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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3부 통일의 바람 - 3장 통일의 무대, 두 번째 멸망(흑치상지)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3장 통일의 무대, 두 번째 멸망(흑치상지)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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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멸망

 

 

호가호위(狐假虎威)라 했던가? 항복한 부여융에게 더 가혹하게 군 사람은 실제 정복자인 소정방이 아니라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金法敏)이었다. 승자인 신라의 왕자는 패자인 백제의 왕자를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는데, 놀라운 것은 그의 발언이다. “20년 전에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원통하게 죽인 일이 있는데, 이제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말할 것도 없이 그는 642년의 대야성 전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항복을 받은 뒤 첫 마디가 20년 전의 이야기라면 김춘추 부자가 백제에 얼마나 큰 사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김법민은 정복자가 아니므로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 부여융의 목숨까지 빼앗을 권리는 없다. 따라서 그는 따로 화풀이 대상을 찾는데, 백제군 포로 중에는 바로 대야성에서 백제에 투항한 검일이 있었다. 김법민은 검일을 죽이고 사지를 찢어 강물에 던져 버림으로써 다소나마 원한을 달랜다.

 

하지만 부여융이 당한 수모는 아버지가 겪은 굴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의자왕(義慈王)은 승리 축하연에서 소정방과 김춘추에게 술을 따라야 했다(그 광경을 보고 백제의 뭇 신하들이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런 굴욕을 당한 뒤 의자왕은 곧바로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압송되었다가 얼마 못 가 죽었다.

 

그러나 왕실은 사라졌어도 나라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주장한 무리들이 있었다. 백제는 중앙집권적 국가면서도 지방자치제의 성격을 가진 담로(擔魯)의 전통이 있었으므로 도읍과 왕실을 잃었어도 지방 세력들은 건재했다담로는 성()이라는 뜻의 백제어로서, 백제의 지방 지배 조직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백제의 강역이 크게 확장된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지방 지배를 위해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측 사서인 양서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22개의 담로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백제의 성곽들 중에서 요처에 위치해 있거나 도시를 이룰 만큼 주민이 많은 곳이 담로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담로는 중앙정부의 관할을 받았지만 비교적 자치의 폭이 넓었다. 그래서 일부 역사가들은 담로를 일종의 봉건 영지로 보기도 하는데,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왕권을 강화시킨 성왕(聖王) 때 담로가 약화된 것을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다.

 

소정방은 신속하게 백제의 영토를 다섯 개의 도독부로 나누고 점령지 지배를 위한 일종의 군정청을 설치한 다음 귀국했으나, 그는 20세기 중반 한반도에서 미군정청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가 현지 정치세력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라는 걸 몰랐다(해방 직후 남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미 군정청에 온갖 추파를 던졌다). 백제의 지방 지도자들은 당 군정청의 권위를 무시하고 방금 역사의 뒷장으로 넘겨진 왕조를 부흥시키고자 한다.

 

그들의 리더로 떠오른 인물은 무왕(武王)의 조카인 복신(福信)이었다. 일단 그는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지금의 서천 부근)을 근거지로 부활의 기치를 높이 세운다. 그에게는 두 가지 시급한 과제가 있다. 하나는 외부의 지원을 끌어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 왕을 옹립하는 문제다. 마침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는 수단은 한 가지다. 일찍이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의자왕(義慈王)의 또 다른 아들인 부여풍(扶餘豊)을 왕으로 맞아들이면 자연히 일본의 지원군도 따라오게 될 것이다. 태자의 신분도 못 되었던 부여풍은 위기의 조국을 재건한다는 명분에다. 왕위계승까지 선물로 받았으니 당연히 대환영이다.

 

 

 

 

일본에서 출발할 새 왕에게 또 다른 선물을 주기 위해설까? 아니면 오히려 부여풍을 이름만의 왕으로 제한하려는 예비 공작일까? 자신을 얻은 복신은 수도 탈환을 계획한다. 이미 백제의 유민들이 속속들이 합류해 오면서 백제 부흥군은 3만의 병력으로 늘어났다. 한편 당과 신라 입장에서는 사비성까지 내주면 그동안 공들인 백제 정벌 자체가 수포로 돌아갈 터이다. 그래서 웅진도독(‘당 군정청의 장관격이다)인 유인궤(劉仁軌)는 일단 다른 곳들은 제쳐두고 전 병력을 당의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사비성으로 집결시켜 방어에 나선다. 이쯤 되면 누가 정벌군이고 누가 방어군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은 도성을 포위하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함락시킬 힘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유인궤가 이끄는 지원군이 후방을 공략하자 사비성 탈환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이동해 임존성(지금의 예산 부근)으로 갔다. 마침 임존성은 백제의 달솔이었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근거지로 삼고 이미 독자적인 부흥 운동을 벌이고 있는 곳이었다.

 

비록 옛 도성을 수복하지는 못했지만 이제 부흥군은 옛 백제의 북서 방면에 자리잡고 200여 개의 성을 장악함으로써 반란군이 아니라 어엿한 정부군이 되었다. 게다가 662년에는 드디어 부여풍이 170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일본에서 금의환향했다. 백제가 부활했다! 그런 자신감에서 도침은 유인궤가 보낸 사신을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돌려보내는 여유까지 보인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다. 부활한 백제가 어느 정도 자리잡았다 싶더니 곧바로 권력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복신은 도침이 왕처럼 구는 게 영 못마땅하다. 게다가 그는 도침과 달리 유인궤와 타협해야만 부활한 백제가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사적인 권력욕이 명분과 손을 잡자 그는 거리낌없이 동지였던 도침을 살해한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완전히 잘못이었다.

 

애시당초 백제에게 겁을 주고 복속시키는 선에서 만족할 심산이었다면 굳이 13만의 당나라 대군이 황해를 건너올 필요도 없었다. 즉 그들의 임무는 백제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까지 부흥군에게 당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라측과 연결된 보급로가 끊겼기 때문이었다(백제 부흥 세력은 백제의 북서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복신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에 보급로의 요지인 진현성(眞峴城)의 수비를 보강했으나 이미 그의 마음 속에 뚫려 있는 허점까지 보강하지는 못했다. 유인궤는 집요한 공격으로 진현성을 함락시켜 마침내 군량 보급로를 확보했다. 이제는 역공에 나설 차례다.

 

자신의 판단미스로 결정적인 실패를 겪고서도 복신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될 것만을 걱정한다. 그래서 그는 병이 든 것처럼 가장하고 대권 도전자인 부여풍(명목상으로는 대권 소유자였지만)이 문병을 오면 죽일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속셈을 알아챈 부여풍이 오히려 선수를 쳐서 복신을 죽이고 이름만의 왕에서 벗어난다. 이래저래 백제의 부활은 물거품이 될 조짐이 짙어졌다.

 

당군이 총공세로 나오자 부여풍은 고구려와 일본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으나 구원투수는 마운드에 오르기도 전에 가로막혀 버렸다. 믿을 것은 오로지 일본에서 온 400척의 함선이었는데, 그들 역시 백강 하구에서 당군의 공격을 받아 모조리 침몰해 버린 것이다(삼국사기에는 당시 하늘과 바닷물이 모두 빨개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쓸 수 있는 카드를 모두 쓴 부여풍은 도망쳤으며(이후 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3년 만에 또 다시 왕을 잃은 부흥군은 이제 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약삭빠른 흑치상지는 홀로 남은 임존성(任存城)을 지킬 자신도 없고 또 지켜봤자 얼마 못 가리라는 판단에서 당군에 투항했고, 홀로 남은 임존성에 홀로 남아 저항하던 지수신(遲受信)은 동료인 흑치상지가 공격해 오자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렇게 해서 663년에 백제는 다시 한번 멸망하는 얄궂은 운명을 겪었다.

 

 

영욕의 산성 700년에 가까운 백제의 사직은 왕실이 항복했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사진은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항전 장소였던 충남 예산의 임존성이다. 흑치상지가 거병했고, 나중에는 배반한 흑치상지를 맞아 지수신이 항거했던 이곳은 백제의 영욕을 상징하듯이 지금은 풀만 무성하고 성곽의 흔적만 남아 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시나리오1 약한 고리 끊기

두 번째 멸망

시나리오2 사슬을 해체한다

삼국에서 일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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