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통을 통해 변한다
소통은 지적인 이해나 또는 정서적 교감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지적인 이해나 정서적 교감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독립된 주체와 타인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적인 이해나 정서적 교감은 나는 나이고, 너는 너라는 인칭적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소통은 기본적으로, 독립된 주체와 독립된 타인 사이의 관계 맺음이라기보다, 우리가 소통을 통해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점에 그 논점이 있는 개념이다. 이처럼 소통은 우리가 새로운 주체로 생성되는 비인칭적 수준에서의 관계맺음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래서 소요유(逍遙遊)라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대붕 이야기’도 곤(鯤)이라는 물고기에서 대붕(大鵬)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자에게 주체의 자유는 주체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주체 형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주체 형식의 변화는 조우한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장자가 권고하는 자유는 우리가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부단히 자신을 극복하고 새롭게 생성될 수 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행글라이더를 타고 자유롭게 비행하는 사람의 자유가 기본적으로 바람의 섬세한 흐름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조절을 통해 존립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타자와의 소통으로서의 자유가 주체와 타자의 구분이 해소되는 절대적 자유가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결코 나와 너는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 우리로 소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차피 나와 타자는 모두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유한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와 타자가 변증법으로 지양되어 하나가 되어버린다면, 이것은 마치 거울이 하나의 영상만을 가진 사진이 된 것에 비유될 만한 사태다. 그러므로 나 아닌 것으로서 타자들은 기본적으로 무한히 다양하고 복수적이라는 것을 긍정하는 데서 장자가 권고하는 자유의 현실성이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장자에게 소통은 자유[逍遙遊]라는 이념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후대 신유학(新儒學)에서 ‘타자가 도래하면 그에 따라 응한다[物來而順應]’고 표현된 자유 이념의 선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유한자라는 점에서, 인간의 자유는 철저하게 인간 자체 내에서만 존립될 수 없다. 오직 비인칭적인 마음으로 타자와의 소통이 가능했을 때, 자유는 실현될 수 있다. 물론 자유가 실현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주체가 새로운 타자와 소통해서 새로운 주체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장자의 소요유는 절대적 주체의 정신적 자유나 심미적 자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자유는 절대적 자유가 아니라 제한적인 자유, 유한적인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한적 자유의 이념으로서의 소요유의 주체는 엄밀하게 비인칭적인 마음을 가진 나를 가리킬 수 없다. 왜냐하면 소요유의 주체는 이미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우리의 한 상관항으로 변화 또는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