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분열 속의 발전: 『삼국지』의 막후에는(구품중정제, 병호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분열 속의 발전: 『삼국지』의 막후에는(구품중정제, 병호제)

건방진방랑자 2021. 6. 5. 16:12
728x90
반응형

 2. 분열 속의 발전

 

 

삼국지의 막후에는

 

후한 말기 황건적(黃巾賊)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들고일어나 각 지방을 할거(割據)한 호족들의 세력 판도는 한동안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분할과 정립의 구도가 고착되었다. ‘정립(鼎立)’()’이란 원래 세 발 달린 솥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의 세 발은 위()ㆍ오()ㆍ촉()의 삼국인데, 이들이 벌인 60여 년간의 전쟁이 소설 삼국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진수(陳壽)가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와는 다른 책이지만 다루는 시대는 같다의 소재가 되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고 세력 판도에서도 선두를 달린 주자는 후한의 무관 출신인 조조(曹操, 155~220)가 세운 북중국의 위나라였다. 조조의 가문은 후한의 정치를 쥐고 흔든 환관이었다. 그 반면 촉한(蜀漢)의 유비(劉備, 161~223)는 황실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남중국 내륙의 형주(荊州)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실 유비가 황실의 후예라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당시 호족들 가운데 유씨는 흔한 성씨였다. 한 고조 유방(劉邦) 시절부터 공이 신하들, 심지어 투항해온 북방 민족의 수장들에게까지 유씨 성을 하사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손권(孫權, 182~252)은 옛날 전국시대의 강국인 오나라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양쯔강 이남의 옛 오나라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조가 막강한 정치권력을 가졌다면, 강남의 곡창지대에 있는 손권은 경제적으로 풍요한 상황이었다. 요컨대 삼국은 당대의 실력자(), 적통(嫡統)의 상속자(蜀漢), 전통의 계승자()라는 신분으로 맞선 셈이다.

 

이런 식의 대립에서는 으레 적통과 전통보다는 현실적인 힘이 말하게 마련이다. 삼국 정립기의 기본 구도는 오와 촉한이 힘을 합쳐 위의 남하에 맞서는 형세였다. 조조의 위는 일찌감치 후한의 헌제(獻帝)를 끼고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각지의 호족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화북 전역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조조는 꿈꾸던 제위에 오르지는 못했고, 그가 죽은 해인 220년 그의 아들 조비(曹丕, 187~226)가 헌제를 핍박해 후한의 문을 닫고 위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촉한은 명신인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도움으로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고 명맥을 유지하지만, 결국 263년에 위에 병합되고 말았다. 손권의 오는 조금 더 버티다 280년에 위()의 뒤를 이은 진()에 의해 멸망했다.

 

 

소설 삼국지는 이 과정이 주요 내용이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은 그 막후에 있다. 삼국 정립기는 전란으로 얼룩진 시대였으나 그와 동시에 여러 가지 내외적 개혁과 쇄신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삼국이 대립하면서 경쟁적으로 부국강병에 힘썼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ㆍ한 시대의 경험에서 노출된 모순이 해결되고 새로운 통일을 위한 토대가 조성되었다.

 

특히 삼국 중 가장 강성했던 위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각종 개혁을 단행했다. 새로운 관리 임용 제도인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 병역제도인 병호제(兵戶制), 세금 제도인 호조제(戶調制) 등 본격적인 국가 체계의 골격이 모두 이 무렵에 만들어졌고, 둔전제(屯田制)도 새로이 정비되었다.

 

후한 시대는 외척과 환관이 중앙 정치를 주무르고, 호족이 지방행정을 좀먹은 탓에 늘 쓸 만한 인재가 부족했다. 그러나 인재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많은 편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후한 중기에 발언권을 높였다가 정권의 철퇴를 받고 한 발 물러난 유학 세력은 그 뒤로도 계속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발전해 상당한 인력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 인재를 어떻게 하면 적절히 발탁하고 중용하느냐는 것이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한 정책이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 이 제도는 각 군마다 중정이라는 인재 발탁요원을 배치해 관내의 인재를 아홉 가지 등급에 따라 분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인재가 필요할 경우에는 그 등급을 참고로 임용할 수 있었다.

 

또한 삼국시대는 긴 전란기였으므로 병력의 장기적인 공급이 중요했다. 종전까지 전통적인 병역제도는 백성을 징발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전란이 잦아 백성들의 이동이 심한 데다 호족들이 마음대로 유민들을 흡수해버린 탓에 병력을 충원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런 사태를 시정하기 위해 조조가 도입한 병호제(兵戶制)는 병역을 대상자 개인이 아닌 그 가족 전체에게 맡기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도망치면 아들에게, 형이 도망치면 아우에게 병역이 계승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연좌제보다 심한 악법이었으나 당시에는 합리적인 개선이었다. 그전에는 일반 백성들 전부가 평생 동안 병역의 의무를 지고 국가의 부름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징발되었지만, 병호제가 시행되면서 병역 대상자가 확정되었고, 시기도 대충 예측이 가능해졌다. 물론 국가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국가 상비군을 마련할 수 있어 대만족이었다.

 

 

▲ 『삼국지 중국 역대 왕조에서는 새로 들어선 왕조가 전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사진은 위 오촉 삼국 정립기의 역사를 다룬 서진의 진수가 지은 삼국지의 일부다. 소설 삼국지는 후대인 원대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지연의. 역사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소설보다 역사서 삼국지. 이 책에는 한반도 고대사에 관한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우리 고대사에도 고구려의 역사서인 유기(留記)신집(新集), 백제의 서기(書記), 신라의 국사(國史)등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특히 중요한 것은 둔전제(屯田制)였다. 이 제도는 한 무제가 처음 도입한 바 있지만, 당시에는 변방에서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했을 뿐이고 전국적으로 폭넓게 사용한 것은 삼국시대의 위나라였다. 병호제(兵戶制)처럼 이것도 역시 전란기였기에 가능한 제도였다. 잦은 전란으로 주인 없는 토지가 늘어난 게 문제였다. 자칫하면 또다시 후한 시대처럼 호족들이 겸병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조조는 호족을 대신해 국가가 그 토지를 운영하도록 한 것이다. 주인 없는 토지나 새 개간지가 생기면 국가가 유민이나 가난한 농민들을 모집해 경작하게 하고 조세를 받는 것이다(국가가 지주로서 소작료를 받는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둔전민은 군 태수의 지배 아래 놓이지 않고 국가의 직접 관리를 받았으므로 국가 재원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둔전제는 위가 진으로 바뀌면서 폐지되지만, 나중에 고대의 가장 혁신적인 토지제도인 균전제(均田制)의 모태가 된다. 그리고 호조제 역시 전통적인 인두세(人頭稅) 대신 호()를 단위로 세금을 부과하는 새로운 방식으로서, 이후 조세제도가 발달하는 계기가 된다.

 

그 밖에 삼국시대에는 대외적인 팽창도 이루어졌다. 분열기에 팽창이라면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삼국의 경쟁적인 부국강병책에 힘입어 중화 세계는 전체적으로 더욱 넓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방의 오나라가 삼국 가운데 당당히 한몫을 차지함으로써 양쯔 강 이남이 본격적으로 중화 문화권에 편입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강역상으로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그 지역도 중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한 제국 시절 내내 중원과 거리를 두고 겉도는 처지였다. 더 남쪽의 산월(山越) 때문에 마음 놓고 위의 남하에 맞서지 못한 오나라는 50여 년이나 걸려 간신히 산월을 제압했으며, 이후 해외로 진출해 대만을 손에 넣고 멀리 인도 지역과도 수교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삼국시대에 뒤이은 남북조시대에는 강남 지역이 처음으로 중국 역사의 주 무대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위의 동북 방면 공략으로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된 것은 우리 역사를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덕분에 역사책 삼국지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에 고대 한반도에 관한 중요한 기록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위와 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촉한도 양쯔강 상류의 쓰촨(四川),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등지를 복속시켜 강역의 확대에 기여했다.

 

 

둔전제의 고향 삼국 정립기는 전란의 시대였으나 여러 가지 정책이 실험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둔전제다. 사진은 조조가 196년 최초로 둔전제를 실시했던 광대한 허도(許都)의 모습이다. 당시는 백성들이 이 넓은 땅을 버리고 유민이 될 정도로 난세였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삼국지의 막후에는

고대의 강남 개발

따로 또 같이

문화의 르네상스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