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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Ⅳ. 말과 길 - 1. 중국 철학에서 도(道)의 의미, 공자가 ‘朝聞道, 夕死可矣’라고 말한 이유 본문

고전/장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Ⅳ. 말과 길 - 1. 중국 철학에서 도(道)의 의미, 공자가 ‘朝聞道, 夕死可矣’라고 말한 이유

건방진방랑자 2021. 7. 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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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자가 朝聞道, 夕死可矣라고 말한 이유

 

 

최소한 공자에게 있어 도란 용어는 길, 방법, 기술 등과 같이 실천적인 진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수영을 잘 하는 방법을 듣고 ! 이제 죽어도 좋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직 그 방법을 가지고 직접 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해보고, 그 방법을 몸에 익혔을 때에만,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결국 공자가 들은 도는 실천적 진리였던 것이다. 실천적 진리는 이론적 진리와는 차이가 난다. 가령 물은 액체다라는 이론적 진리는 우리가 물과 어떤 관련을 맺어야 하는지, 혹은 우리가 물에 대해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반면 물에서는 손을 이렇게 휘젓고 발은 이렇게 놀려야 한다는 실천적 진리는 직접적으로 우리가 물 속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사변적 진리가 항상 실천적 진리로부터 추상화(abstraction) 혹은 형식화(formula- tion)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물과 이러저러하게 관계맺음 갖는 실천적 양식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물은 액체다라는 이론적 진리를 전혀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실천적 진리는 이론적 진리를 함축하지만, 이론적 진리는 실천적 진리를 함축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길버트 라일(Gilbert Ryle)마음의 개념(Concept of Mind)을 보면 이론적 앎(know-that)과 실천적 앎(know-how)이라는 구별이 나온다. 전자의 예로는 ‘1+1=2라는 것을 안다는 것을 들 수 있고, 후자의 예로는 더하기를 할 줄 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라일의 실천적 앎이 공자의 도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천적 앎과 도의 차이점은, 전자가 삶의 과정을 통해서 맹목적으로 배운 실천적 앞을 기술하고 있다면, 후자는 주체적이고 의지적인 실천적 앎의 이상(ideal)을 표현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도는 단순히 자전거 타는 방법, 수를 세는 방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인간의 삶의 방식이라는 이념적인 수준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자전거는 바퀴가 두 개다를 안다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앎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전거 바퀴가 두 개다라는 앎은 자전거를 탈 줄 안다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되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과 자전거는 이제 분리불가능한 관계에 묶이게 된다.

 

누군가가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주장했을 때, 우리는 이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 타 봐!”라고 요구하고, 타는지 못 타는지[]를 시간을 두고 관찰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실천적 진리나 도의 진리성은 삶의 과정을 통해서, 실천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중국 철학은 항상 지행합일(知行合一)과 언행일치(言行一致) 등을 강조했던 것이다. 효도를 해야 가정이 평화로워진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이것은 단지 사변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실제로 더 중요한 것은 효도는 실천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는 이런 사람에 대해 효를 할 줄 안다[知孝]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중국 철학에서 강조했던 지()나 언()은 실천적 함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앎이자 이야기다. 이제 우리는 공자가 왜 아침에 도에 대해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공자도 누군가에게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들었을 때, 그것이 실제로 옳은 방법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실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중국 철학에서의 도가 왜 말로 될 수 없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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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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