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비 놓친 사마천의 심정으로 읽어라
그대가 태사공의 『사기』를 읽었다 하나, 그 글만 읽었지 그 마음은 읽지 못했구료. 왜냐구요. 「항우본기」를 읽으면 제후들이 성벽 위에서 싸움 구경 하던 것이 생각나고, 「자객열전」을 읽으면 악사 고점리가 축筑을 연주하던 일이 떠오른다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늙은 서생의 진부한 말일 뿐이니, 또한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 주웠다는 것과 무에 다르겠습니까.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가지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 보면 아무도 없고, 게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천이 책을 저술할 때입니다. 足下讀太史公, 讀其書, 未嘗讀其心耳. 何也? 讀項羽, 思壁上觀戰; 讀刺客, 思漸離擊筑, 此老生陳談, 亦何異於廚下拾匙? 見小兒捕蝶, 可以得馬遷之心矣. 前股半跽, 後脚斜翹, 丫指以前, 手猶然疑, 蝶則去矣. 四顧無人, 哦然而笑, 將羞將怒, 此馬遷著書時也. |
「답경지答京之」의 세 번째 편지이다. 아마 경지가 보내온 먼저번 편지에 이런 사연이 있었던 듯하다. “요즘 사마천의 『사기』에 푹 빠져 있습니다. 「항우본기」을 읽노라면 제후들이 항우의 용맹에 얼이 빠져 감히 함께 나가 싸울 생각도 못하고 성벽 위에 붙어 서서 그 싸우는 모습을 넋 놓고 구경하던 장면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고, 「자객열전」을 읽으면 이수易水 강가에서 자객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하러 떠나면서, ‘가을바람 쓸쓸하고 이수는 찬데, 장사는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나니’ 하고 노래를 부를 때 그 곁에서 축을 타던 고점리의 그 비장한 연주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참으로 사마천의 문장 솜씨는 경탄을 금할 수가 없군요.”
그러자 연암은 대뜸 이렇게 지적하고 나선다. “그대가 『사기』를 읽었다 하나 그 글만 읽었지 그 마음은 아직 읽지 못했구료. 『사기』를 읽고 단지 그 문장력에 감탄하여 손뼉을 치는 것은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 하나 줏어들고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이 ‘숫가락 줏었다!’하고 외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고 봅니다. 『사기』를 제대로 읽으려면 그 글 속에 담긴 사마천의 그 마음을 읽어야지요. 내가 하나의 비유로 들려드리리다. 어린아이가 꽃잎에 앉은 나비를 잡으려고 집게손을 조심조심 내밀며 숨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갑니다.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에 손가락을 뻗치지만 나비는 그만 손가락 끝에 허망한 감촉만을 남기고 날아가 버립니다. 아이는 게면쩍기도 하고 화도 나고 해서 누가 보았나 싶어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으므로, 그제야 멋쩍게 씩 웃습니다. 나는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때도 꼭 이런 마음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 마음은 읽지 못하고 그저 그 문장력에 감탄만 하고 앉았다면 그대가 읽은 것은 사마천의 껍데기일 뿐입니다.”
「항우본기」와 「자객열전」, 결국 이들 실패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마천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었다던 항우는 왜 해하 싸움에서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린 끝에 제 손으로 제 목을 찌르고 말았을까? 자객 형가의 독 묻은 칼끝에 폭군 진시황이 죽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 글을 쓸 때에 사마천의 마음속에서 휘돌아나가던 상념은 어떤 것이었을까? 정의는 왜 반드시 승리하지 못하는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정작 붓을 떼고 나서도 사마천은 나비를 놓치고 만 소년의 안타까움을 지녔을 것이다. 나비를 잡으려는 아이의 간절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이 역사 앞에 선 그의 마음이었다면, 눈앞에서 나비를 놓쳐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나는 것은 어느 한 순간 뜻하지 않게 역사가 제 궤도를 벗어나 빗겨갈 때에 느끼는 좌절감과 무력감이었으리라. 과연 역사의 신은 있는가? 역사 속에 정의의 힘은 존재하는가?
우리가 사마천과 만나는 것은 그의 문장기교나 표현 역량으로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으로 통하게 하는 사다리일 뿐이다. 그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는 묘사에만 감탄하는 것은 『사기』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문자에 현혹되지 말아라. 나비를 놓친 소년의 그 마음을 읽어라. 진실은 글자 속에 있지 않다.
2. 의미 없는 독서에 대해
완산完山 이낙서李洛瑞가 책을 쌓아둔 방에 편액을 걸고 소완정素玩亭이라 하였다. 내게 기문記文을 청하므로, 내가 이를 나무라며 말하였다. “대저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면서도 눈이 물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보는 바의 것이 모두 물이고 보니 물이 없는 것과 한가지인게지. 이제 자네의 책은 용마루에 가득차고 시렁을 꽉 채워 전후좌우 할 것 없이 책 아닌 것이 없으니,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단 말일세. 비록 동중서董仲舒의 전일專一함을 본받고, 장화張華의 기억력에 도움 받으며, 동방삭東方朔의 암기력을 빌려온다 해도 장차 스스로 얻지는 못할 것일세. 그래도 괜찮겠나?” 完山李洛瑞, 扁其貯書之室, 曰素玩. 而請記於余, 余詰之曰: “夫魚游水中, 目不見水者, 何也? 所見者皆水, 則猶無水也. 今洛瑞之書, 盈棟而充架, 前後左右, 無非書也, 猶魚之游水. 雖效專於董生, 助記於張君, 借誦於東方, 將無以自得矣, 其可乎?” |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동그란 유리를 통과한 햇빛이 점점 도타워지고 오므라들면서 꼭 칠흑 속에 숨은 고양이 눈깔처럼 요괴롭게 빛나다가, 마침내 종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뿜어올리고, 구멍을 내고, 구멍이 실고추처럼 가늘고 새빨갛게 종이를 먹어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동안 나는 숨이 막히고 배창자가 쪼글쪼글 오그라들면서 오줌이 마려웠다.”
두 번째 읽으려는 글은 독서의 방법에 대해 적고 있는 「소완정기」란 글이다. ‘소완素玩’이란 바탕을 익힌다는 의미이다. 화사후소繪事後素라고 했다. 그림을 그리자면 먼저 본 바탕이 하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채색이 먹지 않는다. 옛날에 종이가 없을 때 이야기다. 흰 바탕의 준비 없이 화가가 채색을 베풀 수 없듯이, 책읽는 사람은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서책을 통해 그 지식을 소화해낼 수 있도록 바른 바탕을 갖추어야 한다. 낙서 이서구가 방 하나 가득 책을 쌓아두고서 그 이름을 소완정이라 한 것은 그것과 더불어 바탕을 다져 익히겠다는 뜻이니,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을 치듯이 책 속에 파묻혀 그 속에서만 노닐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 많은 책속에 파묻혀 지내는 것도 좋지만 물고기가 물속에 있어 물이 있는 줄을 아예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정작 책 속에 파묻혀 책의 의미를 그냥 놓쳐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제 아무리 한우충동의 장서라 해도, 그 안에 엄청난 양의 정보를 담고 있다 해도, 그저 물고기가 제 앞의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 깨달음 없이 문자로만 읽는 공부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 아닌가? 물고기는 물에 있으면서도 물을 의식하지 못한다. 물밖에 있을 때 물고기는 오히려 물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서책의 정보는 오히려 그것에서 벗어나 바라볼 때 비로소 내게 의미로 다가온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도 그 서책 속에 담긴 정보를 내 삶의 의미와 연관 짓지 못한다면 그 많은 독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의식이 없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
3. 넓게 읽되 요약해야 하고 번뜩 깨우쳐야 한다
낙서가 놀라 말하였다. “그렇다면 장차 어찌해야 할지요?” 내가 말했다. “그대는 저 물건 찾는 사람을 보지 못했던가? 앞을 보자면 뒤를 잃게 되고, 왼편을 돌아보면 오른편을 놓치고 말지. 왜 그럴까? 방 가운데 앉아 있으면 몸과 물건이 서로 가리게 되고, 눈과 허공이 서로 맞닿기 때문일 뿐이야. 차라리 몸을 방밖에 두어 창에 구멍을 뚫고 살펴보아 한 눈의 전일함으로 온 방안의 물건을 다 보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일세.” 낙서가 사례하여 말하였다. “이는 선생님께서 저를 ‘약約’, 즉 요약함을 가지고 이끌어 주시는 것이로군요.” 洛瑞驚曰: “然則將奈何?” 余曰: “子未見夫索物者乎? 瞻前則失後, 顧左則遺右, 何則? 坐在室中, 身與物相掩, 眼與空相逼故爾. 莫若身處室外, 穴牖而窺之, 一目之專, 盡擧室中之物矣.” 洛瑞謝曰: “是夫子挈我以約也.” |
앞을 보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뒤를 놓치게 되고, 왼편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오른쪽에 빈틈이 생기고 만다. 좁은 방 안에서는 방안의 사물을 옳게 바라볼 수 없다. 숲 속에서 숲의 전체상을 알 수 없는 것과 한 가지 이치이다. 그러나 문밖에서 조그만 틈으로 바라보더라도 방 전체의 모습은 한눈에 또렷하게 파악할 수가 있다. 우리의 독서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제 아무리 폭넓은 독서의 온축이 있다 해도 그것이 내 것으로 체화되지 않고서야 나의 것일 수가 없다. 이것을 보면 이것이 옳게 보이고, 저것을 들으면 저것에 현혹된다. 여기에 있다 싶어 보면 어느새 저기에 있고, 저긴가 해서 가면 어느새 여기에 와 있다. 좌충우돌, 닥치는대로 섭렵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게 살아있는 의미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방안에 있지 않고 책 속에도 있지 않으며, 방밖에 있고 글자 너머에 있다. 그저 방안에 틀어박혀 읽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자기화 할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다. 이를 달리 말해 ‘박이약지博而約之’라 한다. 제 아무리 폭넓은 섭렵도 하나의 초점으로 집약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널리 읽어라. 그렇지만 그것을 하나의 초점으로 집약시켜라. 요점을 잡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마음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눈으로만 보려하면 흩어져 산만해진다. 이것저것 다 눈에 들이려 하다가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된다.
내가 또 말했다. “자네가 이미 ‘약約’의 도를 알았네그려. 또 내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비춤을 가지고 자네를 가르쳐도 괜찮겠는가? 대저 해라는 것은 태양이니, 사해를 덮어 씌워 만물을 기르는 것일세. 젖은 곳을 비추면 마르게 되고, 어두운 곳이 빛을 받으면 환하게 되지. 그렇지만 능히 나무를 사르거나 쇠를 녹일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빛이 두루 퍼져서 정기가 흩어지기 때문일세. 만약 만리에 두루 비치는 것을 거두어, 좁은 틈으로 빛을 들여 모아서, 둥근 유리알에 이를 받아, 그 정채로운 빛을 콩알 만하게 만들면, 처음에는 내리쬐어 반짝반짝 하다가 갑자기 불꽃이 일어나 타오르는 것은 어째서겠나? 빛이 전일하여 흩어지지 않고, 정기가 한데 모여 하나가 되기 때문일세.” 낙서가 사례하여 말하였다. “이는 선생님께서 제게 오悟, 즉 깨달음으로 타이르는 것입니다.” 余又曰: “子旣已知約之道矣. 又吾敎子以不以目視之, 以心照之, 可乎? 夫日者太陽也. 衣被四海, 化育萬物. 濕照之而成燥, 闇受之而生明. 然而不能爇木而鎔金者, 何也? 光遍而精散故爾. 若夫收萬里之遍照, 聚片隙之容光, 承玻璃之圓珠, 規精光以如豆, 初亭毒而晶晶, 倏騰焰而熊熊者, 何也? 光專而不散, 精聚而爲一故爾.” 洛瑞謝曰: “是夫子警我以悟也.” |
햇빛을 가지고 비교해보자. 햇빛은 천지를 비추고 만물이 그 빛을 받아 성장한다. 젖은 곳을 마르게 하고 어두운 곳을 밝게 해준다. 서책이 주는 지식이나 지혜는 우리의 정신을 성장시킨다.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고, 나쁜 마음을 정대하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나무를 사르거나 쇠를 녹이는 힘을 발휘할 수는 없다. 보다 큰 창조적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폭발적인 에너지는 그저 흩어지는 햇빛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물 위로 흩어지는 빛의 에너지가 있다. 이제 그 빛을 볼록렌즈 위로 모아들여서 하나의 초점 위로 집중시킨다. 이 집중을 이 글에서는 ‘약約’이란 말로 설명했다. 그러면 하나의 초점 위로 뭉친 빛살의 소용돌이는 마침내 불꽃으로 활활 타오른다. 주체할 수 없는 폭발적인 에너지로 변화하게 된다. 박博에서 약約으로 집약되어 하나의 정점에서 그것은 ‘오悟’의 단계로 변화한다. 폭넓은 독서가 하나의 초점으로 집약되어 마침내 오성悟性을 열어주는 주체적 각성으로 변모할 때 그것은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그전에 의미 없던 모든 것들이 그 순간 의미 있는 것으로 바뀌고 만다. 나와 무관하게만 여겨지던 많은 것들이 내 삶 속으로 들어와 하나의 의미가 된다. ‘박이약지’의 단계를 넘어서 마침내 ‘약이오지約而悟之’의 경지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4.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의 서재
내가 또 말하였다. “대저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이 모두 이 서책의 정기일세. 그럴진대 본시 바싹 가로막고 보아 한 방 가운데서 구할 수 있는 바가 아닐세. 그래서 포희씨가 문장을 봄을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땅을 살폈다’고 한 것이야. 공자께서 그 문장을 봄을 크게 여겨 이를 이어 말씀하시기를, ‘편안히 거처할 때는 그 말을 익힌다[玩]’고 하셨지. 대저 익힌다 함이 어찌 눈으로만 보아 살피는 것이겠는가? 입으로 음미하여 그 맛을 얻고, 귀로 들어 그 소리를 얻으며, 마음으로 마주하여 그 정채로움을 얻는 것일세. 이제 자네가 창에 구멍을 뚫고서 눈으로 이를 전일하게하고, 유리알로 받아 마음으로 이를 깨닫는다고 하세. 비록 그러나 방과 창이 텅비지 않고는 밝은 빛을 받을 수가 없고, 유리알이 비지 않으면 정기를 모을 수가 없을 것이네. 대저 뜻을 밝히는 도리는 진실로 비움에 있나니, 물건을 받음이 담박하여 사사로움이 없어야 하네. 이것이 자네가 바탕을 익히겠다는[素玩] 까닭인가?” 낙서가 말하였다. “제가 장차 벽에 붙이렵니다. 써주십시오.” 드디어 그를 위해 써주었다. 余又曰: “夫散在天地之間者, 皆此書之精, 則固非逼礙之觀, 而所可求之於一室之中也. 故包犧氏之觀文也曰, ‘仰而觀乎天, 俯而察乎地.’ 孔子大其觀文而係之曰: ‘居則玩其辭.’ 夫玩者, 豈目視而審之哉? 口以味之, 則得其旨矣, 耳而聽之, 則得其音矣, 心以會之, 則得其精矣. 今子穴牖而專之於目, 承珠而悟之於心矣. 雖然, 室牖非虛, 則不能受明, 晶珠非虛, 則不能聚精. 夫明志之道, 固在於虛, 而受物澹而無私. 此其所以素玩也歟.” 洛瑞曰: “吾將付諸壁, 子其書之.” 遂爲之書. |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책은 문자로만 고정되어 있지 않다. 천지 만물이 모두 하나의 서책이다. 어찌 문자 속에서만 찾으려 하는가? 포희씨는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땅을 살펴, 천지만물의 비밀을 읽었다. 그가 읽어 팔괘로 읽어낸 천지만물이란 텍스트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어찌 방안에서만 찾으려 하는가? 공자께서 『주역』 「계사전繫辭傳」에서 가만히 있을 때마다 그 말을 익혔다고 하신 것은 그 문자를 익혔다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정신, 그 오성을 익혔다는 것이다. 그것은 눈으로만 보아서는 보이지 않는다. 입으로 음미하고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마주하고 전신으로 만나야만 볼 수 있는 것이다.
햇빛과 렌즈, 그리고 불이 붙으려면 초점이 필요하다. 서책에 담긴 지식과 내 마음의 눈, 그리고 그것이 오성으로 타오르려면 집약이 필요하다. 물건으로 가득찬 방은 빛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렌즈가 깨끗지 않고서는 초점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마음이 텅 비어 있지 않으면 서책의 정보는 그 안에 깃들일 수가 없다. 내 눈빛이 맑지 않고서는 그 정보가 오성으로 불붙을 수가 없다. 그런 독서를 나는 ‘죽은 독서’라고 부르리라.
‘전목오심專目悟心’ 할 수 있으려면 먼저 ‘담이무사澹而無私’ 해야 한다. 이 책을 읽어 어디에 써 먹겠다는 생각, 이것을 가지고 출세의 밑천을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렌즈가 아무리 좋아도 거기에 때가 끼어 있으면 빛을 모을 수가 없다. 투명한 오목렌즈에 많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하나의 초점으로 집약되어 불을 붙이듯, 내 마음에 천지만물이라는 서책이 주는 모든 지식이 쏟아져 들어와 하나의 초점으로 집약되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가? 방안에도 있지 않고, 책 속에도 있지 않으며, 내 마음 안에 있고, 천지만물 속에 있다. 여보게, 낙서! 그렇다면 자네 우선 그 방안에서 나오게. 문자의 질곡, 언어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게.
『논어』 「옹야」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널리 글을 배우고, 예禮로써 이를 요약하나니, 또한 도에서 어긋나지 않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연암의 「소완정기」는 이 박문약례博文約禮의 가르침을 부연해 설명한 글이다. 명나라 때 귀유광歸有光은 「군자존덕성이도문학君子尊德性而道問學」이란 글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공자의 가르침에 박문약례라 하였으니, 정精으로써 일一로 돌아가고, 의義로써 예禮를 온전히 하며, 박博으로써 약約을 이루라. 모든 성인들께서 서로 전하여온 비결이 여기에 있나니!” 연암이 이 글에서 하고자 한 말은 귀유광의 이 한 마디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장서와 잡다한 지식, 사회적 명성만을 뽐낼 뿐 그것으로 하나의 정채로운 불길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모든 가짜들을 위해 던지는 정문의 일침이다.
5. 자기중심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사람들
우연히 거친 성질을 기리다가 스스로를 사슴에다 견준 것은 사람이 가까이 가면 놀라는 까닭에서였지 감히 스스로 크다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주신 글월을 받자오매, 스스로를 말 꼬리에 붙은 파리에다 비유하셨으니 또 어찌 그다지도 작단 말입니까? 그대가 진실로 작게 되기를 구한다면 파리도 오히려 크지요. 개미가 있지 않습니까? 偶頌野性, 自况於麋, 所以近人則驚, 非敢自大也. 今承明敎, 自比於驥尾之蠅, 又何其小也? 苟足下求爲小也, 蠅猶大也. 不有蟻乎? |
윗 글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역시 바라봄의 문제에 대해 논한 글을 한 편 더 읽어본다.
「답모答某」는 연암이 누군가에게 답장으로 보낸 편지글이다. 아마 이보다 앞선 편지에서 연암이 스스로를 겁 많은 사슴에 견준 것을 두고 상대가 스스로 크다고 여긴 것으로 오해하여, 나는 사슴은커녕 말꼬리에 붙은 파리만하다고 낮추자 이에 대해 해명을 겸하여 쓴 글인 듯 싶다. 언어는 종종 이런 식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연암은 앞서 「답경지」에서, 글쓴이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표면의 문자에만 현혹되는 죽은 독서를 나무랐다. 또 「소완정기」에서는 늘 물속에 있음으로 해서 오히려 물의 존재를 잊고 마는 물고기의 관성화된 삶의 태도를 질타하고, 깨달음으로 점화되지 못하는 지식의 허망함을 지적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번에 살핀 「환희기후지」에서는 눈을 뜨는 순간 눈이 멀어버린 ‘눈 뜬 장님’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뜬 장님은 오히려 눈을 뜨는 순간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보통 사람에게서 눈을 빼앗아 간다면 그 불편함을 단 하루도 견딜 수 없겠으나, 습관이 된 장님에게는 눈 없는 것이 그다지 불편하지가 않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장님은 손으로도 볼 수 있고, 발로도 볼 수 있으며, 마음으로도 볼 수 있으니, 꼭 눈으로 보아야만 보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눈을 빤히 뜨고서도 보지 못하는 ‘눈 뜬 장님’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가 하면 보지 않고도 모두 알아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럴진대 보고 못보고, 보이고 안 보이고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제가 일찍이 약산에 올라가 그 도읍을 굽어보니, 사람들이 내달리고 달음질치는 것이 땅에 엎디어 꿈틀대는 개미집의 개미와 같아, 한 번 크게 숨을 내쉬면 흩어져 버릴 것만 같더이다. 그러나 다시금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게 한다면, 벼랑을 더위잡고 바위를 에돌아 덩쿨을 붙잡고 나무를 끼고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망녕되이 스스로 높고 큰체 하는 것이 또한 머리의 이가 머리카락을 타고 오르는 것과 무에 다르겠습니까? 僕嘗登藥山, 俯其都邑, 其人物之若馳若騖者, 撲地蠕蠕, 若屯垤之蟻, 可能一噓而散也. 然復使邑人而望吾, 則攀崖循巖, 捫蘿緣樹, 旣躋絶頂, 妄自高大者, 亦何異乎頭蝨之緣髮耶? |
이제 이 글에서 연암은 다시 크기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언젠가 약산의 꼭대기에 올라가 약산 읍내를 내려다 본 일이 있었다. 그 아래서 북적대며 오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떼와 다를 바 없었다. 훅 불면 전부 날려가 버릴 것만 같이 통쾌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저 개미 굴 속에서 개미떼들과 더불어 아웅다웅 이익을 다투고 손해를 따지느라 바둥거렸나 생각하니 그만 그들이 불쌍하고 가소로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보면 어떨까? 그 아슬아슬한 산비탈을 낑낑대며 기어, 바위를 돌고 덩쿨을 더위잡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마치 구름 속의 신선이나 된 듯 아래를 굽어보는 내 모습을 보고, 그들은 마치 이 한 마리가 머리카락을 타고 오르듯 우습고 같잖게 볼 것이 아닌가? 올라가본들 다시 내려올 것을 뭐하자고 저렇게 제 몸을 괴롭힌단 말인가 하고 가소로워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개미로 보기나, 저들이 나를 머리카락에 붙은 이로 보기나 서로를 하찮게 여기기는 매 일반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드니, 제 것만 좋고 남의 것이 우습게 보인다. 모든 문제는 언제나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6. 가련한 공기족들의 미련한 판단능력
이제 큰 소리로 스스로를 비유하여 사슴이라 말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겠습니까? 마땅히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다시금 형체의 크고 작음을 비교하고 보는 바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려 한다면, 그대나 나나 모두 망녕될 뿐이리이다. 사슴이 과연 파리보다야 크겠지만, 코끼리가 있지 않습니까? 파리가 과연 사슴보다야 작겠지만 만약 개미로 본다면 코끼리의 사슴에 있어서와 한 가지일 겝니다. 今乃大言自况曰麋, 何其愚也? 宜其見笑於大方之家也. 若復較其形之大小, 辨所見之遠近, 足下與僕, 皆妄也. 麋果大於蠅矣, 不有象乎? 蠅果小於麋矣, 若視諸蟻, 則象之於麋矣. |
연암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제 내가 스스로 사슴이라 비유한데 대해, 그대가 크기로 따져서 자신을 파리에 비교한다면 이 또한 산꼭대기의 사람과 산 아래 사람이 서로를 비웃는 것과 무에 다르겠습니까? 사슴이 파리보다야 엄청나게 크겠지요. 그렇지만 코끼리는 어떻습니까? 파리가 작기는 해도 개미보다는 훨씬 크니, 코끼리와 사슴의 차이에다 견줄 수 있을 겝니다. 이제 내가 다시 스스로를 개미에 견준다면 그대는 장차 어찌 하시렵니까?
이제 저 코끼리는 서면 집채만 하고, 가면 비바람 휘몰아치는 듯 하며, 귀는 드리운 구름같고, 눈은 초승달만합니다. 발가락 사이에 낀 진흙은 흙더미가 언덕과 같아 개미가 그 속에 집을 짓지요. 개미가 비가 오나 싶어 줄지어 나와 두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코끼리가 보이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보는 바의 것이 멀기 때문일 뿐입니다. 코끼리가 한쪽 눈을 찡그리고 보아도 개미를 못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보는 바의 것이 가까운 까닭일 뿐입니다. 만약 조금 큰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금 백리 먼데로부터 바라보게 한다면 아마득하고 가물가물해서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을 겝니다. 어찌 이른바 사슴과 파리, 개미와 코끼리를 족히 분간해낼 수 있겠습니까? 今夫象立如室屋, 行若風雨, 耳若垂雲, 眼如初月, 趾間有泥, 墳若邱壟, 蟻穴其中. 占雨出陣, 瞋雙眼而不見象, 何也? 所見者遠故耳. 象矉一目而不見蟻, 此無他. 所見者近故耳. 若使稍大眼目者, 復自百里之遠而望之, 則窅窅玄玄, 都無所見矣. 安有所謂麋蠅蟻象之足辨哉. |
자! 그렇다면 내가 가장 작은 개미와 가장 큰 코끼리를 가지고 말씀드리지요. 코끼리의 집채 만한 몸집이 한 번 어슬렁거릴제면 마치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듯 하고, 그 큰 귀를 한 번 뒤채면 구름이 드리운 것만 같고, 몸집에 비해 작기만 한 눈도 초승달 만하게 보이겠지요. 개미는 그 코끼리의 발가락 사이에 낀 흙덩어리 속에 집을 짓고 삽니다. 날씨가 꾸물꾸물하면 비라도 오려나 싶어 개미떼가 줄을 지어 내다 보는 것이지만, 암만 봐도 제가 부치어 사는 코끼리는 안중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코끼리가 너무 크고, 제 눈에서 아득히 멀기 때문이지요. 보이지 않기는 코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고 바라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은 개미가 너무 작은데다, 제 눈에서 너무 가까이 있는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너무 큰 것과 너무 작은 것, 아주 먼 것과 아주 가까운 것은 결국 한가지인 셈입니다. 개미에게는 코끼리가 안중에 없고, 코끼리 또한 개미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만이 그 중간에 서서 이것은 저것보다 얼마나 크니, 저것은 이것보다 얼마나 작으니 하며 따지길 좋아합니다. 조금 크면 그 앞에서 그만 주눅이 들고, 조금 작다 싶으면 만만이 보아 업수이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설령 아주 먼데를 볼 수 있는 큰 안목을 갖춘 사람이 있다 해도 백리 먼 곳에서 본다면 그 큰 코끼리가 보이겠습니까? 그 작은 개미가 보이겠습니까? 제 아무리 뛰어난 시력을 갖추었어도 백리 밖에서는 아무 것도 분간해 낼 수가 없을겝니다. 그러니 이제 내가 스스로 사슴에 견준 것을 두고 자신을 파리에 견주어, 이것으로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증거로 삼으려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겠지요. 그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렇다! 우리의 눈이란 종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우리의 귀만 해도 그렇다. 조금 큰 소리에도 깜짝 놀라고, 때로는 고막이 터질까봐 귀를 막으면서도, 그보다 더 큰 우주의 소리는 아예 들리지도 않는 것이다. 모기가 앵앵대는 소리에 예민한 신경이 화들짝 놀라 무더운 잠을 깨기도 하지만, 개미가 제 먹이를 통째로 우걱우걱 씹어대는 그 큰 소리는 하나도 듣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디부터가 작은 소리고 어디까지가 큰 소리인가? 무엇이 작은 것이고, 무엇이 큰 것인가?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미세한 세계가 있고, 천체 망원경으로만 볼 수 있는 아득한 세계도 있다. 그 미세하고 광대한 세계 속에서 유독 인간만이 제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이것은 크니 저것은 작으니 하면서 무슨 큰 일이라도 난 듯 따지고 잰다. 내가 직접 보고 듣는 눈과 귀가 이렇듯 믿을 수 없을진대, 그 눈과 귀를 믿고 따라서 움직이는 마음이란 것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황지우가 살찐 소파에 앉아서 하루 종일 격조 있게 혼자 놀다가, “수족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얼굴에/ 횡으로 도열한 수마트라 두 마리, 열대어 화석처럼 박혀 들어왔을 때/ 나는 내가 담겨 있는 공기족관空氣族館을 느꼈다”(「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고 한 것도 아마 이런 종류의 깨달음이었으리라. 수족관 속의 물고기가 답답하기나, 공기족관 속의 내가 안스럽기나 결국은 그게 그거라는 거다. 사람이 물고기를 불쌍해할 하등의 자격이 없다는 거다. 그는 조금 씁쓸하게 말을 했지만, 결국은 개미가 코끼리를 안중에 두지 않고 살 듯 그렇게 저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거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고정의 가치는 없다. 불변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유동하는 가운데 있다. 놓이는 자리에 따라 달라진다. 꼭 이래야만 한다고 우기지 말아라. 이것만이 옳다고 고집하지 말아라. 여룡은 제 여의주를 가지고 말똥구리의 말똥을 웃지 않는다. 말똥구리는 제 말똥을 소중히 알아 여룡의 여의주에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말똥구리에게는 말똥만이 소중할 뿐인데, 그것을 하찮고 더럽게 여기는 것은 오직 우리 ‘가련한 공기족空氣族’들 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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