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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비슷한 것은 가짜다 - 6. 문심(文心)과 문정(文情) 본문

책/한문(漢文)

비슷한 것은 가짜다 - 6. 문심(文心)과 문정(文情)

건방진방랑자 2020. 3. 24.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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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을 보며 글자를 만들었던 포희씨

 

 

연암은 40세 전후로 지금의 파고다 공원 뒤편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머물러 살았다. 이 시기 전후 몇 년간의 글을 묶어 종북소선鍾北小選이라 이름 짓는다. 이글은 이 묶음의 첫머리에 얹은 것이다. 연암 문학론의 최상승最上乘 문자로 그 문학 정신의 울결鬱結이 이 한편에 녹아 있다.

 

 

전의감동에 살 때의 울분은 醉踏雲從橋記담겨 있다. (사진 출처 - [연암을 읽다])  

 

 

 

우주라는 기호를, 만물이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야 좋을까? 연암은 이 종북소선자서鍾北小選自序에서 그 방법을 성색정경聲色情境이란 네 항목에 담아 이야기한다. 다시 처음의 원문으로 되돌아가서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보자.

 

아아! 포희씨庖犧氏가 죽으매 그 문장文章이 흩어진지 오래로다. 그러나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 돌의 초록빛과 새깃의 비취빛 등 그 문심文心은 변치 않았다. 솥의 발과 호리병의 허리, 해의 둘레, 달의 활 모양은 자체字體가 아직도 온전하다. 그 바람과 구름, 우레와 번개 및 비와 눈, 서리와 이슬, 그리고 새와 물고기와 짐승과 벌레와, 웃고 울고 소리 내고 울부짖는 것들의 성색정경聲色情境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嗟乎! 庖犧氏歿, 其文章散久矣. 然而, 蟲鬚花蘂·石綠羽翠, 其文心不變; 鼎足壺腰·日環月弦, 字體猶全. 其風雲雷電·雨雪霜露, 與夫飛潛走躍, 笑啼鳴嘯, 而聲色情境, 至今自在.

글에는 성색정경聲色情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팔괘를 만들었다는 포희씨가 죽자 그 문장은 흩어져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포희씨로 하여금 천지만물이라는 텍스트를 읽어 괘상으로 표현하게끔 했던 그 사물의 세계, 그 감동의 세계는 오늘도 그대로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그것을 이름하여 문심文心이라 한다. 글자를 처음 만들었다는 창힐씨가 죽자 그 문장은 흩어져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물을 관찰하여 기호로 옮겨내던 창힐씨의 정신은 그가 관찰했던 그 사물들 속에 여전히 남아 바래지 않는 의미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 문심, 그 자체字體, 무수히 포개진 시간 속에서도 변함없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사물들의 성색정경은 지금도 자재自在로이 남아 있다.

 

 

그런 까닭에 을 읽지 않고는 그림을 알지 못하고, 그림을 알지 못하면 글을 알지 못한다. 왜 그런가? 포희씨庖犧氏을 지음은 우러러 관찰하고 굽어 살펴보아 홀수와 짝수를 더하고 갑절로 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와 같이하여 그림이 되었다[각주:1]. 창힐씨蒼頡氏가 글자를 만든 것 또한 정을 곡진히 하고 형을 다하여 전주轉注하고 가차假借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하여 글이 된 것이다[각주:2].
故不讀易則不知畵, 不知畵則不知文矣. 何則? 庖犧氏作易, 不過仰觀俯察, 奇偶加倍, 如是而畵矣. 蒼頡氏造字, 亦不過曲情盡形, 轉借象義, 如是而文矣.

장언원張彦遠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서, 처음 창힐이 글자를 만들자 조화造化가 그 비밀을 간직할 수 없게 되고 영괴靈怪가 그 모습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하늘은 곡식비를 내리고, 귀신이 한밤중에 울었다고 했다. 그 태초의 교감, 그 원음을 듣는 감동은 이제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제 우리는 천지만물의 비의秘義를 가늠할 줄 알았던 포희씨의 그 정신, 사물을 기호 속에 재현해 낼 줄 알았던 창힐씨의 그 마음을 잃고 말았다.

 

 

 

 

 

 

  1. 『주역周易』「계사繫辭」하下에 “옛날에 포희씨가 천하에서 왕노릇할 때, 우러러 하늘에서 象을 관찰하고, 굽어 땅에서 법칙을 관찰하며, 새와 짐승의 무늬와 땅의 마땅함을 관찰하고, 가까이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여 이에 비로소 팔괘를 만드니, 이로써 신명神明의 덕과 통하게 되었고, 이로써 만물의 정을 그려내게 되었다. 古者包犧氏之王天下也, 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觀鳥獸之文與地之宜, 近取諸身, 遠取諸物. 於是始作八卦, 以通神明之德, 以類萬物之情”고 하였다. [본문으로]
  2.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 권 1, 「서화지원류敍畵之源流」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창힐은 눈이 네 개였는데, 우러러 드리운 형상을 관찰하고 새와 거북의 자취를 본떠서 마침내 글자의 꼴을 정하였다. 조화造化가 능히 그 비밀을 감출수 없게 된 까닭에 하늘은 곡식비를 내렸고, 신령神靈들도 그 모습을 숨길 수가 없게 되자 귀신이 한밤중에 울었다. 頡有四目, 仰觀垂象, 因儷鳥龜之跡, 遂定書字之形. 造化不能藏其秘, 故天雨粟, 靈怪不能遁其形, 故鬼夜哭.” [본문으로]

 

 

2. 글로 드러나는 소리와 빛깔

 

 

그렇다면 글에 소리[]가 있는가? 말하기를, 이윤伊尹의 대신大臣 노릇 할 때[각주:1]와 주공周公이 숙부叔父 역할을 할 때[각주:2] 내가 그 말소리는 듣지 못하였어도 그 소리를 상상해 본다면 정성스러울 따름이었으리라. 고아孤兒인 백기伯奇[각주:3]와 기량杞梁의 과부寡婦[각주:4]를 내가 그 모습은 못 보았지만, 그 소리를 떠올려 보면 간절할 뿐이었으리라.
未聞其語也,然則文有聲乎? : 伊尹之大臣, 周公之叔父, 吾 想其音則款款耳. 伯奇之孤子, 杞梁之寡妻, 吾未見其容也, 思其聲則懇懇耳.

먼저 이다. 그렇다. 글에는 그 배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있어야 한다. 이윤伊尹과 주공周公, 백기伯奇와 기량杞梁, 그 옛 사람의 음성을 나는 접한 적이 없는데도, 그 글을 읽으면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하고 안타까운 소리가 또렷이 들려오는 것이다. 내가 읽은 것은 그의 글일 뿐인데, 마치 그 사람이 내 앞에 서 있는 듯, 그 그렁그렁한 음성이 내 가슴에 파고들어, 아득한 옛 사람과 호흡지간에 서로 만나 손잡게 해주는 것이다. 좋은 글에는 소리가 있다. 행간으로 울려오는 소리가 있다. 체취가 느껴지는 육성이 있다.

 

 

글에 빛깔[]이 있는가?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잘 나와 있다. “비단옷에 홑옷 덧입고, 비단 치마에 홑치마 덧입었네.衣錦褧衣, 裳錦褧裳라고 하였고[각주:5], “검은 머리 구름 같으니 트레머리 얹을 필요가 없네.鬒髮如雲, 不屑髢也라고 하였다[각주:6].
文有色乎? : 詩固有之. “衣錦褧衣, 裳錦褧裳.” “鬒髮如雲, 不屑髢也.”

그 다음은 이다. 글에는 또 빛깔이 있어야 한다. 비단옷에 홑옷을 덧입는 것은 왜 그런가? 비단옷이 너무 화려하므로 그 화려함을 감추고자 함이다. 검은 머리가 윤기 흐르니 굳이 화려한 트레머리의 장식은 얹을 필요가 없다. 비단옷의 화려는 감춤으로써 은은히 드러나고, 맨 머리의 짙음은 트레머리를 얹지 않을 때 한층 분명해진다. 감춤으로써 더 드러나는 아름다움, 또는 드러냄으로써 더 환해지는 아름다움이 있다. 글이 의미를 드러내는 것도 이와 같다. 있지도 않은 화려를 꾸미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이 능사가 아니다. 보잘 것 없는 본 모습을 뽐내는 것도 자랑이랄 수 없다. 뽐내려면 감추어라. 뽐내려면 드러내어라. 이 사이의 미묘한 저울질을 아는가? 글에는 빛깔이 있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한시미학산책

1. 세상을 보며 글자를 만들었던 포희씨

2. 글로 드러나는 소리와 빛깔

3. 글로 드러나는

4. 통해야만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한다

5. 세상을 관찰함으로 읽는 책

6. 아깝구나, 연암이 세초하여 없앤 책들

 

 

 

  1. 이윤伊尹은 탕湯임금을 도와 천하에 왕노릇 하게 하였다. 처음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을 초빙할 때에 폐백을 가지고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었다. 『맹자孟子』「만장萬章」상上에 이때 마음을 고쳐 초빙에 응하면서 그가 한 말이 실려 있다. 또 탕왕湯王이 세상을 뜬 후 태갑太甲이 탕왕湯王의 법도를 전복시키므로 이윤이 그를 동桐 땅에 3년간 유폐시켜 과오를 뉘우치게 하였다. 『서경書經』「이훈伊訓」은 이윤이 태갑을 훈도코자 지은 글이고, 또 「태갑太甲」上에는 이윤이 태갑을 뉘우치게 하려고 두 번 세 번 간곡한 말로 올린 글이 실려 있다. 이윤은 마음만 먹었으면 자신이 왕노릇 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 그의 글을 읽으매 그의 폐부에서 우러나는 관관款款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본문으로]
  2. 주공周公 단旦이 무왕武王을 이어 숙부로써 성왕成王을 도울 때 간곡한 말로 임금이 경계로 해야 할 일을 간한 일을 두고 한 말이다. 『서경書經』「무일無逸」에서 주공은 무려 7차례에 걸쳐 ‘오호嗚呼’로 시작되는 간곡한 말로 임금의 바른 마음가짐을 간하고 있다. 『맹자孟子』 「만장萬章」상上에는 “繼世以有天下, 天之所廢, 必若桀紂者也. 故益伊尹周公, 不有天下”라 하였다. [본문으로]
  3. 백기伯奇는 주선왕周宣王 때 신하 윤길보尹吉甫의 아들인데, 어머니가 죽자 후모後母가 그 아들 백봉伯封을 장자로 세우고자 백기를 무함하였다. 이에 윤길보가 노하여 백기를 들판으로 쫓아 내니 백기는 연잎을 엮어 옷해입고 마름꽃을 따서 먹으며 죄없이 쫓겨난 것을 슬퍼하여 「이상조履霜操」란 노래를 지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이에 윤길보가 뒤늦게 깨달아 백기를 다시 불러오고 후처를 죽였다. 『초학기初學記』 권 2에 보인다. 여기서는 지금도 그 시를 읽으면, 백기가 가슴 가득 억울함을 품고 노래 부를 때의 그 간간懇懇한 음성이 마치 귀에 들리는 것만 같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4. 춘추春秋 때 제齊나라 대부 기량杞梁이 전사戰死하자, 그 아내 맹강孟姜이 교외에서 상여를 맞이하는데 곡소리가 몹시 구슬퍼 듣는 이가 모두 눈물을 흘리고, 성벽城壁이 그 소리에 무너지고 말았다는 고사.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기량처杞梁妻」에는 남편이 죽자 그녀가 “위로는 아비 없고, 가운데 지아비 없고, 아래로 자식도 없으니 산 사람의 고통이 지극하고나. 上則無父, 中則無夫, 下則無子, 生人之苦至矣”하며 길게 곡하자 도성의 성벽이 감동하여 무너졌고, 그녀 또한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했다. [본문으로]
  5. 『詩經』「鄭風」「丰」에 나온다. 錦은 무늬있는 화려한 옷이니, 그 화려함이 지나치게 드러남을 가리기 위해 麻紗로 된 홑옷을 그 위에 받쳐 입음을 말한 것이다. 「衛風」「碩人」에도 “碩人其頎, 衣錦褧衣”라 한 구절이 있다. 劉勰의 『文心雕龍』「情采」에도 “是以衣錦褧衣, 惡文太章; 賁象窮白, 貴乎反本”이라 하였다. [본문으로]
  6. 『시경詩經』「용풍鄘風」「군자해로君子偕老」에 나온다. ‘진발鬒髮’은 머리숱이 짙고 많은 것이고, ‘체髢’는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덧얹는 트레머리, 즉 가발이다. 지나친 방탕과 사치를 경계한 시로, 본 바탕의 아름다움을 갖추었으면 트레머리를 얹어 치장함이 불필요함을 말한 것이다. [본문으로]

 

 

3. 글로 드러나는

 

 

무엇을 일러 정이라 하는가? 말하기를,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은 초록이요 산이 푸르른 것이다.
何如是情? : 鳥啼花開, 水綠山靑.

또한 글에는 정이 있다. 글의 정이란 무엇인가.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은 초록빛이요 산은 푸른빛이라고 했다. 나는 외롭다. 나는 슬프다. 나는 기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기쁘다고 쓰지 않고,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로 들려준다. 나는 외롭다고 말하는 대신 가을하늘을 나는 외기러기의 울음에 얹을 뿐이다. 돌아오지 않는 님이 그리워 가슴이 아플제면 나는 그 님과 헤어지던 그 버드나무 아래서 뭣 모르고 우는 꾀꼬리 소리를 듣고 서 있다.

아아! 그렇구나.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 새는 울고 꽃은 피었다가 또 저렇게 지는 것이다. 강물은 흘러가고 산은 언제나 푸른 자태로 저렇게 서 있는 것이다. 내 마음도 저 청산과 같이 푸를 수만 있다면, 저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나 정체되지 않기를. 내가 말하고 보여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일 뿐인데, 어째서 그것들 위에는 내 정의 무늬가 아로새겨지는가? 사물은 깨끗이 닦아논 거울이구나.

 

 

무엇을 일러 경이라 하는가? 말하기를, 먼데 있는 물에는 물결이 없고, 먼데 있는 산에는 나무가 없으며, 먼데 있는 사람은 눈이 없다[각주:1]. 그 말하는 것은 가리키는 데 있고, 듣는 것은 손을 맞잡는데 있다[각주:2].
何如是境? : 遠水不波, 遠山不樹, 遠人不目. 其語在指, 其聽在拱.

글에는 경도 있다. 먼 물을 그릴 때는 물결을 그리지 말아라. 파도가 없어서가 아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먼 산을 그릴 때는 나무를 그리면 안 된다. 나무가 없어서가 아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을 그릴 때면 눈을 그리지 말아라. 그가 장님이어서가 아니다. 거리가 멀기에 그의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을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화면 속에 한 사람이 어딘가를 가리킬 때 그는 지금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화면 속에 한 사람이 두 손을 맞잡고 있다면 그는 지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만폭동도萬瀑洞圖우여춘수도雨餘春水圖를 보라. 여기에는 눈도 코도 없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손을 맞잡고 그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일일이 시시콜콜히 설명하지 않아도 쓰는 이의 의도는 그 행간에 농축되어 전달된다. 글이나 그림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옮겨 놓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 렌즈가 담아내는 사진과 화가가 그리는 그림은 그래서 다르다. 영화관의 간판과 극사실의 회화가 구분되는 점도 여기에 있다. 둘 다 똑같이 대상을 재현했는데 하나는 간판이 되고 하나는 예술이 된다. 왜 그런가? 그 차이는 경의 유무로 결정된다. 경이란 무엇인가? 화가의 주관적 정이 세계의 객관적 물과 만나는 접점에서 빚어지는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경계이다. 말하지 않고 말하기, 그리지 않고 그리기. 이것이 글의 경이다. 한마디 말로 열 마디 웅변을 대신하게 해주는 힘, 이것이 글의 경이다.

 

 

 

 

 

 

  1. 당唐 왕유王維의 찬撰으로 전해지는 「산수론山水論」에 보이는 구절이다. “무릇 산수山水를 그리는 것은 뜻이 붓보다 우선해야한다. 산山이 열 자라면 나무는 한 자가 되고, 말이 한 치라면 사람은 한 푼의 크기로 그린다. 먼데 사람은 눈이 없고, 먼데 나무는 가지가 없으며, 먼산은 바위가 없이 은은히 눈썹처럼 그려야 하고, 먼 물은 물결이 없이 구름과 높이가 나란해야 한다. 이것이 산수화를 그리는 비결이다. 凡畵山水, 意在筆先. 丈山尺樹, 寸馬分人. 遠人無目, 遠樹無枝, 遠山無石, 隱隱如眉; 遠水無波, 高與雲齊, 此是訣也.” [본문으로]
  2. 옛 그림의 풍경 속에는 으레 두 사람이 등장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한 사람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고, 한 사람은 그 가리키는 방향을 보며 두 손을 맞잡고 있다. 가리키는 사람이 말을 하는 사람이고, 맞잡은 사람은 듣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4. 통해야만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한다

 

 

그런 까닭에 늙은 신하가 어린 임금께 고하는 것과 고아와 과부의 사모함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더불어 소리를 논할 수가 없다. 글을 짓더라도 시경의 생각이 없으면 더불어 국풍國風의 빛깔을 알 수가 없다. 사람이 이별해보지 못하고, 그림에 먼 뜻이 없다면 더불어 문장의 정경情境을 논할 수가 없다.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모두 문심文心이 없는 것이다. 솥과 그릇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하는 자는 비록 한 글자도 모른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故不識老臣之告幼主, 孤子寡婦之思慕者, 不可與論聲矣. 文而無詩思, 不可與知乎國風之色矣. 人無別離, 畵無遠意, 不可與論乎文章之情境矣. 不屑於蟲鬚花蘂者, 都無文心矣. 不味乎器用之象者, 雖謂之不識一字可也.

주역周易』「계사繫辭는 그래서 역궁즉변易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가구通則可久라고 적고 있다. 은 궁하면 변화해야 하고, 변화해야 서로 통하게 된다. 통하게 되어야만 비로소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변화를 잊고 사물을 외면한 채 이미 낡은 기호, 죽은 사상事象에만 집착한다.

벌레의 더듬이나 꽃술이나 돌이끼, 새깃은 이제 그들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기용器用의 형상은 그들에게 어떤 느낌도 줄 수가 없다. 문심을 잃은 까닭이다. 그들이 지은 글을 보고는 귀신은 더 이상 울음 울지 않는다. 하늘은 곡식비를 내리지도 않는다.

 

 

고대에는 우주가 하나의 형태와 중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주의 운동은 순환적 리듬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고, 그 리듬의 형상은 여러 세기 동안 도시와 법과 예술작품의 원형이 되었다. 정치적 질서와 시적 질서, 공적인 축제와 사적인 제의祭儀 -그리고 나아가 우주적 법칙에 대한 불화의 위반에 이르기까지-등은 우주적 리듬의 표현들이었다. 그 뒤 세계의 형상이 확장되었다. 공간은 무한하고 사방으로 뚫려 있다. 플라톤적인 해()는 끝없고 직선적인 연속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항성들은 더 이상 우주적 조화의 이미지가 되지 못했다. 세계의 중심과 신은 쫓겨나고, 관념과 본질들은 사라져갔다. 우리는 홀로 남게 되었다. 우주의 형상이 바뀌고,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개념도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여전히 세계였고, 인간은 인간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총체였다. 이제 공간은 팽창하여 분열되고, 시간은 불연속적인 것이 되었다. 세계, 전체는 조각 조각 파편화되었다. 인간은 분산되고, 그 역시 분산되어 떠도는 공간 속에서 미아가 되었다.

- 활과 리라, 김홍근·김은중 편역, 솔출판사, 338

 

 

옥따비오 빠스는 공간은 팽창하여 분열하고, 시간은 불연속적인 것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세계는 조각조각 파편화되어 인간은 분산되고, 떠도는 공간 속에서 길 잃은 미아가 되고 말았다고 썼다.

이처럼 조각조각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문학을 한다는 행위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 옛날 포희씨가 했던 것은 앙관부찰仰觀俯察즉 우러러 하늘을 살펴보고, 굽어 땅을 관찰했을 뿐이다. 창힐씨가 했던 것은 곡정진형曲情盡形곧 정을 곡진히 하고 형상을 그대로 재현해 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제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남들이 이미 했던 말을 되풀이하고, 남들이 본대로만 바라볼 따름이다. 세계와 앙가슴으로 만날 수 있는 통로를 사람들은 잃고 말았다. 중심 없는 세계에서 쓸쓸하게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하고, 해체주의를 말하며, 패러디의 시학을 외쳐대는 공허한 메아리만 울려 퍼진다.

 

 

 

 

5. 세상을 관찰함으로 읽는 책

 

 

여기서 다시 연암의 글 한편을 읽기로 하자. 제목은 답경지지이答京之之二이다.

 

독서를 정밀하고 부지런히 하기로는 포희씨만한 이가 없다. 그 정신과 의태意態는 천지만물을 포괄망라하고 만물에 흩어져 있으니, 이것은 다만 글자로 쓰이지 않고 글로 되지 않은 글일 뿐이다. 후세에 독서를 부지런히 한다고 하는 자들은 거친 마음과 얕은 식견으로 마른 먹과 썩어 문드러진 종이 사이에 눈을 부비며 그 좀오줌과 쥐똥을 엮어 토론하니, 이는 이른바 술지게미와 묽은 술을 먹고 취해 죽겠다는 꼴이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讀書精勤, 孰與庖犧? 其神精意態, 佈羅六合, 散在萬物, 是特不字不書之文耳. 後世號勤讀書者, 以麤心淺識, 蒿目於枯墨爛楮之間, 討掇其蟫溺鼠渤, 是所謂哺糟醨而醉欲死. 豈不哀哉!
 
저 허공 속을 울며 나는 것은 얼마나 생의로운가? 그런데 이를 적막하게 란 한 글자로 말살시켜 버리니, 빛깔도 볼 수 없고 그 모습과 소리도 찾을 수 없다. 이 어찌 마을 제사에 나아가는 시골 늙은이의 지팡이 위에 새겨진 새와 다르랴! 어떤 이는 그것이 너무 평범하니 산뜻하게 바꾼다하여 자로 고친다. 이것은 책 읽고 글 짓는 자의 잘못이다.
彼空裡飛鳴, 何等生意? 而寂寞以一鳥字抹摋, 沒却彩色, 遺落容聲, 奚異乎赴社邨翁杖頭之物耶? 或復嫌其道常, 思變輕淸, 換箇禽字, 此讀書作文者之過也.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 그늘진 뜨락에서 이따금 새가 지저귄다.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외쳐 말하기를, “이것은 내 날아가고 날아오는 글자이고,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 글이로다하였다. 오색 채색을 문장이라고 한다면 문장으로 이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이다. 오늘 나는 책을 읽었다.
朝起綠樹蔭庭, 時鳥鳴嚶. 擧扇拍案胡呌曰: “是吾飛去飛來之字, 相鳴相和之書. 五采之謂文章, 則文章莫過於此. 今日僕讀書矣.

오늘 나는 책을 읽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질 않는가? 포희씨가 읽었던 책은 글자로 씌여지지도 않고, 글로 엮어지지도 않은 글이었다. 육합六合을 포괄하고 여태도 만물에 흩어져 있는 그런 문장이었다. 우주만물이라는 살아있는 텍스트였다. 그것은 날아가는 새의 푸득이는 날갯짓에서 느끼는 약동하는 생명력이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독서는 옛 사람의 말라비틀어진 종이 위에 머리를 묻고, 그 좀오줌과 쥐똥에 코를 박고서 이미 용도 폐기된 죽은 지식의 껍데기만을 찾아 헤매이는 것이다. 펄펄 날며 우짖는 저 새의 생의로움을 시골 늙은이 지팡이 위에 새겨 놓은 새 마냥 가두어두고도 그들은 쉽게 만족하고 흐뭇해한다. 술에 취해 죽으려거든 깡술을 마실 일이지, 왜 술지게미만 배가 터지게 먹어대는가? 사물과 만나고 싶으면 가슴을 활짝 열어 그것들을 받아들일 일이지, 왜 낡은 책갈피만 뒤적이고 있는가?

글속에 담긴 교훈적 의미나 끄집어내는 사람과는 문학을 이야기할 수 없다. 구도와 색채만을 말하는 자와는 그림을 이야기 하지 말 일이다. 과 색만 보고 광과 태는 읽을 줄 모르는 자와는 예술을 말할 수 없다. 외피만 보고 판단치 말라. 거기에 담긴 시인의 마음, 화가의 의도를 읽어라. 그림 속에 깃든 소리, 글 속에 담긴 메아리를 읽어라. 마음의 귀로 들어라. 눈앞에 있는 그대로를 그림같이 묘사한다하여 좋은 글이 아니다. 눈앞의 광경을 사실같이 모사模寫한다하여 좋은 그림일수가 없다. 저울질이 있어야 한다. 미묘한 저울질, 그 저울질로 하여 사물의 본질이 드러난다.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온갖 다채로운 빛깔로 반사되듯이, 사물은 시인의 눈을 통과하면서 제각금의 빛깔을 드러내야 한다.

아픈 사랑의 이별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시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연암은 말한다. 그런데도 정작 그는 가슴이 아프다고 쓰지 않고 새가 울고 꽃이 피었다고 쓰고 있구나. 먼데 사람까지도 이목구비를 단정히 그려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화가는 이발소 그림이나 그려서 좋을 화가다. 이런 자들과 어찌 문장의 정경情境을 말하랴. 사랑을 모르는 자 문학을 말하지 말라. 그 사랑의 마음을 담담히 감정의 체로 걸러 사물에 얹어낼 수 없는 자 문학을 말하지 말라. 그림에 먼 뜻이 담길 때라야 경은 살아난다. 할 말을 다 해버리면 경은 사라진다. 이 이치를 모르고서는 문장의 정경情境을 운위하지 말라. 벌레의 더듬이를 보고, 꽃술을 보며 즐거워하는 자는 문심文心이 있는 자이다. 솥과 그릇의 형상을 보고 무릎을 치는 사람은 글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사물과 만나 그 의미를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다.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도 사물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나 진배없다. 아름다운 새 소리에 아무 느낌도 일지 않는 사람은 귀머거리나 한 가지다. 정신의 귀가 멀고, 가슴의 눈이 멀고 보면 예술은 빛을 잃는다. 성색정경聲色情境은 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물들 속에 녹아 있다.

 

 

 

6. 아깝구나, 연암이 세초하여 없앤 책들

 

 

아들 박종채朴宗采아버지 연암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연암협에 계실 때 혹은 종일 마루를 내려오지 않고 혹은 어떤 사물을 주목하여 눈길을 돌리지 않고 침묵하여 말이 없는 채 두어 시간을 넘기곤 했다.
其在燕峽也, 終日不下堂, 或遇物注目, 瞪默不言者移時.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지극히 미미한 물건, 예컨대 풀이나 짐승이나 벌레라도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으니, 조물주가 만든 자연의 현묘함을 볼 수가 있다하셨다.
嘗言: “雖物之至微, 如艸卉禽蟲, 皆有至境, 可見造物自然之玅.”
 
매양 냇가 바위에 앉아 들릴 듯 말 듯 읊조리거나 느릿느릿 걷다가 문득 멍하니 무엇을 잊어버린 듯 하셨다. 때로 오묘한 깨달음이 있으면 반드시 붓을 잡고 기록을 해서, 깨알 같은 글씨로 쓴 조각조각 종잇장들이 상자에 가득 차고 넘쳤다.
毎臨溪坐石, 微吟緩步, 忽嗒然若忘也. 時有玅契, 必援筆箚記, 細書片紙, 充溢篋箱.
 
마침내 시냇가 집에 간직해두고서, “훗날 다시 생각하고 점검해서 조리가 일관된 연후에 책을 이루리라하셨다.
遂藏之溪堂, : “他日更加攷檢, 有條貫然後可以成書.”
 
뒷날 관직을 버리고 연암협에 들어가 꺼내 살펴보니 그때는 눈이 너무 나빠져서 작은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서글피 탄식하시기를, “애석타! 고을살이 십 수년에 한 질 좋은 책을 잃어버렸구나!”하시고, 이윽고 끝내 쓸짝없이 되고야 말았으니, 헛되이 사람의 뜻만 어지럽힐 것이다하시고, 냇물에 세초洗草해버리게 하셨다.
後棄官入峽, 出而視之, 眼昏已甚, 不能察細字. 乃悵然發歎曰: “惜乎! 宦遊十數年, 便失一部佳書.” 已而又曰: “終歸無用, 徒亂人意.” 遂令洗草溪下.
 
아하! 우리들은 그때 곁에 있지 않아서, 마침내 수습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嗟乎! 不肖輩, 時未侍側, 遂失檢拾焉.
 
譯註 過庭錄(박종채 저/ 김윤조 역주, 태학사 간, 63)

아깝구나! 그 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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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목차 / 한시미학 / 연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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