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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 다이어리, 의형제와 미하엘 바흐친 - 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의형제와 미하엘 바흐친 - 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건방진방랑자 2021. 7. 28.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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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형제와 미하엘 바흐친

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1. 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내가 완결되고 사건이 완결되었다면, 나는 살 수 없으며 행동할 수 없다. 살기 위해서는 완결되지 않아야 하며, 자신에게 열려 있어야만 한다.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38.

 

 

우리는 가족이나 연인, 절친이나 룸메이트처럼 가장 가까운 타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타인을 엿보며 끊임없이 탐색전을 펼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자신도 모르게 신경 쓰며 하루를 보낸다. 소설을 쓰는 작가와 소설 속 주인공의 관계, 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주인공의 관계 또한 그렇다. 한 쪽은 끈질기게 엿보고 한 쪽은 좀처럼 자신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한 쪽은 난 널 이해할 수 있어, 아니, 내가 널 만들었잖아!’라고 속삭이고 한 쪽은 아니, 넌 날 결코 이해할 수 없어, 난 네 인식의 한계를 넘어 존재하지라고 속삭인다.

 

영화 의형제를 바라보며 주인공을 바라보는 작가-감독의 시선의 위치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감독의 시선은 관객들에게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이 사람은 꼭 이렇게 이해해야 해라고 강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입장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조바심도, 깜짝 반전을 통해 관객을 쥐락펴락하려는 과욕도 보이지 않았다. 영화 의형제에서 감독의 시선은 창조자라기보다 메신저의 역할에 가깝게 보인다. ‘, 봤지? 바로 내가 이 인물들을 만들어냈어!’가 아니라, ‘나는 그냥 이 인물들을 당신들의 곁에 데려다주는 데에 충실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듯한 조용한 메신저의 역할 말이다.

 

의형제의 광고 콘셉트만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또 간첩 이야기야?’하는 의구심부터 일었기 때문이다. 두 남자의 미묘한 심리전이라니, 게다가 의리를 강조하다니, 유난히 마초적 의리를 강조하는 영화가 활개를 치는 한국에서는 좀 식상하지 않은가 싶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광고 카피는 영화의 매력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그런 소재적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의형제에서 이념적 갈등이나 블록버스터적 스케일이 아니라 한 인간을 바라보는 가장 아름다운 각도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감독의 시선이 느껴져서 좋았다. ‘나는 그를 알지만, 당신들은 그를 잘 몰라라고 말하는 듯한 위압적인 시선이 아니라 나는 그를 알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는 그는 그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한 감독의 담담한 시선이 좋았다.

 

 

 

 

강동원이 연기한 송지원이라는 인물은 이미 오래 전에 완성된 캐릭터가 아니라 마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끊임없이 흔들리는 관객의 마음과 함께 만들어지고 있는 듯한느낌이었다. 의형제에서는 인물의 캐릭터가 처음부터 완전히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조금씩 배우와 감독의 교감을 통해 만들어져가고 있는 한 인물의 마음이 걸어온 아련한 흔적이 느껴졌다. 게다가 불세출의 배우 송강호는 그가 연기하는 이한규라는 인물이면서도 , 역시 송강호구나!’하는 감탄을 잊지 않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반쯤은 배우이고 반쯤은 이미 감독이 된 듯한 내공을 보여준다. 그는 이한규라는 인물을 연기해내고도 마음의 여백이 한참 남아 송지원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으려면 내가 어디에 서면 될까를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한규가 선 자리는 과연 송지원이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가장 가까운 인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의 진정한 얼굴, 온전한 얼굴을 보기 위해서 (……) 삶의 우연한 상황 때문에 그에게 씌워진 덮개들을 얼마나 많이 벗겨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라. 주인공의 견고하고도 명확한 형상을 얻기 위해 싸우는 예술가의 투쟁은 상당 정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29.

 

 

 

 

 

2. 있는 그대로를 최대한 담담히 보여주기 위해

 

 

당신은 내 전체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인물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나의 전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당신은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고 계십니다.” 이런 주인공은 작가에게 미결정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계속하여 다시 태어나며, 계속해서 새로운 완결 형식을 요구하면서도 이 형식을 주인공이 자신의 자의식으로 파괴해버린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47.

 

 

우리가 타인의 인상을 판단할 때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외모와 직업이야말로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정체성의 덫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의형제의 주인공 송지원과 이한규는 둘 다 매우 불리한 직업을 가졌다. 이한규는 국정원 요원이고 송지원은 남파 공작원이다. 너무도 뻔한직업이라 생각하기 쉬운 이 상투적인 정체성의 틀에 투 인물은 자칫하면 갇히기 쉽다. 누군가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사실 그 사람의 인상의 80퍼센트 이상이 결정되곤 하지 않는가. 게다가 그 직업이 간첩이나 국정원 간부라면 이야기는 더욱 간단명료해진다. 그 사람 고유의 삶이란 존재하기 어려운, 전형적인 조직중심형인간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형제는 영화 초반부터 그 직업이라는 정체성의 틀을 살짝 비틀어 관객을 교란시킨다. 국정원 요원 이한규는 냉혹한 이성을 지닌 전형적 요원이라기보다는 가볍게 내뱉는 말과 표정 하나하나가 코믹하기 이를 데 없다. 송지원은 순정만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수려한 외모에 자상한 아빠와 로맨틱한 남편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송지원이 전화로 북한에 있는 아내와 통화하며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장면은 간첩에게 숨겨진 의외의 성격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송지원의 모습임을 관객은 처음부터 믿게 된다. 그 모든 모순적인 캐릭터들이 두 사람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조금도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림자라는 닉네임을 가진 베테랑 공작원의 지시를 따르는 송지원. 그는 그림자와 접선하기 위해 암호를 해독한다. 가수 남궁옥분의 재회라는 노래가 나오는 순간 지원은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을 펼쳐 자신에게 도착한 암호를 읽어낸다. 같은 시간 이한규는 국정원 진원들과 함께 그림자가 보낸 암호를 해독하려고 백방으로 애써보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림자는 이한규의 오랜 표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송지원이 오래전 남파된 친구이자 공작원인 손태순의 차량을 타고 가는 것을 알게 된 이한규 일행은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송지원과 그림자 사이에 오가는 암호는 해독할 수 없지만 이한규에게는 손태순이라는 비밀 연락책이 있었던 것이다. 손태순에게서는 지원에게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과 결연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손태순의 정보력을 믿는 이한규는 다른 부서의 지원을 받지 않고 단독으로 그림자를 잡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

 

영화의 스토리는 이렇듯 전형적인 추격신의 방정식을 따라가지만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스토리와 캐릭터의 균열을 경험한다. 감독의 시선은 마치 바다 위에서 윈드 서핑을 하듯 끊임없이 흔들리며 주인공의 의무와 욕망사이, 직업과 성격 사이, 이성과 감성 사이의 균열을 포착해낸다. 이때 인물들은 영화라는 거대한 불가마 안에서 조금씩 자신의 빛깔과 형태를 찾아가는 도자기처럼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감독은 송지원을 있는 힘껏 노출시키지도 않고 지나치게 신비화하지도 않는다. 프레임 바깥에서 흔들리는 카메라는 주인공도 함께 따라서 흔들리도록 내버려둔다. 감독은 송지원과 이한규의 과거를 속속들이 파헤치지 않고도 그들의 라이프스토리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난 채로 내버려둔 것 같다. 작가-감독은 단순히 주인공에 대한 찬성이나 반대의 위치가 아니라 주인공의 세계 바깥에서 흔들리는 시점의 원드서핑을 하며 그가 최대한 아름답게 비치는 카메라의 위치와 각도를 찾는다. ‘그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있는 그대로를 최대한 담담히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작가-감독이 포착할 수 없는 잉여에 인물이 존재할 수 있는 아련한 여백을 남겨두기 위해.

 

 

작가는 자신 밖에 위치해야 하며, 우리가 실제로 우리 자신의 삶을 체험하는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신을 체험해야만 한다. (……) 작가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타자가 되어야 하며, 타자의 눈을 통하여 자신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사실, 삶에서도 우리는 매순간 이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평가하며, 타자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의식에 대해 경계이월적인 요소들을 이해하고 고려하려고 노력한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41

 

 

 

 

 

3. 타인의 이해가 어렵다는 걸 이해하는 순간

 

 

그림자: (공중화장실 문을 잠그고 송지원과 손태순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엉뚱한 제안을 한다) 춤 한번 춰봐라. 여기 아이들 유행하는 춤.

송지원과 손태순: (그림자의 진의를 몰라 한참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둘 다 엄청나게 수줍어하며, 정말 어쩔 수 없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한의 유명 아이돌의 춤을 춘다.)

그림자: 잘한다, . 공부하라고 지원해줬더니! (송지원을 가리키며) 네가 더 민첩하니까 넌 나하고 올라간다. (손태순을 가리키며) 넌 아래 있고.

 

 

남파 공작원 세 명의 급작스러운 조우를 묘사한 감독의 재치가 번뜩이는 장면이다. 베테랑 공작원 그림자의 냉혹한 카리스마와 주도면밀한 성격, 송지원의 내성적이고 순진한 캐릭터가 동시에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의형제는 각각의 인물들이 겪어온 삶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압축하는 아주 자잘한 순간들을 예민하게 포착해낸다. 어차피 인간은 타인의 삶 전체를 파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자기 자신의 삶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니 말이다. 우리는 서로의 아주 작은 부분들만을 바라보고 그것을 전체를 향해 투사할 뿐이다.

 

 

 

 

국정원 요원과 남파 공작원. 한국 관객에겐 너무도 상투적인 설정이지만 의형제는 그러한 해묵은 상투성에 갇히지 않는다. 느끼한 휴머니즘으로 등장인물의 갈등을 노련하게 포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감독과 관객이 만들어가는 촘촘한 시선의 그물 바깥으로 인물의 잉여가 조금씩 새어나가도록 내버려둔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송지원이라는 인물을 미처 다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 그렇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좋았다. 관객이 주인공의 장단점이나 라이프 스토리를 장악했다는 느낌이 아니라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우리의 시선이 가닿을 수 없는 스크린의 여백에 인물이 오롯이 존재하고 있는 그 느낌이 따스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시야에 갇혀 타인을 바라보며 그것이 그의 전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고, 나 자신이 타인에게 비추는 인상에 자주 불만을 가지며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야라고 변명하며 하루를 보내곤 한다. 우리는 정말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 노력을 포기해야 할까. 우리가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은 우리가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혹은 우리가 그의 행동을 어떻게 조심해야 할 것인가같은 철저히 이기적이고 경험적이며 편파적인 기준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정말 개개인의 이해타산을 넘어 한 인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해하는 순간, 작가와 주인공 사이의 아름다운 거리감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바흐친은 우리가 한 인간의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리고 우리 자신 또한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무지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한 인간의 전부를 놓고 마지막으로 그는 선한 사람이다, 악한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다, 이기주의자이다 등등으로 규정할 때에도, 이 규정들은 단지 우리가 그와의 관계에서 취하는 생활 속에서의 실제 입장을 나타낼 뿐이다. 이 규정들은 그를 규정하기보다는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없는지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있게 해주며, 전체에 대한 그저 우연한 인상이나 고약한 경험적 일반화를 제시할 뿐이다.

삶에서 우리가 흥미 있어 하는 것은 전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단지 그의 개별 행동들이며, 이 행동들이란 (……) 어떤 식으로든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것들이다. (……)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개성의 전체를 우리 자신이 가장 적게 지각할 수 있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28.

 

 

 

 

 

4. 얼굴 위에 새겨진 이야기의 우주

 

 

독자는 자신을 주연배우에게 감정이입하고, 주인공을 완결하는 모든 특징들(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외양)을 무시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 삶의 주인공인 양 주인공의 삶을 체험한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59.

 

 

미술시간에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는 자화상 그리기였다. 거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하루 종일 거울 앞에 붙어 있어도 내 생김새를 정확하게 포착해낼 수가 없었다. 그림 속에서나마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마구 내 모습을 성형해보고 싶기도 했고, 명랑만화 주인공처럼 내 모습의 코믹한 부분을 극대화시켜보고도 싶었지만, 온종일 결국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멀뚱하게 앉아 있었다. 애꿎은 스케치북에는 좀처럼 알아볼 수 없는 괴상한 점선 자국들만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꾸역꾸역 그린 자화상의 결과물은 여전히 미완성이었고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멀찌감치 치워놓아 결국에는 찾을 수도 없게 되었다. 자기 자신을 올바로 그리는 일의 어려움을 그때야 실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거울 앞의 내 모습이 낯설어지는 순간, 그 순간은 바로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내 모습거울에 비친 내 모습사이의 미묘한(때로는 섬뜩한) 차이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 주인공의 삶에 자신을 감정이입 시키는 매혹의 기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자기 자신과는 다르지만 자신과 조금은 닮아 있을지도 모를 타인의 삶에 매혹되는 것이 아닐까. 관객은 영화의 스크린과 사운드에 사로잡혀 있을 동안 자신을 향한 자신의 끈질긴 시선을 잠시 망각할 수 있다. 관객석의 조명이 꺼지는 순간, 우리는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잊은 채 스크린 속의 타인의 삶을 향해 집중하기 시작한다. 매력적인 등장인물은 아무리 외국인이어도, 성별이 달라도, 살아온 모든 환경이 달라도, 그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을 잊게 만든다. 영화의 스크린은 다른 사람의 사람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과 등장인물이 지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시너지 효과로 관객을 유혹한다. 우리는 그렇게 스크린을 통해 를 넘어선 또 다른 나의 잃어버린 가능성을 탐색한다.

 

 

 

 

의형제의 주인공 송지원은 자신과 같은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신과 전혀 다른 캐릭터를 지닌 인물 그림자와의 대비 효과를 통해 관객의 마음에 성큼 다가온다. 오랫동안 국정원의 주요 타깃이었으며 해묵은 골칫거리이기도 했던 그림자는 냉혹한 킬러의 전형을 보여준다. “국제적으로 암약하는 살인마라는 평가를 받는 그림자가 송지원과 함께 처리할 대상은 김성학이라는 귀순자였다. “인민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자란 새끼가 장군님을 모략하는 책을 써? 밤마다 네 목을 따는 꿈을 꿨어.” 김성학 가족을 대하는 태도에서 관객은 송지원과 그림자의 차이를 감지한다. 송지원은 김성학의 가족까지 살해하라는 그림자의 지시를 차마 따르지 못한다. 김성학의 장모는 물론 아내까지 잔인하게 살해하는 그림자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송지원은 김성학의 아이만이라도 살려주기 위해 애쓰지만 그림자는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송지원을 노려본다. “강성대국의 아이들 중에 나약한 놈은 한 놈도 없어!”

 

 

 

 

자신의 임무와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일치시킬 수 없는 비극의 주인공. 카메라는 조심스럽게 송지원의 눈 밑에 가득 드리운 절망의 그림자를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한다. 그는 빨리 이 임무를 마치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가족이 몰살된 상황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 소년의 삶을 무시할 수 없다. 송지원은 그림자에게 김성학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아이의 눈을 황급히 가린다. 자신만 살아 돌아가기도 바쁜 이 상황에서 송지원은 아이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셀 수 없는 고뇌와 절망의 흔적이 가득한 송지원의 얼굴에는 그렇게 마음 약한그가 걸어왔을 신산한 삶의 이야기가, 보일 듯 말 듯 아련하게 깃들어 있다. 그가 남파공작원신분에 걸맞지 않게 생면부지의 아이를 구하는 순간. 관객은 불현듯 그의 얼굴에 숨겨진 이야기의 풍경을 읽어내고 싶어진다. 검푸른 우울과 섬뜩한 고독, 투명한 설렘을 동시에 간직한 송지원의 얼굴 뒤에 숨겨진 이야기의 풍경을.

 

 

 

 

물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외적인 형상을 상상 속에서 그려보고, 외부에서 자신을 느끼면서, 자기 자신을 내적인 자기 느낌의 언어에서 외적인 표현성의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느 정도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특별한 노력은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반쯤 잊힌 타인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체험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 나는 다소간 둘로 분열되는 듯하지만, 최종적으로 완전히 나누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두드러지게 제시하고 나의 내적 자기 지각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오기 위해서는 얼마간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에 성공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외적인 형상 속에 어떤 독특한 공허, 유령 같음, 그리고 조금은 섬뜩한 정도의 고독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된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59.

 

 

 

 

 

5. 두 사람의 빛

 

 

지명훈: (수척해진 지원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자수하는 건 어떻겠니?

송지원: 제게 사상교육을 해주신 건 선생님이셨어요. 이제 조국을 배신하라고요? 교수님처럼요?

지명훈: (조국을 배신한 자의 괴로움과 스승으로서의 노여움이 복잡하게 오가는 표정으로) 그만 해라.

송지원: (스승을 상처주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가 필요했던 그는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힌다.) 지난 6년간 도망만 다녔습니다. 이제 무슨 일이든 결단을 내려야죠. 다시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그의 얼굴은 조명이 어두울 때 더욱 빛을 발한다. 그의 빛은 쾌활하고 명랑한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이 아니라 슬픔과 고독을 공깃돌 삼아 오랫동안 혼자 놀아본 사람의 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빛은 언뜻 어둠으로 비치기 쉽다. 하지만 관객은 그의 직업이 아무리 암울하다해도, 그를 둘러싼 환경이 뿜어내는 음울한 장막을 걷어내고, 거역할 수 없는 그만의 빛을 발견해낸다. 오래전에 남한 사람이 되어버린 은사 지명훈을 만나러 온 날, 송지원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운 빛을 뿜어낸다. 장대비가 내리는 밤 사방이 어둠으로 휩싸여 있을수록, 송지원의 얼굴에서는 어둠 속에서 더욱 눈이 시리게 맑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 우직한 대장장이가 단 한 사람의 무사를 위해 오랫동안 묵묵히 벼린 칼끝에서 나오는 빛처럼 단단하고 묵직한 그런 빛.

 

 

 

 

송지원은 그림자의 손아귀에서 아이를 구출하고,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지만, 그림자는 물론 북쪽에서도 완전히 버려진 신세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림자는 당에서 정해진 표적이었던 김성학 뿐 아니라 남한의 국정원 요원들을 여러 명 살해해버렸고, 그 와중에 그림자는 송지원이 국정원에 자신의 존재를 밀고했을 것이라는 의심까지 한 것이다. 알고 보니 밀고자는 송지원의 오랜 친구였던 손태순이었다. 손태순은 이한규를 통해 남파 공작원의 정보를 심심찮게 전달해주고 있었고, 이한규는 손태순을 믿고 송지원을 이용하여 그림자를 잡으려 한 것이다. 살벌한 총격전 끝에 그림자는 신출귀몰한 액션을 펼치며 이한규 일행의 추적을 보기 좋게 따돌려버린다. 가족 같은 동료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이한규는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고 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송지원의 얼굴에 고인 이야기의 빛이 외부의 어떤 이물질에도 손상되지 않는 투명한 빛이라면, 이한규의 얼굴에 고인 이야기에서는 언뜻 좀처럼 이렇다 할 이 우러나오지 않는 듯 보인다. 그는 얼핏 일상에 적당히 찌들고 세속에 웬만큼 물든 전형적인 40대 남자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우아한 세계의 조폭 아버지가 딸린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참아야 했던 참담한 굴욕이 남아 있고, 살인의 추억에서 잡히지 않는 범인을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끝까지 추격했던 박형사의 무대포식 집념도 섞여 있고, 괴물에서 아무런 힘도 무기도 없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선량한 아빠의 모습도 남아 있다. 물론 넘버 3놈놈놈에서 보여준 배꼽 빠지는 코믹 액션과 옹골찬 애드립의 기운도 남아 있다. 배우 송강호가 연기해온 이 모든 아버지와 아저씨와 남편의 자연스러운 집대성이 아마 의형제의 이한규일 것이다.

 

송강호가 만들어낸 이한규의 얼굴은 대한민국의 보통 아저씨라면 누구나 견뎌왔음직한 산전수전과 어정쩡한 처세술의 노하우와 어디서도 소리 내어 울 수 없는 가장의 슬픔을 버무린 아름다운 평균치가 아닐까. 이한규의 얼굴이 담아내는 이야기의 빛은 너무도 평범해서 영화의 러닝타임 중 절반이 흐르기까지 금방 쉽게 포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지극히 평범한 빛의 광원(光源)이 가눌 수 없는 고독과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임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관객들은 어느새 송지원의 아련한 빛과 이한규의 능청맞은 빛이 절묘한 한 쌍의 언밸런스 커플록(?)을 완성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고통 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외적 표현성의 충일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것을 부분적으로만 체험할 뿐이며, 그나마도 내적인 자기지각의 언어를 통해서 그러하다. 그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근육의 긴장을 알지 못하며, 자신의 육체의 전체적이며 조형적으로 완결된 몸가짐, 즉 자신의 얼굴에 나타난 고통의 표현을 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고통 받는 외적인 형상이 나에게 의미화되도록 하는 배경인 맑고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심지어 이런 모든 요소를 볼 수 있다고 할지라도, 예를 들어 거울 앞에 있다 할지라도, 그는 이런 요소들에 상응하는 정서적-의지적인 접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53.

 

 

 

6. 너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너를 안다

 

 

송지원: (도망간 베트남 처녀를 잡아오는 길. 이한규가 그녀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저기요.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이한규: 한 번 잡은 사람 또 도망가면 그 다음엔 대책이 없어.

송지원: 차가 달리고 있는데 어떻게 도망갑니까? (……) 우리가 경찰도 아니고, 저 사람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인간적으로 합시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버릴 정도로 깊이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아무리 사랑해도 가닿을 수 없는 존재의 견고한 벽을 느끼곤 한다. 그건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 자체의 본성일 것이다. 사랑은 원래 아무리 해도 부족하게 느껴지게 마련이고 사랑을 통해 타인의 벽을 오히려 명징하게 인식된다. 사랑은 결핍을 통해 더욱 절실하게 인지되고 단절을 통해 더욱 깊어가는 감정인 것 같다. 우리는 나 자신을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할 수 없고, 반대로 타인을 사랑하듯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어쩌면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에는 조금씩 나르시시즘적 계기가 깃들게 마련이지만 타인을 향한 사랑에는 자기애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관여한다. 바로 타인과의 스킨십, 타인의 몸을 만지고 입 맞추고 부둥켜안는 감각이다.

-로댕의 키스, 1886

 

 

 

 

바흐친은 이 스킨십이야말로 우리가 타자의 존재를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등 뒤에서 우리를 포옹할 수 없으며, 스스로의 입술에 입맞출 수 없는 존재다. 아마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는 타인의 자신의 몸을 만지고 자신이 누군가의 몸을 만지는 순간의 쾌락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남녀관계만이 아니다. 타인의 존재를 느끼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를 만지는 것만큼 확실한 길이 없지 않은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이나 악수 같은 가벼운 스킨십을 통해서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분량의 정보를 소통한다. 누군가의 체온과 살결을 느끼는 일은 그에 대한 인적사항이나 백 마디 설명보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아닐까.

 

 

 

 

나는 자신을 사랑하듯이 가까운 이를 사랑할 수 없으며, 더 정확하게는, 가까운 이를 사랑하듯이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만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보통 행하는 모든 행위들의 총합을 그에게 전이하는 것뿐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82.

 

 

국정원에서 버려진 이한규와 그림자에게 버려진 송지원. 그로부터 6년이 지나 이한규는 인터내셔널 태스크포스라는 사람 찾기 회사를 차렸고 둘의 첫 대면은 라이따이한 출신의 국제결혼 브로커를 잡아 현상금을 타려는 이한규가 곤경에 처했을 때 일어난다. 베트남 출신의 노동자들을 수하로 거느리는 라이따이한은 자신을 잡으려 하는 이한규를 처리하려고 하지만, 마침 그곳에서 일하는 있던 송지원의 도움으로 이한규는 위기를 모면한다. 둘은 서로가 서로를 모를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서로를 향한 접선을 시도한다. 둘은 서로에게 속삭이는 중이다. 너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너를 안다고. 이한규는 송지원을 이용해 그림자를 비롯한 간첩조직을 엮어내어 거액의 현상금을 타내려 하고, 송지원은 이한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함으로써 그림자와의 접선을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이한규는 송지원의 뛰어난 무술 실력과 총명함을 무기 삼아 자신의 사업을 확정하고자 한다는 핑계로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로 한다.

 

이한규와 송지원 두 사람이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 추격자와 피추격자 사이의 살벌한 주종관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은 두 사람의 어색한 동거 직후부터 시작된다. 업무 첫날부터 송지원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는 고분고분 사장님의 명령을 따르는 충실한 피고용인과는 거리가 멀다. 도망간 베트남 처녀를 잡아 가정의 평화를 찾아주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임무라고 설교하는 이한규는 베트남 처녀에게 수갑까지 채워 자신의 사업에 만전을 기하고자 한다.

 

 

 

 

송지원은 업무 첫날부터 고용주의 사업 방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적으로 합시다.” 그는 깍듯한 존댓말도 편안한 반말도 아닌 중립적인 청유형을 써가며 이한규와 자신의 최소한의 동질성(우리 모두 인간이라는!)에 교묘하게 호소한다. 목소리만 컸지 본래 모질지 못한 이한규는 송지원의 단호한 태도에 놀라 얼떨결에 송지원에게 수갑 열쇠를 넘겨주고 만다. 그들의 인간적 접촉은 그렇게 시작된다. 두 사람은 같은 집과 같은 자동차와 같은 밥그릇과 같은 변기를 공유하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너무 많은 인간적 접촉의 시간을 쌓아간다.

 

 

결국엔 오직 타자만을 껴안을 수 있고 사방에서 부여잡을 수 있는 것이며, 오직 그의 경계만을 사랑스럽게 매만질 수 있는 것이다. 타자의 연약한 유한성, 완결성, 그의 이곳-현재의 존재-이 모든 것은 나에 의해서 내적으로 이해되며, 말하자면 나의 포옹으로 형성된다. (……) 나 자신의 입술은 오직 타자의 입술에만 닿을 수 있으며, 오직 타자에게만 나의 손을 올려놓을 수 있으며, 타자를 적극적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고, 그의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으며, 그의 존재의 모든 구성적 특징 속의 그를 덮어줄 수 있으며, 그의 육체와 그의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74~75.

 

 

 

 

 

7.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동안

 

 

제아무리 견고하다 해도 현실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므로, 인간은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감각이 바뀌면서 현실이 무르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마련인데, 이를 두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다. 모든 성인들은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해 그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현실이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다. 하지만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경험한 그 다음 순간, 모든 성인들은 감각적 현실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인지 깨닫게 된다. 현실이 감각적으로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게 덧없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져야 할 텐데, 아이로니컬하게도 더욱더 그 감각적인 생생함을 즐기게 되니 놀라운 일이다.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문학동네, 2007, 42.

 

 

공작금 끊겨서 생계형 간첩 된 애들. 지금 취업난에, 알바자리 찾느라 난리라던데.” 그림자와 헤어진 후 송지원도 이렇듯 물적 토대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막노동에 몸을 던져야 하는 처지였다. 이한규는 도망간 베트남 처녀를 찾는 일로 건당 200만원에서 400만원가량의 돈을 벌며 이혼한 아내에게 딸 윤지의 양육비를 보내고 있다. 송지원의 북한의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낯선 남한에서 생계를 감당해야 할 뿐 아니라 북한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아내와 딸을 데려오기 위해 거액의 자금을 필요로 하는 처지다. 그들은 지금 저마다의 절박함 때문에 타인의 절박함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송지원은 이한규에게 고용되어 베트남 처녀를 잡아오는 비인간적인일을 어쩔 수 없이 하면서도 최소한의 인간적인길을 찾으려 한다.

 

 

 

 

실종된 베트남 여인을 찾던 이한규는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고스톱을 치면서 할머니들을 구워삶아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한다. 할머니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함구하고, 이한규는 오늘은 이렇게 공치는구나 싶다. 이때 송지원과 베트남 여인이 나란히 이한규 앞에 나타난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오는 베트남 여인을 보며 이한규는 놀란다. “어떻게 한 거야?” 송지원은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설득했죠. 인간적으로.” 이한규의 비인간적인 작업 방식에 대한 가벼운 풍자가 담긴 송지원의 대사다. 한방 맞은 이한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냉혹한 남파 공작원 송지원의 빈틈없는 표정의 갑옷 사이로 언뜻 비치는 감정의 틈새를 발견한다.

 

 

 

 

송지원은 이한규가 여전히 국정원의 팀장으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활동 정보를 자세히 보고하면 그림자의 신뢰를 다시 얻고 끊어진 과의 접촉도 다시 시작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는 이한규의 유능한 피고용인의 연기를 해내면서 동시에 이한규의 각종 신상 정보를 이메일을 통해 보고하기 시작한다. 그가 그림자에게 보내는 보고서는 참수리 7호 보고서. “국정원 3팀장 이한규. 흥신소를 가장한 업무 반복. 딸이 있고, 이혼했음. 특이사항 햄버거.” 양주를 먹을 때조차도 싸구려 햄버거를 안주 삼아 씹어 먹는 이한규의 서글픈 식습관은 송지원의 눈에 특이사항으로 보였던 것이다. 늘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햄버거로 대충 허기를 모면하는 이한규의 식습관은 송지원의 연민을 자극한다. 그들은 서로의 숨 막히는 역할 가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서로의 맨얼굴과 상처 입은 속살을 훔쳐보며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밤이 되면 서로를 향해 단단히 무장하고 있던 심리적 가면이 반쯤 벗겨진다. 특히 한쪽이 잠들 때쯤이면 그들은 자신의 가면을 벗고 자신도 모르게 벗겨진 저쪽의 가면을 바라보며 더욱 쓸쓸해진다. 잠들었을 때. 우리는 거울 앞에서처럼 좀더 마음에 드는자신의 표정을 지어보일 수도 없고,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을 때의 긴장감도 사라진다. 서로의 잠든 얼굴을 슬며시 훔쳐보며 그들은 자신이 미처 단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숨은 얼굴을, 상처가 생겨도 털어놓을 사람조차 없어 외로움으로 점점 굳어가는 서로의 얼굴을 발견한다. 송지원이 북한을 향해 보내는 편지는 늘 안 읽음(unread)’ 상태로 쌓여만 간다. 그가 보내는 편지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그 누구에게도 소통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완벽히 혼자다. 그는 지금 존재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정말 혼자일까.

 

 

작가는 자신 밖에 위치해야 하며, 우리가 실제로 우리 자신의 삶을 체험하는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신을 체험해야만 한다. (……) 작가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타자가 되어야 하며, 타자의 눈을 통하여 자신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사실, 삶에서도 우리는 매순간 이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평가하며, 타자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의식에 대해 경계이월적인 요소들을 이해하고 고려하려고 노력한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41.

 

 

 

 

 

8.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나 자신의 입술은 오직 타자의 입술에만 닿을 수 있으며, 오직 타자에게만 나의 손을 올려놓을 수 있으며, 타자만을 적극적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고, 그의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으며, (……) 그의 육체와 그의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74~75.

 

농부: (아내를 다시 찾아준 이한규와 송지원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표정을 담아) 사례를 해야 할 텐데.

이한규: 찾는 데 200, 데려오는 데 200, 400 되겠습니다.

송지원: 부인이 직접 오셨으니까 사례는 필요 없습니다.

이한규: (사장도 아닌 송지원이 제멋대로 사례비를 눈앞에서 공중분해 시키자 어안이 벙벙한 채로 송지원을 노려본다.)

농부: (해맑게 미소 지으며) 그래도 감사의 표시라도…….

이한규: (농촌에서 직접 재배한 각종 야채와 닭을 자동차에 실어준 농부의 사례를 한심한 듯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홰를 쳐대고 꼬꼬댁 꼬꼬댁 소리를 내며 야단법석을 떠는 토종씨암탉을 노려보며) 그거 가져가려면 수갑 채워!

송지원: (흐뭇한 표정으로 씨암탉을 꼭 껴안고 있다.)

 

 

 

 

두 사람은 지금 서로에게 최대한의 실용적인 정보를 빼내어 저마다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중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불현듯 자기 자신의 정해진 업무를 망각하곤 한다. ‘인터내셔널 테스크포스의 기계적인 흥신소 업무를 송지원은 별 무리 없이 잘해내는 듯하지만, 그는 두당 200만 원의 수고비를 한 순간에 제멋대로 날려버릴 정도로 타인의 삶에 관심이 많다. 농촌에서 힘겹게 농사를 짓는 가난한 남편과 무럭무럭 커가는 아이들을 보자 200만 원의 수고비를 받아낼 생각이 싹 달아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 외부에서 입력된 공적인 정체성이 잠시나마 지워지는 순간이다. 농촌 아이들과 놀아주며 나이를 묻는 송지원의 모습은 영락없이 잘생긴 동네 총각이다. 그의 얼굴에 가득 드리운 서늘한 그림자 뒤에 숨겨진 따스함을 읽어낸 관객의 마음은 어느덧 가뿐하게 무장해제 되어 있다. ‘송지원의 직업과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한 인간의 마음속 소용돌이를 읽어낼 준비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남파공작원과 전직 국정원 팀장의 목소리가 아닌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인간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본인들도 선뜻 주어진 역할로서의 자아내면의 자아를 구분하지 못한다. 농부가 준 씨암탉을 능숙하게 요리하여 닭백숙을 만들어낸 송지원. 그가 만든 닭백숙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는 이한규. 늘 싸구려 햄버거를 비롯한 각종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이한규는 송지원의 찰진 손맛에 배인 사람 냄새를 맡고는 자신이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집에서 해주는 음식에 대한 향수를 맛본다. “토종 씨암탉. 맛있다. 누가 해주는 음식. 오랜만이네.”

 

결코 닮은 데라곤 없어 보이던 두 사람의 영혼. 그런데 서로의 내심을 흘깃흘깃 엿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언젠가부터 조금씩 닮아간다. 송지원은 가족은 물론 조직사회에서도 버림받은 이한규를 바라보며 저 고독한 표정을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한규도 마찬가지다. ‘끈 떨어진 연신세가 되어 당의 지원은 물론 그림자와의 연락이 끊긴 송지원을 바라보며 이한규는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진다. 저 얼굴. 저 얼굴은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바로 그것이다. 나밖에는 사랑할 사람이 없는 내 얼굴이지만 결코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없는 내 얼굴. 언제나 내심을 숨겨야 하기에 진짜 자연스럽고도 솔직한 표정이 어떤 것인지도 오래전에 잊어버린, 나 자신조차 낯선 내 얼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머물며, 우리 자신의 반영만을 볼 뿐이고(……) 우리는 자신의 외양이 반영된 상은 보지만, 외양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한다. 외양은 나의 모든 것을 포함하지 못하며, 따라서 나는 거울 앞에 있는 것이지 그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 실제로 거울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는 항상 어느 정도 허위적이다. (……) 바로 여기서 우리가 거울 속에서는 보지만 실제 삶에서는 드러내지 않는 독특하고도 부자연스런 얼굴 표정이 나타난 것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63.

 

 

 

 

 

9. 인물에 완전히 동화되지도, 인물과 완전히 거리를 두지도 않는 지탱점

 

 

송지원: 그런데…… 부인은 왜 떠나신 거예요?

이한규: (원망도 미움도 남아 있지 않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내가 잘 못 해줘. 애 엄마는 영국인이랑 재혼했어. 알버트라고. 알버트가 애 이름을 영국식으로 지었다는데, 에이미래 에이미. 에이씨! 애 이름을 에이미가 뭐야, 에이미가!!

송지원: (이런 순간에도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는 이한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렴풋이 웃는다.)

이한규: 돈 많이 벌어서 우리 딸 결혼할 때 집 한 채 해주고 싶어.

송지원: (아빠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자신의 딸을 생각하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그러실 수…… 있을 거예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또 다른 목소리가 발화하는 순간들이 있다. 분명히 내가 한 말인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싶은 낯 뜨거운 순간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홀로 얼굴이 붉어지는, 겸연쩍고 민망한 고백. 두 사람은 매일 한솥밥을 먹으며 같은 자동차를 타고 같은 방을 쓰면서 점점 더 그런 일들이 잦아진다. ‘사무적인 분위기에서라면 전혀 나눌 필요가 없는 사적이고 내밀한 대화의 흔적들이 조금씩 늘어간다. 서로를 향한 자잘한 감정의 주름들이 늘어갈수록 참수리 7(송지원의 닉네임)’의 보고서는 점점 짧아진다. 이한규의 일거수일투족을 미주알고주알 보고하는 것이 점점 힘겨워지는 것일까.

 

 

 

 

추석이 되자 인터내셔널 테스크포스에도 달콤한 휴가가 찾아온다. 찾아갈 곳도 궁금한 곳도 없다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전국 노래자랑만 열심히 시청하고 있는 송지원. 이 황금 같은 휴일에 만날 사람도 없냐, 여자친구도 없냐고 묻는 이한규에게 송지원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누굴 만나요? 서울엔 친구 없어요. 여자한텐 관심 없어요.” 무척이나 공사다망한 듯이 부랴부랴 옷을 차려입고 외출하는 이한규의 뒷모습을 확인한 송지원은 재빨리 이한규를 미행하러 따라나선다. 잠시 긴장을 늦출 뻔 했으나,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창조해낸 공적 임무를 잊지 않은 것이다. 이한규가 아직 국정원의 일원이라 믿는 송지원으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인 셈이다.

 

감독의 시선은 인물의 내면과 외면을 비추는 마음 속 카메라의 완급을 조절한다. 망원경의 시선으로 송지원을 비출 때 그는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는 유능한 공작원으로 보이지만, 돋보기의 시선으로 그의 차가운 얼굴을 확대해보면 고뇌와 절망과 신념이 교차하는 그의 우수 어린 표정이 드러난다. 현미경의 시선으로 그를 비추면 그의 행동을 결정하는 변수들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의 입장에서는 유능한 인재지만 누구에게도 아주 사소한 상처도 주기 싫어하는 세심한 성격 때문에 그림자처럼 냉혹한 킬러가 될 수 없다. 여기에 이한규의 시선이 더해진다. 이한규의 시선 또한 크게 세 가지로 분리된다. 남파 공작원 송지원을 바라보는 직업적 시선과 아내와 딸을 두고 떠나온 한 남자를 바라보는 인간적 시선. 그리고 자신과 동거하는 룸메이트를 바라보는,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없는 서로에게 이제는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되어버린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제3의 시선.

 

이렇듯 한 인물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토록 다양한 감성의 렌즈가 필요하지 않을까. 송지원이 스스로가 처한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면 아래는 여전히 자신인 채로 수면 밖을 바라보는 잠망경의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바흐친은 작가가 주인공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 중 하나는 단지 주인공에게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있는 그대로흠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에게 성격을 입히고 신념을 주입하고 대사를 녹음시키는 작가가 아니라, 어느새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된 주인공에 대한 무조건적인 흠모야말로 작가가 주인공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위치가 아닐까.

 

무조건적인 흠모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그 불안과 그 현기증을 참아내면서 주인공의 있는 그대로의 전체를 그려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작가는 단지 주인공에게 거리를 두거나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에게 작가의 입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불완전한 전체로서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가 주인공의 외부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주인공을 바라보는 불안한 지탱점들을 찾아가는 과정. 작가는 그 과정에서 창조적 다중인격이 되어야 한다. 그 어떤 인물에도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형되는 과정 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작가-감독은 인물에 완전히 동화되지도 않고 인물과 완전히 거리를 두지도 않는 자기만의 지탱점을 매 순간 창조해야 한다. 바로 그 불안한 지탱점에서 아름다운 캐릭터가 탄생한다.

 

 

여기서 문제는 작가가 주인공에게 이론적으로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님을 강조하자. 주인공의 외부에 있는 필수적인 지탱점을 발견하기 위해서 (……) 주인공과의 관계에서 오히려 발견해야 할 것은 주인공의 전 세계관이 주인공의 존재론적이고 직관적이며 구체적인 전체 안에서 단순히 한 요소가 될 수 있는 특별한 위치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가치의 중심을 강제로 부여받는 존재로서의 주인공에게서 아름다운 것으로 주어져 있는 존재로서의 주인공에게로 이동해야만 한다. 주인공의 말을 듣고 그에게 찬성하는 것 대신에 작가는 현재의 충일성 속에서 주인공의 모든 것을 보아야 하며, 그 자체의 그를 흠모해야만 한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44~45.

 

 

 

 

 

10. ‘에고와의 내전(內戰)

 

 

에고이스트는 마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나 부드러움과 유사한 그 어떤 것도 체험하지 못한다. 문제는 그가 이러한 감정들을 전혀 모른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자기보호는 일체의 사랑스럽고 애틋하며 미적인 요소들을 결여한 차갑고 가혹한 정서적-의지적 태도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44~45.

 

 

에고이스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수많은 대상 중에 평등하게 자기를 포함시키는 건 어쩐지 은밀한 반칙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모든 경쟁상대를 제치고 유독 출중한 자기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사랑해보지 않은 것이 아닐까. 사랑은 나에게 아무런 자기중심적즐거움을 약속해주지 않는 불안하고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이끌리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의 폭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지원과 이한규는 에고이스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 자신을 돌보는 일을 자주 까먹는 사람들이다. 송지원은 북한에 있는 가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막노동을 하면서도 진심으로 나는 이 일에 만족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고, 이한규는 이혼한 후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는 딸 윤지에게 양육비를 부쳐주느라 자기 몸에서 나는 지독한 홀아비 냄새도 모른 척한다. 송지원은 가족을 못 만난 지 6년이 넘었고 이한규의 가족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들이 속한 조직은 그들을 버렸고 그들 주위엔 이제 살가운 친구도 선후배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족만을 생각하고 조직조차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이렇게 사연 많은 두 룸메이트들은 사실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타인들이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눈에서 서로의 가여운 분신을 본다. 우리는 처음에 전혀 다른 존재인 줄로만 알았다. 쫓아야 하고 쫓겨야 하는. 이해관계가 너무나 분명히 대립하는 선명한 적.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우리는 너무 닮았다. 너와 살을 부대끼며 같은 식탁과 같은 변기와 같은 현관을 쓰다 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너와 나는 조직이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가 어떤 조직에 있든 우리는 조직적으로 살 수 없는 인간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직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못하면서 조직에서 배운 신념은 잊지 못하는 서글픈 족속들이다. 우리는 조직의 이해관계에 내 모든 개인적 삶을 끼워 맞출 수 없다는 점에서 유난히도 닮았다. 우리는 기계의 부속품이기엔 너무 제멋대로인 나사들이니까. 기계의 부속품으로 살기엔 인간적인 삶의 냄새를 너무 그리워하니까. 우리는 똑같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견고한 정체성의 껍질을 완전히 벗지 못한 지금, 아직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일 뿐이다.

 

 

내 앞에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의 의식의 시야는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환경과 그가 자신 앞에서 보는 대상으로 가득 메워져 있다. (……) 나는 그를 미학적으로 체험하고 완성해야만 한다. 미학적 활동의 첫 번째 단계는 나를 그 사람(타자) 안으로 투사(감정이입) 하여 그의 내부에서 그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다. 나는 그가 체험하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즉 나는 나 자신을 그의 위치에 놓아야 한다. 이를 테면 그와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 실제로 고통 받는 인간의 내면에서 체험되는 삶의 상황은 나를 자극하여 도움, 위안, 인식의 사유 등과 같은 윤리적 행동을 하도록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나 자신을 그 안으로 투사하는 것 다음에는 나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 즉 고통 받는 인간의 외부에 있는 나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 반드시 뒤따라야만 한다. (……) 만약에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타자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체험하는 병리적인 현상이 발생할 것인데, 이는 타자의 고통에 감염되는 것에 불과하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52~54.

 

 

 

 

 

11. 어깨에 무겁게 닻을 내리고 있는 조직

 

 

이한규: (송지원이 미행하여 자신의 통화를 도청 중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영국에 있는 딸에게 전화한다.) 알버트가 피아노 가르쳐 줬어? 새 아빠 좋아? 아빠가 더 좋아? 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어? 디카? 그건 그쪽에도 사도 되잖아. 아빠가 돈 더 보내줄 테니까 엄마한테 사달라고 그래. (명절이라 바쁜 일도 전혀 없으면서) 아빠 바빠서 그만 끊을게.

송지원: (이한규의 통화를 도청하던 중, 깊은 한숨을 내쉰다. 딱히 도청할 내용조차 없는 이한규의 신산한 삶이 안쓰럽다. 지독하게 고독한 저 중년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보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그 순간 송지원의 가명 박기준을 향해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이한규가 보낸 문자메시지: 기준아. 저녁에 나 맛있는 거 좀 해줄래?

 

 

 

 

이한규의 가슴 시린 문자메시지가 도착하는 순간, 송지원의 가슴 속에서는 칼바람이 스쳐간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경계심을 내려놓는 순간. 불현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6년 동안 남모르게 증오해왔던 옛 친구, 손태순이 나타났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는데. 너만 아니었어도, 너만 아니었어도. 갑자기 이한규와 송지원 사이에 조심스레 흐르던 인간적 연민의 감정선이 뚝 끊기고 본래의 긴장감이 되살아난다. 이한규에게 생활비를 타쓰고 있는 손태순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초라한 행색에 심각한 알콜중독까지. 손태순을 미행한 송지원은 텅 빈 집에서 머그컵에 소주를 부어 먹는 손태순의 절망적인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겨우 이따위로 살라구 조국과 동무까지 팔아먹었네? 간나새끼, 너 때문에 변절자 취급 받고…….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무슨 말이라도 좀 해보라!” 손태순을 때려눕히고 부질없이 항변하는 송지원의 두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술에 절어 저항할 힘도 없이 그저 맞고만 있는 태순을 주먹으로 때리는 지원. 그의 주먹에는 원망보다 무력한 절망이 서려 있다. 멱살을 잡힌 채 숨을 헐떡이던 손태순의 입술에서는 핏물과 함께 뜻밖의 절규가 비어져 나온다. “, 살고 …… 살고 싶다.”

 

 

 

 

친구 태순에게서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음을 깨달은 지원은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하여 북에 있는 가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애쓴다. 그러던 중 또 다른 엄청난 사건이 터져버린다. 집에서 함께 뉴스를 보던 이한규와 송지원은 각기 다른 이유로 어안이 벙벙해진다. 북한이 급작스레 핵실험을 선언하여 국제사회가 들썩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간신히 화해 무드로 돌아섰던 남북관계가 다시 얼어붙기 시작한다. 송지원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이한규 또한 당혹스럽다. 송지원을 이용해 그림자를 잡으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못한 이한규는 지원의 손목시계에 몰래 최첨단 GPS. 그들 사이에는 아직 건널 수 없는 존재의 장벽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어깨 위에 아직 무겁게 닻을 내리고 있는 조직의 안개를 제거하고 나면, 상처받은 개인만이 남는다. 두 사람은 여전히 마음속에 국정원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가까워진 서로의 관계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름다운 필리핀 아내를 되찾아달라며 거드름을 피우는 고객앞에서 송지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는다. 아내를 구타했다는 말까지 자랑 삼아 떠들어대는 고객 앞에서 송지원은 살아남기 위해이런 일을 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심하다. 송지원은 우울한 얼굴로 이한규에게 묻는다. “저 사람 아내 우리가 찾아주면……. 또 때리겠지요?” 이한규의 얼굴에서도 송지원과 같은 빛깔의 우울함이 스쳐지나간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은 자기 자신 속에서가 아니라 타자 속에서만 직관적으로 확신에 차서 체험된다. 나는 자신의 외적 세계와 전혀 동종적이지 않다. 왜냐 하면 내 안에는 항상 그 세계에 대립시킬 수 있는 본질적인 어떤 것, 다시 말하면 그 안으로는 포함되지 않는 나의 내적인 자기 활동성, 외부세계를 대상으로 직면하게 만드는 나의 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적인 나 자신의 자기활동성은 자연과 세계를 모두 능가한다. 나는 항상 세계에 대한 행위 속에서 내적으로 자기 자신을 체험하는 선을 따라가는 출구를 갖고 있다. 나는 마치 완전히 자연적으로 주어진 소여에서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구멍 같은 것을 항상 가지고 있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72~73.

 

 

 

 

 

12. 상처 입은 사람만이 알아보는 서로 닮은 상처

 

 

우리는 타인의 육체를 포옹하거나 덮어주면서 육체 안에 갇혀 있고 육체로 표현되는 그의 영혼을 포옹하거나 덮어주는 것이다.

-미하일 바흐친

 

흔들리는 눈빛 연기가 힘들었다. 겹겹이 싸인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 답답했다. 상황 상황마다 감독님과 얘기하면서 감정선을 정리하고 이런저런 욕심을 버리고 눈빛으로 많이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캐릭터가 밋밋해질까 걱정도 하고…… 눈으로만 감정을 전달하는 게 힘드니까 나중에는 감독님께 못하겠다면서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배우 강동원 인터뷰 중에서

 

 

두 사람은 함께 살면서도 서로의 앞모습보다는 옆모습이나 뒷모습에 익숙하다. 자신의 표정을 숨기고 겹겹이 포장된 상대방의 내면을 읽어야 할 때가 많으므로. 옆모습과 뒷모습은 앞모습만큼 의식적인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앞모습에 신경을 쓰느라 옆모습과 뒷모습에서 흘러나오는 우리의 감정을 간수하지 못하곤 한다. 송지원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뒷모습의 쓸쓸함은 고스란히 이한규의 망막에 맺히고, 이한규가 미처 통제하지 못한 옆모습의 무력감은 고스란히 송지원의 눈동자에 맺힌다.

 

 

이한규: (자조 섞인 표정으로 체념한 듯이) 남의 돈 가져다가 내 행복 찾는 게 자본주의야.

송지원: 사장님은 남의 마누라나 찾아주는 게 행복합니까? 사장님은 사람들이 돈으로만 보이세요?

 

 

 

 

남편에게 구타당하다가 간신히 탈출한 필리핀 여인을 둘러싼 두 사람의 논쟁이다. 온수영. 그녀의 한국이름이다. 온수영을 그녀의 법적인 남편이 아닌, 그녀가 너무도 그리워한 친동생에게 데려다준 후. 그들은 격앙된 감정으로 몸싸움까지 벌이고 한참동안 티격태격 하다가 결국 그녀에게 걸린 몸값을 포기한다. “기준아. 그냥 가자.” 이한규가 필리핀 여인을, 아니 이제는 한국인이 된 온수영을 놓아주는 순간, 송지원의 굳은 얼굴에서는 오랜만에 해맑은 미소가 번진다. 둘은 이제 이전보다 한결 편안하게 서로의 앞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제 두 사람은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며 미행하고 도청하는 사이지만, 서로의 안부를 가장 먼저 걱정하는 사이가 되어버렸음을. 두 사람이 몸싸움을 하며 바닥을 뒹굴 수 있는 것 또한 따스하고 온화하게 친밀감을 표현할 수 없는 무뚝뚝한 남자들의 우정 표현법이 아닐까. 그들은 남편에게 구타당하다가 끝내 도망친 필리핀 여인의 모습에서, 힘겹지만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기 시작한 그녀의 모습에서, 그들이 오래전에 잊어버린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다. 그것은 상처 입은 사람만이 알아보는, 서로 닮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치명적인 흉터가 아니었을까.

 

 

 

 

다음날 아침, 난데없는 차례상이 조촐하게 차려져 있는 것을 보고 송지원은 놀란다. “다행히 마트가 문을 열었네. 늦었지만 차례 지내려고.” 이한규는 송지원에게도 예를 차리도록 하고 부모님의 지방까지 대신 써준다. “지방 쓸 줄 몰라? 어머니 성씨가 어떻게 되나? 안동 김씨?” 멋진 붓글씨로 지방을 척척 써내려가는 이한규의 옆모습을 보며 송지원은 든든함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낀다. 차례상 앞에서 절을 올리는 송지원의 서글픈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한규의 눈빛에서는 전에 없이 무섭도록 차분한 단호함이 스쳐간다.

 

그리고 마침내 송지원에게 고백하듯 뇌까린다. “요즘은 이북에서도 제사 지낸다지?” 송지원은 경악한다. ‘그림자가 건네주었던 주머니칼을 꺼내 이한규를 겨냥한다. 여전히 소름끼치도록 차분한 표정으로, 이한규는 말한다. “앉아라. 제사 지내는데 설마 잡아가기야 하겠냐?” 드디어 송지원의 굳게 닫은 에고의 빗장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노크로 열리는 순간이다.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왜 날 데리고 있었어? 왜 신고 안했어?”

 

 

나는 자신을 사랑하듯이 가까운 이를 사랑할 수 없으며, 더 정확하게는, 가까운 이를 사랑하듯이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만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보통 행하는 모든 행위들의 총합을 그에게 전이시키는 것뿐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83.

 

 

 

 

 

13. 나는 네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완전히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모든 의미는 미래의 어느 날에는 환영파티를 갖게 될 것이다.

-미하일 바흐친

 

 

이한규에게 칼을 겨눈 송지원의 눈에는 전에 없던 분노와 살기가 서린다. “왜 날 데리고 있었어? 왜 신고 안 했어?” 이한규는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번득이는 칼을 보고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한다. “너 하나 잡아서 뭐하겠냐? 잡으려면 간첩단 정도는 돼야지.” 가눌 수 없는 분노로 결국 송지원은 이한규의 팔에 상처를 내고 만다. “그래 요샌 나 같은 놈 잡으면 얼마 준답니까?” 이한규는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을 부여잡고도 평온한 표정으로 송지원을 진정시킨다. “모든 일이 잘되면, 우리 사업이나 제대로 키워보자.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대박 날 거야. 좋은 일 한번 해보자.”

 

 

 

 

이한규에게 자신을 해칠 의도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된 송지원은 절망과 분노와 회한,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참담함이 밀려드는 얼굴로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한다. “하던 절마저 해. 나도 너희 부모님께 절 한번 올릴게.” 송지원의 부모님께 절을 올리겠다는 이한규의 맑게 가라앉은 음성. 이것으로 지원의 평생을 가로지르던 견고한 에고의 빗장은 비로소 부서져버린다. 그의 삶에 처음으로 가족이나 이념이나 국가가 아닌, ‘타인의 존재가 스며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타자의 범주를 통해 바로 그의 고통으로 경험한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위로의 말과 도움의 손길이다.

-미하일 바흐친

 

 

 

 

그림자가 준 칼을 힘없이 던져버리는 송지원. 그의 눈 속에는 차마 마음 놓고 흐르지도 못하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다.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 슬퍼 보이지만 잠들어 있을 때조차 놓을 수 없었던 불안과 긴장의 끈이 풀려 어느 때보다 아름다워 보인다. 그의 눈 속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 만날 수 없는 가족과 버릴 수 없는 이념과 얼굴조차 모르는 딸과 먼저 간 동지들이 미처 다하지 못한 삶이 함께 고여 있는 것만 같다. 저 거대한 슬픔의 짐짝을 혼자 등에 지고 살아왔을 그의 인생이 새삼 눈부시다. 이제 두 사람 앞에는 완전히 새로운 미래가 펼쳐질 참이다. 둘 사이에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아닌,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밖에 없는 가장 가까운 타인을 향한 믿음이 태어난다.

 

그래, 나는 네가 아니다. 너도 내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아님의 뼈아픈 엇갈림 속에서 서로 조금은 닮았을지도 모를 나의 잃어버린 분신을, 너의 잃어버린 조각을 발견한다. 우리는 타인의 육체를 접촉함으로써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님을 확인한다.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육체를 통해 타인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출구를 발견한다. 송지원은 자신이 찌른 이한규의 팔뚝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보며 그 찢어진 팔만큼 쓰라리게 아파오는 자신의 마음속 파동을 감지한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흐느끼는 송지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한규 또한 마음속 깊이 무너지는 울음을 삼틴다. 송지원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과 이한규의 팔에서 흐르는 피는 같은 슬픔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영원처럼 긴 순간이 있다. 송지원이 흐느껴 우는 이 순간은 관객도 카메라도 문득 시간의 흐름을 잊고 싶다. 감독의 카메라는 별다른 기교 없이 오래도록 송지원의 두 눈을 관통하듯 묵묵히 그의 얼굴을 비춘다. 영화 속 인물들도,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도, 잠시 라는 존재의 경계를 잊는 순간이다. 너와 나의 존재를 가르는 선명한 경계를 잊는 순간, 우리의 마음이 타인의 존재를 향해 무한히 가까이 다가가는 점근선이 되는 순간. 이 순간만은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만 진정한 내가 존재함을 깨달을 때. 너의 삶이라는 프리즘에 비춰보아야 비로소 드러나는 나의 존재를. 나의 본질은 나에게 있지 않다. 너의 본질도 너에게 있지 않다. 내가 너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너는 비로소 너다울 수 있고, 네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일 수 있다.

 

 

사회적으로 조직된 집단들이 보다 우월하다는 명목으로 극단적인 개별성을 거부하는 여타 철학들과는 달리 바흐친의 철학은 개기인의 존엄성의 싹을 잘라내지 않는다. 바흐친의 대화주의는 우리 모두가 의미를 만드는 데 반드시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 인간이 그 자신 스스로에 대해서 그리고 서로서로에 대해서 책임의 구조학에 참여하고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이 세계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질서와 의미의 저자이며 창조자들인 것이다.

-K. 클라크·M.홀퀴스트 지음, 이득재·강수영 옮김, 바흐친, 문학세계사, 1993, 346.

 

 

 

 

 

14. 간신히 친구가 될 뻔하다가

 

 

변신은 개인의 삶 전체를 좀 더 중요한 위기의 순간 속에서 그려내는 방법의 토대가 된다. 그것은 한 개인이 어떻게 과거의 자신과 달라지게 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의 진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한 인간의 위기와 갱생만을 볼 뿐이다.

-바흐친, 소설의 시간 형식과 크로노토프 형식중에서

 

 

두 사람의 상처가 은밀하게 연대하는 이 순간. 이한규가 송지원으로 인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듯 송지원도 이한규의 시선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신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 순간. 뜻밖의 사건이 터지고 만다. 국정원 후배의 연락을 받고 급히 외출하는 이한규. 그를 송지원은 조용히 미행한다. 이한규가 달려간 병원 영안실에는 송지원의 친구 손태순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손태순 살해, 누가 봐도 그림자의 끔찍한 솜씨다. “, 살고 싶다…….” 그렇게 절규하던 친구의 목소리가 지원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다. 친구를 잃은 충격으로 망연자실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아 고개 숙인 송지원을 국정원 직원이 발견한다. “, 송지원 맞지?” 국정원 직원들은 송지원을 회유하여 그림자를 체포하려 한다.

 

 

 

 

송지원의 딱한 사정을 모두 침착해주겠다고, ‘그림자만 넘겨주면 너만은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국정원 직원들의 설득. 그러나 6년 동안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조직을 버리지 않았던 송지원에게 이런 논리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당신 눈엔 내가 그런 시시한 배신자로 보여?” 송지원은 단호하고, 이한규는 그 순간 부끄러움을 느낀다. 송지원과 국정원 직원들 사이의 숨 막히는 추격전이 시작되고 이한규의 눈빛에서는 안타까움과 함께 절박함이 스쳐간다. 아직 네 손목시계에 GPS가 달려 있다는 말을 해주지 못했는데…….

 

 

 

 

이한규는 국정원 후배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지원이 놔줘라. 지원이 그림자한테 사형선고 받은 애야. 지원이가 알아서 자수할 거야.” 후배는 이한규에게 항변한다. “그런 거 다 봐주면 간첩은 언제 잡습니까?” 후배의 눈빛에는 이한규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이 꿈틀거린다. 이제 이한규는 마지막 남은 국정원 후배의 신뢰까지도 잃을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지원을 살려야한다는 생각뿐이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되어버렸다. 다른 무엇보다도 다만 그의 안부가 중요해져버렸다.

 

 

 

 

도망친 송지원은 드디어 6년 만에 그림자와 접선에 성공하고, 그림자는 송지원의 스승이었던 통일문제연구소 지명훈 교수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필요하다면 전원 살해해도 좋다.” 다급해진 이한규는 지원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하지만 지원은 받지 않는다. 이한규가 송지원에게 남기는 음성 메시지. “왜 전화 안 받아, 지원아! 네 손목시계에 GPS 달려있어! 그 시계 버려!” 한편 송지원은 그림자의 명령을 받고 움직여야 하는 순간,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제 정말 마지막을 준비한다. 그는 오랫동안 가족들의 송환을 준비해왔던 사람에게 연락하여 가족들의 탈출을 부탁한다. “민 피디님. 저 때문에 가족들까지 위험해졌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꼭 진행시켜주세요.”

 

 

 

 

그림자의 살해 위협을 눈치 채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지명훈. 그림자는 지명훈을 추격하고 이한규는 송지원을 추격한다. 인근 건물 옥상으로 도망친 지명훈을 기어이 잡아 쓰러뜨린 그림자는 스승의 마지막 처리를 제자인 송지원에게 맡긴다. “조국이 네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마저 끝내라우.” 지명훈을 처리해야 하는 그 순간, 이한규가 나타난다. 이제 건물 옥상에는 마침내 가혹한 운명으로 얽힌 세 사람이 조우하게 된다. 그림자와 이한규는 오랜 숙적 관계였고 이한규는 그림자를 잡더라도 송지원은 반드시 풀어주려 한다. “시계부터 풀어! 왜 전화를 안 받아! 널 죽일지도 모르니까, 빨리 도망가!”

 

 

 

 

지원은 손목을 덥석 잡아 시계를 풀어 옥상 밑으로 던져버리는 이한규를, 그림자가 숨어서 몰래 지켜보고 있다. 그림자는 총구를 송지원 쪽으로 겨눈 채 이한규마저 처리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파도처럼 흔들리던 지원의 눈빛은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단호해진다. 그 순간 송지원의 칼은 이한규의 복부를 향해 정확하게 꽂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한규의 시야는 암전되고 송지원의 눈빛은 냉혹하게 번득인다. 간신히 친구가 될 뻔했던 두 사람은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차이의 늪을 건너가지 못하는 것일까.

 

 

임종 직전 바흐친은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청한다. 그것은 데카메론중에서 성자로 여겨졌으나 사실은 끔찍한 악당이었던 사람의 무덤가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 중에서 우리가 바흐친을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도망갈 길(loophole)은 어디엔가 항상 있다는 것, 삶은 예기치 않은 일들로 가득 찬 것, 혹은 신은 인간으로서의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바흐친, 344.

 

 

 

 

 

15. 나의 존재가 무한히 작아질수록 타인의 고독에 무한히 가까워질 수 있다

 

 

인간은 예술 속에 있을 때는 삶 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을 때는 예술 속에 있지 않다. (……) 내가 예술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에서 무위로 남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나 자신의 삶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은 죄과와도 결합되어 있다. 삶과 예술은 서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해 죄과도 떠맡아야 한다. (……) 무책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영감에 의지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삶을 무시하고, 그 자신이 삶에게 무시당하는 영감은 영감이 아니라 사로잡힘이다. (……) 삶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창조하는 것이 더 쉽고, 예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예술과 삶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안에서, 나의 책임을 통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26.

 

 

피를 뚝뚝 흘리며 쓰러진 이한규 곁에서 신음하던 지명훈은 묻는다. “당의 지시로 온 거냐? 누구의 지시로 온 거야?” 송지원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럼 이 모든 것이 당의 지시가 아닌 그림자의 단독 행동이었단 말인가. 그림자는 망설임 없이 지명훈에게 잔혹한 총질을 해대고 지명훈은 즉사한다. “변절자 새끼. 말이 많구먼.” 송지원은 그림자에게 항변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의 지시로 온 게 아니었습니까? 그럼 태순이도 그냥 동무가 죽인 겁니까?” ‘변절자를 처단하는 일은 당의 지시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그림자. 이제 그림자의 총구는 송지원을 향한다. “, 북에 있는 가족들 빼돌렸지?” 지원은 이성을 잃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제 가족은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됐을 것 같네?” 이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한규가 기적처럼 깨어난다.

 

 

 

 

이한규의 복부에서 흐르던 피는 실은 이한규의 피가 아니라 송지원의 피였다. 송지원은 이한규의 복부를 찌르는 척하면서 남몰래 자신의 손을 찌른 것이다. 아무도 다치게 할 수 없어 스스로를 난자한 송지원. 날카로운 자상(刺傷)을 입어 선혈이 뚝뚝 흐르는 지원의 손을 바라보며 이한규는 가슴이 시리다. “미련하긴.” 지원은 아픔조차 잊은 채 가족의 안부를 걱정한다. 그림자의 암시처럼 가족들이 잘못되었다면 이젠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져버린 지원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 그림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 잊은 표정이다. 이한규의 총구는 그림자에게, 그림자의 총구는 송지원에게 향해 있다. 송지원은 아예 그림자의 총구를 손으로 꽉 잡은 채 차라리 자신을 죽여버리라고 절규한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림자와의 몸싸움 끝에 지원은 그림자와 함께 건물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숨이 끊어질 듯 긴박한 상황에서 송지원은 자신을 껴안고 눈물 흘리는 이한규를 바라보며 유언처럼 속삭인다.

 

 

송지원: 저는……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이한규: 알아, 임마…….

 

 

송지원은 자신의 손바닥에 전해지는 날카로운 고통을 통해 스스로 이한규가 되었고, 이한규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끝까지 애쓰다 추락한 송지원을 바라보며 어느덧 자신의 분신이 되어버린 그의 고통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존재를 깡그리 부수어서라도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으려는 그의 몸부림을 읽어낸 것이다. 아무리 접근해도 영원히 닿지 않는 점근선 같았던 의 존재가 드디어 의 경계를 구성하는 단단한 이성의 각질을 뚫는 순간. 나의 존재가 무한히 작아질수록 나는 타인의 고독에 무한히 가까워질 수 있다. 영원히 나와 네가 일치할 수는 없지만 나의 존재는 너의 존재에 끊임없이 다가가는 몸부림 그 자체가 될 수는 있다.

 

 

 

 

 

16. 돌이킬 수 없는 차이로 인해 내가 더욱 풍요로워지는 그곳

 

 

송지원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가족을 되찾게 되고, ‘이한규의 동생 티가 팍팍 나는 새로운 이름 이상규도 갖게 되었다. 이한규가 영국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비행기 표를 선물하고는 자신도 몰래 그 비행기를 탄 이상규-송지원. 언뜻 보아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송지원이 아무리 이상규가 되어도 다가갈 수 없는 평범한 삶의 아득한 장벽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지만 남파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의 도 아니기에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게 된 송지원. 교육비는 물론 생활비 자체가 터무니없이 비싼 한국은 송지원 같은 무리 안의 디아스포라가 살기에는 너무 척박한 땅이 아닐까.

 

 

 

 

의형제자기 땅에서 디아스포라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21세기 판 오디세이다. 오디세우스는 돌아올 집과 든든한 삶의 토대가 있었지만, 송지원에게는 돌아갈 집은커녕 삶의 토대 전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스스로의 가난한 몸뚱이 자체가 늘 움직이는, 불안한 집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상황에도 아주 작은 희망의 틈새는 남아 있다. ‘싸구려 흥신소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한규의 회사 인터내셔널 테스크포스는 이한규뿐 아니라 이 메마른 디아스포라들의 기나긴 겨울 같은 삶을 끌어안는 따스한 요람이 되지 않을까. 이한규는 이미 엄청난 현상금이 걸린 라이다이한 출신 조폭을 늠름한 직원으로 고용한 상태다. 그러고 보면 이한규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죄인조차 자신의 가족으로 만드는 뛰어난 용병술의 대가다. ‘빨갱이 잡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잃어버린 사람 찾기로 자신의 직업을 바꾸어버린 이한규의 사람 찾기 프로젝트는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제 자리로 돌아오게 만드는 멋진 사업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바흐친이 말한 이질성의 언어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정해진 질서가 아닌 매번 새로 만들어지는 카니발의 언어로 거듭나는 그곳. ‘라는 존재가 영원히 종결되지 않고 타자를 향해 끝없이 열린 정체성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그곳. 육체와 육체, 문화와 문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사이, 그 모든 경계접촉지점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차이의 충돌을 이질성의 카니발로 만드는 지혜. 너와 나의 차이로 인해 너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돌이킬 수 없는 차이로 인해 내가 더욱 풍요로워지는 그곳. 바흐친의 말처럼, 타자를 향해 끊임없이 열려 있는 존재의 기원은 대화가 아닐까. 혼자 있을 때도 우리에겐 대화가 필요하다. 단지 동일성으로 수렴되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깃들어 이미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수많은 타자들과의, 소리 없이도 이미 왁자지껄한, 서로의 차이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수많은 그대들과의 대화가. 영원히 완결되지 않을 나를 향해 말을 거는 타자의 모든 의심과 비판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대화를 향한 창조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타자의 말은 내가 나의 말의 잠재력에 말을 걸 수 있게 한다. 내적 대화를 통해 생성되는 것은 아직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내 말의 잠재력이다. 나의 말도 타자에게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타자 또한 낯선 나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잠재력에 말을 걸게 될 것이다. 그가 나의 말을 향해 열려 있다면 말이다. 타자를 향해서 마음을 열었을 때 나와 타자는 모두 자신의 말에서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창조성을 발휘하게 된다. 진정한 대화는 그 자체가 창조를 부추기는 행위인 것이다. (……) 일상이란 매일 틀에 박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창조 행위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일상의 말과 행위는 그 자체로 나의 것이며 내가 내 말에 책임을 지는 한 나의 말은 언제나 창조적이다. 책임지는 자아, 창조하는 자아야말로 바흐친의 산문학에 거주하는 시민이다. 책임지는 자아, 창조적인 자아는 언제나 자기 말의 외부를 통해, 잉여를 통해, 타자를 통해 자신의 말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말에 대한 타자의 시험을 두려워하는 사회, 말에 대한 타자의 의심을 통과하지 않는 말을 내뱉는 사회, 그렇게 의심받지 않은 말이 지배하는 사회에 필요한 것이 대화다. 그런 뜻에서 바흐친은 다른 사람의 말에 응답하는 자신과 먼저 대화하기를 권한다.

-게리 솔 모슨·캐릴 에머슨 지음, 오문석 외 옮김, ‘옮긴이의 말중에서, 바흐친의 산문학, 책세상, 2006, 799~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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