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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이미지는 살아 있다, 코끼리의 기호학 - 6. 만물은 제각기 살아 숨 쉴 뿐, 절대적 법칙은 없다 본문

책/한문(漢文)

이미지는 살아 있다, 코끼리의 기호학 - 6. 만물은 제각기 살아 숨 쉴 뿐, 절대적 법칙은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0. 3. 24.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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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만물은 제각기 살아 숨 쉴 뿐, 절대적 법칙은 없다

 

 

이것은 마음으로 헤아림이 미치는 바가 오직 소나 말, 닭이나 개에만 있지, 용이나 봉황, 거북이나 기린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쳐서 이를 죽이고 마니 그 코는 천하에 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우러르며 서 있는다. 그렇다고 해서 장차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말한다면 앞서 말한 바의 이치는 아닐 것이다.

是情量所及, 惟在乎馬牛鷄犬, 而不及於龍鳳龜麟也. 象遇虎, 則鼻擊而斃之, 其鼻也, 天下無敵也. 遇鼠, 則置鼻無地, 仰天而立. 將謂鼠嚴於虎, 則非向所謂理也.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내 눈으로 보아 아는 세계의 하찮은 지식을 가지고 세상의 온갖 진리를 꿰뚫으려 하는 노력은 코끼리 앞에 서면 무력해지고 만다. 코끼리만 예외로 해 놓고 그냥 넘어 갔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고민스럽다. 그 사나운 범 두 마리를 일격에 쓰러뜨린 코끼리의 그 코도 조막만한 새앙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코끼리의 코 속으로 쥐가 들어가면 코끼리는 그만 미쳐 날뛰다 죽는다. ! 사나운 범은 코끼리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그 용맹한 코끼리는 범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새앙쥐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그렇다면 새앙쥐는 범보다 위대한가? 이것을 수긍할 수 없다면, 대저 저 하늘의 일정한 섭리란 것은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대저 코끼리는 직접 눈으로 보는데도 그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데, 또 하물며 천하 사물은 코끼리보다 만배나 됨에랴! 그런 까닭에 성인께서 주역을 지으실 적에 을 취하여 이를 드러내었던 것은 만물의 변화를 다하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夫象猶目見, 而其理之不可知者如此, 則又況天下之物, 萬倍於象者乎? 故聖人作易, 取象而著之者, 所以窮萬物之變也歟.

하늘의 섭리는 없다. 고정불변의 이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물은 제각금 살아 숨 쉰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 내가 알지 못한다 해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지 말아라. 지금 내 눈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저 코끼리야 말로 그 살아 있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천지만물의 주재자라고 믿는 하늘을 두고도 우리는 필요에 따라 천··· 등의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가?

같은 하늘이로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지듯, 한 가지 사물 안에도 온갖 이치가 깃들어 있다. 나는 코끼리를 통해 세계와 만난다. 주역의 괘는 각각의 으로 형상화 된다. 그런데 그 괘상의 결합은 미묘하고도 복잡하여 일괄하여 말하기 어려운 무수한 변상變象들을 만들어 낸다. 이미지를 나타내는 이란 글자가 코끼리 상자이기도 한 것은 무슨 심오한 관련이 있는가? 그것은 성인의 뜻이라 가늠할 수가 없다.

연암은 예외를 인정치 않으려는 태도를 수긍하려 들지 않는다. 사실 하늘의 이치란 것도 하나의 법칙이란 것도 인간이 지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사물들은 살아 있다. 그것은 하나의 법칙으로 가둘 수가 없다. 하늘의 이름이 부르는 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지듯이, 사물의 질서는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하나의 기호는 하나의 진실만을 담고 있지 않다. 나는 그 기호를 통해 세상과 만난다. 기호와 기호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 기호는 살아 있다. 코끼리는 살아 있다.

나는 이글을 쓰는 내내 연암의 상기를 에코가 읽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언제나 세상은 실체는 간데없고 기호만이 괴력을 발휘해 왔다. 기호가 말씀이 되고 권력이 되어 살아 숨 쉬는 사물의 생취生趣를 억압해 왔다. 기호와 세계 사이의 불균형과 간극은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것인가?

살펴본 대로 연암의 상기象記는 획일화된 가치 척도로 세계를 규정코자 하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의 뜻을 담아내고 있다. 우연히 열하 행궁에서 만난 코끼리를 앞에 두고, 인간의 사변적 지식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만고불변의 진리란 것이 어째서 이토록 허망한가를 그는 생각하고 있다.

물상의 세계는 햇볕에 비친 까마귀의 날갯빛과도 같아 잡아 가두려고 하면 금세 달아나버린다. 이미지는 살아 있다. 내 손끝이나 눈길이 닿을 때마다 그것들은 경련한다. 살아있는 이미지들 속에서만이 삶의 정신은 빛을 발한다. 화석화된 이미지는 더 이상 이미지일 수가 없다. 이것이 코끼리를 앞에 세워 놓고 연암이 21세기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움베르토 에코와 연암으로 본 동서양의 철학 차이

2. 이전에 코끼리를 두 번 봤던 기억

3. 코끼리를 눈으로 보고도 코를 찾는 사람들

4. 하늘이 만든 건 아무 것도 없다

5. 하늘은 왜 코끼리에게 장난을 쳤는가?

6. 만물은 제각기 살아 숨 쉴 뿐, 절대적 법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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