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이 부인 머리꾸미개를 사마의에게 보내다
양유건괵(亮遺巾幗)
『晉書』. 諸葛亮帥衆十餘萬, 壘于郿之渭水南原. 天子遣護軍秦朗, 督步騎二萬, 受宣帝節度. 朝廷以亮遠寇, 利在急戰. 每命帝持重, 以侯其變, 亮數挑戰, 帝不出. 因遺帝巾幗婦人之飾, 帝怒, 表請決戰, 天子不許. 乃遣衛尉辛毗, 杖節以制之. 亮復挑戰, 帝將出兵以應之, 毗杖節而立軍門, 帝乃止.
對壘百餘日, 會亮卒. 先是亮使至, 帝問: “諸葛公食可幾米?” 對曰: “三四升.” 次問政事. 曰: “二十罰已上 皆自省覽.” 帝曰: “其能久乎?” 竟如其言.
『漢晉春秋』曰. 楊儀等整軍而出, 百姓奔告宣王, 王追焉. 姜維令儀反旗鳴鼓若將向宣王者. 王乃退, 不敢偪, 於是儀結陣而出, 入谷然後發喪. 宣王之退, 百姓諺曰: “死諸葛走生仲達.” 或以告王, 王曰: “吾能料生, 不便料死也.”
해석
『晉書』.
『진서』에 실린 이야기다.
諸葛亮帥衆十餘萬, 壘于郿之渭水南原.
제갈량은 십여 만의 병사를 이끌고 미현(郿縣) 위수(渭水)의 남쪽 언덕에 진을 쳤다.
天子遣護軍秦朗, 督步騎二萬, 受宣帝節度.
위나라 천자 명제는 호군 진랑을 파견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감독함으로 선제【선제(宣帝): 사마의의 시호】 절도사 사마의에게 지휘받도록 했다.
朝廷以亮遠寇, 利在急戰.
위나라 조정은 제갈량이 먼 데서 왔기에 이로움이 위급히 싸우는 데 있다고 여겼다.
每命帝持重, 以侯其變, 亮數挑戰, 帝不出.
매번 출명에도 사마의는 자중하며 변화만을 기다렸고 제갈량이 자주 도전해왔지만 사마의는 출진하지 않았다.
因遺帝巾幗婦人之飾, 帝怒, 表請決戰, 天子不許.
사마의에게 머리 꾸미개인 부인 장식품을 보내오자 사마의는 화내며 결전을 청하는 표문을 올렸지만 천자는 허락지 않았다.
乃遣衛尉辛毗, 杖節以制之.
곧바로 위위(衛尉)인 신비를 파견해 부절(符節)을 잡고 제지하도록 했다.
亮復挑戰, 帝將出兵以應之, 毗杖節而立軍門, 帝乃止.
제갈량이 다시 도전해오자 사마의는 장차 출병하여 응전하려 했지만 신비는 부절을 잡고 군문에 서 있었고 사마의는 멈춰야했다.
對壘百餘日, 會亮卒.
진을 대치한 지 100여일에 마침내 제갈량은 숨졌다.
先是亮使至, 帝問: “諸葛公食可幾米?”
앞서 제갈량의 사신이 도착하니 사마의가 “제갈공은 얼마의 쌀을 먹는가?”라고 물었다.
對曰: “三四升.”
“3~4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次問政事. 曰: “二十罰已上 皆自省覽.”
다음으로 정사에 대해 묻자, “20대 이상의 중범죄는 모두 스스로 살피십니다.”라고 대답했다.
帝曰: “其能久乎?” 竟如其言.
선제가 “버틸 수 있는가?”라고 말했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았다.
『漢晉春秋』曰.
『한진춘추(漢晉春秋)』에 실린 이야기다.
楊儀等整軍而出, 百姓奔告宣王, 王追焉.
제갈량의 종사관 양의 등이 군졸을 정렬하여 출진하자 백성들이 분주히 선제에게 보고했고 선제는 추격했다.
姜維令儀反旗鳴鼓若將向宣王者.
촉군 통솔자가 된 강유는 양의에게 명령해 깃발을 되돌리고 북을 치면서 마치 장차 선제를 향하는 듯이 했다.
王乃退, 不敢偪, 於是儀結陣而出, 入谷然後發喪.
선제는 곧바로 퇴각(退却)하며 감히 기습치 못했고 이에 양의는 군진을 결집하여 출진했고 골짜기에 들어가서야 제갈량의 초상을 치루었다.
宣王之退, 百姓諺曰: “死諸葛走生仲達.”
선제가 퇴각하자 백성들이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쫓아냈다.”라고 속담을 만들었다.
或以告王, 王曰: “吾能料生, 不便料死也.”
어떤 이가 선제에게 알리자 선제가 “나는 삶을 헤아릴 순 있었지만 곧 죽음을 헤아릴 순 없었구나.”라고 말했다.
해설
유비와 제갈량은 삼국시대 촉나라를 건국한 두 영웅이다. 제갈량(181~234)의 자는 공명으로 유비의 ‘삼고초려’에 감동해 출사한 이야기는 군신 관계의 모범이었다.
그 후 유비를 도와 촉나라를 세우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유선의 승상으로 정치와 군사를 관리했다. 땅은 좁고 경제력도 열세이고 인재도 부족한 촉나라를 지키고 북벌을 완성하기 위해 제갈량은 밤낮으로 고심했다. 무엇보다 자기 손으로 살아 있는 동안에 위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했다. 세 번의 출정은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이 영웅은 오장원의 들판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양유건괵(亮遺巾幗)」에서 제갈량은 사마의가 여자처럼 틀어박혀만 있음을 흉보기 위해 부인네의 머리 장식을 보내며 몇 번이나 전투에 끌어내고자 했다. 이에 대해 사마의는 군주에게 상소문을 바쳐서 전투를 청한다.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장군이 한 번 임금에게 명령을 받아 출전하면 군명이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손자병법』 「구변」’고 했다. 명령을 받아서 출동한 이상 군주의 명령이 있어도 바꾸지 않고, 스스로 판단해서 대처하는 것이 병가의 관례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마의가 상소문을 바쳤던 것은 부하 장병들이 자신을 겁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정말로 싸울 마음이 있었다면 독단으로 행동하지 않을 리 없다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고, 위제가 신비를 파견했던 것도 그러한 사마의의 성격을 헤아려 본 결과라고 전해진다. 아무튼 신이 내렸다는 군사 전략가 제갈량도 천하의 대세는 어찌하지 못한 것이다.
뒤의 유비가 어렸을 때 이야기인 「비실비저(備失匕箸)」는 영웅 전설의 한 종류이다. 다만 뽕나무가 작은 수레[小車] 덮개와 같다고 하면서 ‘소(小)’자를 붙인 것은 그의 영토가 작음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유비는 예주목을 지낸 뒤에 서주도 아울러 다스렸지만, 여포에게 당하고 조조의 도움을 빌려 여포를 죽인다. 당시 조조는 천자 헌제를 옹립해 허창지방에 있었고, 유비는 조조를 따라 허창으로 떠나 좌장군이 되었다. 조조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헌제는 황후의 아버지 동승에게 조조 토벌의 밀약을 받고 유비도 그 음모에 참가했다. 조조가 자신과 유비만이 영웅이라고 말한 것은 그때였다.
유비가 얼떨결에 젓가락을 떨어뜨린 것은 그러한 상황이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이다. 조조가 음모를 눈치챈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워한 것이다. 또 유비는 생각보다는 제스처가 다양한 사람이다. 다소 비굴하지만 젓가락을 떨어뜨리면서 자신을 어눌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노력에서 천하의 일을 도모하는데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준비하는 끈질긴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몽구』, 이한 지음, 유동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8년, 35~37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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