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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통일의 바람 - 3장 통일의 무대, 시나리오 2 사슬을 해체한다(설인귀, 방효태)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3장 통일의 무대, 시나리오 2 사슬을 해체한다(설인귀, 방효태)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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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나리오 2 사슬을 해체한다

 

 

김춘추 부자는 의자왕(義慈王)이 따르는 술을 마시고 매국노를 잡아죽인 것에 만족할 수 있었으나 소정방은 달랐다. 신라에게는 백제가 사슬이지만 당나라에게는 한반도 전체가 사슬이므로 백제는 그 하나의 고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소정방은 또 하나의 더 튼튼한 고리를 끊어야 사슬을 완전히 해체할 수 있었다. 그래서 6608월 그는 의자왕의 술을 마시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우선 의자왕과 왕자들을 비롯하여 88명에 이르는 백제의 대신들과 장군들, 게다가 무려 12807명의 백제 백성들까지 장안으로 압송한 다음에 소정방은 곧바로 고구려 공략 작전으로 들어갔다. 그 해 11월에 고구려 원정군이 출발했으니 그는 가히 초인적인 체력의 소유자였던 듯하다(게다가 당시 그는 65세의 노인이었다).

 

영웅의 시대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소정방이 지휘하는 원정군을 맞아 다시 위기에 처한 고구려를 구한 사람은 고구려의 늙은 영웅 연개소문이다. 6618월 당의 노슈퍼맨이 대동강으로 들어와 평양을 포위하자 고구려의 노영웅은 긴급히 수성에 나서는 한편 맡아 들인 연남생을 보내 압록강 쪽에서 오는 당군을 막게 했다. 그러나 역시 영웅의 유전자라는 건 없는 모양이다. 못난 아들은 3만이나 되는 병력을 죽이고 제 몸만 살아 돌아온다. 결국 이듬해 1월에 연개소문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방효태(龐孝太)가 이끄는 당군과 일대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면서 당의 기세를 꺾었다. 때마침 내린 폭설에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이 철군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고구려는 위기에서 벗어났다고구려 원정에서 당과 신라의 분업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백제 정벌 때는 그런 대로 전투 역할도 수행했던 신라는 고구려 정벌에서는 완전히 보급부대로 전락했다. 당은 원정군이 출발하기 직전에 신라에 명을 내려 군량을 평양으로 수송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보급대장이 김유신이다. 그는 2천 대의 수레에 쌀 26천 석을 싣고 북행길에 올랐는데, 황해도 남부에서 폭설을 만났다. 결국 그 자신은 평양까지 가지 못하고 부하들을 시켜 군랑을 소정방에게 전달했으나, 역시 폭설로 고생하고 있던 소정방은 보급품을 받자마자 평양성에서 철수했으니 헛수고가 되어 버렸다. 신라 최고의 장수가 보급대의 지휘관을 맡았다면, 당시 당과 신라의 분업 구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50년 전 수 양제의 침략부터 셈하면 무려 몇 차례의 선방일까? 그러나 한 사람의 최종 수비수에 국운을 맡기고 있다는 데서 아무래도 고구려의 운명은 오래 가지 못할 조짐이 충분하다.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고 맏이인 연남생이 대막리지를 계승하자 그 조짐은 순식간에 현실화된다. 가장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집안은 그 가장이 사라지고 나면 오히려 더 빨리 해체되게 마련이다. 못난 맏아들 남생은 두 동생(남산과 남건)이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역시 못난 두 동생은 형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눈치를 챈 형은 어이없게도 당나라로 도망쳐 도움을 호소한다. 500년 전 동생 산상왕(山上王)에게 쫓겨나 랴오둥으로 도망친 발기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장면, 과연 발기가 그랬듯 남생도 당 고종이 내리는 직함을 받고 오히려 조국을 정벌하기 위한 전쟁에 한몫 거들게 된다.

 

문제는 500년 전과 달리 중국의 원정군은 그 옛날 공손탁의 랴오둥군 수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66612월 당 고종(아마도 측천무후가 아니었을까?)은 다시 고구려 원정을 명한다. 과연 이번 원정은 과거 그 어느 때와도 다르다. 우선 신라를 완전히 복속시킨 데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부흥 세력까지도 완전히 제거했으므로 적은 고구려 하나밖에 없다. 이번 원정을 고구려 원정의 최종판, 나아가 한반도 정복의 최종 사업으로 삼겠다는 각오는 총사령관의 임명에서도 보인다. 원정군 총사령관은 일찍이 당을 건국하는 데서도 일등 공신이었으며, 대적인 돌궐을 물리쳤고, 20년 전에도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던 이적이라는 인물이었다. 비록 팔십 노구의 몸이었으나, 경력에서나 경험에서나 슈퍼맨 소정방보다 한 급 위의 하이퍼맨이다.

 

 

 

 

과연 이적은 초장부터 전술 운용에서 한 수 위의 기량을 과시한다. 과거의 원정들이 모두 실패한 이유는 랴오둥을 방기하고 조급히 압록강을 건넜기 때문이라고 본 그는, 시일이 걸리더라도 랴오둥을 완전히 정복하고 나서 고구려 본토로 치고 들어가겠다는 기본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랴오둥의 판세를 읽은 다음 요처인 신성을 함락시키는 데 전력을 집중한다. 이적의 명성과 당의 대군에 겁을 먹은 성주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여 서전(緖戰)은 손쉽게 승리한다. 게다가 신성이 함락되자 인근 16개의 고구려 성이 와르르 무너지니 부수입도 짭짤하다. 하지만 이적은 서둘지 않는다. 667년 한 해 내내 그는 랴오둥을 차근차근 먹어들어 가면서도 압록강을 건너려고는 시도하지도 않았다.

 

고구려에게는 불행한 일이나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비록 졸은 아니지만 이적의 휘하에는 설인귀(薛仁貴)라는 또 다른 명장이 있었다. 신성으로 급파된 고구려 지원군을 거뜬히 물리쳐 첫 전공을 세운 그는 곧이어 5만의 고구려 대군을 몰살시키고 여러 성을 빼앗았으며, 이듬해인 6682월에는 고구려의 마지막 보루였던 부여성(현재 중국 지린성의 눙안)마저 함락시켰다. 그것을 계기로 40여 성이 항복하면서 압록강 이북은 완전히 당나라의 수중으로 넘어갔다설인귀는 불과 3천 명의 병력으로 부여성을 공략했는데, 당시 다른 지휘관들이 중과부적이라며 말렸으나 병력의 규모가 아니라 어떻게 병력을 운용하는가가 중요하다면서 작전을 전개했다. 공교롭게도 고구려 정복의 선봉장이었던 설인귀는 후대에 중국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큰 인기를 누린다. 우리 무속 신앙에서 산신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현재 경기도 양주의 감악산의 산신이 바로 설인귀다.

 

이제 압록강을 건너 며칠만 행군하면 평양, 그러나 고구려의 명맥을 완전히 틀어쥐고서도 이적은 여전히 조급하게 굴지 않고 전군이 압록강 북변에 모일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최종적으로 평양성을 점령한 것은 6689월이었으니, 그는 그때까지 7개월에 걸쳐 천천히 남하하는 압박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도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한 달 가량 버티던 보장왕은 결국 연남산을 보내 이적 앞에 항복의 뜻을 표시하게 했다. 이것으로 당의 동아시아 통일 전략은 완수되었고, 고구려는 705년의 사직을 뒤로 한 채 역사의 무대에서 공식적으로 퇴장했다부여성이 함락된 직후 당 고종은 전선에서 온 특파원에게서 전황 보고를 받는데, 그 내용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특파원은 필승의 이유로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고구려에 허점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연개소문 사후에 고구려의 정정이 불안정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이유로 특파원은 고구려의 비밀 기록을 근거로 든다. 그게 어떤 문헌인지 알 수 없으나 그에 따르면 고구려 역사는 900년을 넘지 못하며 팔순 노장의 손에 의해 멸망한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팔순 노장은 물론 이적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900년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주몽이 나라를 세운 것은 기원전 37년으로 이에 따라 고구려의 공식 역사는 705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비록 900년을 넘지 못한다고는 했지만 705년과 900년은 격차가 크다. 그렇다면 중국은 김부식과 달리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이전에 성립한 국가라고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김부식(金富軾)은 고구려의 탄생을 박혁거세보다 이르게 잡고 싶지 않았을 테고.

 

 

베스트셀러의 주인공 당의 장수 설인귀는 조선시대까지도 큰 인기와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전기를 다룬 중국 소설 번역본 설인귀전은 18세기 조선의 베스트셀러였다. 중국의 장군이 어떻게 한반도에서 신격화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동국여지승람에 신라가 설인귀를 감악산의 산신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 신라 정부가 설인귀를 무척 존경했던 듯하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시나리오1 약한 고리 끊기

두 번째 멸망

시나리오2 사슬을 해체한다

삼국에서 일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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