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에 넘치는 자리에 오른 갱시제 유현이 주눅 들어 자리만 만지작거리다
유현괄석(劉玄刮席)
『後漢』. 劉玄字聖公, 光武族兄. 王莽末, 平林陳牧等聚衆, 號平林兵, 聖公往從之. 及破莽軍, 號聖公爲更始將軍. 衆雖多無所統一, 遂共立更始爲天子.
更始卽帝位, 南面朝群臣, 素懦弱, 羞愧流汗, 擧手不能言. 初入都宛城. 時漢兵誅王莽, 傳首詣宛, 懸於市. 遂北都洛陽, 後遷長安. 初莽敗, 惟未央宮被焚, 餘宮館無所毁, 官府市里, 不改於舊. 更始旣至, 居長樂宮, 升前殿, 郞吏以次列庭中. 更始羞怍, 俛首刮席, 不敢視.
後赤眉賊入關見殺.
해석
『後漢』.
『후한서』에 실린 이야기다.
劉玄字聖公, 光武族兄.
유현의 자는 성공(聖公)으로 광무제의 족형【족형(族兄): 같은 성을 가진 일가로서 유복친 안에 들지 않는 형뻘이 되는 남자】이다.
王莽末, 平林陳牧等聚衆, 號平林兵, 聖公往從之.
왕망 정부 말년에 평림(平林) 진목(陳牧) 등이 군중을 모아 평림병(平林兵)이라 부르니 성공(聖公)이 그들을 가서 따랐다.
及破莽軍, 號聖公爲更始將軍.
왕망의 군대를 깨부수자 성공을 갱시장군(更始將軍)이라 불러줬다.
衆雖多無所統一, 遂共立更始爲天子.
무리가 비록 맡더라도 통솔할 수 없어 마침내 모두 갱시장군(更始將軍)을 세워 천자로 삼았다.
更始卽帝位, 南面朝群臣,
갱시장군이 제위에 즉위하자 남면【남면(南面): 옛날의 예법에 천자는 남쪽을 향해 앉고 신하는 북쪽을 향해 서도록 돼 있다.】하고서 뭇 신하들을 조회했지만
素懦弱, 羞愧流汗, 擧手不能言.
본디 나약하고 부끄러워하여 땀을 흘리며 의사표현을 손을 들며 하지 말을 할 순 없었다.
初入都宛城.
처음엔 수도 완성(宛城)에 들어갔다.
時漢兵誅王莽, 傳首詣宛, 懸於市.
그때 한나라의 병사들은 왕망을 주륙하여 머리를 전하며 완성(宛城)에 이르러 저잣거리에 매달았다.
遂北都洛陽, 後遷長安.
마침내 북쪽으로 낙양을 수도 삼고 훗날에 장안으로 천도했다.
初莽敗, 惟未央宮被焚,
처음에 왕망이 졌을 때 오직 미앙궁만 불탔지
餘宮館無所毁, 官府市里, 不改於舊.
나머지 궁궐은 허물어지지 않았고 관청과 저자와 마을도 예전 그대로 고치질 않았다.
更始旣至, 居長樂宮, 升前殿, 郞吏以次列庭中.
갱시제가 이미 도착해 장락궁(長樂宮)에 거처하며 천자의 궁궐에 오르니 궁중의 관리들이 차례대로 뜰에 열을 지어섰다.
更始羞怍, 俛首刮席, 不敢視.
갱시제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자리만 만지작거리며 감히 보질 못했다.
後赤眉賊入關見殺.
훗날 도적떼인 적미적(赤眉賊)이 궁궐에 들어왔을 때 죽임을 당했다.
해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기 능력과 덕망의 크기가 있다. 그런데 용케 능력 이상의 지위에 오를 경우라도 스스로 괴로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큰 폐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
지위가 높으면 높은 만큼 그 피해는 더 커지게 된다. 여기에 예를 든 두 사람의 천자는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지위에 오른 전형적인 인물이다.
「유현괄석(劉玄刮席)」의 유현(劉玄)은 황제 일족으로 태어나 신하들의 추천까지 받아 천자의 지위에 올랐다. 평화로운 시대라면 올바른 신하들이 든든히 받쳐줄 테고, 본인이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어쩌면 무난하게 극복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현은 당시 황족이면서도 그때까지 평민과 큰 차이가 없이 살았다.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 올라 허둥대고 주눅 든 모습은 불쌍하기까지 하다.
다른 책에 보면 평림병(平林兵)에 참여하기 전에 동생이 살해당하자 암살자를 보내 보복하게 하고 유해를 고향에 옮겼다고 하는 이야기가 보인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은 아닌 듯하다. 천자의 지위에 오르자마자 방종에 빠졌거나 또는 평범함이 지나쳤다고 볼 수도 있겠다.
천자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천하를 가슴에 담을 만한 그릇은 참으로 적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경우보다는 사람이 자리를 빛내는 경우가 더 많은 이유도 여기 있다.
「진혜문마(晉惠聞蟆)」 이야기에서 혜제의 경우는 거의 백치에 가까울 정도로 어리석다. 뒤에 붙은 인용문은 혜제의 죽음을 적은 뒤에 덧붙인 것이다. 290년부터 306년까지 재위에 있었지만, 그 전반부는 가황후(賈皇后)와 그 외척이 함부로 정치를 제멋대로 했다. 후반부는 팔왕의 난과 이민족의 침입이 있었다. 이 와중에 백성은 도탄에 빠지는 괴로움을 맛보아야 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아버지 무제의 죄가 깊다는 점이다. 무제가 시험삼아 사소한 일인 상서(尙書)의 사무를 취급하게 하고도 얼마나 잘하는지 제대로 점검하지 못했다. 더구나 가황후가 측근인 장홍(張泓)에게 공문서를 처리하게 했다. 옛 사례와 출전을 인용하고 문서를 대조해서 밝히는 일은 공부가 짧은 혜제의 능력에 부치는 일이었다. 장홍은 이런 세부적인 내용을 채워서 사건에 대한 판단만을 하도록 해서 혜제에게 베껴 쓰게 시켰다. 잔재주를 부리는 무리들에 의해 사실이 가려진 것이다.
또 고기죽[肉麋]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 때 마리 앙뜨와네뜨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어야지’라고 했던 이야기와 잘 어울린다. 세습제가 기본인 옛날에 성군을 하늘에서 내려 주기만을 기다려야 했으니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몽구』, 이한 지음, 유동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8년, 27~29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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