水之趣者矣. -李夏坤, 『頭陀草』책16 「淸暉亭記」].】.
그러나 주목할 것은 백악시단이 추구한 전신(傳神)은 형사(形似)를 매개로 한 전신(傳神)이라는 점이다. 백악시단의 산수시는 전신(傳神)에 궁극적 의의를 두었지만, 그렇다고 형사(形似)를 소홀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아래 이하곤의 글은 전신(傳神)을 추구하면서도 형사(形似)를 중시한 좋은 보기가 된다.
시는 성조의 고하와 자구의 공졸을 막론하고 그 그려낸 경(境)이 참되고[眞] 표현한 정(情)이 진실[實]해야 천하의 좋은 시라 할 수 있다. 이백과 두보 이후에 백낙천, 소식, 육유와 같은 여러 사람의 시는 그 성조가 반드시 모두 높은 것은 아니며, 자구가 반드시 모두 공교롭지는 않다. 하지만 또한 그들의 시는 참되지 않은 경(境)을 그려낸 적이 없고 진실하지 않은 감정을 말한 적이 없어 읽어보면 참으로 읽는 자가 그 땅을 직접 밟아보고 얼굴을 직접 마주하며 이야기를 듣는 것 같으니 역시 천하의 좋은 시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작시(作詩)는 화가가 초상화를 그리는 것과 꼭 같다. 터럭 하나하나가 모두 꼭 닮은 뒤라야 그 사람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터럭 하나라도 닮게 그리지 못했다면 채색의 솜씨를 최고로 발휘했더라도 신정(神情)과는 곧 무관하게 되니 어찌 그 사람을 그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왕안도(王安道, 王履)는 ‘문장은 마땅히 옮기려 해도 움직이지 않아야 하니, 말머리의 굴레와 같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나의 뜻 그대로다.
詩無論聲調高下、字句工拙, 其寫境也眞, 道情也實, 斯可謂之天下之好詩也. 李、杜之後, 如白樂天、蘓子瞻、陸務觀諸人之詩, 其聲調未必盡高, 字句未必盡工, 然亦未嘗寫不眞之境, 道不實之情, 使人讀之, 眞若身履其地而面承其言也, 盖亦天下之好詩也. 故余嘗曰: ‘作詩正如畫工之寫眞, 一毛一髮無不肖似, 然後方可謂之寫其人矣. 苟或一毛一髮不能肖似, 則雖極丹靑之工, 而神情便不相關, 豈可謂之寫其人乎? 王安道曰「文章當移易不動, 愼勿與馬首之絡相似」, 正余此意也.’ -李夏坤, 『頭陀草』책17 「南行集序」
이하곤은 ‘경진(境眞)’과 ‘정실(情實)’을 좋은 시의 관건으로 제시하였는데 경(境)과 정(情)은 경(境)이 진(眞)해야 정(情)도 실(實)해지는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면서 작시(作詩)를 화가의 초상화 그리기에 비유하였는데 여기에서 형사(形似)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터럭 하나하나까지 모두 꼭 닮게 그려야 한다’는 이하곤의 발언은 앞서 본 김창흡의 초상화 비유와 배치되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하곤은 “만약 터럭 하나라도 닮게 그리지 못했다면 채색의 솜씨를 최고로 발휘했더라도 신정(神情)과는 곧 무관하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형사와 전신의 단계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밝힌 것이다. 곧 ‘전신을 위한 형사’, ‘형사를 통한 전신’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문 하단의 왕리(1332~1383)의 말 또한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왕리는 「책이 완성됨에 장남삼아 이것을 써 스스로를 나무란다[帙成戲作此自譏]」라는 글에서 한유의 「남산시」가 10여 구절에서만 종남산의 모습을 담아내고, 나머지 구절은 꼭 종남산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형상화가 이루어진 점에 대해 비판하였다. 왕리는 한유의 「남산시」를 실제 공간의 형사를 소홀히 하고 관념적 표현으로만 전신한 작품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두보는 실사(實事)와 실경(實景)에 의거하여 형사와 전신,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의 높이에서도 문학적 표현에서도 모두 성취를 거둘 수 있었다고 보았다【昌黎「南山詩」二百四句, 鋪敘詳, 文采贍. 議者謂其似「上林」、「子虚」賦, 才力小者不能到, 是固然矣. 然余竊觀之, 其‘吾聞京城南, 兹維羣山囿. 東西兩際海, 西南雄太白. 突起莫間簉. 藩都配德運, 分宅占丁戊. 逍遙越坤位, 詆訐陷乾竇. 昆明大池北, 前尋徑杜墅. 坌蔽畢原陋, 初從藍田入.’等十餘句, 可以施之於終南山, 外此則凡大山皆有之, 皆可當不獨終南也. 移此以指他山, 誰曰不可? 況又每有梗韻生意, 使文辭牽綴而義理不得通暢者、固才力小者不能到, 但恐非終南之本色耳. 故先正謂‘文章當使移易不動, 愼勿與馬首之絡相似’. 竊謂縱不宜規規然傳神寫照, 亦豈宜泛泛然駕虛立空? 非駕虛立空之不足以成文, 然終無一主十客之理, 務駕虛立空以夸其多, 不亦‘雖多亦奚以爲’乎? 少陵則不然. 其自秦入蜀詩二十餘篇, 皆攬實事實景, 以入乎華藻之中, 旣不傳神寫照, 又不駕虛立空, 是故高出人表而不失乎文章之所以然也. -朱存理, 『趙氏鐵網珊瑚』, 電子版『四庫全書』) 권16 「帙成戲作此自譏[王履]」】.
이하곤이 자신의 생각을 대변했다며 언급한 “문장은 마땅히 옮기려 해도 움직이지 않아야 하니, 말머리의 굴레와 같아서는 안 된다” 말은, 시란 실지체험(實地體驗)에 바탕하여 그 시를 읽으면 그 곳을 알 수 있어야지 어디에라도 붙일 수 있는 범범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하곤 자신이 추구했던 ‘경진성실(境眞情實)’과 상통한다. 이하곤에게 있어 형사와 전신과 같은 형상화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각답실지(脚踏實地)하는 것이었다. 실제의 공간을 직접 체험하면서 정신적으로 소통한 실감(實感)을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는 것, 이것이 바로 좋은 시의 요건이었던 것이다. 실재 공간을 직접 체험한 것이라면 형사와 전신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보다 자유롭게 구사될 수 있는 것이다. 작가가 실제 대상과 이룬 교감은 전신만으로도, 형사만으로도, 형사와 전신을 아울러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하곤의 윗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전신을 위해 생동감 넘치는 형사를 애용하는 양상을 보인다. 대개의 시는 작품 안에 형신(形神)의 두 요소를 모두 담아내는데, 일부의 작품은 형사만을 전면화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전신(傳神)한 바를 느끼게 하고, 또 일부의 작품은 작가가 느낀 바만을 전면화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대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세 번째로 언급한, 전신만으로 이루어진 산수시는 그다지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대상의 의의를 상대적으로 높이 설정하는 시론에 따른 것으로, 왕리의 말처럼 작가의 주관적 흥회만을 내세워 꼭 그곳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시 쓰기를 배척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백악시단 산수시의 중요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대상 산수를 직접 체험하면서 산수에 오묘하게 발현되는 천기와 조우하고 그로부터 고양된 정신적 깨달음을 작품 안에 담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에 자신이 목도한 산수를 핍진하게 묘사하면서도 그 생생한 형사를 통해 작가의 깊은 정신적 흥회를 담아낼 수 있었다【이런 과정을 거쳐 창작된 산수시에는 자연스럽게 대상의 사실성과 작가의 정신성이 공존하게 되고 대상은 진경(眞景)에서 출발하여 진경(眞境)으로 고양되게 된다. 이는 백악시단의 문예론을 공유했던 정선의 금강산 그림이 실재 경관의 특징적인 면모를 구상화하면서도 육안(肉眼)으로 보이는 실재대로가 아니라 심안(心眼)으로 해석되고 재구된 특징을 보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 까닭에 백악시단의 산수시는 대상에 대한 실감(實感)나는 묘사가 특징적이면서도 한편으로 대상과의 깊은 정신적 교융이 온축된 이지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제 실제 작품을 통해 이러한 특징들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김창흡의 시를 보자. 아래 시는 『임하필기(林下筆記)』에도 소개된 작품이다.
水落毘盧峰 | 물은 비로봉에서 떨어져 |
鍧鍧萬仞壑 | 굉음을 울리며 만길 골짝을 치달리네. |
東兼九井峰下溪 | 동쪽으로 구정봉 아래 시내와 합쳐져 |
流向海門石壁隘 | 바다 향해 달리니 바위 벼랑 비좁구나. |
西來五十有三佛 | 서역에서 온 쉰셋의 부처가 |
夜半驅龍以金策 | 한밤중에 금책(金策) 휘둘러 용들을 몰아내니 |
龍失宅 叫其子 | 용은 집을 잃고 새끼 찾아 울부짖는데 |
雲亦片片與龍徙 | 구름도 조각조각 용을 따라 옮겨갔다네. |
淪洞百丈龍實都 | 백 길 깊은 골짜기는 실로 용이 사는 곳인데 |
環以揷天雲錦壁 | 비단 구름 어린 절벽 하늘 찌르며 빙 둘렀고 |
九淵上下白石素 | 아홉 못 아래 위에 하얀 바위 더욱 흰데 |
明鏡爲底水銀滴 | 환한 거울 바닥으로 수은(水銀)이 떨어지네. |
鼓鬐磨鬣石痕古 | 갈기로 치고 비볐나? 바위에 흔적이 고색창연한데 |
龍之爲變見佛力 | 용이 변화를 부린 모습에서 부처의 힘을 보겠네. |
初淵觀者慄未逼 | 첫 못은 무서워서 보는 이들 다가서지 못하고 |
及至終淵髮皆肅 | 마지막 못에 와서도 머리칼이 빠짝 서네. |
髮森森 步躩躩 | 머리카락 쭈뼛쭈뼛, 발걸음은 주춤주춤 |
松林倚身足底瀑 | 솔숲에 몸 기대니 발아래가 폭포로다. |
冥游諸僧歌霽日 | 명유(冥游)하던 여러 중들 갠 날을 노래하니 |
爾忘風雷閃不測 | 그대들은 바람 우레 순식간의 불측한 변화 잊었도다. |
滄瀛苦闊巖竇小 | 푸른 바다 실로 넓고 바위 샘물 작지만 |
淵雲爲雨沛東國 | 못의 구름 비가 되면 동국 흠뻑 적시리니 |
誰知淵龍非海龍 | 누가 알랴! 못의 용이 해룡이 아님을 |
誰知九淵非一宅 | 누가 알랴! 아홉 못이 하나의 집이 아닌 줄. |
「구룡연가(九龍淵歌)」, 金昌翕, 『三淵集』 권2
이 시는 1685년 김창흡이 세 번째 금강산 유람에서 지은 것이다. 김창흡은 전 생애에 걸쳐 여섯 차례 금강산을 찾았는데, 두 번째 유람까지는 시를 남기지 않았다. 이는 자신의 말대로 금강산의 경관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며【金剛, 我國之山也. 然稱難見, 旣見又稱難詩, 所言來遠矣. 今人始聞金剛有瓌奇壯幻之觀, 則莫不以大心傾之, 又莫不以大事營之, 故卽事鮮辦. 蓋自生其難而未必金剛之爲難. 僅乃一得造焉, 則以彼動搖之心, 卒當不暇之接. 目將瑩焉, 口將胠焉, 氣且瞀焉, 意且閼焉. 求所以敵其雄奇而竟未能奇, 則益枵然而歸. 斯所謂神之不勝也. 余故於金剛遊者再矣, 詩則無一焉. -金昌翕, 『三淵集』 권25 「題兪命岳李夢相金剛錄後」】 금강산의 절경 앞에 허다한 감탄만을 남발하기 보다는 금강산의 절경과 소통할 만한 자신의 내적 역량을 쌓으려 했기 때문이다【詩近方, 文近圓. 定格而後俟感以禦卑, 精思而後出辭以禦易, 積學而後修藻以禦陋, 觸機而後成句以禦鑿. 才情未裕, 景事寡劑, 騖於雄奇莽蒼之觀, 而略於澹蕩優柔之致.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29 「漫錄」[論詩]】. 김창흡의 산수시는 세 번째 금강산 유람으로부터 산수 자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핍진한 묘사와 산수를 마주한 정신적 흥회가 어우러지기 시작하여 산수의 절경 속에서 이치를 구하고 깨달음까지 형상하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김남기, 「삼연 김창흡의 시문학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92면 및 100~101면 참조.】.
시는 비로봉의 높이와 석벽의 협소함을 대비적으로 구사하며 구룡연 물소리를 초점화한 뒤, 물소리의 굉대(宏大)함을 부처에게 쫓겨나 집도 새끼도 잃어버린 용의 울부짖음으로 환치한다. 굉음을 내며 치달리는 물을 구룡연의 설화와 결부시킴으로써 구룡연에는 거센 기세에 신비로움까지 더해지게 된다. 구룡연 주위로는 오색구름이 어우러진 석벽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있고 못가에는 분류(奔流)에 씻긴 바위들이 하얀 빛을 띠며 널려있고 거울 같은 소(沼)로는 수은(水銀) 같은 물방울이 쏟아진다. 바위를 할퀸 물의 흔적을 애통한 용의 몸부림으로 형용한 뒤 구룡연의 폭수(暴水)의 기세를 말하였다. 구룡폭포가 직하하는 첫 못은 접근조차 어려운 전율을 주었는데 그 기세는 마지막 아홉 번째 못에 이르러도 머리카락이 설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초연(初淵)’과 ‘종연(終淵)’을 부조적(浮彫的)으로 상치시켜 현장의 실감(實感)을 증폭시킨 것으로 모자라 전율하는 자기의 모습을 3자 구의 짧은 호흡으로 제시함으로써 구룡연의 장관과 기세는 더욱 생동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같은 생생한 형사를 통해 구룡연을 이미지화한 뒤 김창흡은 자신의 흥회를 붙였다.
함께 했던 중들은 구경을 마친 뒤 현상적 흥취에 빠져있는데 김창흡의 정신은 우주적 이해로 심화된다. ‘창영(滄瀛)’과 ‘암두(巖竇)’를 대소(大小)로 상치시키며 이 못에서 피어난 구름이 비를 내리면 동국(東國)이 흠뻑 젖을 것이라 상상하였는데, 이는 바다의 물이건 바위틈의 샘물이건 근원은 모두 하나의 물[一水]이라는 본원적 차원의 동질성을 자각한 것이다【萬殊之所以一本, 一本之所以萬殊, 如一源之水流出爲萬派, 一根之木生爲許多枝葉. -『朱子語類』 권27】.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구룡연의 용이 바다의 용과 다르고 구룡연 아홉 못이 모두 별개임을 누가 알겠느냐는 표현은 하나의 근원에서 생성된 만유가 무궁한 변화를 직조해내는 생생경(生生境)에 대한 자각이다. 곧 김창흡은 구룡연의 물을 통해 통체태극(統體太極)과 각구태극(各具太極)【自男女而觀之, 則男女各一其性, 而男女一太極也; 自萬物而觀之, 則萬物各一其性, 而萬物一太極也. 蓋合而言之, 萬物統體一太極也; 分而言之, 一物各具一太極也. -『近思錄』 권1】의 본원적 사유에 도달한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생생한 형사를 통해 구룡연을 하나의 활경(活境)으로 그려내고 거기에 일본만수(一本萬殊)의 우주적 통찰을 담아내었다. 다음의 시 또한 생생한 형사와 이지적 흥회가 잘 결합된 작품이다.
洞闢數千里 中成百千瀑 | 골짜기가 수 천리에 열리자 중간 중간 수천 폭포 이루어졌네. |
瀑流被磐石 大抵白玉白 | 폭포 물살 너럭바위를 타고 흘러 백옥과 부딪혀 흰 빛이 되네. |
殷殷起晴雷 颯颯洒飛雪 | 우르릉 마른하늘 우레가 일자 쏴아 쏴아 눈발이 뿌려지는 듯. |
楓林蕩倒光 丹綺燦相射 | 단풍 숲 거꾸로 비쳐 일렁거리니 붉은 비단 반사되어 찬란하구나. |
看看蘊奇秀 應接不暇目 | 볼수록 기수(奇秀)함을 갈무리하여 응접(應接)하느라 내 눈은 겨를이 없다네. |
瑩凈豈堪唾 懔慄自生粟 | 맑고도 차가운 물에 어찌 침을 뱉으랴 오싹하여 저절로 소름 돋는 걸. |
洗盡俗慮醒 稍覺淸明得 | 속된 생각 싹 씻어 각성케 하니 조금씩 깨닫노라! 청명(淸明)을 얻어 감을. |
將此擴充去 可入聖賢域 | 장차 이 청명함을 확충시켜 간다면 성현의 경지에도 들어갈 수 있으리니 |
不必神仙子 飄然蛻眞骨 | 반드시 신선처럼 표연히 탈태하여 진골(眞骨)될 필요 없지. |
「만폭동에서[萬瀑洞]」, 趙正萬, 『寤齋集』 권1
이 시는 조정만이 1691년 금강산을 유람하며 쓴 시이다. 시는 만폭동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1~10)과 만폭동 유람하고 난 감회를 표출한 부분(11~18)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1구와 2구에서 만폭동에 들어서 본 전체적인 모습을 말한 뒤, 시선을 대상에 밀착시켜 형상화를 시작한다. 폭포의 물과 너럭바위가 어우러진 모습을 하얀 옥[너럭바위]에 하얀 빛[폭포 물살]이 더해진다며 감각적으로 형용하였다. 폭포가 너럭바위를 입고 있다[被]고 한 표현도 선명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런 다음 폭포의 모습을 한층 끌어당겨 직류(直流)하는 폭포의 물에 초점을 맞추고 폭포성(瀑布聲)의 기세를 마른하늘의 우레로, 흩날리는 포말을 하얀 눈으로 비유하였다. 폭포수를 보던 시선은 이제 폭포수 밑 소(沼)로 이동한다. 소(沼)에는 붉게 물든 단풍 숲이 도영되어 일렁이고 있었는데, 작가는 이 광경을 실제 단풍 숲과 도영된 단풍 숲이 거울 같은 수면에서 반사되어 서로에게 찬란한 선홍빛을 보낸다고 형용하였다. 그리고 이런 절경을 보느라 눈이 쉴 겨를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태었다.
이 작품의 형사 부분에서 인상적인 것은 작가의 시선 처리와 이미지 창출능력이다. 사진촬영에 빗대어 보면, 작가는 광각의 팬포커스(pan focus)로부터 만폭동을 조금씩 줌인(zoom in)하여 폭포수와 도영된 단풍 숲을 부각하고 주변을 아웃포커스(out focus)하였다. 이러한 시선 처리를 통해 독자는 만폭동의 모습을 광각에서 접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화각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사진촬영에서는 불가능한 촬영하는 작가 자신을 화면 속에 담아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흥취와 몰입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하였다. 여기까지 만으로도 한 편의 시로 손색없는 완성도를 갖추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작가는 초점을 경물에서 자신에게로 옮겨 이어질 신사(神似)를 예비한다. 또한 이미지 창출과 관련해서는 하얗고 투명한 색조에 붉은 색조를 곁들임으로써 백색은 더 하얗게 홍색은 더 선명해지게 하였는데, 이를 통해 독자는 시를 읽으며 눈이 정화되는 듯한 심미적 효과를 느끼게 된다. 또한 이렇게 창출된 맑고 선명한 이미지는 이어지는 부분에서의 마음의 청명(淸明)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작가는 신사의 첫 부분에서 소름이 돋는다고 하였다. 소름[粟]은 만폭동에서 얻은 정신적 쾌(快)를 구상화한 시어인데, 작가가 얻은 쾌는 속된 생각을 씻어버리고 정신의 각성을 얻은 데서 발현된 것이었다. 일체의 속된 생각이 씻겨나간 자리를 채운 것은 마음의 청명(淸明)함이었다. 조정만이 얻은 마음의 청명은, 앞서 이하곤이 말한 대로 명산(名山) 이경(異境)의 청명(淸明)하고 수아(秀異)한 기운을 얻은 것으로 천리를 체인할 수 있는 마음의 허명정일(虛明靜一)한 상태와 통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 청명함을 확충시켜 가면 성현의 경지에도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수양론에 관해서는 김창협의 다음 글이 참조가 된다. “至於‘衆人無靜時’, 未知道以果曾有此說否, 而愚謂未可如此說殺. 昔南軒嘗謂‘衆人無未發時’, 胡廣仲以爲疑, 而朱子論之曰‘ 亦隨人稟賦不同’, 此言最當. 蓋雖非聖賢, 性靜而寡欲者, 亦自有此時節, 其餘則雖有而絶少, 最下者則全無焉. 雖須臾之間, 而此心未發, 則所謂中者, 固卽此而在, 但無戒懼工夫, 體而存之, 是以旋又汩沒失之耳. 衆人之所以異於聖賢, 只在於此. 今謂‘衆人元無靜時’, 則固太過. 而若謂‘衆人之未發, 不足以爲中’, 則是天命之性, 其在衆人, 却不能無偏倚矣, 其爲不識大本, 顧不甚哉! -金昌協, 『農巖集』 권19 「答道以」” 김창협은 보통 사람도 그 기질과 수양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미발의 때가 있으니 계구(戒懼)를 통해 미발시의 마음, 즉 심(心)의 허정(虛靜)한 상태를 확장 시켜나가면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마지막 두 구절은 신선술이나 다른 이단의 학설처럼 대번에 도를 얻으려 하지 않고 지난하지만【주자학의 지난한 학문과 수양과정을 이단(異端) 학설의 손쉬움과 대비하는 인식은 다수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인식은 일반적으로 이단(異端)의 경박함과 사학(斯學)의 근실함으로 대비된다. “至於大明之世, 王守仁輩繼出, 陸說大行, 朱學幾絶矣. 光運曰: ‘大抵心本虛明, 禪學以心觀心, 心上少有光明, 則謂之頓悟. 吾儒之學, 博雅然後, 一以貫之, 其工夫階梯甚多, 學者厭其高遠, 以禪學視爲捷逕, 靡然趨之, 宗普者出, 而假托儒家文字, 粧撰說出, 學者之誑惑益甚. 至如九淵之學, 一味禪會, 陽托尊儒, 陰諱其學, 雖以鴛鴦繡出從君看, 莫把金針度與人之句見之, 可知其全諱其學矣, 朱子生前, 其說只行於江西, 而王陽明輩出後, 遂大行於一世, 道德之學, 幾乎熄矣.’ -『承政院日記』 영조 4년 3월 1일”】 도를 추구하며 학문과 수양에 정진하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시는 만폭동의 경치를 맑고 선명한 이미지로 형사하면서 그것을 작가의 정신적 흥과 각성으로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형사와 신사의 유기성이 잘 발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앞서 김창흡의 「구룡연가」와 비교해보면 형신을 통해 대상을 형상화한 점은 같지만, 김창흡의 시가 주된 제재였던 물과 용을 작품의 신사(神似) 부분까지 일관되게 유지하여 시상과 정감의 통일성을 높이고 시적 흥취를 고양시킨 반면, 조정만의 시는 신사 부분에서 이치를 직출함으로써 정감의 유기성과 시적 흥취가 다소 떨어지게 되었다. 대신 조정만의 시는 이 신사를 통해 근실하고 방정한 의론성을 획득하였다.
두 작품이 보인 시적 경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은 모두 산수를 정신으로 체득하고 그것을 형신을 통해 드러냈다는 점에서 같다. 그렇다면 이 같은 차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바로 작가 각자의 개성이요, 작가 각자의 ‘진(眞)’이라 할 수 있다. 김창흡의 시를 읽으면 김창흡의 사람됨을, 조정만의 시를 읽으면 조정만의 사람됨을 볼 수 있는 것, 또한 실제의 경험을 통해 얻은 자기대로의 정감을 粉飾하지 않기 때문에 천편일률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 바로 이것이 ‘진시’의 지향이었음을 상기해보면, 두 시편 모두 ‘진시’의 지향과 실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본 두 편의 시는 전신(傳神)한 바가 대단히 사변적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백악시단의 산수시가 모두 다 이렇듯 사변적인 신사를 하고 있지는 않다. 다음에 살필 작품은 유람의 흥취를 잘 담아내었다.
萬二千巖各滴淙 | 만 이천 봉 각각에서 방울져 떨어진 물 |
合爲轟瀑觸爐峰 | 합쳐져 폭포 되어 향로봉에 부딪치네. |
雷霆㙜怖雙靑鶴 | 대에 깃든 쌍청학은 우레 천둥 두려운데 |
雪雹潭噴五色龍 | 못에 서린 오색용은 눈과 우박 내뿜네. |
金地無蹊唯鐵鎖 | 금지(金地)엔 길도 없어 오직 쇠사슬뿐이요 |
玉山何水不珠舂 | 옥산(玉山)이라 어느 물인들 구슬 방아 안 찧으랴! |
飛流濺沫從他怒 | 날리는 물줄기 흩뿌린 물방울 예서 더욱 거세지니 |
只恐蓬萊字滅蹤 | 양봉래 새긴 글자 다 지울까 걱정일세. |
「만폭동(萬瀑洞)」, 趙裕壽, 『后溪集』 권2
만폭동은 내금강을 대표하는 명승으로 금강문으로부터 화룡담까지의 구간을 가리킨다. 이곳은 금강산 수천 지류의 물이 한데 모여 기암괴석과 격류(激流)하는 곳으로 많은 폭포와 沼가 금강산의 계곡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리용준·오희복 공역, 『금강산 한시집』, 문예출판사[평양], 1989, 172면 참조.】. 김창협은 이곳 만폭동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곳 만폭동은 전체가 거대한 반석이 깔려있는데 바위는 모두 옥처럼 하얗다. 시냇물은 비로봉에서 내려와 여러 골짜기를 교차해서 흘러내려 다투어 내달리다 모두 이 만폭동에 모여든다. 만폭동의 바위 중에 험준하게 들쭉날쭉하고 얼기설기 얽혀 평탄하지 않은 것들은 또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어져 있으면서 계곡물과 기세를 겨룬다. 물이 이러한 바위를 만나면 반드시 치달리다 솟구치고 부딪쳤다 잦아들며 온갖 변화를 다 보인 뒤에야 비로소 성난 기세를 누그러뜨려 천천히 흘러 평탄한 시내가 되고 얕은 여울이 된다. 그러다 중간에 낭떠러지를 만나면 다시 떨어져 폭포가 되고, 폭포 아래에서 다시 고여 소가 된다. 폭포는 길이가 6, 7길에서 1, 2길 사이이고, 못은 넓이가 7, 8묘(畝)에서 3, 4무 사이로, 못의 이름은 구담(龜潭), 선담(船潭), 청룡담(靑龍潭), 흑룡담(黑龍潭), 응벽담(凝碧潭), 진주담(眞珠潭), 청유리담(靑琉璃潭), 황유리담(黃琉璃潭) 등인데, 벽하담(碧霞潭)이 가장 아름답고 화룡담(火龍潭)이 가장 웅장하다. 이것이 만폭동의 대략이니, 상세한 것은 나로서는 다 형언할 수가 없다.
蓋是洞全以大盤石爲底, 石皆白色如玉. 而溪水自毗盧峰以下, 衆壑交流, 奔趨爭先, 咸會于是洞. 石之嶔崎磊落、槎牙齦齶者, 又離列錯置, 以與水相爭, 水遇石必奔騰擊薄, 以盡其變, 然後始拗怒徐行, 爲平川爲淺瀨. 間遇懸崖絶壁, 又落而爲瀑, 瀑下又滙而爲潭. 瀑長自六七丈至一二丈, 潭廣自七八畝至三數畝. 其名爲龜爲船, 爲靑龍、黑龍, 爲凝碧, 爲眞珠, 爲靑琉璃、黃琉璃, 而碧霞最奇麗, 火龍最雄大. 此其大略也. 其詳則余無得以窮焉. -金昌協, 『農巖集』 권23 「東遊記」
조유수의 시 또한 만폭동의 격류가 빚어내는 변화무쌍한 기세를 형상화하였다. 수련에서는 수천 지류가 합류하여 폭포를 이룬 모습을 그렸고, 함련에서는 폭포의 위세를 비유적으로 묘사하였다. 우레와 천둥으로 비유된 폭포성은 석벽[청학대] 높이 사는 학마저 무서워할 정도라며 그 기세를 실감나게 형상화하였고 폭포수가 만들어내는 포말과 연무는 오색룡이 내뿜는 것으로 신비화시켰다. 경련에서는 폭포 주변의 경관을 담았다. 금지(金地)는 본래 사원을 가리키는 말로【『釋氏要覽』上: ‘金地或云金田, 即舍衛國給孤長者, 側布黃金, 買祇太子園, 建精舍, 請之居之.’ -『漢語大詞典』 [金地]】, 여기서는 보덕암을 가리킨다. 쇠줄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듯한 보덕암의 모습을 제시한 것은 폭포수가 금세라도 보덕암이 매달린 암벽을 쳐부술 듯 그 기세가 엄청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로써 폭포의 기세는 더욱 격해지고 보덕암은 더욱 아슬아슬해지는 실감이 증폭된다. 또한 하얀 옥을 깎아 만든 듯한 향로봉에 엄청난 기세의 폭포수가 떨어지니 거기서 솟구치는 물방울들은 마치 옥을 빻아 만든 구슬 같다고 하였다. 폭포수의 기세는 미련으로 이어진다. 옥산에 부딪혀 더욱 거세어진 물줄기는 물방울을 사방으로 토해내는데 그 물방울이 양사언의 글자를 다 지울까 걱정일 정도라고 하였다. 김창협은 “양봉래(楊蓬萊)가 쓴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용이 꿈틀대는 듯한 필치가 산세와 자웅을 겨루는 듯했다[楊蓬萊所書‘蓬萊楓嶽元化洞天’八大字刻在石面, 龍挐猊攫, 幾欲與嶽勢爭雄. -金昌協, 『農巖集』 권23 「東遊記」].”면서 양사언 글씨의 기세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조유수는 그런 양사언 글씨마저 지워버릴 기세라며 시상을 마무리 하였다.
조유수의 이 시는 거센 폭류(瀑流)가 일체의 속된 생각을 씻어 청정해졌을 작가의 정신 상태는 독자들로 하여금 행간에서 읽도록 하고, 오직 산수가 주는 흥취를 전면화한 점이 앞서 본 두 작품과 다르다. 그래서 조유수는 그런 흥취를 형상화하기 위해 감각적인 비유, 호한한 연상을 활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 작품은 만폭동의 기세와 짝하는 호쾌한 미감을 성취할 수 있었다.
한편 백악시단의 산수시 가운데는 형사의 비중을 압도적으로 높여 현장감과 실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작품들도 있다.
衆壑遍淸絶 玆谷信靈邃 | 여러 골짜기 두루 맑고 빼어났지만 이 골짝은 참으로 신령스럽고 깊구나. |
秀巒似留雪 喬栝如揷翠 | 우뚝한 봉우리는 눈이 아직 남은 듯 높이 솟은 회나무는 비취를 꽂아둔 듯. |
泠泠巖溜滴 淺淺石瀨駛 | 똑똑똑 벼랑에선 물방울이 떨어지고 콸콸콸 바위에선 거센 물살 쏟아지네. |
荒塗屢迷惑 灌木恒森緻 | 험한 길이라 여러 차례 길을 헤매는데 관목들은 언제나 빽빽하구나. |
振策躡先登 蔭樾企後至 | 지팡이 떨쳐 잡고 한 발 한 발 먼저 올라 그늘에서 뒷사람들 오기를 기다리니 |
魚貫緣絶壁 猿掛窺無地 | 물고기를 꿴 듯 절벽에 바싹 붙고 원숭이처럼 매달려 디딜 곳을 엿보네. |
遊陟旣告勞 探眺彌恣意 | 높은 곳 유람은 전부터 힘들다고들 하니 차근차근 조망하길 오래도록 실컷 하네. |
遙畛辨綺錯 遠村俯棊置 | 저 멀리 들판은 비단이 뒤섞인 듯 저 먼 마을은 바둑돌을 늘어놓은 듯. |
雲日翳崦嵫 霜木耀崖寺 | 태양은 어느덧 엄자산(崦嵫山)으로 사라지고 서리 내린 나무가 벼랑 위 절집에 환하구나. |
沈吟悄欲下 揮管發幽思 | 시 읊을 적엔 시름겨워 내려가고 싶더니 젓대소리 울리자 그윽한 생각 일어나누나. |
「선암(船庵)」, 金昌業, 『老稼齋集』 권1
선암은 수미봉 아래에 있는데 암자의 위치가 대단히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선암이라는 명칭이 금강산이 바닷물에 잠겼을 적에 암자 아래에 배를 대어두었기 때문에 생겼다고 할 만큼 높고도 험한 곳이다【在須彌峯下, 處地極高絶. 僧傳玆山爲海所沈, 曾泊舡於庵下, 以此得名云. 語甚誕妄矣. -李夏坤, 『頭陀草』책5 「船庵」의 주석】. 이재(頤齋) 이의숙(李義肅, ?~1807)은 “암자는 높고 외진데다 대단히 위험하여 오는 이가 드물다. 높은 산봉우리들을 등지고 좌우로 높은 산줄기가 벌려 섰는데…(중략)…원통, 소망과 같은 여러 산봉우리들도 여기에 이르면 모두 앉아서 어루만질 듯하였다. 산 너머로 들이 보이고 들 너머로 멀리 산봉우리가 솟아있었다. 길이 암자 서북쪽으로 뻗어있는데 뱀이 기어가듯 구불거렸다. 혹 높은 벼랑에 길이 끊긴 곳에는 잡고 오를 쇠밧줄이 늘어져 있었는데 줄을 잡고 올라오자 또 다시 험난함이 처음 같았다. 무릇 3리쯤 머리를 숙이고 내려오니 선암이라 하였다[庵峻僻竆危, 罕致人. 負嶐峯, 左右列巘, …(中略)… 圓通、所望諸崗, 至是皆坐拊, 山外見野, 野外出遠岑. 逕出庵西北, 蛇緣跉行, 或崱壁斷道, 垂鐵鎖令攀引乃昇, 旣昇又澁難如初. 凡三數里, 方俛而降, 呼船庵. -李義肅, 『頤齋集』 권4 「金剛評」 중 船庵].”라며 선암의 높고 험난함을 묘사하였다.
김창업의 시 또한 높고 험한 선암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김창업은 금강산 여러 골짜기 가운데 이곳을 가장 신령스럽고 깊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선암(船庵)까지 이르는 길에서 본 풍경과 체험을 감각적이면서도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우뚝한 봉우리는 백설이 덮인 듯 하얀 빛을 띠고, 쭉 뻗어 자란 회나무는 비취를 꽂아둔 듯하다며 비유를 통해 선명한 색채 이미지를 구사하였다. 뒤처진 사람들이 험로를 어렵사리 따라오는 모습 또한 대단히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벼랑에 딱 붙어 줄지어 가는 사람을 물고기 꿰미에 비유하고, 벼랑에 매달려 가는 사람을 원숭이에 비유하였다. 특히 원숭이처럼 매달려 발 디딜 곳을 찾아보건만 변변히 디딜 곳이 없다는 데 이르러선 아슬아슬한 실감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렇듯 험난한 길을 오른 시인은 고생한 보람을 오랜 조망에서 찾았다.
이의숙의 글에서도 들판에 대한 조망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김창업은 보다 감각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김창업은 붉은 빛의 단풍과 초록의 상록수와 그 사이로 보이는 황금빛 들녘의 빛깔을 뒤섞인 비단이라 묘사하였고, 들판에 붙어 아스라이 보이는 마을을 두고선 바둑알을 늘어놓은 듯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가 지고 달이 오르자 더욱 적막해진 선암에서 쓸쓸함을 느꼈던 시인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젓대소리에 그윽한 생각이 인다며 짧은 소회로 시상을 마무리하였다. 마지막 부분의 짧은 소회는 작가가 주제의식을 직출하기 보다는 다층적 해석 가능성을 열어둔 모호성(ambiguity)을 통해 시적 운치를 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감각적이고 실감나는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전체 20구 가운데 처음 2구와 마지막 2구를 제외한 16구가 생생한 형사로 이루어져 있다. 김창업이 이렇듯 형사의 비중을 압도적으로 높여 형상화한 것은 이런 형사만으로도 작가의 흥회를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창업은 형상의 비중을 압도적으로 높였지만 앞의 세 작품처럼 형사와 전신을 확연히 구분 지었다. 그러나 이제 살필 작품들은 형사와 신사의 경계를 허물고 형사 속에 신사를 더욱 공교롭게 온축한 작품들이다. 먼저 김시보의 작품을 보자.
遙夜宿崖寺 白雲生我衾 | 긴긴 밤을 벼랑 위 절에서 묵었더니 덮고 잤던 이불에서 흰구름이 피어나네. |
晨興讀遺碑 因以訪息菴 | 새벽에 일어나 비문 읽다가 마침내 식암을 찾게 되었네. |
遠望曖垂藤 稍入驚棲禽 | 멀리서 볼 적엔 드리운 덩굴로 어둑하더니 조금씩 들어가자 자던 새들이 놀라네. |
數椽出林杪 苔逕無人尋 | 두어 서까래 숲 끝에 솟았는데 이끼 낀 길엔 사람 흔적 전혀 없구나. |
昔聞眞樂公 於此遯世深 | 듣자하니 지난날 진락공(眞樂公)께서 이곳으로 세상 피해 깊이 숨었다는데 |
至今面壁處 千尺石嶔岑 | 지금 와보니 면벽하던 곳은 천 길 바위 절벽 까마득하네. |
流水無時已 盥盆宛溪潯 | 흐르는 물 그친 적이 없는데 대야처럼 움푹한 곳 물가에 있네. |
神飈颯然至 落葉滿廢龕 | 신령한 바람이 휙 불더니 낙엽이 버려진 감실에 가득 쌓이네. |
「식암(息菴)」, 金時保, 『茅洲集』 권5
이 시는 김시보가 55세 되던 1712년에 양구현감(楊溝縣監)으로 부임하면서 청평(淸平)의 식암(息菴)에 들러 지은 시이다. 이 시는 식암에 가보지 않았던 사람도 식암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인적이 없어 덩굴이 시커멓게 드리워져 있고 축축한 습기로 파란 이끼가 무성히 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자그마한 암자가 숲 끝으로 나타나는데, 그곳에는 까마득한 바위 절벽이 우뚝 버티고 서 있고 바위 절벽을 타고 물줄기가 내려오며 물이 떨어지는 곳엔 움푹 팬 바위가 마치 대야처럼 물을 담고 있다. 시를 읽으며 이런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은 이 시가 지닌 묘사력, 즉 생생한 형사(形似)의 효과이다.
그런데 전편이 형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제시된 경관이 실제의 경관임과 동시에 작가의 정신적 감수가 투사된 경관이라는 점이다. 형사를 통해 제시된 장면들을 다시 살펴보자. 흰 구름이 이불에서 피어날 만큼 높은 사찰은 이곳이 범상한 속객들이 찾을 공간이 아님을 의미한다. 멀리서 볼 적에는 덩굴 천지로만 보인다는 5구 또한 이곳을 절속의 공간으로 여기는 작가의 정신적 흥회가 반영된 것이다. 인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새도 아직 잠든 때에 시인이 이곳을 찾은 까닭은 무엇인가? 이곳이 바로 청평거사 이자현이 세상을 피해 은둔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김상헌의 기록에 따르면 식암은 고니알 만하여 두 무릎을 굽혀야 앉을 수 있는데, 이자현은 이곳에서 몇 달씩 묵묵히 수양을 쌓았다고 한다【시냇가를 따라 올라가 오른쪽으로 돌아서 6, 7리가량 가면 선동(仙洞)으로 들어가는데 구불구불하고 그윽한 곳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다. 암자 뒤의 석벽(石壁)에는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는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 진락공(眞樂公, 李資玄)의 글씨라고 한다. 구지(舊誌)에 “식암은 둥글기가 고니의 알과 같아서 겨우 두 무릎을 구부려야 앉을 수가 있는데, (이자현은) 그 속에 묵묵히 앉아 있으면서 몇 달 동안 나오지 않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의 작은 암자는 바로 후대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암자 뒤에는 또 나한전(羅漢殿)이 있다. 나한전의 앞에는 계곡물이 절벽을 타고 흐른다. 석대(石臺) 아래에는 돌을 파낸 곳이 두 곳이 있었는데, 진락공이 손을 씻던 곳이다. 석대의 북쪽 바위 사이에는 고기(古器)가 보관되어 있는데, 일찍이 비가 와서 무너졌을 때 열린 적이 있었는데 전해 오는 말로는 진락공의 뼈가 묻힌 곳이라고 한다. 진락(眞樂)은 이자현이 바꾼 이름이다[由川上右轉六七里, 入仙洞, 崎嶇窈窕, 有小庵. 庵後石壁刻‘淸平息庵’四大字, 眞樂公筆云. 舊誌‘息庵團圓如鵠卵, 只得盤兩膝, 默坐其中, 數月不出者’, 卽此也. 今之小庵, 乃後人所建. 庵後又有羅漢殿, 殿前懸流側壁. 石臺下鑿石二所, 眞樂公盥盆. 臺北巖間藏古器, 嘗雨塌開視, 流傳眞樂瘞骨處. 眞樂者, 李資玄易名也 -金尙憲, 『淸陰集』 권10「淸平錄」「息菴」]】. 시인이 착목한 천 길 바위는 곧 이자현의 정신적 높이를 비유한다. 또한 시인의 시선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물줄기와 움푹한 바위에 담긴 물을 포착한 것은 부단한 수양의 모습과 그 결과 얻어진 청허(淸虛)의 마음을 은유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듯 김시보는 자기 흥회를 시의 외면으로 발출하지 않고 경관을 형사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신령한 바람이 휙 불더니 낙엽이 버려진 감실에 가득 쌓이네.’라고 한 표현은 시인 자신과 이자현의 정신적 공명을 암시하는 부분으로 전신(傳神)이 극대화된 곳이다. 시인은 방치된 감실(龕室)에 낙엽만 수북한, 퇴락한 감실의 모습을 통해 이자현과 같은 사람이 제대로 기려지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런데 시인은 낙엽을 불어 날린 바람을 ‘신표(神飈)’라 하였다. 여기서의 ‘신(神)’은 시인이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한 시어로 보다 적극적인 해석을 요한다. 흡사, 노래가 끝나자 바람이 불어 지전이 서쪽으로 날아갔다던 제망매가의 경우처럼, 자신의 정신을 담은 시가 일종의 감통을 보였음을 암시하고 있는 시어가 바로 ‘신(神)’인 것이다. 즉,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이자현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자현과 같은 초속적 삶의 경지가 식암 방문을 통해 시인 자신에게서도 의미 깊게 고양되었다는, 정신적 공명(共鳴)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김시보는 선경후정(先景後情) 식의 기계적 형신 결합을 벗어나 형(形)이 곧 신(神)이 되도록 하는 형상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경향은 아래 이병연의 시에도 잘 드러난다.
첫 번째
黃葉森森靜不飛 | 누런 잎들 빽빽하여 고요히 날리지 않는데 |
獨隨流水出禪扉 | 홀로 물을 따라 절집 문을 나섰더니 |
公然瀑布生風雨 | 넓게 트인 폭포에는 비바람이 일어나고 |
無數峯巒盡夕暉 | 무수한 봉우리엔 저녁 햇살 다해가네. |
龍卧九淵何日起 | 아홉 못에 누운 용은 어느 날에 일어날까 |
鶴辭西嶺別天歸 | 서쪽 봉을 떠났던 학 별계(別界)로 돌아오네. |
徘徊上下情何極 | 상하를 배회한들 정이 어찌 다할쏘냐? |
漠漠三淸碧樹圍 | 끝없는 삼청(三淸)에 푸른 숲이 둘러있네. |
두 번째
欲從何處問源頭 | 어디서부터 물의 근원 찾아야 하나? |
深淺相通上下求 | 깊고 얕게 서로 통해 위아래로 찾아보네. |
擾擾側峯爭隙地 | 비쭉비쭉 기운 봉우리 빈 땅을 다투고 |
蒼蒼橫嶺界高秋 | 창창하게 뻗은 능선 가을 하늘 가르네. |
洞開洞裏不窮路 | 골짜기 속에 또 골짜기 길은 끝없고 |
潭落潭中無靜流 | 못 속으로 못이 떨어져 고요한 물 없구나. |
薄暮如聞雲外磬 | 박모(薄暮)에 구름 너머 경쇠소리 들리는 듯하니 |
中林漠漠忽生愁 | 깊은 숲 속 막막하여 홀연 시름 이는구나. |
「만폭동에서(萬瀑洞)」, 李秉淵, 『槎川詩抄』卷上
이병연은 1710년 금강산 초도의 김화(金化)에 부임하면서 금강산을 유람할 수 있었다. 이병연은 김화현감(金化縣監) 시절, 두 차례의 금강산 유람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첫 번째 유람은 스승이었던 김창흡과, 두 번째 유람은 부친 이속(李涑), 아우 이병성, 벗 장응두(張應斗)와 정선이 함께 하였다. 이 시는 첫 번째 유람에서 지어진 시이다.
이 시는 저물녘 만폭동을 거닐며 쓴 시이다. 첫 번째 수의 수련은 작시의 정황을 보여준다. 저물녘 홀로 물길을 따라 산책을 나섰더니 바람 한 점 없던 절집과는 달리 만폭동의 폭포에서는 비바람이 일어나고 사방을 옹위한 산으로는 해가 지고 있다. 고요한 채 날리지 않는 나뭇잎과 폭포의 비바람을 대비한 것은 이곳 만폭동이 별계(別界)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특별한 공간에서 작가는 문득 묘한 생각에 잠긴다. 밤이 되면 못에서 자던 용이 일어나고 둥지를 떠났던 학은 신선을 태우고 올 것이라는 상상이 그것인데, 작가는 이러한 상상의 내용을 ‘용은 언제 일어날까?’라는 의문과 둥지를 찾아드는 학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이런 상상을 경련에 제시한 것은 밤이 되면 꼭 별계의 세상이 열릴 것만 같은 만폭동의 기위(奇瑋)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묘한 생각에 잠기자 작가의 감정은 더욱 묘연해진다. 그래서 만폭동 이곳저곳을 배회해 보지만 보이는 건 ‘삼청(三淸)을 두르고 있는 푸른 숲’ 뿐이다. ‘삼청(三淸)’은 도교 최고의 선경(仙境)인 삼청경(三淸境)인데, 이병연은 만폭동을 삼청(三淸)으로 환치시켜 기이한 흥감을 표현하였다.
두 번째 수는 만폭동의 ‘원두(源頭)’를 찾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첫 번째 수에서 만폭동을 별계로 형상화한 이병연은 그 원두(源頭)를 찾고 싶다는 소망으로 두 번째 수를 시작하였다. 수없는 물줄기들이 합류하는 계곡이라 어디서부터 물의 근원을 찾아야 하는지 막막하지만 작가는 선경의 근원을 찾고 싶어 만폭동 이곳저곳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만폭동에서 원두(源頭)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두를 찾아 물을 거슬러 올라가니 기우뚱해 보일 만큼 높은 산들이 빼곡히 서 있고 능선들은 높은 가을 하늘을 가르며 뻗어있다. 골짜기를 찾아 들어가면 또 다른 골짜기가 이어지고 골짜기마다에는 못에서 못으로 이어지는 물살이 분류(奔流)한다. 그러다 홀연 경쇠소리가 나는 것 같아 돌아보니 이미 날은 저물고 절은 구름 저편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작가는 이내 걱정이 앞선다.
두 번째 수에서 형상화한 원두(源頭) 찾기 과정은 작가가 만폭동에 심취해가는 과정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직 시선을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못에서 못으로 붙인 채 시간도 잊고 돌아갈 줄도 잊은 작가의 모습은 일종의 삼매(三昧) 상태이다. 이병연은 이 시 어디에서도 자기의 흥회를 직접 노출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행위와 자신이 본 광경만을 보였을 뿐이다【마지막 구의 ‘시름[愁]’이 감정을 표현한 시어이기는 하나 이때의 시름은 화자의 실제 걱정을 드러내기 위해 구사된 것이 아니라 돌아갈 길을 걱정할 정도로 만폭동에 푹 빠졌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병연이 얻은 정신적 흥회는 앞서 이하곤이 “무릇 산수를 잘 보는 자는 넓고 높은 그 가운데 정신을 응결시키기 때문에 천지의 고후(高厚), 일월의 광명을 거의 알지 못하고 사슴들이 앞에서 흥해도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우레와 천둥이 뒤에서 요란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릇 폐와 내장에 삐쭉한 것은 모두 나무와 바위이며 코와 입으로 호흡한 것은 모두 안개와 남기이니 대저 이 같은 연후에야 산수의 취(趣)를 깊이 얻었다 할 만하다.”라고 한 그 상태이다. 그런데 이병연은 자신이 얻은 산수의 취를 가령 ‘여기 와서 진정으로 산수의 취(趣)를 얻었다’는 식으로 직출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
그렇다면 이병연은 왜 이러한 형상화를 시도한 것인가? 작가의 직접적인 신사(神似) 노출은 시적 함축이 지니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명(共鳴)의 묘를 저해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얻은 정신적 흥회는 작가의 일방적 선언보다는 독자가 시를 읽으며 행간에서 그것을 만났을 때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병연의 정신적 경지는 바로 만폭동에 심취해 시간도 잊은 채 만폭동 계곡을 헤매는 그 모습에 있다. 이처럼 형신의 기계적 배열을 지양하고 형사만으로 신사를 온축하는 형상화 방식은 이병연의 특징적 작시 방식이다【이러한 형상화 방식은 독자가 작품 속에 온축된 작가의 정신을 찾을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독자가 작가의 감춰진 의사를 찾지 못하면 싱겁고 밋밋한 작품이 되고 마는 특징을 지닌다. 그래서 이병연을 위시한 후기 백악시단의 시 작품들은 진중하지 못하거나 정신성이 약한 것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작품에 대한 감수가 온전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막 쓴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이병연 시의 특징을 김창흡은 ‘閒肆精深仍自化 -安重觀, 『悔窩集』 권2 「寄三陟守李一源」’라고 하였고, 심노숭은 “일부 논자(論者)들은 ‘공의 시가 백거이(白居易)·육유(陸游)의 사이에서 나와 속된 말 쓰기를 좋아하여 간혹 장난에 가깝고, 법도가 없어 끝내 평이한 데로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이 아니다. 크고 고우면서도 제 마음대로 구가하고, 깊은 맛이 있으면서 스스로 오묘함이 맞으니 공(空) 안의 상(相), 상(相) 밖의 울림이 있다[論者言‘公詩出白陸之間, 喜使俚語, 或近俳諧, 不有典則, 卒歸流易’, 此非知言也. 巨麗而惟意驅架, 雋永而自契悟妙, 空裏之相相外之響. -沈魯崇, 『孝田散稿』35책 「槎川選詩敘」]라고 하였다.】.
김시보와 이병연이 보인 형사와 신사의 경계 허물기는 보여주기를 전면화한 작품을 낳기도 하였다.
두 번째 수(其二)
睡起吾閒步 山深誰復過 | 자리에서 일어나 한가로이 걷노라니 산이 깊어 누가 다시 이 길을 지났으랴! |
峰陰渾欲霧 林雪自開花 | 산그늘은 온통 안개 낀 듯 어둑한데 숲 속에 내린 눈은 절로 꽃으로 피었구나. |
石怪盤松老 菴憐畵佛多 | 괴이해라! 소나무는 바위에 서려 늙어가고 가련해라! 부처는 암자 벽화 속에 많구나. |
鐘鳴齋飯熟 啼啄有寒鴉 | 종 울리자 절밥이 다 됐나보다 까악까악 찬 까마귀 우는 것 보니. |
「관음사에서(觀音寺)」, 朴泰觀, 『凝齋遺稿』卷上
박태관은 관음사에 들러 스님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이러한 정황은 첫 번째 수에 보인다. 첫 번째 수는 다음과 같다. “重創蓮宮淨, 初來雪徑淸. 崖巖欹未墜, 寺地斸能平. 獨立檜何直, 孤懸月自明. 夜寒僧不睡, 爐火語深更. -같은 시, 其一”】 다음날 이른 새벽 홀로 산책을 나섰다. 발자국 하나 없는 첫새벽의 눈을 밟으며 박태관은 청정무구의 세계에 빠져든다. 안개가 낀 듯 자욱한 산길에는 가지마다 눈꽃이 피어있고, 하얀 눈을 인 노송은 차가운 바위에 뿌리를 내린 채 서려 있으며, 암자 벽의 그림 부처도 눈 속에 무방비다. 이 시의 묘미는 미련(尾聯)에 있다. 청정 세계에 빠져든 작가는 홀연 종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종소리를 따라 선문에 들어서려는데 어디선가 까마귀들이 날아와 부리로 쪼아대며 울고 있다. 박태관은 이 상황을 아침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에 까마귀들이 자기보다 먼저 알고 절집으로 모여 든 것으로 절묘하게 엮어냈다. 여기에 박태관의 시인으로서의 출중한 역량이 드러난다. 박태관이 본 장면은 사실 우연한 하나의 사건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박태관의 안목은 까마귀들이 종이 울리면 으레 절에 와서 아침밥을 공양 받았던 것으로 그리고 있다. 우연일 수도 있는 장면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이 작품 전체를 통관하는 ‘청정’에 정점을 찍는다. 박태관은 눈 내린 절집의 한 장면에서 나[我]와 저[彼], 인(人)과 물(物), 속(俗)과 선(禪) 등 일체의 차별이 무화(無化)된 진여(眞如)의 세계를 읽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이처럼 보여주기를 전면화하면서도 심원한 의취를 수준 높게 형상화하였다.
또한, 형사 위주의 형상화는 시를 한 폭의 그림이 되도록 하였다.
두 번째 수
扁舟一曲採菱歌 | 조각배엔 한 자락 채릉가 노래 소리 |
落日飛霞水底多 | 지는 해 나는 노을 물 밑으로 쌓여 드네. |
三十六峯渾得瘦 | 서른여섯 봉우리들 모두 바짝 야위어서 |
不堪秋影漾淸波 | 가을 그림자 일렁일렁 맑은 물결 힘겨워하네. |
「삼일호(三日湖)·2」, 李秉淵, 『槎川詩抄』卷上
對石門開巧 層濤蹴馬蹄 | 마주한 바위 교묘하게 문이 되어 층층 파도 말발굽을 치네. |
棠紅春後色 千里白沙堤 | 봄 간 뒤라 해당화 붉어졌는데 천리 길엔 흰 모래 언덕. |
「문암(門岩)」, 權燮, 『玉所稿』 「詩·11」「關東十六爲任士敬作」 중 13수)
삼일포는 강원도 고성에 있는 호수로, 호수 가운데 사선(四仙)이 3일 동안 놀다 갔다는 사선정(四仙亭)이 있다. 김창협은 이곳에서의 유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식사를 한 뒤 삼일포를 찾아가 관람하였다. 삼일포는 둘레가 10여 리쯤 되는데 밖으로는 36개의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다. 안에는 작은 섬 하나가 있는데, 붉은 누각이 그 위에 높이 세워져 있었으니 이름하여 사선정(四仙亭)이라 하였다. …(중략)… 노를 저어 물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물이 깊고 넓어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굽어보면 마름풀 사이로 헤엄치는 물고기를 또렷이 셀 수 있었으니 그 맑기가 이와 같았다.
飯後, 往觀三日浦. 周遭可十餘里, 外有三十六峰環之. 中則小島兀然, 朱甍出其上, 曰四仙亭. …(中略)… 棹船入中流, 滉漾渺瀰, 若不見涯涘者, 而俯視荇藻間, 游魚歷歷可數, 其淸如此. -金昌協, 『農巖集』 권23 「東游記」
이병연의 시는 김창협의 기문에서처럼 배를 타고 사선정으로 들어가면서 지은 것이다. 이병연은 저물녘 삼일호의 수면을 한 폭의 그림으로 포착하였다. 수면에는 낙일(落日)과 노을, 그리고 호수를 둘러싼 서른여섯 봉우리의 도영(倒影)이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이 화면 속으로 채릉가 노랫가락이 울려 퍼진다. 이병연의 시적 역량은 절묘한 순간을 포착해내는 능력과 또 그것을 절묘하게 형상화하는 능력에 나온다. 이병연은 지는 해와 노을이 수면에 비치는 것을 물밑으로 차곡차곡 쌓여 많아지는[多] 것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붉은 노을이 물결을 따라 일렁이며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도영된 산의 모습을 ‘바짝 야위었다[渾得瘦]’라고 표현함으로써 잎을 다 떨군 산을 수경(瘦勁)한 멋으로 다시 살렸다. 묘미는 결구에 있다. 이병연은 비쳐든 산 그림자가 물결에 일렁이는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不堪]’고 하였는데, 이는 물결의 일렁거림마저 견딜 수 없을 것처럼 수척해진 가을 산의 진골(眞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작품은 낙조와 노을이 반짝거리는 화사함과 가을 산의 수경미(瘦勁美)가 어우러져 기위(奇瑋)한 미감을 창출하였다.
두 번째로 인용된 권섭의 작품 또한 문암(門岩)의 경관을 한 폭의 화면처럼 제시하였다. 화면 좌우로 문암과 바다의 모습을 포치시키고 그 사이로 해당화 핀 백사장을 가로질렀다. 김창협은 문암의 광경을 “문암에 도착했는데, 두 개의 바위가 마주 서 있어서 사람들이 오갈 때에 마치 문처럼 그 사이를 통과하였다. 문암은 흰빛을 띄고 모양이 매우 기이하였는데, 화초가 그 위에 알록달록하게 깔려 있는 모습이 마치 수를 놓은 것 같았다[數里至門巖, 二石對立, 人往來道其間若門. 色白而狀頗奇, 花草斑駁其上如繡. -金昌協, 『農巖集』 권23 「東游記」].”라고 묘사하였는데, 권섭의 시 속 장면 그대로이다. 권섭은 기구와 승구에서 문암을 지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전구와 결구에서는 파도가 말발굽에 부딪히고, 붉은 해당화와 하얀 백사장이 어우러진 장면을 그렸다. 권섭의 이 작품은 대상의 특징적 모습을 중심으로 화폭에 선명한 구도만 그려냈을 뿐【강혜선, 「옥소 권섭의 기행시문 연구」, 『한국한시연구』18집, 2010, 274면 참조.】 대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나 작가의 흥회는 형상화하지 않았다. 이는 형사만으로 신사를 담아내는 후기 백악시단의 형상화 방식 가운데서 가장 극단적인 예에 해당한다. 물론 권섭이 보인 형상화는 막힘이 없는 시원한 미감을 주지만, 한편으론 독자가 작품을 통해 작가의 정신을 만날 수 있는 단서가 극히 제한적이어서 작가-시-독자가 파편화될 우려도 있다【절구의 짧은 시형에서 명사 위주의 시어를 통해 함축성을 극대화하는 형상화 방식은 후기 백악시단 가운데 이병연과 권섭에게서 뚜렷하게 발견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대표적인 예는 이런 작품을 들 수 있다. “만산(萬山)을 휘젓는 다리 권조원(權調元), 십년(十年)을 크게 누운 이일원(李一源). / 천지간에 일양(一陽)이 두 늙은이 붙들어, 칠십 구년 한훤(寒暄)을 목청껏 부르게 하네[萬山行脚權調元, 大臥十年李一源 . 天地一陽扶兩老, 高歌七十九寒暄. -權燮, 『玉所稿』 「朋遊唱酬錄·4」「南至贈庚友[李秉淵]」 제1수] 이 작품의 경우 80세를 맞이하는 이병연과 권섭의 우정을 그린 시로, 1구와 2구는 79세까지의 가장 특징적인 삶의 모습을 두 구로 함축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함축은 80이 되도록 산수 유람을 다녔던 권섭의 삶과, 만년에 다리를 절게 된 이병연의 삶을 알지 못해도 두 사람이 대조적 삶을 살면서도 돈독한 우정을 쌓았음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오히려 1구와 2구는 자잘한 설명 없이도 둘의 우정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형상화는 원숙한 작시 능력이 뒷받침 되었을 때, 시적 묘미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시상을 조직하는 원숙한 솜씨 없이 이런 형상화를 따르게 되면, 시는 지극히 무미한 것이 되거나 수수께끼처럼 변해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권섭이 대상 산수의 특징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시편을 구성한 것은 자신의 주관적 흥회를 드러내기보다는 대상 산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대상 산수를 형신(形神)을 통해 보다 핍진하게 담으려는 노력은 백악시단의 문인들로 하여금 연작의 방식을 애호하게 하였다. 근체시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고시의 형식을 통해서도 핍진한 형사와 신사를 담아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고시는 한 편의 작품 안에 형사와 신사의 유기성을 확보해야 하고 더구나 긴 편폭에 어우러지는 정감의 변화까지 담아내야 하는 까닭에 자칫 시인으로 하여금 대상과의 진지한 교감을 소홀히 하고 시적 안배에 매달리게 할 우려도 있다. 그에 비해 연작시는 대상의 진면목을 다양한 측면에서 관조하고 입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는데, 이러한 장점은 산수와의 정신적 교감을 통해 산수의 진면목을 담아내려 했던 백악시단의 시적 지향과 잘 맞는다. 나아가 연작시는 형상화에 있어 형사와 신사를 보다 자유롭게 선택하여 조직할 수 있게 하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전대의 산수시와 비교할 때 백악시단이 연작 산수시를 상대적으로 많이 창작한 까닭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먼저 김창흡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둘째(其二)
二淵懸瓢似 瀑流喧吐呑 | 못은 달아 맨 바가지던가 멍멍하게 폭포 물을 삼켰다 뱉네. |
誰知呀然小 逈洞摶桑根 | 누가 알랴? 우묵하게 고인 작은 물이 멀리 통해 부상의 뿌리에까지 맺힐 줄. |
다섯째(其五)
五淵急回軋 南岸側成釜 | 못 급히 돌며 콸콸 대는데 남쪽 언덕 비스듬하여 솥이 되었네. |
馳波迭後先 赴隘徘徊舞 |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달리다가 좁은 곳에선 빙빙 돌며 춤추는 듯. |
여섯째(其六)
六淵美如璧 淸涵石紋粹 | 못 아름답기 구슬 같은데 맑게 씻긴 바위 무늬 티도 없구나. |
竦髮注眸深 高雲正泛翠 | 머리 선 채 못 깊은 곳 눈을 붙이니 높은 구름 참으로 비취 위에 떠있네. |
여덟째(其八)
八淵淺堪漱 潛龍易出身 | 못 얕아서 양치질할 만하니 숨은 용도 쉬 몸을 드러내겠네. |
日靜玩澹瀩 眞爲遭睡人 | 날이 고요해 못가에서 즐기다 보면 진실로 잠든 용을 만난 사람이 될 듯. |
「구룡연(九龍淵)」, 金昌翕, 『三淵集』 권2
두 번째 못에서는 그 모양을 주목하였다. 김창흡은 ‘달아놓은 바가지’같다고 비유하면서 소에 물이 차고 넘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였다. ‘탄토(呑吐)’라는 감각적 표현 또한 생생한 실감을 높이기 위해 구사되었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자신의 정신적 감수를 붙였다. 육안으로 보이는 소는 작은 물에 불과하지만 이 물은 결국 동해에까지 이어져 동해의 조종(祖宗)이 됨을 말하였는데 이는 현상적으로 각기 존재하는 물을 통해 본원적 ‘일리(一理)’를 체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섯 번째 못에서는 물살의 역동성을 주목하였다. 급히 돌아나가다 앞에 솥처럼 생긴 언덕을 만나 잠시 고였다 솥이 차면 다시 달려 나가는 물의 변화무쌍한 흐름을 그렸다. 여섯 번째 못에서는 구슬 같은 물빛을 주목하였다. 구슬처럼 고운 못은 그 영롱함이 못의 깊은 수심에서 발색되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못의 깊은 곳을 보는데 머리카락이 바짝 선다고 하였다. 두렵지만 고개를 빼고 바라본 못에는 하늘의 구름이 도영하여 비취빛 못물에 둥실 떠있었다. 비취빛 못과 하얀 구름의 색채 대비가 선명하고 곱게 그려졌다. 여덟 번째 못에서는 기이한 상상을 펼쳤다. 상상의 내용은 물은 얕고 날은 참으로 고요해서 못가에서 노니노라면 잠룡을 볼 수 있을 테고 잠룡을 만나면 용의 여의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조수(遭睡)’는 물가의 가난한 집 자식이 물에 들어가 용의 여의주를 주워오자 그 아버지가 용이 잠든 때를 기다려 용을 돌려주라고【河上又有家貧窮恃緯蕭而食者, 其子沒淵, 得千金之珠. 謂其子: ‘取石來鍜之. 夫千金之珠必在九重之淵而驪龍之頷下, 汝得之必遭其睡. 若龍寤, 子尙奚微之有哉? -『太平御覽』 권485】 한 데서 나온 말로, ‘잠을 만난 사람[遭睡人]’이 된다는 말은 용이 잠들었을 때를 만난 사람을 의미한다. 작가는 용에 대한 고사를 활용하여 구룡연의 기위(奇瑋)함을 신비롭게 그려내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연작의 형식을 활용하여 대상에 대한 작가의 다양한 관심과 포착을 자유롭고도 입체적으로 그려내었다. 형신의 형상화 양상을 보면 두 번째 수는 형사와 신사가 대등하게 그려져 있고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수는 형사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덟 번째 수는 신사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형사된 모습으로 보자면 못의 모양, 물의 기세, 물의 빛깔, 못의 깊이 등이 다각적으로 조명되고 있으며, 구룡연의 역동적인 모습과 맑고 고요한 모습 등 대상이 지닌 대비적 특징까지 다채롭게 형상화하였다. 신사의 내용을 보면, 두 번째 수는 성리학적 각성을 담고 있고 여덟 번째 수는 도교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연작시가 지니는 분절성을 활용하여 구룡연이라는 대상을 다각적으로 형사하면서 작가의 신사 또한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러한 방식으로 구룡연의 다양한 특징들을 핍진하게 형상화하였는데, 이인상(李麟祥)은 이러한 성취를 높이 사 이 작품을 토대로 구룡연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今年秋, 李君元靈本三淵金公昌翕所爲九淵詩而爲之圖, 屬余爲記. -黃景源, 『江漢集』 권9 「九龍淵記」】.
다음에 살필 이병성의 작품은 한 공간과 관련한 다양한 대상을 형상화하는 데 연작 시형을 활용하였다.
橫飆乍捲衆香峰 | 회오리바람 홀연 중향성으로 솟구쳐 |
片片輕霞西復東 | 조각조각 가벼운 노을 동서로 흩어지니 |
半露半遮遙隱映 | 반은 보이고 반은 가린 채 저 멀리서 비치는데 |
紫紗如罩玉芙蓉 | 자줏빛 깁으로 옥부용을 둘러 맨 듯. |
두 번째(其二)
漫道芙蓉與白玉 | 부용이니 백옥이니 대략 말하고 말았으니 |
松江題品亦疎麤 | 송강 어른 제품(題品) 역시 거칠다 할 밖에. |
香城萬古嬋娟色 | 중향성 만고토록 선연한 저 빛 |
微雪山陰一夜鋪 | 가랑눈 산그늘에 한 밤 내내 뿌렸으니. |
세 번째(其三)
如翔如舞幾重重 | 비상(飛翔)하듯 춤추듯 겹겹이 그 얼마냐 |
變態奇姿未可窮 | 변화무상 기이한 자태 궁구할 수 없구나. |
不必丹楓兼躑躅 | 단풍에다 철쭉을 겸할 필요 없으니 |
紅霞百朶作玲瓏 | 붉은 노을 백 송이가 영롱하면 그뿐인 것을. |
네 번째(其四)
能爲巨嶽與洪洋 | 거대한 산, 너른 바다 능히 그리려 |
鄭子毫端萬丈長 | 정원백의 붓끝이 만 길이나 높아졌는데 |
腕力今來還頓㥘 | 필력이 이제 와서 낭패할까 겁났는지 |
毘盧峰下漫彷徨 | 비로봉 아래에서 하릴없이 배회하네. |
[元伯方盤礴未下筆] | [원백(元伯)이 다리를 쭉 뻗고 앉은 채 붓을 대지 못하였다.] |
다섯 번째(其五)
不必新詩別有篇 | 새로운 시편 따로 있을 필요 없구나! |
泠泠歌曲洞中天 | 시원한 가곡소리 하늘까지 울리네. |
松翁死後無豪士 | 송강 어른 사후에 호방한 선비 없어 |
海嶽蕭條幾百年 | 바다와 산 몇 백 년이나 쓸쓸하게 방치될까? |
[聽弼文誦關東別曲] | [장필문이 관동별곡을 암송하는 것을 들었다.] |
「비 갠 뒤 천일대에 올라[雨後登天一臺]」, 李秉成, 『順菴集』 권2
첫 번째 수는 날이 개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중향성의 모습을 형사하였다. 이병성은 바람이 구름을 흩어내자 반쯤 모습을 내비친 천일대의 모습을 붉은 비단으로 꽃받침 삼은 옥으로 된 연꽃으로 비유하였다. 두 번째 수는 천 일대에서의 조망의 흥취를 담았다. 햇살을 받아 선연한 중향성과 미설(微雪)이 펼친 색조의 향연을 보이면서 「관동별곡」의 “부용을 꽂은 듯, 백옥을 묶은 듯”이란 명구마저 실재 대상과 비교하면 대략 거칠게 표현하고 만 것이라 하였다. 이는 「관동별곡」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정철의 솜씨로도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금강산이 빼어남을 말하는 것이다. 세 번째 수는 형사와 신사, 신사와 형사를 교직하며 경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역동적인 산세에서 변화의 무궁함을 느끼고 노을의 영롱함에서 유람의 흥취를 말하였다. 네 번째 수는 동반한 정선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정선이 다리를 뻗고 앉은 모습[盤礴]【반박(盤礴)은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나오는 말로 작가의 정신적 경지, 즉 일체의 속박을 떨치고 대상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말이다. “송나라 원군이 그림을 그리려 하니 여러 화공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그들은 명을 받자 읍을 하고는 정해진 자리에 서서 붓을 고르고 먹을 갈아 대기하였는데, 인원이 많아 전각에 들어가지 못한 자가 반이었다. 그런데 한 화공이 늦게야 도착해서는 달려오지도 않고 천천히 들어와 읍을 하고는 서지도 않은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원군이 사람을 시켜 엿보게 했더니, 그는 옷을 벗고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벌거벗고 있다고 전하였다. 그러자 원군이 말하기를 ‘됐다. 이 사람이 참다운 화공이다.’ 하였다[宋元君將畫圖, 衆史皆至, 受揖而立, 舐筆和墨, 在外者半. 有一史後至者, 儃儃然不趨, 受揖不立, 因之舎. 公使人視之, 則解衣般礴, 臝君曰: ‘可矣. 是真畫者也.’]”】은 금강산과 정신으로 교감하며 금강산의 진면목을 찾는 모습이다. 쉽사리 붓을 들지 못하는 정선의 모습을 통해 정선의 필력으로도 담기 어려운 금강산의 빼어남을 말하였다. 다섯 번째 수는 장응두의 관동별곡 가창을 들으며 든 생각을 말하였다. 정철 같은 호방한 선비가 없어 금강산은 지기를 잃은 채 오래도록 방치될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이 작품은 연작시의 특징을 활용하여 천일대에서 바라본 중향성의 절경뿐만 아니라 중향성의 빼어난 경관을 부각하기 위해 선뜻 붓을 들지 못하는 정선과 시원하게 관동별곡을 읊조리는 장응두의 모습도 그렸다. 또한 연작시의 특징을 활용하여 작가의 의도에 따라 형사와 신사를 자유롭게 조직하여 구사하였다.
김창흡과 이병성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듯 분절 형식을 지닌 연작시는 한 호흡으로 이어가는 장편 고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상을 충분히, 그리고 다각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리고 관조를 통해 포착해낸 대상의 진면목을 형신(形神)을 자유롭게 조직하여 형상화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대상과의 소통에서도, 자기 흥회의 표출에서도, 그 참됨을 담아내기에 용이한 연작 형식을 적극 활용하였다.
한편, 산수의 진면목을 시로 담아내기 위한 노력은 대상 산수에 대한 정보와 시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아래 이해조의 작품이 그 예이다.
정방연(正方淵)【일명 驚鷺淵이라고도 한다.】
정방연은 서귀포 동쪽 1리쯤 떨어진 해안에 있다. 100척의 바위 벼랑이 병풍처럼 몇 리를 에워싸고 있는데 폭포가 바닷물로 나는 듯 떨어진다. 동쪽 기슭은 솟아올랐다가 갑자기 끊어지니 그 위가 평평하여 천연의 대가 되었는데 고운 풀들로 덮여 있다. 대의 언저리에는 일곱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는데 큰 것은 모두 몇 아름이 넘고 묵은 가지는 용처럼 구불거리며 누웠는데 위로는 구름과 해를 가리고 아래로는 푸른 물결을 스친다. 삼도(森島), 초도(草島), 독도(禿島) 세 개의 바위섬이 바다 가운데 우뚝하게 늘어섰는데 깎아지른 바위 벼랑에 소나무가 어둑하게 가리고 있어 삼라만상의 아득한 자태가 동해 칠성봉(七星峯)과 흡사하다. 옥 같이 흰빛은 미치지 못하지만 푸른빛이 곱고 빼어난 것은 더 나으니 이곳은 이른바 한라산 주봉(柱峯)이 옮겨진 절벽이라 할 수 있다. 대에 올라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앞으로는 세 섬을 마주하고 뒤로는 한라산을 바라보며 좌측으로는 나는 듯한 폭포에 나가니 진보(鎭堡)와 어부의 집은 구름 속에 아련하고 돛배와 섬들은 소나무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하여, 술자리에 기기하고 교묘한 경치를 다투어 바치는 듯하니 비단섬 가운데 첫째가는 선경(仙境)일 뿐이 아니다. 영동의 이름난 곳과 비교해도 쉽사리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그 때 피리 부는 악공 하나를 데려다 폭포가 떨어지는 바위 위에서 몇 곡조를 불게 하니 막속(幕屬) 가운데 노래 잘하는 이가 소나무에 기대어 피리 곡에 맞추어 한 곡조를 불렀다. 공활한 바다와 하늘에 맑은 음이 요량(寥亮)하게 구름 사이로 흩어지는데 황홀하게 봉우리를 감싸며 오르는 것은 통소 소리였다. 내가 수령에게 “사람들이 한라산 동쪽 무협(巫峽)에서 때때로 신선의 음악 소리가 들린다 하더니 또한 어찌 이보다 낫겠소?”하니, 수령이 “무협(巫峽)의 천악(天樂)은 그저 그 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인데 지금은 그 사람의 모습까지 볼 수 있으니 아마 이것만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서로 한바탕 웃었다. 대 앞으로 작은 고기배가 서귀포 어귀에서 노를 저어 와 전복을 따는데 대여섯 사람이 알몸으로 물속에 뛰어들자 다만 물 위로는 표주박만 둥둥 떠 있었다. 이윽고 사람의 머리가 차례로 솟구치더니 전복 수십 갑을 주었다. 소나무 아래에서 회쳐 먹고 구워 먹으니 그 맛이 까무러칠 만큼 좋아 술잔 달라 부르는 소리도 모를 지경이었다. 취기가 심해 쓰러져 누워 말을 탈 수가 없어 석양 무렵에 견여를 타고 피리 불며 돌아 오니 또한 하나의 멋진 풍류였다.
正方淵.【一名, 驚鷺淵】
淵在西歸浦東一里海岸. 石崖百尺, 屛擁數里, 瀑流飛落於海水. 東麓隆起陡絶, 其上平廣, 天然作㙜, 軟莎被之. 㙜邊七松森立, 其大皆數拱餘, 老榦虬屈偃蹇, 上蔽雲日, 下拂滄波. 森島、草島、禿島凡三石嶼列峙海中, 巖壁峭削, 松檜蔭翳, 森羅縹緲之態恰似東海七星峯, 玉色不及, 而蒼翠娟秀過之, 此所謂漢挐柱峯之移峙者也. 登㙜撫松, 前對三島, 後矚漢挐, 左臨飛瀑, 鎭堡、漁戶隱約於雲靄, 帆檣、島嶼掩暎於松翠, 有若爭奇獻巧於樽俎之邊, 不但島中第一仙境, 雖較嶺東勝區, 亦未易優劣也. 時携一笛工, 快弄數曲於瀑巖上, 幕屬有善歌者, 倚松而和之. 海天空闊, 淸音寥亮飄散於雲霄之間, 恍然緱嶺上, 簫聲也. 余謂主倅曰:‘人傳漢挐東巫峽, 時聽仙樂, 亦豈勝此耶?’主倅曰: ‘巫峽天樂, 但聞其聲, 而今見其人, 恐不如也.’相與胡盧. 㙜前小漁艇, 自西歸浦口掉來, 載採鰒, 五六人躶身投水, 但見瓠子泛泛於水上. 俄頃, 人頭次第涌出, 供鰒數十甲. 松下鱠煑, 風味頓佳, 不覺頻喚大白. 醉甚頹卧, 不能騎馬, 夕陽肩輿, 吹笛而還, 亦一風流事也. (이하 시는 생략) -李海朝, 『鳴巖集』 권3 「正方淵」
浩蕩風濤滿眼前 | 드넓은 바람과 파도가 눈앞에 가득한데 |
古臺千尺立蒼然 | 태곳적 대는 천 길 높게 창연히 우뚝 섰네. |
不周山折分三島 | 부주산(不周山)이 쪼개져 세 섬으로 나뉘고 |
銀漢波傾落九天 | 은하수가 기울어져 구천에서 떨어지네. |
採鰒漁瓠遙泛泛 | 전복 따는 어부 박은 아스라이 떠있고 |
倚松雲盖坐翩翩 | 소나무에 기대니 구름 일산 너울너울 지나가네. |
梅花一曲江城笛 | 강가 성에 울리는 매화곡 피리 소리 |
愁殺天涯李謫仙 | 천애에 온 이태백을 시름겹게 하는구나. |
「정방연(正方淵)」, 李海朝, 『鳴巖集』 권3
이 시는 이해조가 1706년 제주순무어사(濟州巡撫御使)로 나갔을 당시 지어진 작품이다. 이해조는 제주에 도착한 이래 제주에서 견문한 일들을 시에 담았는데, 이때 지어진 시편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시편마다 제목과 주석을 통해 대상에 관한 충실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제주라는 지역이 쉽사리 갈 수 없는 곳이고, 육지와는 풍속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정보가 될 만한 것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먼저 제주를 찾은 이해조의 선배 문인들 또한 제주의 풍속을 전하는 다양한 저작들을 남겼고 이해조는 그러한 기록들을 참조하기도 하였다【선배 문인들의 저작으로는 임제(林悌)의 『남명소승(南溟小乘)』,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 김정(金淨)의 『충암록(沖庵錄)』,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 등이 있었다. 이해조는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을 인용하기도 하고 임제의 시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대의 기록물들은 산문이 대부분이고 간헐적으로 지어진 시들은 산문을 보조하여 흥취를 제공하는 데 활용되어 장르간의 편향이 뚜렷한 반면 이해조의 시는 기문(記文) 성격의 제인(題引)을 의도적으로 활용하여 한편에서는 산문의 특장을, 한편에서는 시의 특장을 작품 안에 결합하였다.
이 작품은 정방폭포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대로 시의 제목이 있고 그 아래에 서문(序文) 성격의 글【다른 작가의 시에는 이런 경우 ‘병서(幷序)’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해조의 글은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제목 아래 두었기 때문에 서문(序文)으로 보아야 할 지, 주석으로 보아야 할지 분명치 않은 점이 있다. 하지만 대체적인 성격은 서문(序文)에 가깝다.】이 붙어 있으며 그 아래 시가 제시되어 있다. 이해조 이전에 지어진 기록들은 대부분 제주도의 특이한 풍속이나 명승에 대한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문학적 감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다. 그런데 위에 제시된 이해조의 글은 오히려 문학적 감흥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 글은 대상에 대한 간략한 지리정보를 제시한 뒤 대상과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 그리고 그곳에서의 감흥을 적고 있다. 글의 반 정도는 대상인 정방연을 묘사하고 나머지는 정방연에서 이루어진 풍류사(風流事)를 적었다. 정방연에 대한 묘사를 보면 정방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드러내기 위한 비유적 표현, 긴장과 이완을 조절한 문장 포치 등을 적절하게 구사하여 정방연의 절경을 그렸다. 또한 풍류사에 대한 서술에서도 대화를 배치하고 상세한 장면묘사를 활용하여 생동감을 부여하였다. 자체로 완결성이 뛰어난 한 편의 기문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배치된 시는 산문에 비해 더욱 함축과 과장을 활용하였다. 이해조는 정방연에 대해 산문으로 이미 자세하게 제시했다고 해서 시에서 자신의 소회(所懷)만을 읊거나 하지 않았다. 시의 구성 또한 전반부는 정방연의 절경에 대한 것이고 후반부는 풍류사(風流事)에 대한 것이다. 산문의 구성을 시가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인데, 이해조는 같은 구성을 취하면서도 산문과는 다른 시적 묘미를 활용하고 있다. 이해조는 산문에서 상세하게 묘사된 대(臺)의 모습을 ‘천 길 높이로 우뚝 선 모습’으로 함축하면서 거기에 ‘태고’라는 시간을 부여하여 절경의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대에서 보이는 삼도(森島), 초도(草島), 독도(禿島)는 ‘세 개의 섬’으로 간략하게 제시되었지만 거기에 부주산(不周山)을 끌어와 역시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부주산(不周山)과 관련한 이야기는 『사기(史記)』「보삼황본기(補三皇本紀)」에 실려 있다. 축융씨(祝融氏)에게 진 공공씨(共工氏)가 화를 못 이겨 부주산(不周山)을 무너뜨리자 하늘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부러지고 땅을 동여매고 있던 밧줄이 끊어졌는데, 여와씨(女媧氏)가 오색 돌을 다듬어 하늘을 깁고 자라의 다리를 끊어 사방의 끝에 기둥으로 세웠다고 한다. 이처럼 이해조는 부주산(不周山)의 전고를 활용하여 삼도(森島), 초도(草島), 독도(禿島)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부각시켰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산문과는 달리 일어난 일의 순서를 바꾸어 시적 분위기를 고양시키고 있다. 산문에서는 피리를 불던 일이 어부가 전복을 따 준 일보다 앞서 있었는데 시에서는 전복 따는 일이 먼저 제시되고 피리 소리를 듣는 화자의 모습이 나중에 그려져 있다. 이는 다분히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시를 더욱 유장하게 하려는 시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구에 화자 자신을 이태백으로 비유함으로 산문에서 그려진 술자리 풍류와 연결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이 작품은 산문만으로도, 시만으로도 독자적 완결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 둘이 결합함으로써 더욱 깊은 문학적 향유가 이루어지게 하는 특징이 있다. 김창흡은 이해조 시가 지닌 이러한 특징을 두고 “또한 시 가운데 허자를 잘 사용하여 의미의 연결을 이루고 아울러 그 제인(題引)과 견사(遣辭)가 종종 명쾌하고 절묘하니 좌사(左思)와 유종원(柳宗元)을 따른 듯합니다. 이로써 논하건대 아마도 문장이 시보다 나은 듯합니다. 어찌 그 全稿를 보여주지 않는 지요[且詩中善用虛字以轉意脉, 並其題引遣辭, 種種敏妙, 似從左柳中來, 以此論之, 窃恐文勝於詩. 而何由睹其全稿乎? -金昌翕, 三淵集拾遺권16 「答李子東」]?”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이해조가 제주어사 시기 창작한 시편들은 산문과 시가 지닌 장르적 특질을 상보적으로 결합하였는데 그 결과 독자는 한 작품을 통해 두 장르의 미적 성취를 동시에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에서 백악시단의 산수를 대상으로 한 시편들을 살펴보았다. 백악시단은 자신들의 시론인 천기론에 입각하여 산수에 내재된 진면목을 포착하고 이를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진면목을 포착하는 과정은 그들의 학문과 사상에 기반한 고도의 정신적 감수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감수한 정신적 흥회를 드러내기 위해 산수 자체가 지닌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천기론은 산수를 완물이 아니라 궁리의 대상으로 전화시키는 논리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이러한 논리에 기대어 그들은 남들이 회피하는 험지까지 열정적으로 탐방하였고, 산수를 마주해서는 대상에 한발 더 밀착하여 요소요소의 아름다움과 오묘함을 형상화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들의 산수 유람은 지금의 ‘관광’과는 다르고 오히려 ‘탐사’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산을, 숱한 위험까지 감내해가며 찾은 것은 탐사의 태도가 아니고서는 이해가 불가하다. 김창흡은 “마땅히 회옹(晦翁)께서 하신 법을 따라, 바위 하나 뫼 하나도 집중해서 보시게나[須依晦翁法, 不瞬視巖巒].”고 하였다. 그리고 유람을 통해서는 “십년 진세(塵世)의 상념이, 유수와 더불어 모두 사라지는구나![十年塵世念, 流水與俱空]”【洪重聖, 『芸窩集』 권3 「正陽寺」】와 같은 정신적 각성을 얻기도 하고, “청색 홍색 뒤섞여야 진정 애호할 만하니, 진홍색이 되자마자 곧장 쇠락할 테니[靑紅半雜眞堪愛, 纔到深紅便是衰]”【朴泰觀, 『凝齋遺稿』卷上 「楓林」】라거나 “산은 꾸밈이 없어야 바로 진짜지[山無粧點是爲眞]”【李秉成, 『順菴集』 권2 「表訓寺西臺」】와 같은 인생의 경구가 될 만한 깨달음을 얻기도 하였으며, 거꾸로 말을 탄 채 폭포를 보는[嬴馬倒騎看瀑布]【李秉淵, 『槎川詩抄』卷上 「龍貢寺」】 풍류도 즐겼다.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철학하고 문학하는 산악인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탐사에 가까운 자세로 산수에 밀착했다. 그리고 그렇게 밀착하여 얻어진 산수의 면면들은 그들의 깊은 정신적 감수를 거쳐 한 편의 시로 탄생되었다. 백악시단의 산수시는 성리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한 높은 정신성과 탐사를 통한 진면목의 사생을 통해 자기 흥취가 위주가 되어 감정은 과잉되고 대상은 소략해지고 만 전대의 산수시를 극복해 갔다.
인용
Ⅰ. 서론
Ⅱ.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2. 동인들의 문학 활동
Ⅲ. 진시의 기저와 논리
Ⅳ. 진시의 정신적 깊이와 미학
3. 물아교감의 이지적 흥취
Ⅴ. 진시의 시사적 의의
Ⅵ.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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