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극찬에 젓가락을 떨어뜨린 유비
비실비저(備失匕箸)
『蜀志』. 先主劉備字玄德, 𣵠郡𣵠縣人, 漢中山靖王勝之後. 少孤, 與母販履織席爲業. 舍東南角籬上有桑樹生, 高五丈餘, 遙望見童童如小車蓋, 或謂: “當出貴人.” 先主少時, 與諸小兒於樹下戱言: “吾必當乘此羽葆蓋車.” 先主垂手下膝, 顧自見其耳, 好交結, 豪俠年少爭附之.
靈帝末黃巾起, 州郡各擧義兵, 先主率其屬, 討賊有功. 除安喜尉, 累遷豫州牧.
從曹公還許, 曹公從容謂曰: “今天下英雄, 惟使君與操耳, 本初之徒不足數也.” 先主方食失匕箸. 本初袁紹字.
해석
『蜀志』.
『촉지』에 실린 이야기다.
선왕인 유비의 자는 현덕(玄德)으로 탁군(𣵠郡) 탁현(𣵠縣) 사람이고 한나라 무제의 형 중산정왕(中山靖王) 승(勝)의 후손이다.
少孤, 與母販履織席爲業.
어려서 아버지를 여위고 어머니와 짚신을 팔고 멍석을 짜서 생계를 삼았다.
舍東南角籬上有桑樹生, 高五丈餘, 遙望見童童如小車蓋, 或謂: “當出貴人.”
집 동남쪽 모서리 울타리 위에 뽕나무가 자라는데 크기가 다섯 자 정도로 멀리서 바라보면 나무 그늘 드리운 것【동동(童童): 나무 그늘이 드리우다】이 작은 수레 덮개 같아서 어떤 이는 “응당 귀인이 나올 걸세.”라고들 했다.
先主少時, 與諸小兒於樹下戱言: “吾必當乘此羽葆蓋車.”
선왕이 소싯적에 나무 아래서 뭇 아이들과 있다가 “나는 반드시 의장용 덮개가 달린 수레를 탈 거야.”라고 농을 쳤다.
先主垂手下膝, 顧自見其耳, 好交結, 豪俠年少爭附之.
선왕은 손을 내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을 정도고 돌아보면 스스로 귀가 보일 정도였으며 사귀길 좋아해서 호협한 나이 어린 이들이 다투어 사귀려 했다.
靈帝末黃巾起, 州郡各擧義兵, 先主率其屬, 討賊有功.
영제 말기에 황건적이 일어나 주군에서 각각 의병을 일으키자 선왕은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황건적을 토벌하여 공을 지었다.
除安喜尉, 累遷豫州牧.
안희현(安喜縣)의 통치자인 위(尉)에 제수되었고 예주 목사로까지 계속 영전했다.
從曹公還許, 曹公從容謂曰: “今天下英雄, 惟使君與操耳, 本初之徒不足數也.”
조조를 따라 허창(許昌) 땅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조용히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그대와 나뿐이니, 본초의 무리는 말하기에 부족하네.”라고 말했으니
先主方食失匕箸. 本初袁紹字.
선왕은 금방 밥 먹다가 젓가락을 떨어뜨릴 정도였다. 본초는 원소의 자이다.
해설
유비와 제갈량은 삼국시대 촉나라를 건국한 두 영웅이다. 제갈량(181~234)의 자는 공명으로 유비의 ‘삼고초려’에 감동해 출사한 이야기는 군신 관계의 모범이었다.
그 후 유비를 도와 촉나라를 세우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유선의 승상으로 정치와 군사를 관리했다. 땅은 좁고 경제력도 열세이고 인재도 부족한 촉나라를 지키고 북벌을 완성하기 위해 제갈량은 밤낮으로 고심했다. 무엇보다 자기 손으로 살아 있는 동안에 위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했다. 세 번의 출정은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이 영웅은 오장원의 들판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양유건괵(亮遺巾幗)」에서 제갈량은 사마의가 여자처럼 틀어박혀만 있음을 흉보기 위해 부인네의 머리 장식을 보내며 몇 번이나 전투에 끌어내고자 했다. 이에 대해 사마의는 군주에게 상소문을 바쳐서 전투를 청한다.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장군이 한 번 임금에게 명령을 받아 출전하면 군명이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손자병법』 「구변」’고 했다. 명령을 받아서 출동한 이상 군주의 명령이 있어도 바꾸지 않고, 스스로 판단해서 대처하는 것이 병가의 관례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마의가 상소문을 바쳤던 것은 부하 장병들이 자신을 겁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정말로 싸울 마음이 있었다면 독단으로 행동하지 않을 리 없다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고, 위제가 신비를 파견했던 것도 그러한 사마의의 성격을 헤아려 본 결과라고 전해진다. 아무튼 신이 내렸다는 군사 전략가 제갈량도 천하의 대세는 어찌하지 못한 것이다.
뒤의 유비가 어렸을 때 이야기인 「비실비저(備失匕箸)」는 영웅 전설의 한 종류이다. 다만 뽕나무가 작은 수레[小車] 덮개와 같다고 하면서 ‘소(小)’자를 붙인 것은 그의 영토가 작음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유비는 예주목을 지낸 뒤에 서주도 아울러 다스렸지만, 여포에게 당하고 조조의 도움을 빌려 여포를 죽인다. 당시 조조는 천자 헌제를 옹립해 허창지방에 있었고, 유비는 조조를 따라 허창으로 떠나 좌장군이 되었다. 조조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헌제는 황후의 아버지 동승에게 조조 토벌의 밀약을 받고 유비도 그 음모에 참가했다. 조조가 자신과 유비만이 영웅이라고 말한 것은 그때였다.
유비가 얼떨결에 젓가락을 떨어뜨린 것은 그러한 상황이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이다. 조조가 음모를 눈치챈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워한 것이다. 또 유비는 생각보다는 제스처가 다양한 사람이다. 다소 비굴하지만 젓가락을 떨어뜨리면서 자신을 어눌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노력에서 천하의 일을 도모하는데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준비하는 끈질긴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몽구』, 이한 지음, 유동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8년, 35~37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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