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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새 역사의 출발점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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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새 역사의 출발점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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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역사의 출발점

 

 

신생국 고구려가 차츰 안정을 찾아갈 무렵인 기원전 19, 고구려 왕궁으로 느닷없이 한 젊은이가 찾아온다. 그는 바로 주몽이 부여에 두고 온 예씨 부인의 아들 유리였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헤어진 탓에 정표로 남겨둔 부러진 칼을 맞춰보고서야 아들임을 확신한 주몽은 즉각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덕분에 비류와 온조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유리가 주몽의 적자라지만 비류 형제가 주몽의 친자였다면 20년 가까이 지나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찾아온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는 일이 가능했을까? 더구나 형제의 어머니 소서노는 고구려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지 않았는가?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는 데는 모르긴 몰라도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승자는 주몽과 유리 부자다. 비류와 온조는 굴러온 돌에 뽑힌 채 고구려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어머니 소서노까지 동반한 채 따르는 무리와 함께 남행열차를 타야 했으니까. 이들은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거리를 행군해서 지금의 한강 하류, 바로 서울이 있는 곳에 이른다. 큰 강을 눈앞에 둔 곳에서 형제는 의견이 엇갈렸다. 형 비류는 강을 건너 더 하류로 갈 것을 주장했고, 동생 온조는 지금 이 자리가 좋다고 맞섰다. 당시 그 일대는 낙랑과 말갈이 강성했고 마한에 속하는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던 곳, 따라서 비류는 위험을 걱정했을 테고 온조는 산자락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강이 휘감아 돌아가는 오늘날 서울 광진구 아차산 일대의 지세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어머니 소서노는 둘째 아들의 편을 들었다. 결국 비류는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자기 뜻대로 서쪽 미추홀(인천)로 가서 나라를 세웠고, 온조는 그 자리에 십제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백제다전하는 바에 따르면 온조는 원래 신하 10명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으로 국호를 십제라고 지었다가 나중에 백제로 고쳤다고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인천으로 간 비류가 결국 나라를 세우는 데 실패하고 돌아온 뒤부터 백제라고 고쳤다는 주장도 있고, 온조가 한강을 건너 오늘날 서울 송파구로 간 뒤 백제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당시 마한 연합국 내에는 백제라는 나라가 있었으므로 아마 이 세력과 연합하면서 이름을 바꾸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인천으로 간 비류에 관해서도 이설이 있다. 그가 세운 나라가 온조의 백제와 연맹을 이루면서 상당 기간 존속하다가 나중에 살림을 합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모두 며느리도 모를 이야기들이지만, 당시에 국가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고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쟁점은 박혁거세의 경우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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