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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21세기의 3대 과제 - 1. 흙, 건강, 디자인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21세기의 3대 과제 - 1. 흙, 건강, 디자인

건방진방랑자 2021. 5. 7.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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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의 3대 과제

 

 

1. , 건강, 디자인

 

 

지난 주 오스트랄리아 시드니에 다녀왔다. 세계 디자이너들의(ICSID, ICOGRADA, IFI 3단체) 총회가 열리는데, 나 보고 주제 강연을 하나 해 달라는 것이었다. 올 여름에 IFI(International Federation of Interior Architects/Designers) 워크숍이 서울에서 열렸다. 내가 디자인에 대해서 뭘 알까마는 우연한 기회에 주제강연을 간곡히 부탁하길래, ‘, 건강, 디자인(Soil, Health, Design)’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국제회의가 되어 놓고 보니, 영어를 제대로 할 줄 알면서도 좀 토속적인 냄새가 나는 사람을 고르다 보니까 나같은 사람이 적격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하여튼 요즈음은 그런 청탁이 적지 않다. 그런데 나 자신 또한 디자인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눈뜨고 보는 것이 다 디자인이요, 내가 사는 집부터 입는 옷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만년필까지 모두 다 디자인이니, 디자인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많은 젊은이들이 디자인하면 무슨 밖에 있는 물건의 모양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껏해야 나 밖에 있는 공간(空間)을 칸막아 처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동양사상으로 말하자면 물건(things)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의 집적태며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무아(無我), 즉 자기동일성을 지니는 실체성[]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아(無我)들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디자인이란 궁극적으로 나의 생각의 디자인이다. 나의 생각의 디자인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인식의 디자인인 것이다. 자기 머리 속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컴퓨터 화면만을 들여다보고 앉아있는 디자이너들이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디자인의 철학적 기초라고 생각하는 시간ㆍ공간도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하여튼 이런 복잡한 얘기들을 쉽게 풀어 주섬주섬 두어 시간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것을 들은 외국사람들이 내 강의가 너무 좋아 자기들만 듣기가 아깝다고 세계인들이 모인 총회자리에서 한번 다시 해달라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은 좋은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좋다고 받아들이는 미덕은 확실히 우리보다 더 있는 것 같다. 요즈음 시간이 워낙 모자라 외유(外遊)를 한다는 것이 무리였지만, 세계의 미항(美港)으로 꼽히는 시드니(Sydney), 아니, 이색적인 또 하나의 남반구 대륙구경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기에, 초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사실 속마음으로는 좀 켕기는 구석도 있었다. 외국학회에 나가 일개의 학인으로서 내 논문발표하는 것은 해본 짓이지만, 세계인들이 이목을 집중하는 자리에서 대접받는 지도자의 모습으로 권위있는 연설을 한다는 것이, 한국말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당당히 2시간의 강연시간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쳤지만, 과연 영어로 세계각국의 청중들을 그 장시간동안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하여튼 안해본 짓이래서 미지수의 부정적 결과를 고려 안할 수도 없었다. 말문이 확 막히면 어떻허나? 영어단어가 생각 안 나 떠듬거리면 어떻허나? 나라망신? 개망신? 평생을 외국어와 더불어 살아왔지만 아직도 외국어의 부담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어를 깊게 알수록 영어에 대한 절망감은 깊어져만 간다. 제기랄 내가 언제 이따위 고민하고 산 적 있나? 하여튼 단 위에 올라서서 생각하자!

 

 

우리나라 세종문화회관 규모보다도 훨씬 더 큰 시드니 컨벤션센터 전체를 빌려 행하여진 요번 총회의 회의실에서 나의 목소리는 울려 퍼졌다. 두시간 동안 미동도 없었다. 기침소리 하나 들을 수 없었다. 오직 낭낭한 나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을 뿐이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게 영어가 잘 되었다. 아니 영어를 잘 했다기보다는, 단 위에 올라선 후 순식간에 나는 내가 외국어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지막,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 인생이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맥배드(Macbeth)의 독백을 끝으로 강의를 마쳤을 때, 모든 사람이 한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곧 전 강의장이 기립박수의 열기 속에 휩싸이고 말았던 것이다.

 

말레이지아ㆍ싱가포르ㆍ인도 등지의 사람들도 나에게 달려와서 나의 강연이 동양인들의 프라이드를 높여주었다고 꼭 성자를 대하듯이 고꾸라지듯 절을 했다. 어느 임신한 오스트랄리아 여인은 뱃속의 아기가 감동을 받아 두시간 동안 계속 자기 배를 찼다구 죠크를 했다. 그리고 나와 사진을 찍으려고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하여튼 요번 여행은 강연의 성공으로 유쾌한 여행이 되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그곳 오스트랄리아 시드니 동포들은 그들 나름대로 내 강연을 요청했다. 마침 그곳 현지의 교민언론연합체가 결성되어 있어서, 그 언론인협회 주최로 내 강연을 열겠다는 것이다(로바나, 개미스 후원).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내가 시드니에 도착한 것은 수요일 아침, 내가 떠나기로 되어있는 것은 일요일 밤이니까, 토요일 저녁밖에는 교민들이 모일 챈스(chance)가 없다. 그런데 그곳 우리 신문들이 대개 주말에 한번 나오는데, 토요일 아침에나 받아보게 되리라는 것이다. 미국과 달리 테레비ㆍ라디오 등의 채널도 확보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요번 주말이 노동절 롱 위크앤드(Long Weekend)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시드니 교포사회가 역사가 짧고, 이런 사상강연같은 것은 전례가 없어, 몇 명이나 모일지 미지수라는 것이다. 부리나케 광고를 해도 삼사십 명 정도 올 것으로 예상을 해두는 것이 속 편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래도 최대규모로 잡아서 한 200명 예상하고 준비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 명이 와 들어도 상관없다 했고, 수요일 저녁 그곳 현지 언론사 기자님들과 인터뷰를 했다.

 

 

102일 오후 7, 버우드여자고등학교(Burwood Girl's Highschool) 강당! 아내와 내가 탄 차가 어둑어둑한 수풀길을 지나가는데 꼭 개화기에 선교사집회에 몰래 몰래 사람들이 고깔을 뒤집어쓰고 몰려드는 듯, 한 두사람씩 강당 앞길로 물밀 듯이 모여들고 있었다. 매우 허름한 강당이었다. 강당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우리는 모두 얼얼한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 날 모여든 사람들이 500여명, 시드니 교민 사상(史上) 최대의 인파를 기록했다. 그리고 내 싸인을 받으려고 자기들이 집에 소장하고 있는 나의 책을 가지고 나와서 줄을 선 모습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의 저술가로서, 하나의 사상가로서, 생애에 이 이상의 기쁨이 어디 있으랴!

 

이날 나는 세시간 십분 동안 열변을 토했다. 이날 강연은 무아(無我)의 열정 그 자체였다. 강의가 끝났을 때 속옷부터 겉 두루마기까지 완전히 땀이 흠뻑 젖어 있었다. 기진맥진해서 곧바로 호텔로 돌아왔을 땐 오한이 났고 목구멍에서는 피가래가 끓었다. 그래도 유감이 없었고, 오랜만에 삶의 희열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늘씬하게 깊은 잠을 잤다. 내가 여기 21세기 인류의 3대 과제 운운하는 것은 바로 시드니에서 처음 설()한 것이다. 그날 시드니강연의 주제가 바로 이 3대 과제를 놓고 전개된 것이다. 나는 미래학 운운하는 학자도 아니요, 뭐 대단한 예언가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일상의 지극히 상식적인 통념일 뿐이다.

 

나는 3대 과제로 다음의 세 가지 화해를 들었다. 그 첫째가 인간과 자연환경의 화해(the Harmony between Man and his Environment), 그 둘째가 종교와 종교간의 화해(the Harmony between Religions), 그 셋째가 지식과 삶의 화해(the Harmony between Knowledge and Life). 이것이야말로 곧 우리가 노자(老子)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인용

목차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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