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불쑥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아무렇지 않게 찾아왔지만 어화둥님과 별나들이님, 풍경님은 늘 보아오던 사람처럼 반갑게 맞이해주더라.
그러고 보면 ‘민들레 읽기 모임’이란 한창 때엔 수요일마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모임에서, 지금은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이 오랜 친구를 만나 자연스럽게 썰을 풀 듯 편안하게 모이는 모임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이날도 나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얼굴을 내비치는 앵두님이나 석혜영님 같은 분들이 있다 보니,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묻고 들으며 이야기는 시작됐다. 그래서 저녁 8시에 시작된 이야기는 새벽 4시가 넘도록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고,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한지 “피곤해서 잠이 오긴 하는데 그래도 잠은 자기 싫으네요”라는 말이 여기저기 나오기도 했던 것이다.
▲ 우리의 이야기는 시간을 타고, 분위기를 타고 이어졌다.
변화를 꿈꾸되 현실이란 벽에 절망하다
이 날의 첫 주제는 변화에 대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그건 내가 요즘 심하게 꽂혀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변화란 종종 애벌레가 나비로 변태하는 것과 같이 인식의 전환뿐만 아니라, 행동의 변화까지도 수반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여러 문학에 나타난 변화는 그리 매력적이지도, 그리 대단해보이지도 않는 게 사실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변해버린 오빠의 얘기이기보다 상황이 달라졌을 때 가족이 어떻게 구성원을 재배치하여 가족을 유지하는 지를 알려줬고,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엔 곤이란 물고기가 붕새로 변했다는 얘기로 인식이 달라졌다 해도 메추라기에겐 한낱 비웃음 밖에 당할 게 없다는 비루한 현실을 알려줬다. 그뿐인가? 한국사회에선 ‘끊임없이 변화하라. 끊임없이 혁신하라’라고 주문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정 맞지 않도록’ 늘 하던 대로 그냥 묵묵히 하는 것이고, 튀지 않게 중간만 따라 가면 되는 것이다.
▲ 로렌스 데이비드의 [변신]은 카프카의 변신을 패러디하여 재밌는 이야기로 담아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다. 굳이 주역의 원리인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바뀌고 변화하는 것을 “역”이라 부른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현실이란 늘 반복되는 일상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변화를 열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상한 그녀』의 오말순 여사처럼 칠순 할매가 이십대의 아가씨로 변하는 기적을 바라기도 하고, 장자의 「소요유」에 나오는 곤이란 물고기가 붕새로 변하여 비록 메추라기들의 비웃음을 살지라도 세상을 뒤덮을 정도의 태풍을 타고 만 리를 날아다니며 역사에 길이 남을 발자취를 남기기를 꿈꾸기도 했다. 이건 이를 테면, ‘변하지 않을 바에야 일상에 뿌리를 내리며 살되, 변할 바에야 아주 그럴 듯하게 변해주겠어’라는 심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비겁한 변명’에 다름 아니었던 거다. 겁이 많아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많아서 변화를 추구할 수 없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에둘러 표현했던 것이니 말이다.
풀리지 않는 퍼즐처럼 현실에 짓눌려 있다 못해, 아예 파묻혀 있을 때 자연스럽게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첫 주제로 나오니, 두 눈은 반짝, 귀는 쫑긋, 정신은 아하attention할 수밖에 없었다.
▲ 나에게 변화란 어떤 거대하거나 의미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런 극적인 변화는 현실엔 없음에도 말이다.
변하고 싶거든 틀부터 바꾸라
제비꽃님은 ‘틀이 바뀌면 꼴이 바뀐다’는 김영민 선생의 글을 인용하며, 어떻게 하면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려줬다. 결국 그 얘긴 의식적인 변화만으로는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그건 ‘내가 좀 바뀌었지’라는 자위는 될지언정, 진정한 변화는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식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이끌며, 행동의 변화는 관계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언행일치言行一致에 이은 의행일치意行一致의 경지이며, 앎과 삶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닌 앎과 삶이 뒤섞여 예전엔 미처 상상도 할 수 없던 삶으로 이어지는 경이驚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제비꽃님은 2년마다 집을 옮기는 분(틀을 바꾸는 사람의 예)의 일화를 들려주며, 자신도 언젠가 그와 같은 삶을 살아볼 뜻이 있음을 알려줬다.
▲ 결국 의행일치가 이루어질 때, 변화하게 된다. 삶과 앎이 어떻게 공명할 것인가?
이 말을 듣다 보니 『민들레』 첫 읽기 모임이었던 58호 읽기 모임이 떠올랐다. 그 당시에도 주의attention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위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며, ‘정형화된 수업’, ‘하나의 정답만 강요하는 지식’이 문제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왜냐하면 수업을 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하나를 듣는 순간 자연히 다음을 예측하게 된다. 그런데도 수업은 그런 예측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수업에 집중할 필요도, 다음을 궁금해 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수업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려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틀을 아예 바꾸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 틀이 바뀐 만큼, 아이들의 수업 받는 꼴도 바뀌게 마련이다. 이 말을 자칫 잘못 이해하면 분필 집어던지기와 같은 괴팍한 행동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기론 어텐션은 그와 같은 지엽적인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닌, 좀 더 본질적인 의식의 변화나 생각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나처럼 변화를 열망하고 있다면, 단순히 ‘변하고 싶다’라고 되뇌이며 멈춰 있을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 삶의 틀부터 바꿔나가야 한다.
▲ 내 틀에 모든 것을 맞추려 하면 '프로크루테스의 침대'가 될 뿐이다. 내 틀을 바꾸면 꼴도 바뀐다.
안 하던 짓을 해야 하는 이유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 살짝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때 별나들이님의 독특한 해석은 느슨해지던 집중력을 어텐션시켰고 졸린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라는 말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말일 것이다. 이 말은 ‘죽음에 임박하면 안 하던 짓을 하게 된다’는 뜻으로 전해져 왔기에,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짓을 하는 사람에게 자주 썼던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할 때 방점은 ‘죽음’이란 단어에 찍히게 되고, 그건 곧 변화를 부정하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 대해 별나들이님은 전혀 다른 해석을 했고, 그건 어찌 보면 ‘변화를 부정하는 시각’이 아닌 ‘변화를 긍정하는 시각’이었기에 신선했다.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란의 말의 방점은 ‘죽음’이 아닌, ‘안 하던 짓’에 찍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어느 순간에 하게 됐다는 것은,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내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책은 지식의 보고이니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좋다’라며 책을 모으는 것을 취미로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턴 ‘책 또한 지적허영이기 때문에 채우기보다 비워야 한다’라며 책을 버리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할 만하다. ‘안 하던 짓’을 한다는 건, 이처럼 ‘과거의 나(관념, 신념, 편견)’와 결별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니 안 하던 짓을 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과거의 나를 죽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 [매트릭스]의 한 장면. 죽으면 죽는 것도 있지만, 죽어야 사는 것도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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