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일상에 깃들도록 하라
방금 읽었던 이야기를 통해 장자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단지 이런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발제 원문 마지막 부분에서 장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장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즉 “이것이라고 여기는 인식이 쓰여지지 않고 그것을 일상에 깃들게 해야 한다[爲是不用而寓諸庸]!” 이어서 장자는 바로 이것이 자신이 밝음을 쓴다[以明]라고 했을 때 의미했던 것임을 명확히 한다. 여기서 옳다고 여기다 또는 이것이라고 여기다로 번역되는 위시(爲是)는 대대의 논리에 따라 그리고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해서 수행되는 인식이나 판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위시라는 의식은 앞에서 살펴본 자시(自是)에 근거하고 있는 사유와 판단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장자가 위시라는 판단을 부정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예측과는 달리 장자는 이 위시를 그 자체로 부정하고 있지 않다. 장자에 따르면 위시는 그 자체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다만 제약되어야 할 뿐이다. 다시 말해 “위시는 일상에 깃들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장자의 권고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철학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서 표어처럼 사용하는 말이 있다. “생각하지 말고, 보아라!” 여기서 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가령 어떤 사람이 방안에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방의 문은 안으로 잡아당기면 열리지만 밖으로 밀면 열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방문은 밀어야 열린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결코 이 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사람은 방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갇혀 있다고 해야 한다. 어쨌든 이 사람은, 만일 그 문은 밀지 않고 당겨야 열린다는 사실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계속 갇혀 있게 될 것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에게 본다는 것은 미리 예단하지 않고 주어진 사태에 맞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두 가지 생각이 가능하다. 하나는 ‘방문은 밀어야 열릴 것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방문은 잡아당겨야 열릴 것이다’이다. 중요한 것은 전자의 생각이나 후자의 생각도 모두 미리 사태에 맞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결코 생각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생각은 사태에 대한 어떤 시선의 변경 속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장자가 이명(以明)을 ‘이것이라고 여기는 인식이 쓰여지지 않고 그것을 일상에 깃들게 해야 한다[爲是不用而寓諸庸]’라고 정의할 때,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통찰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저용(寓諸庸)에서 저(諸)는 문법적으로 지어(之於)의 줄임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그것을 일상[庸]에 깃들게 하라’라고 번역된다. 장자는 결코 위시(爲是)를 그 자체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이런 생각의 활동을 온전한 자리에 두고자 하는 것이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렇게 일상에 깃들게 된 위시를 장자는 인시(因是)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위시의 주체가 고착된 자의식의 기준으로서 과거의식이라면 인시의 주체는 오히려 사태나 타자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명(以明)에 대한 장자 본인의 정의인 ‘이것이라고 여기는 인식이 쓰여지지 않고 그것을 일상에 깃들게 해야 한다’는 구절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위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위시의 고유한 자리가 구체적인 삶의 세계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위시가 삶의 세계에 깃들게 되었을 때, 위시는 자의식의 동일성에 근거한 인칭적 판단을 벗어나게 된다. 오히려 이 경우의 위시, 즉 인시는 사태의 고유성 및 단독성과의 소통과 이런 소통의 결과로 임시적으로 구성된 자의식(= 임시적 자의식) 속에서 작동하게 된다. 이렇게 위시가 임시적이고 비인칭적으로 작동하는 유동적인 판단이 되었을 때, 그것은 인시로 변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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