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진나라 혜제가 개구리 울음소리에 바보같은 질문을 하다
진혜문마(晉惠聞蟆)
晉惠帝初爲太子, 朝廷咸知不堪政事, 武帝亦疑焉. 嘗使決尙書事, 不能對. 賈妃遣左右代對, 遂安.
及居大位, 政出群下, 綱紀大壞, 貨賂公行. 勢位之家, 以貴陵物, 忠賢路絶, 讒邪得志, 更相薦擧, 天下謂之互市.
嘗在華林園, 聞蝦蟆聲, 謂左右曰: “此鳴者爲官乎? 爲私乎?” 或對曰: “在官地爲官, 在私地爲私.” 及天下荒亂, 百姓餓死, 帝曰: “何不食肉麋?” 其蒙蔽皆此類.
해석
晉惠帝初爲太子, 朝廷咸知不堪政事, 武帝亦疑焉.
진나라 혜제가 처음 태자가 됐을 적에 조정이 다 정사를 감당치 못할 것을 알았고 무제도 또한 의심했다.
嘗使決尙書事, 不能對.
일찍이 상서성의 일을 결제하게 했지만 대응하질 못했다.
賈妃遣左右代對, 遂安.
황후 가(賈)씨의 계집종이 좌우를 보내 대신 대응케 하자 마침내 평안해졌다.
及居大位, 政出群下, 綱紀大壞, 貨賂公行.
천자의 지위에 올라 정치는 여러 밑 사람들에게 내도록 하자 기강은 크게 망가졌고 뇌물은 대놓고 행해졌다.
勢位之家, 以貴陵物, 忠賢路絶, 讒邪得志,
권세가와 지위 있는 집안이 귀한 것으로 사물들을 능멸했고 충신과 현인들의 길이 끊겼으며 아첨 모리배들이 뜻을 얻어
更相薦擧, 天下謂之互市.
다시 서로 천거해대니 천하 사람들이 ‘서로 끌어주고 당겨준다[互市, 교역]’이라 불러댔다.
嘗在華林園, 聞蝦蟆聲,
하루는 화림원(華林園)에 있을 적에 청개구리 소리를 듣고
謂左右曰: “此鳴者爲官乎? 爲私乎?”
좌우에 “이 울음소리는 공익을 위한 것인가? 사익을 위한 것인가?”라고 말했다.
或對曰: “在官地爲官, 在私地爲私.”
혹자가 “나랏땅에 사는 놈은 공익을 위하고 사적 땅에 사는 놈은 사익을 위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及天下荒亂, 百姓餓死,
천하가 황폐해지고 어지러워져 백성이 아사하자
帝曰: “何不食肉麋?” 其蒙蔽皆此類.
혜제는 “어찌 고기죽을 먹지 않는가?”라고 말하니 어리석고 멍청하기가 모두 이런 종류였다.
해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기 능력과 덕망의 크기가 있다. 그런데 용케 능력 이상의 지위에 오를 경우라도 스스로 괴로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큰 폐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
지위가 높으면 높은 만큼 그 피해는 더 커지게 된다. 여기에 예를 든 두 사람의 천자는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지위에 오른 전형적인 인물이다.
「유현괄석(劉玄刮席)」의 유현(劉玄)은 황제 일족으로 태어나 신하들의 추천까지 받아 천자의 지위에 올랐다. 평화로운 시대라면 올바른 신하들이 든든히 받쳐줄 테고, 본인이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어쩌면 무난하게 극복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현은 당시 황족이면서도 그때까지 평민과 큰 차이가 없이 살았다.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 올라 허둥대고 주눅 든 모습은 불쌍하기까지 하다.
다른 책에 보면 평림병(平林兵)에 참여하기 전에 동생이 살해당하자 암살자를 보내 보복하게 하고 유해를 고향에 옮겼다고 하는 이야기가 보인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은 아닌 듯하다. 천자의 지위에 오르자마자 방종에 빠졌거나 또는 평범함이 지나쳤다고 볼 수도 있겠다.
천자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천하를 가슴에 담을 만한 그릇은 참으로 적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경우보다는 사람이 자리를 빛내는 경우가 더 많은 이유도 여기 있다.
「진혜문마(晉惠聞蟆)」 이야기에서 혜제의 경우는 거의 백치에 가까울 정도로 어리석다. 뒤에 붙은 인용문은 혜제의 죽음을 적은 뒤에 덧붙인 것이다. 290년부터 306년까지 재위에 있었지만, 그 전반부는 가황후(賈皇后)와 그 외척이 함부로 정치를 제멋대로 했다. 후반부는 팔왕의 난과 이민족의 침입이 있었다. 이 와중에 백성은 도탄에 빠지는 괴로움을 맛보아야 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아버지 무제의 죄가 깊다는 점이다. 무제가 시험삼아 사소한 일인 상서(尙書)의 사무를 취급하게 하고도 얼마나 잘하는지 제대로 점검하지 못했다. 더구나 가황후가 측근인 장홍(張泓)에게 공문서를 처리하게 했다. 옛 사례와 출전을 인용하고 문서를 대조해서 밝히는 일은 공부가 짧은 혜제의 능력에 부치는 일이었다. 장홍은 이런 세부적인 내용을 채워서 사건에 대한 판단만을 하도록 해서 혜제에게 베껴 쓰게 시켰다. 잔재주를 부리는 무리들에 의해 사실이 가려진 것이다.
또 고기죽[肉麋]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 때 마리 앙뜨와네뜨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어야지’라고 했던 이야기와 잘 어울린다. 세습제가 기본인 옛날에 성군을 하늘에서 내려 주기만을 기다려야 했으니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몽구』, 이한 지음, 유동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8년, 27~29쪽
인용
龍鍾(서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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