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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이미지는 살아 있다, 코끼리의 기호학 - 4. 하늘이 만든 건 아무 것도 없다 본문

책/한문(漢文)

이미지는 살아 있다, 코끼리의 기호학 - 4. 하늘이 만든 건 아무 것도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0. 3. 24.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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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늘이 만든 건 아무 것도 없다

 

 

아아! 세간의 사물 가운데 겨우 털끝같이 미세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일컫지 않음이 없으나, 하늘이 어찌 일찍이 일일이 이름을 지었겠는가? 형체를 가지고 이라 하고, 성정을 가지고는 이라 하며, 주재함을 가지고는 라 하고, 묘용妙用을 가지고서는 이라 하여, 그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이고 일컬어 말하는 것도 몹시 제멋대로이다. 이에 이기理氣로써 화로와 풀무로 삼고, 펼쳐 베품을 가지고 조물造物로 여기니, 이것은 하늘 보기를 교묘한 장인匠人으로 보아 망치질하고 끌질하며, 도끼질과 자귀질하기를 잠시도 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世間事物之微, 僅若毫末, 莫非稱天, 天何嘗一一命之哉. 以形軆謂之天, 以性情謂之乾, 以主宰謂之帝, 以妙用謂之神, 號名多方, 稱謂太褻. 乃以理氣爲爐鞴, 播賦爲造物, 是視天爲巧工, 而椎鑿斧斤, 不少間歇也.

그렇다면 천하의 그 많은 사물들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늘이 만들었는가? 연암은 사뭇 그럴 리가 없다는 투다. 천하 만물을 만들었다는 하늘도 이름이 여러 가지다. 생긴 모양을 본떠서는 이라 하고, 하늘은 굳건하기에 성정으로 말할 때는 이라 한다. 하늘의 주재자는 누구인가? 그를 일러 사람들은 라고 한다. 그 오묘한 섭리와 작용을 이를제면 으로 일컫는다. 한 가지 하늘을 두고도 이같이 많은 이름으로 부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물주가 이기理氣로 결합하고 형상을 품부稟賦하였다 하여, 마치 하늘이 교묘한 공장工匠이 되어 일일이 망치질하고 끌질 하고 도끼질하고 자귀질하여 온갖 만물을 직접 만들기라도 한 듯이 여긴다.

 

 

그런 까닭에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이 초매草昧, 즉 혼돈을 만들었다(天造草昧).”고 하였는데, 초매라는 것은 그 빛이 검고 그 모습은 흙비가 쏟아지는 듯 하여, 비유하자면 장차 새벽이 오려고는 하나 아직 새벽은 되지 않은 때에 사람과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캄캄하여 흙비 내리는 듯한 가운데에서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이 과연 어떤 물건인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 비유컨데 국수집에서 밀을 갈면 가늘고 굵고 곱고 거친 것이 뒤섞여 땅으로 흩어진다. 대저 맷돌의 공능은 도는데 있을 뿐이니, 애초부터 어찌 일찍이 곱고 거친 것에 뜻이 있었겠는가?

故易曰: “天造草昧”, 草昧者其色皂而其形也霾, 譬如將曉未曉之時, 人物莫辨, 吾未知天於皂霾之中所造者, 果何物也. 麵家磨麥, 細大精粗, 雜然撒地. 夫磨之功, 轉而已, 初何嘗有意於精粗哉?

그러나 그런가? 주역에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이 만든 것은 초매草昧즉 혼돈일 뿐이라고. 정작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아직 갈려지지 않은 천지미판天地未判의 상태, 보다 생생하게 말하면 새벽이 오기 직전 아무 것도 구별할 수 없는 태초의 적막한 어둠뿐이라고 주역은 적고 있다. 그렇다면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가? 돼지인가? 아니면 코끼리인가? 하늘이 만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하늘은 맷돌이 통밀을 갈아 때로 가늘게, 이따금 굵게, 곱고도 거칠게 땅으로 흩뿌려 놓듯, 그 날리는 가루 이상으로 헤아릴 길 없는 사물들을 이 세상 위로 제각금 흩어 놓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움베르토 에코와 연암으로 본 동서양의 철학 차이

2. 이전에 코끼리를 두 번 봤던 기억

3. 코끼리를 눈으로 보고도 코를 찾는 사람들

4. 하늘이 만든 건 아무 것도 없다

5. 하늘은 왜 코끼리에게 장난을 쳤는가?

6. 만물은 제각기 살아 숨 쉴 뿐, 절대적 법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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