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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3부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최후의 전성기: 급변하는 만주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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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3부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최후의 전성기: 급변하는 만주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8.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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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만주

 

 

명에 있어 만주는 변방에도 포함되지 않는 그 바깥이었고,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제압의 대상일 뿐이었다. 당시 만주의 주인인 만주족(여진족)에게 명은 관작도 주고 조공 무역도 허락하는 등 북변을 침범하지 않도록 무마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정책이 계속 약효를 지니려면 명의 힘이 강해야 했으나 명이 쇠약해지면서 만주에는 서서히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1588년 만주족의 영웅 누르하치(Nurhachu, 1559~1626)는 만주 일대를 통일했다. 이후에도 계속 세력을 확장하더니 1616년에는 칸(후금 태조)을 자칭했다. 수도는 남만주의 선양이었고, 국호는 300여년 전 조상들이 세운 강국 금을 좇아 후금(後金)으로 정했다. 누르하치는 국호만이 아니라 북중국을 지배한 조상들의 역사까지 재현하려 했다.

 

후금이 랴오둥에서 랴오허를 건너 랴오시까지 진출하자 아무리 쇠락해가는 명이라 해도 더 이상 두고 볼 입장이 아니었다. 정부는 후금을 저지하기 위해 다급히 군대를 파견했다. 그래서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명의 주력군은 만주 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누르하치는 새 제국의 기틀을 세우고 전장에서 얻은 부상으로 죽었지만, 그의 야망은 그에 못지않게 유능한 아들에게로 이어졌다. 칸위를 물려받은 홍타이지(태종, 1592~1643)는 아직 재야 세력인 후금을 본격적인 수권 정당으로 탈바꿈시킨 인물이다. 그는 우선 투항해온 한인들을 중용해 중국의 6부제를 도입하는 등 후금을 중국식 전제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1627년과 1636년 두 차례에 걸친 조선 정벌(정묘호란과 병자호란)로 후방을 다지는 동시에 중국 정복을 위한 재정을 확보했다. 마지막으로 1636년에 그는 국호를 중국식 대청(大淸)으로 고쳐 드디어 대권을 위한 포석을 완료했다.

 

한편 이자성이 베이징을 장악하는 바람에 만주로 파견된 명의 군대는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총사령관인 오삼계(吳三桂, 1612~1678)는 베이징과 선양 사이의 요충지인 산하이관에 머물면서 사태를 관망했다. 떠날 땐 정부군이었는데 돌아갈 땐 반란군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아예 진짜 반란군이 되자. 그는 차라리 청에 항복해 이자성의 반란군을 진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무렵에는 청 태종이 사망하고 그의 아홉째 아들인 세조(世祖, 1638~1661)가 제위를 이은 상태였다. 황제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이었으므로 삼촌인 도르곤(1612~1650)이 섭정이자 실권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도르곤은 오삼계에게 후한 대가를 약속하고 그의 안내를 받아 손쉽게 입관했다(만주에서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것은 산하이관을 통과한다는 의미에서 입관入關이라고 불렀다). 곧이어 1644년에 청은 이자성을 물리치고 꿈에도 그리던 베이징에 입성했다.

 

 

정복 군주의 양면 누르하치를 칭기즈 칸에 비유한다면 청 태종은 오고타이나 쿠빌라이에 비유할 수 있다. 대외적인 정복 활동과 대내적인 전제정치 확립을 통해 후금을 대청 제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임진왜란에 버금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킨 인물로 악명이 높다.

 

 

인용

목차

연표

십팔사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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