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를 끈 쿠데타②
왕과 군신의 행차에 호위 병력이 없을 수 없다. 전쟁과 내전의 시대가 지나자 군대의 가장 주요한 임무가 그런 행사를 호위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 런데 일행이 나들이의 중간 휴식처인 흥왕사를 향할 즈음, 그렇잖아도 손대면 터질 것만 같은 군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터졌다. 의종의 명으로 호위병들은 수박(手搏, 태껸과 비슷한 전통 무예인데 태껸이 주로 발을 쓰는 데 비해 수박은 손을 쓴다) 시범을 보였는데, 여기서 그만 예순 살의 노장 이소응(李紹膺, 1111 ~ 80)이 젊은 병사와 겨루다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한뢰(韓賴)라는 젊은 문신이 그의 뺨을 치며 놀려댄 것이다. 일단 분을 참고 흥왕사에 도착한 호위대장 정중부(鄭仲夫, 1106 ~79)는 즉각 이의방(李義方, ? ~ 1174), 이고(李高, ? ~ 1171) 등의 부하들을 불러 거사를 지시했다【사실 정중부는 개인적으로도 이미 오래 전부터 문신들의 처사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천민 출신으로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군직에서 성공한 그는 인종때 김돈중(金敦中)이라는 젊은 문신에게서 수염을 촛불에 그을리는 수모를 당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삼십대 후반이었던 정중부는 참지 못하고 김돈중을 기둥에 묶어놓고 겁을 주었는데, 오히려 그 사건으로 꾸지람만 듣는다. 그도 그럴 것이 김돈중은 인종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당대 최고 실력자인 김부식(金富軾)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인종의 중재로 벌은 간신히 면했으나 정중부로서는 결코 잊지 못할 치욕이었다. 1167년에도 김돈중은 의종이 행차할 때 한 호위병의 화살이 잘못해서 왕이 탄 수레에 맞는 사건이 일어나자 길길이 날뛰어 많은 무신들을 귀양보낸 일이 있었다. 이래저래 무신들에게 미운 털이 박힌 그는 결국 1170년 무신난이 일어나자 도망치다가 잡혀 죽었는데,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화를 당했으니 나의 죽음은 당연하다”는 말을 남겼다】.
보현원에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반란군으로 돌변했고, 놀이터는 도살장으로 바뀌었다. 정중부 일당은 문신과 환관 수십 명을 살해한 다음 놀이터 연못 속에 시신들을 던져 버렸다. 즐거운 놀이를 기대했던 문신들이 오히려 무신들의 놀잇감이 되어 버린 격이랄까? 우연하고도 사소한 계기였으나 일단 사건이 터지자 무신들은 군인 특유의 기동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즉각 개경으로 가서 나머지 문신들을 싹쓸이한 정중부 일당은 의종을 거제도로, 태자를 진도로 멀리 유배를 보내 버린 다음 의종의 동생인 익양공(翼陽公)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그가 바로 무신들이 세운 최초의 허수아비 왕인 명종(明宗, 재위 1170 ~ 97)이다(명종은 형 의종에게 자기 궁을 빼앗긴 일이 있었으니 내심으로는 그 사태가 반가웠을 것이다).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한 다음 반대파를 숙청하고 허수아비를 왕으로 세운다. 이건 우리 현대사에서도 익숙한 군사쿠데타의 전형적인 공식이다. 다만 ‘왕위’를 직접 노렸던 현대사의 쿠데타와는 달리 12세기 고려에서는 쿠데타 세력이 직접 왕위를 차지하지 않은 것을 보면 고려의 군부는 왕실의 상징적인 지위만큼은 무시하지 않았다고 할까【반란이 일어났어도 왕실 자체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고려가 유교 왕국화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권의 조선시대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유교왕국에서는 그 생리상 실권자와 상징적 권력자(국왕)가 분리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없는 문신의 사소한 손찌검에서 시작된 무신정권 시대가 이후로 100년이나 지속될 줄은 당시 어느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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