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미지는 살아 있다, 코끼리의 기호학
상기(象記)
1. 에코와 연암
몇 해 전 일이다. 강의 시간에 연암의 글을 강독하고서 평설을 써오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한 학생이 과제 끝에 쓴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零落)한 이름뿐’이라는 구절이 내 시선을 끌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인용한 대목이었다. 에코의 이 책에는 연암의 코끼리 이야기와 아주 비슷한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듣거라, 아드소. 수수께끼 풀이는, 만물의 근본 되는 제 1원인으로부터 추론해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특수한 자료를 꾸역꾸역 모아들이고 여기에서 일반 법칙을 도출하면 저절로 풀리는 것도 아니다. …… 뿔이 있는 짐승의 예를 들어보자. 왜 짐승에게 뿔이 있겠느냐? 뿔이 있는 짐승에게는 윗니가 없다. 아직 모르고 있었다면 유념해 두어라. 그런데 윗니도 없고 뿔도 없는 짐승도 있으니 낙타가 바로 이런 짐승이다. 윗니가 없는 짐승에게는 위가 네 개라는 것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너는, 이빨이 없어서 제대로 씹을 수 없으니까 이런 짐승에게는 위가 네 개나 있어서 소화를 도모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너도 상상할 수 있고 추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뿔은 어떨까? 너도, 짐승의 머리에 뿔이 자라는 이유를 상상할 수 있을 게다. 머리에 골질조직(骨質組織)을 솟아나게 함으로써, 부족한 이빨의 수를 보충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설명이 못 된다. 낙타에게는 윗니가 없다. 윗니가 없으면 위가 네 개 있고, 뿔이 있어야 마땅한데, 위가 네 개인 것은 분명하지만 뿔은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야 한다. 방어 수단이 없는 짐승의 머리에만, 몸속의 골질이 뿔로 자라난다. 그러나 낙타의 가죽은 몹시 두껍다. 따라서 낙타에게는 뿔이라고 하는 방어 수단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면 여기에는 어떤 원칙이 있을 수 있다고 해야겠느냐 …… 자연 현상에서 하나의 법칙을 이끌어 내자면 우선 설명되지 않는 형상에 주의하면서,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갖가지 일반적인 법칙을 서로 연계시켜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뜻밖의 결과들이 특수한 상황에서 서로 관련되는 데서, 혹은 여러 법칙을 두루 싸잡는 하나의 실마리가 잡혀 나온다. 이 실마리를, 유사한 경우에 두루 적용시켜 보거나, 다음 발전 단계를 미루어 헤아려 보면, 마침내 자기 직관이 옳은지 그른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 이윤기 옮김, 1992, 열린책들, 하권 483쪽
연암이 우리에게 던지는 첫 번째 화두는 코끼리이다. 흥미롭게도 에코는 낙타라는 기호를 가지고 연암과 비슷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코끼리나 낙타라는 기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소나 말, 개나 돼지에만 익숙해진 눈에 코끼리나 낙타는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위 에코의 인용은 혼란스런 기호들 속에서 ‘하나의 법칙’에 접근해 가는 인식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앞선 연암의 문답과는 주객의 자리가 바뀌어 있다. 앞서 연암의 글에서 ‘하늘의 이치’를 들먹이며 예외적 존재를 인정치 않으려다 연암에게 공박당하는 ‘설자(說者)’의 태도는 윌리엄 수도사에게서 보다 세련된 논리를 갖추고서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나는 여기서 동서양 사고의 한 차이를 읽는다.
인용
1. 에코와 연암
4. 하늘이 만든 건 없다
6. 절대적 법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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