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동양사, 1부 태어남 - 2장 인도가 있기까지, 굴러온 돌의 승리② 본문

카테고리 없음

종횡무진 동양사, 1부 태어남 - 2장 인도가 있기까지, 굴러온 돌의 승리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4. 09:40
728x90
반응형

굴러온 돌의 승리

 

 

인더스 문명에서 보듯이, 고대 인도는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리아인은 문명보다 무력에서 뛰어난 민족이었다. 유목민족이었으므로 정착 문명의 수준은 보잘것없었으나, 아리아인은 그 당시에 이미 철기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1500년경이라면 동서양 어느 곳에서도 철기시대가 도래하기 전이었다.

 

아리아인이 인도를 침입한 것은 단기간에 작정하고 이루어진 게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 지방에 들어와서 한동안 정착 생활을 했다. 여기서 농경 생활을 익힌 그들은 이윽고 유목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인도 중부 지역과 동부 갠지스 강 유역에까지 진출했다. 당연히 원주민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인도 원주민의 대표적인 부족은 드라비다인이었다. 그러나 양측의 싸움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오늘날의 서구인에게서 보듯이 우세한 체력 조건에다 철기를 지닌 막강한 유목민족 출신에게 작은 체구에 청동제 무기밖에 없는 농경민족은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원주민을 정복하고서 함께 어울려 잘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아리아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그들은 자신들의 우위를 아예 제도로 확립했다. 그것이 바로 악명 높은 카스트 제도다.

 

바로 그 무렵 중국에 존재한 은나라는 제사를 받들 때 언제나 은 왕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주변 부족들과 함께 공동으로 지냈다. 또 은의 뒤를 이은 주나라는 이민족 오랑캐를 정복하고 나서도 제후 자신이 직접 제사장을 맡아 토착민의 신을 받드는 제사를 올렸다. 토착민의 지역신은 사()였고, 농업신은 직()이었다. 이것이 후일 합쳐져서 한 왕조를 가리키는 사직(社稷)이라는 말이 되었다. 중국의 고대 왕들은 자기 조상을 받드는 종묘(宗廟)와 피정복민의 문화에서 비롯된 사직을 함께 지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이것이 곧 중화의 원리다).

 

그러나 아리아인은 피정복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카스트 제도로 노골적인 신분 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이리하여 인도는 단순한 신분제를 넘어 철저한 계급사회가 되었다. 더욱 불행한 일은 그 카스트 제도가 오늘날까지도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카스트는 모든 사람을 브라만(Brahman), 크샤트리아(Kshatriya), 바이(vaiya), 수드라(Sudra)의 네 가지 계급으로 구분했다(반드시 네 가지만은 아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브라만을 제외한 모든 계급을 수드라로 구분하기도 했다). 최고 신분인 브라만은 사제 계급으로 종교의식을 담당했고, 크샤트리아는 귀족과 정치적 지배층, 군인 계급이었으며, 바이샤는 농업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평민, 최하층 수드라는 노예 계급이었다. 이 가운데 상위 세 계급은 아리아인이었고, 원주민은 모조리 수드라였다. 즉 원주민의 최상층도 아리아인의 최하층만 못했으니 얼마나 철저한 차별 제도인지 알 수 있다.

 

 

 

 

물론 보편적 인권의 관념이 생겨난 근대 이전까지 모든 인류 사회는 신분제를 취했다. 하지만 고대 인도의 카스트 사회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일반적인 사회라면 당연히 정치와 군사의 지배층이 제1신분일 것이다. 하지만 인도의 최고 지배층은 사제 집단인 브라만이었고, 이들이 정치적 지배층인 크샤트리아를 통제했다. 이점은 고대 인도가 종교 사회였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고대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인도에서 종교란 단순히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아리아인의 이동 경로.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가 고향인 아리아인은 일찍부터 철제 무기를 가졌던 수수께끼의 민족이다. 이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서쪽의 유럽으로 이동했고, 다른 하나는 남쪽의 인도 북서부 펀자브로 왔다. 서쪽으로 간 아리아인은 터키를 지난 다음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까지 남하해 그리스의 원주민들과 어울려 미케네 문명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 전 12세기에 미케네 문명을 파괴한 도리스인도 아리아인의 후예일 것으로 추측된다. 까마득한 고대에도, 느리기는 하지만 대규모 민족이동이 있었고 동서 교류도 있었다.

 

 

인용

목차

연표

십팔사략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