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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Ⅸ. 타자의 타자성 - 1. 타자의 타자성,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힘 본문

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Ⅸ. 타자의 타자성 - 1. 타자의 타자성,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힘

건방진방랑자 2021. 7. 4.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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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힘

 

 

이처럼 유행하고 있는 차이의 인정과 타자의 배려라는 담론에는 강자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 다시 말해 차이와 타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차이와 타자가 아니라 동일성에 의해 매개된 것에 지나지 않는 차이와 타자라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인정과 배려는 강자의 변덕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것이다. 암자에서 온갖 화초를 키우면서 자연으로부터 진정한 앎을 배운다는 스님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고 있다는 어느 동양화가도 어느 순간 그것들을 모두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타자와 차이가 인정과 배려의 대상이 되는 순간, 사실 그 타자와 차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와 차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타자와 차이라는 개념이 인정과 배려의 대상과 같은 온정적인 개념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와 차이는 기본적으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 삶에서 우연적으로 조우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등장하는 무엇이다.

 

길을 가다가 자신을 겁탈하려고 달려드는 압도적인 남성에 직면해 있는 여성에게, 그리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압도적인 무력으로 침략해 오는 강대국에 직면해 있는 약소국에게, 타자에 대한 배려와 차이의 인정은 무슨 의미를 지니겠는가? 몸을 쉽게 겁탈하라고 상대방 타자를 도와주어야 하겠는가? 그저 손쉽게 잘 침략하라고 국경을 열어주어야 하겠는가? 암자 앞에서 화초를 키우는 도중 배고픈 늑대가 나타났을 때 우리의 스님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자신을 잘 잡아먹고 포식하라고 옷이라도 벗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타자와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동일성을 무너뜨리는 어떤 힘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관조의 대상이나 풍경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삶의 차원에서 사건으로 나에게 닥쳐오는 것이다. 내면과 외면이라는 구조 속에서 결코 포착되지 않는 그 무엇이 바로 타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면과 외면이라는 동일성의 구조를 와해시키는 사전에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 타자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아이처럼 귀하게 키웠던 새끼 호랑이가 어느 날 자신의 손을 무는 것처럼 그렇게 타자의 타자성은 우리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흔적을 만든다. 비유하자면 타자는 아름답고 고요한 호숫가에 앉아서 바라보는 자연이 아니라, 거친 대양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릴 것 같은 폭풍우와 같은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거친 폭풍우를 대양 속에서 경험하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와 차이를 겪었고 경험했고, 그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예를 생각해보자. 사랑에 빠진다는 것, 타자와 어떤 관계로 맺어지게 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남자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사랑에 빠진 이 남자는 다른 주체 형식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남자에게 이 여성은 하나의 미지수로서 다가온다. ‘도대체 무엇을 좋아할까?’ ‘내가 이렇게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이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으로부터 오는 미미한 신호마저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미세한 곤충들이 촉수를 휘두르듯이 이 남자는 자신의 전 존재를 그녀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전에 싫어했던 음악을 좋아하게 되고 이전에 싫어했던 음식을 좋아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사랑에 빠진 이 남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미리 예측할 수 없이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주체 형식을 변형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에 대해 인정과 배려를 베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인정과 배려로 그 여성을 만난다면, 이 남자는 사랑에 빠진 사람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인정과 배려는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한 채로 관조적이고 표면적으로만 상대방과 만남을 유지하는 양태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그녀를 동정과 보호의 차원에서 돌봐 주어야 할 약자로서만 대우할 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차이는 자신의 동일성을 파괴하는 그 무엇으로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타자가 지닌 타자성이란 내가 다른 주체로 생성될 수 있게끔 하는 강제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힘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관조의 풍경이 아닌 타자성을 가진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는, 내가 어떤 주체로 생성될 것인지를 미리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공백이나 의미의 결여로서만 나에게 나타나는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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