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자파의 욕망과 욕망의 늪에서 헤어나는 방법
욕망의 화신, 자파: 처음의 작은 욕망은 더 큰 욕망을 위한 변명거리일 뿐
두 번째로 얘기해야 할 사람은 ‘자파’다. 그는 애초부터 욕망의 화신이었다. 권력욕 하나로 이 영화에서 악역을 자처했으니 말이다. 과연 그런 그에게선 어떤 욕망의 구도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는 램프를 손에 넣고 소원을 빈다. “나라의 왕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 소원은 자파가 램프를 차지하려 한 이유이기도 했다. 제2 권력자인 총리대신이지만 그래봐야 왕 앞에선 언제나 낮은 자세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의 첫 소원은 당연히 ‘왕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어야 했고, 사실 그 소원 하나만으로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모든 소원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그 소원에 만족하며 거기서 멈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욕망의 화신답게 애초부터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잘 알고 있다.
욕망의 화신, 자파: 욕망만 추구하다가 욕망에 갇혀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순간, 그건 시시한 무엇이 되어버린다. 새로운 욕망이 싹트는 거다. 늘 바라던 일이었지만 현실이 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닌 매우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는 다른 소원을 또 빈다. “강력한 마법사가 되게 해달라”.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맘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세상을 맘대로 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능력인가?
▲ 하지만 애초부터 그랬듯 무언가 이루어진 상황에 만족하진 않는다. 욕망의 화신답게 '좀 더~ 좀 더~'를 외치며 두 번째 소원을 바로 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맹목적으로 앞을 향해 치닫기 시작한 욕망은 만족이란 걸 모르고 무한 팽창한다. 그러니 ‘더 큰 힘! 더 큰 권력!’을 모토로 삼아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앞을 향해 나간다. 그런 마음가짐이기에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가 되더라도 죽음을 피해갈 순 없고, 지니의 전지전능에 비하면 한 수 아래인 자신이 하찮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의 욕망이란 실상 ‘누군가와의 비교의식’에서 발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자신 안에서 기준점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나보다 나은 누군가와의 비교에서 기준점이 형성되었으니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그의 마지막 소원은 “지니가 되게 해달라”라는 것이란 점도 이런 심리상태에서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 욕망의 화산이 될 수록 점점 더 미쳐가고 있다는 것을 애니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욕망이 존재를 집어 삼키면 서서히 미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욕망 자체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어느 면에서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도 인간은 욕망의 하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욕망의 무한 팽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버려가면서까지 충성 봉사한다. 결국 자파는 자신이 욕망을 통제한다고 착각했지만, 결국엔 욕망에 의해 자신이 완전히 제압당한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지니가 된 자파는 결국 램프에 갇히는 꼴이 되고 만다. 가장 전지전능한 신이 되었으면서도 램프에 갇혀 욕망의 하인이 된다는 설정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욕망이 주인노릇을 하고 나 자신은 그 욕망의 하수인이 된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 욕망 추구의 끝은 무엇인가? 그건 그 욕망에 갇혀 욕망의 노예로 살던지, '좀 더'를 외치며 미쳐가던지 하는 것이다.
욕망의 늪에 빠지지 않는 방법
그렇다면 인간에겐 희망이란 없는 것인가? 욕망의 하인이 되어 그렇게 삶을 저주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만 말한다면 인간의 인생은 비극일 뿐이라는 이야기이니 얼마나 기운이 빠지는 말인가?
그런데 이 영화의 미덕은 그런 욕망의 배치를 드러내면서도 그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 해결책은 뭘까? 어렵다고.... 너무 머리 굴리진 말자. 애초에 욕망이란 무엇이란 것을 말하지 않았던가. 순수한 욕망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불행이 되는 까닭은 남과의 알량한 비교의식을 통해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배치를 바꾸면 된다. 순수한 욕망이 되도록, 남과 비교하지 않도록 자신만의 장점과 자신만의 가치를 키우는 거다.
▲ 비교의식은 끊임없이 현실을 불만족스럽게 만든다. 그러다 보면 현실을 부정하게 되고 욕망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알라딘은 결국 다시 궁전으로 돌아와 자파를 램프에 가두고 모든 것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그는 지니에게 마지막 소원을 말한다. 이때의 장면이 소름끼치도록 새롭게 와 닿았고 가슴이 뭉클했다. 과연 그는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선 당연히 다시 왕자가 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어야 한다. 사회적 관념으론 왕자만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위해 소원을 빌지 않았다. 더 이상 그런 욕망이 필요치 않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자인척 하던 자신의 모습이 거짓임을 알았던 거다. 거지이지만 순수한 자신의 모습이 자신에게 더 맞고 더 행복하다는 것을 여러 일을 겪으며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자아존중감이 충만해진 그였기에 욕망을 위한 소원을 빌지 않고 ‘지니’를 위한 소원을 빌 수 있었다.
▲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오히려 자신의 진솔한 모습이 드러난다. 지니가 없어도 알라딘은 더 이상 주눅들거나 초조해 하지 않는다.
욕망의 하인이 된 순간 불행이 그를 휩싸고 있었지만, 그가 그 욕망을 제어하게 되자 그는 환희에 찬 미소를 띨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가슴 뭉클하면서 아름다운 장면이던지.
지니는 자유의 몸이 되기에 앞서 소원을 빈다. 그가 말하는 소원이 욕망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명대사이기에 여기에 인용하며 욕망에 대한 보고서인 『알라딘』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다.
자유롭게 된다면 맘대로 할 수 있지. 자유롭게만 된다면 ‘소원이 무엇입니까?’ 물어보지 않아도 되고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거, 그게 세상의 그 어떤 보물보다 더 값진 거라구
▲ 초등학생 때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15년만에 다시 본 이 영화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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