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채옹도사(蔡邕倒屣)
『後漢』. 蔡邕字伯喈, 陳留圉人. 少博學, 好辭章數術天文, 妙操音律. 閑居翫古, 不交當世, 後爲中郞將.
獻帝西遷, 王粲徙長安, 邕見而奇之. 時邕才學顯著, 貴重朝廷, 常車騎塡巷, 貧客盈坐. 聞粲在門, 到屣迎之. 粲至, 年旣幼弱, 容狀短小, 一坐盡驚. 邕曰: “此王公之孫, 有異才. 吾不如也. 吾家書籍文章, 盡當與之.”
粲曾祖龔, 祖暢, 皆爲三公.
해석
『後漢』.
『후한서』에 실린 내용이다.
蔡邕字伯喈, 陳留圉人.
채옹의 자는 백개(伯喈)로 진류(陳留)의 어현(圉縣) 사람이다.
少博學, 好辭章數術天文, 妙操音律.
어려서 널리 배워 사장학(辭章學)과 수술학(數術學)과 천문학(天文學)을 좋아했고 음률을 오묘하게 연주했다.
閑居翫古, 不交當世,
여유롭게 살면서 옛날을 탐구했고 당시 사람들과는 교유하지 않았으며
後爲中郞將.
훗날에 궁궐 근위대장인 중랑장이 되었다.
헌제 때에 서쪽으로 천도하자 왕찬도 장안으로 이사했는데 채옹이 보고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時邕才學顯著, 貴重朝廷, 常車騎塡巷, 貧客盈坐.
당시 채옹의 재주와 학문이 우뚝하여 조정에서 귀중히 여겨졌기에 항상 수레와 말이 거리를 메웠고 나그네들이 자리를 채웠다.
聞粲在門, 到屣迎之.
채옹은 왕찬이 문에 있다는 걸 듣고선 짚신을 거꾸로 신고서 그를 맞이 했다.
粲至, 年旣幼弱, 容狀短小, 一坐盡驚.
왕찬이 오는데 나이는 이미 어린데다가 용모는 볼품 없고 키는 짧아 일제히 좌중이 모두 놀랐다.
邕曰: “此王公之孫, 有異才. 吾不如也.
채옹이 말했다. “이 사람은 왕손으로 기이한 재주가 있어 내가 미치질 못하니
吾家書籍文章, 盡當與之.”
우리 집의 서적과 문장을 모두 마땅히 그에게 줄 테야.”
粲曾祖龔, 祖暢, 皆爲三公.
왕찬의 증조부인 왕공(王龔)과 할아버지인 왕창(王暢)은 모두 삼공이 되었다.
해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겸손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일은 예전부터 강조되어 온 공직자의 미덕이지만 실천하기 매우 어렵다.
특히 정권이 바뀌고 이전 시대의 피해자였던 사람이 새로운 정권의 상층부에 올라가면 기고만장해진다. 항상 주인보다 마름이 더 가혹하듯이 통치자가 아무리 개혁과 변화를 부르짖어도 그의 손발들이 당하고 배운 그대로 되돌려 주는 경우가 많다.
「주공악발(周公握髮)」와 「채옹도사(蔡邕倒屣)」의 두 이야기는 겸손함으로 인재를 끌어안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주공악발(周公握髮)」에서 주공은 나라를 연 지 얼마 안 되는 주나라 왕조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는 어린 조카 성왕을 도와 중국 문화의 기초를 다졌으며 공자가 현실 속에서 실패했을 때 ‘꿈속에서 주공이 보이지 않은 지 오래됐다[久矣吾不復夢見周公]’고 한탄할 정도로 이상적인 정치인이고 사상가였다.
여기 실려 있는 이야기는 하나라 우왕 부분에도 적혀 있어 실화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이야기로 전해지는 전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채옹도사(蔡邕倒屣)」에서 채옹의 경우는 특정 인물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왕찬은 나이가 젊고 다른 사람의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당대의 대학자로서 조정의 여망을 짊어진 채옹에게만 눈에 띄었다.
후한시대 말기는 인물 평가가 굉장히 유행하던 시대이다. 바로 그 시대를 배경으로 관상학이 탄생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후한시대 이후로 삼국지의 배경 시대였던 위진남북조시대는 대단한 난세였다.
그러므로 오랜 시간에 걸쳐 인재를 시험하고 평가할 수 없었다. 한번 보고 쓸 만한 인재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짓는 문제였다. 인재를 선택하는 데는 그 나름의 기준과 경험이 필요했고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관상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 고대인의 인상 경험과 부족한 과학지식이 또 하나의 탄생 배경인 것이다. 요즘 미아리나 종로에 관상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확실히 미래도 사람도 불확실한 난세인가 보다 헌제가 도읍을 낙양에서 장안으로 옮긴 것은 동탁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동탁은 왕찬의 아버지 왕겸이 모시고 있던 대장군 하진의 명령을 받고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입성한다.
하황후의 오빠인 하진이 환관을 제거하기 위해 동탁의 군사력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중간에 새어나가 하진은 살해 당했다. 그 뒤 입성한 동탁은 환관을 모두 죽이고 소제를 폐한 뒤 헌제를 옹립하는 등 정권을 제멋대로 휘둘렀다. 그 때문에 동탁을 물리치기 위한 군벌 동맹이 생겨 낙양을 몇 겹으로 포위하자, 동탁이 천도를 단행했다. 그리고 위세가 등등한 동탁을 사도 왕윤이 그의 부장인 여포를 이용해서 암살했다.
왕윤은 채옹을 동탁에게 협력했다고 해서 처형했지만 자신도 급히 돌아온 동탁의 부장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때 상황은 「칠애시(七哀詩)」로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물론 『삼국지』에도 실려 있는 이야기다.
뒤에 왕찬은 조조의 밑으로 가서 문학을 좋아하는 조조 부자에게서 사랑 받고 뛰어난 다섯 자로 된 오언시를 많이 지었다. 이른바 위나라의 건안시대 일곱 명의 대문호인 ‘건안칠자(建安七子)’로 일컬어지는 문학자들의 가장 연장자로 오언시의 확립에 기여했다. 채용에게서 인정받았던 재능이 꽃을 피웠다고 말해도 좋겠다.
-『몽구』, 이한 지음, 유동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8년, 22~24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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