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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 9. 한시 문학의 종장 본문

책/한시(漢詩)

한국한시사 - 9. 한시 문학의 종장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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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시(漢詩) 문학(文學)의 종장(終章)

 

 

1. 한말(韓末)의 사대가(四大家)

 

 

구한말(舊韓末)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대에 이르는 4,50년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전의 전통시대와 그 이후의 일제 식민지 시대와의 불연속상에 놓인 불행한 시기였으며 또한 전통질서의 극복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탈을 부정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이 주어진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과정에서 지성인들의 대응 방식은 크게 개화(開化), 위정척사(衛正斥邪), 동학(東學) 등의 상이한 활동을 통해 민족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문학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당위는 그대로 표출되었다. 1890년대의 독립신문(獨立新聞)(1896)이나 황성신문(皇城新聞)(1898)에 게재된 초기의 일부 국문시가와 일본에서 직수입한 신소설과 같은 산문에는, 개화라는 시대의지가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반면, 재야(在野)사림(士林) 또는 우국지사(憂國志士)의 한시문(漢詩文)이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에 게재된 우국경시가(憂國警時歌)등에는 척외적(斥外的)인 시대의지가 줄기차게 나타나 있고, 동학(東學)의 이념을 담은 동학가사(東學歌辭)에 종교적 이념과 함께 민족 자주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한편 전통시대의 한국문학의 주류를 담당해 온 한시문학은 구한말에 들어 그 종장을 장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서구라는 이질적인 충격에 의하여 대두된 개화(開化)’라는 새로운 시대의지가 끝내는 망국으로 치달아야 했던 역사적 모순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이 시기의 문인들이 담당하여야 할 시대사적 임무는, 망국이라는 역사적 모순을 극복해야만 하는 민족적인 노력으로 집약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의 문학은 쉽사리 우국문학(憂國文學)으로 변신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를 대표할 수 있는 문인으로는, ()에 있어서 추금(秋琴) 강위(姜瑋)ㆍ단농(丹農) 이건초(李建初)ㆍ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ㆍ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ㆍ매천(梅泉) 황현(黃玹) 등을 들 수 있으며 문()으로는 미산(眉山) 한 장석(韓章錫)을 비롯하여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ㆍ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그리고 시문(詩文)에 양미(兩美)한 인물로는 영재(寧齋)창강(滄江)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는 추금(秋琴)과 같이 타고난 신분질서의 굴레 때문에 벼슬이나 영예와 같은 거 추장스러운 영광은 염두에 두지도 못하고, 빼어난 재주로 인하여 일본 및 청나라로 이끌려 다니면서 개화의 물결 속에서 일생을 보내야만 했던 시인이 있었는가 하면, 운양(雲養)과 같이 그 생의 대부분을 묘당(廟堂)에 바치고서도 변전무쌍(變轉無雙)한 일생을 파란만장으로 엮어가야만 했던 문인도 있었다. 그러나 추금(秋琴)이나 운양(雲養)의 경우를 예외로 한다면 이들은 거개가 선비로서의 매서운 절조를 닦아 그 생의 대부분을 문학수업에 바친 시인이요 문인이었다. 즉 구한말의 문인ㆍ절사(節士)들은 전통적인 사장학(詞章學)의 전통 속에서 시부(詩賦)와 문장을 수련하고 추구하였던 이들이지만, 망국의 불행한 상황이 그들의 의식을 우국경시(憂國警時)의 충정(衷情)으로 몰아가곤 했던 것이다.

 

 

 

강위(姜瑋, 1820 순조20~1884 고종21, 仲武堯章韋玉, 秋琴慈屺聽秋閣古懁堂)

의 가계는 조선중기 이후 문관직과 멀어지기 시작하여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무반신분(武班身分)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는 벼슬이 차단된 신분적 한계로 말미암아 일찍이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잠시 과거에 뜻을 두고 공부할 시절에는 영의정을 지냈던 정원용(鄭元容)의 집에 기숙하며 그의 손자였던 건조(健朝)와 함께 수학하였다. 또한 당시 이단으로 지목받던 민노행(閔魯行)을 찾아가 4년간 수학하였으며, 민노행의 유언에 따라 제주도에 귀양가 있던 김정희(金正喜)에게도 5년 남짓을 배웠다. 그러나 민노행과 김정희(金正喜)는 모두 고증학에 매료된 대가였으므로, 강위도 또한 고증학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김정희(金正喜)가 북청(北淸)의 귀양에서 풀려난 뒤 강위는 방랑생활로 들어갔지만, 그의 시명은 오히려 날로 높아져서 당시 문인들 가운데서 성가(聲價)를 드날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1862년에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민란의 소용돌이에서 탈출한 이후 경사로 되돌아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된 것이 국운의 고비고비에서 남다른 고뇌를 맛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강위(姜瑋)1873~1874년에 걸친 두 번의 중국여행을 통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국제정세를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적극적인 개항론자가 되었다. 1862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 전권대신이었던 신헌(申櫶)을 막후에서 보좌하였으며, 1880년에는 서기(書記) 자격으로 일본 수신사인 김홍집(金弘集)을 수행하였고, 귀국 후 황준헌(黃遵憲)조선책략(朝鮮策略)에서 제시했던 연미거아정책(聯美拒俄政策)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그는 끝내 개화의 역정 속에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그의 친구인 방치요(房致堯)에 의하여 그의 유고(遺稿) 고환당집(古懁堂集)을 남기었다.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이 스스로 강위의 시제자(詩弟子)라 밝힌 바와 같이 강위의 시()는 한말의 창강(滄江)영재(寧齋)매천(梅泉) 등 한말 시인들의 시풍을 열어주는 데 기여한 바 크다

 

 

그는 이건창(李建昌)의 추천에 힘입어 김택영(金澤榮)황현(黃玹)과 함께 한말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히었거니와, 비분과 강개가 서린 격조 높은 율시를 많이 남겼다. 그는 그의 문집 외에도 동문자모분해(東文子母分解), 용학해(庸學解), 손무자주평(孫武子注評)등의 저서를 남기었으며 그의 시작(詩作) 중에는 대동시선(大東詩選)통제영(統制營), 수춘도중(壽春道中), 도중문안유감(道中聞雁有感)(이상 七絶) 희차란루경동위당념운(喜次蘭淚京同韋堂拈韻)(五律), 쌍계방장(雙溪方丈), 경사우림해사(京師遇林海史), 김노포동구요집일범루(金老圃東耈邀集一帆樓), 제주망양정각기정용산건조기주(濟州望洋亭却寄鄭蓉山健朝記注)(이상 七律) 등이 뽑혀 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쌍계방장(雙溪方丈)은 다음과 같다.

 

斜日石門整客襟 해질녘 돌문 앞에 옷깃을 바로 하니
洞中仙靄望沉沉 골짜기 속 아지랑이 볼수록 그윽하다.
雙溪水活孤雲墨 쌍계(雙溪) 물은 고운(孤雲)의 먹물로 살아 있고
二鶴峯靑六祖心 이학(二鶴)의 봉우리는 육조(六祖)의 마음으로 푸르다.
僧縛竹籬防虎密 중이 엮은 대울타리 호랑이 막기에 튼튼하고
寺餐松葉拒人深 절에서 주는 솔잎밥 손님에게 오만함이 심하다.
上方七佛如相見 상방(上方)의 칠불(七佛)은 서로 마주 보면서
許施秪園布地金 지원(祗園)의 포지금(布地金)을 허시(許施)하는도다.

 

수련(首聯)은 쌍계사(雙溪寺) 주변의 승경(勝景)을 묘사하였으며 함련(頷聯)은 절의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서술하였다. 경련(頸聯)에서는 대나무로 울을 쳐서 호환(虎患)을 막는 풍습과 절밥이 거칠어 손님 대접이 오만함을 사실 그대로 진술하였다. 시어의 조탁에 힘쓰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읊고 있어 비록 거칠기는 하지만 창신(創新)을 중시한 그의 시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건창(李建昌, 1852 철종3~1898 광무2, 鳳藻鳳朝, 寧齋, 堂號 明美堂)

은 강화도 사곡(沙谷)에서 태어났다. 피난지(避難地) 수도(首都)라는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인 강화도는 이건창(李建昌)의 가문(家門)에 있어서는 신임옥사(辛壬獄事)와 나주벽서(羅州壁書) 사건으로 이어지는 정쟁(政爭)으로부터의 피신처이기도 하였으며 양명학(陽明學)이라는 가학(家學)을 이룩한 고장이기도 하다.

 

이건창(李建昌)병인양요(丙寅洋擾)에 조부(祖父) 시원(是遠)의 순절(殉節)을 계기로 강화별시(江華別試)15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하였다. 그 뒤 벼슬이 참판에 이르는 동안 47년의 생애 가운데 태반을 묘당(廟堂)에서 보냈지만, 관인으로서는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오히려 문명(文名)으로 영채(英彩)를 발하였다. 그는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시명(詩名)이 문명(文名)에 가려진 결과가 되었지만, 구한말의 문인으로 시와 문에 양미(兩美)한 이를 꼽는다면 역시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과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을 들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시는 백거이(白居易)소식(蘇軾)ㆍ육유(陸游)ㆍ전겸익(錢兼益) 등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영재(寧齋) 자신의 진술에서도 그는 두보(杜甫)는 감히 엄두도 못내고 육유(陸游)는 너무 광박(廣博)하고 원호문(元好問)은 너무 준험(峻險)해서 배우기가 어려웠지만, 전겸익(錢謙益)이 스승이라는 것은 숨길 수가 없다[四十年來苦學詩, 何曾夢見杜陵爲, 劍南廣博遺山峻 不諱錢翁是本師 題有學集後].”라 하여 전겸익(錢謙益)를 배운 것을 실토하고 있다. 다만 그 골력(骨力)이나 신운(神韻)에 있어서는 매천(梅泉)창강(滄江)을 따르지 못한다는 비평도 없지는 않지만, 평담(平淡)함을 특장(特長)으로 삼는 그의 시풍은 일세(一世)의 명가(名家)로서 손색이 없는 명편(名篇)을 남기고 있다.

 

신임옥사(辛壬獄事)의 여얼(餘孽)로 일문(一門)이 파가(破家)의 대극(大棘)을 겪으면서도 가문의 전통을 이어 벼슬길에서도 그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이건창(李建昌), 고종(高宗)의 누차에 걸친 엄지(嚴旨)에도 불구하고 해주관찰사(海州觀察使)라는 영관(榮官)을 버리고 고군산도(古群山島) 유배를 자청했다. 만년에는 망국으로 줄달음치는 국운을 차마 지켜 볼 수 없어 강화에 돌아가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광무(光武) 2년 세상을 등졌다. 그래서 그에게는 순국(殉國)의 기회나 우국시(憂國詩)를 남길만한 결정적인 계기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매천(梅泉)영재(寧齋)에 대한 생전의 충절을 기려 그의 오애시(五哀詩)에 조병세(趙秉世)ㆍ민영환(閔泳煥)ㆍ최익현(崔益鉉)ㆍ홍만식(洪萬植) 등 사절제신(死節諸臣)과 동렬에 서게 하였을 뿐이다.

 

저서로 명미당고(明美堂稿)가 전한다. 영재(寧齋)가 남긴 우국시로는 아산과이충무공묘(牙山過李忠武公墓)를 들 수 있을 정도이지만, 이 시가 씌어진 시기에 나라의 대세가 온통 개화의 물결에 휘말려 있었는데도 벌써 닥쳐올 나라의 운명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의 탁월한 예지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울부짖는 화전민의 생활을 그린 협촌기사(峽村記事)를 비롯하여, 서울 양반을 기롱한 노오(老烏)가 있으며,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정주남지일(定州南至日), 도망(悼亡)(이상 五絶), 안시성(安市城), 설성세시가(雪城歲時詞), 홍류동희제(紅流洞戲題), 구성도중(駒城途中), 고차잡절(古次雜絶), 제제회전등사분득생자견기(諸弟會傳燈寺分得生字見寄)(이상 七絶), 금석산(金石山), 과령작(過嶺作), 천마산회우림(天磨山懷于霖)(이상 五律), 회양(淮陽), 십삼산망해(十三山望海), 운재장인직려념이혜길운기회(雲齋丈人直廬拈李惠吉韻記懷), 세모즉사(歲暮卽事), 동허방숙등금오산성(同許方叔登金烏山城), 무망루감회(無忘樓感懷)(이상 七律), 숙광성진기선중새신어(宿廣城津記船中賽神語)(이상 五古) 18수에 이르는 시편을 뽑고 있다.

 

 

이 중에서 평담한 이건창(李建昌)의 시세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정주남지일(定州南至日)과 친구를 그리며 읊은 천마산회우림(天磨山懷于霖)을 보기로 한다.

 

一陽南至日 萬里北行人 해가 동지에 이른 날, 만리 북으로 가는 나그네.
忽見梅花發 猶疑漢水春 문득 매화꽃 피어 있어 한강에 봄이 왔나 의심나게 하네.

 

한겨울 동지(冬至), 정주에서 머물고 있을 때 홀연히 매화가 피어난 것을 보고 지은 시이다. 매화는 이른 봄에 피는 꽃이다. 그런데 한겨울 북변(北邊)에 매화가 핀 것을 보고 지금쯤 한강가에도 봄이 왔을 것이라는 심사를 소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에서도 그의 아기(雅氣)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다음은 천마산회우림(天磨山懷于霖)이다.

 

嶻櫱天磨鎭 蕭條蜀莫州 가파른 천마진(개성)이요, 쓸쓸한 촉막주(개성).
江山餘故國 風雨送殘秋 강산은 옛나라 자취 남아 있는데 비바람은 늦은 가을 보낸다.
古寺楓林落 空城瀑布流 옛 절엔 단풍잎 떨어지고 빈 성엔 폭포수 흘러내린다.
故人京雒去 惆悵不同游 옛친구 서울로 떠나고 없어 서글퍼라, 함께 노닐지 못하네.

 

개성 부근에 있는 천마산을 유람하다가 서울로 간 문우(文友) 김택영(金澤榮, 于霖)을 그리워하면서 쓴 시이다. 천마산 주변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워 옛부터 소인(騷人)과 묵객(墨客)들이 자주 찾던 곳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처연한 정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경련(頸聯)에 이르기까지 주변 경물의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 비록 감정의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노출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소조(蕭條)’, ‘고국(故國)’, ‘잔추(殘秋)’, ‘풍림(楓林)’, ‘공성(空城)’ 등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침울하게 하고 있어, 친구를 만나지 못한 서글픔을 받쳐주는 데 모자람이 없다.

 

 

 

 

김택영(金澤榮, 1850 철종1~1927, 于霖, 滄江韶濩堂)

은 개성출신이다. 개성은 정치적으로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정권에서 소외된 지역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업도시로 각광을 받은 곳이다.

 

창강(滄江)의 가계는 무반(武班) 출신의 상인 집안이다. 그는 일찍이 과거로 발신(發身)할 것을 꿈꾸었지만 41세에야 겨우 진사(進士)가 되었고 편사국(編史局) 주사(主事)ㆍ중추원서기관(中樞院書記官) 겸내각기록국사적과장(兼內閣記錄局史籍課長) 등을 지냈으나 곧 귀향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학세계의 이면에는 배척받은 개성 출신으로서의 비감이 도사리고 있으며 소중화(小中華)를 우습게 여기던 그의 모화(慕華)의 감정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그 해 그는 끝내 조국을 등지고 쉽사리 중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문학수업에 힘써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의 발천(發薦)으로 서울의 진신간(搢紳間)에 문명(文名)이 알려지게 되었고 특히 그는 문()에서 기()를 숭상하여 고문(古文)으로 빼어난 솜씨를 발휘했으며, ()에서는 신운(神韻)이 넘치는 시를 좋아하여 시로써도 한문학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김택영(金澤榮) 역시 나라가 망해가는 비운의 시절을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매천(梅泉)과 더불어 많은 우국시(憂國詩)를 남기고 있다. 을사조약을 눈앞에 두고 망명선(亡命船)에 올랐을 때 술회한 구일발선작(九日發船作)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추감본국십월지사(追感本國十月之事)등이 그러한 것 중의 하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다시 살필 것이며, 다만 그의 우국 시편이자 대표작이 되기도 한 문의병장안중근보국수사(聞義兵將安重根報國讐事)중 첫째 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平安壯士目雙張 평안도 장사가 두 눈을 부릅뜨고
快殺邦讎似殺羊 양새끼 죽이듯이 나라의 원수 죽였도다.
未死得聞消息好 죽기 전에 좋은 소식 하도 반가와
狂歌亂舞菊花傍 국화꽃 옆에 서서 미친듯이 춤추네.

 

이 시는 이국(異國) 땅에서, 황해도이 작품에서는 평안도로 되어 있음 장사인 안중근이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히로 부미(伊藤博文)을 저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것이다. 김택영(金澤榮)은 산문에 있어서도 격렬하고 직서적이기 때문에 생동감있는 문장으로 특징지워지고 있지만, 초반의 격렬이 긴장으로 지속되지 못하는 약점이 흘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시에서도 역시 후반의 나약함을 드러내보인 보기가 되고 있다.

 

그러나 다음에 보이는 구례동류이산한운(求禮同柳二山限韻)은 그의 단련된 솜씨가 아니고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명편이다.

 

籬竹靑靑過雨痕 대나무 울타리 푸른 걸 보니 비가 지나간 모양이고
古堂依約枕山根 낡은 집은 약속이나 한 듯 산 뿌리를 베고 있네.
頭流秀色三千疊 지리산 빼어난 빛 삼천 겹이나 되는데
妙選雙峯作一村 용하게도 두 봉우리 뽑아내어 마을 하나 만들었네. 소호당집(韶護堂集)2.

 

창강(滄江)은 신운(神韻)이 있는 시(), 언외(言外)의 언()을 즐겨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특히 이 시에서는 그의 격렬한 기상도 보이는 일이 없이 오묘의 극치를 이루고 있어 조용한 감동만 줄 뿐이다.

 

 

 

황현(黃玹, 1855 철종6~1910, 雲卿, 梅泉)

은 전남 광양의 한미한 시골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구한말의 급박한 정세 속에서 가장 많은 우국시를 남긴 당시 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소년 시절부터 청운(靑雲)의 꿈을 간직했으나 34세에 겨우 진사(進士)가 됐으며, 이것도 상경(上京)한 지 10여년 만에 얻은 결과였다. 창강(滄江)과 마찬가지로 이건창(李建昌)의 발천(發薦)으로 서울의 문인들에게 알려지면서 시명(詩名)이 드러났으며 이를 계기로 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등과 문우(文友)의 교분을 다지게 되었다.

 

그는 문보다는 시에서 빼어났으며, 특히 절구에서 보여준 굳센 힘은 강직한 그의 성품과 함께 타고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백면서생(白面書生) 시절의 시 가운데 수작(秀作)이 많지만, 날카로운 시대의식을 담은 시들은 대부분 서울 생활에서의 염증을 느끼고 귀향한 다음에 지어진 것들이다.

 

그가 성균생원(成均生員)이 되던 1888년 무렵 이미 정사(政事)는 기울고 있었으며 외우(外憂) 또한 날로 가중되는 형세여서, 서울의 거리는 그의 말대로 귀국광인(鬼國狂人)의 무리가 들끓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을 떠나게 되었으며 다시 서울에 올라오는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의 투철한 시대의식과 날카로운 비평정신은 스스로 많은 우국시를 남겼으며, 소중한 구한말의 야사 자료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이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많은 상세우국(傷世憂國)의 시편들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이충무공의 용기와 지략을 고대하는 충무공구선가(忠武公龜船歌), 충무공이 병사들을 조련하던 곳이었는데도 이제는 일본인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벽파진(碧波津)을 바라보며 당시의 정세를 비장하게 읊은 벽파진(碧波津),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절조를 기리고 있는 의성논개비(義城論介碑), 목포항을 통해 외국상품이 범람하는 와중에서 우리의 쌀이 외국으로 유출되는 상황을 탄식한 발학포지당산진(發鶴浦至糖山津), 을사조약의 비보를 접하고 비분강개를 토로한 문변(聞變)등을 들 수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여기서는 황현(黃玹)의 마지막 우국(憂國) 시작(詩作)이자 대표작으로 널리 인구에 회자되어온 절명시(絶命詩)4수 가운데 셋째 수를 보기로 한다.

 

鳥獸哀鳴海岳嚬 새 짐승 슬피 울고 산하(山河)도 찡그리니
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했구나.
秋燈掩卷懷千古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되새겨 보니
難作人間識字人 글 배운 선비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그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지은 작품으로 황현(黃玹)의 의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황현(黃玹)은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나라로부터 쌀 한톨 얻어 먹은 은혜도 입은 일이 없지만,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비분강개하던 지사(志士). 이 작품에서 그는 나라가 일본에 의하여 패망당한 비극을 조수(鳥獸)와 산하(山河)도 울부짖고 찡그리는 것으로 극대화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그가 슬퍼한 것은 500년 동안 선비를 양성한 나라에서 나라가 망하는 날에 이르러 선비가 해야 할 구실을 스스로 찾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음뿐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황현(黃玹)의 시는 초기작 가운데 수작(秀作)이 많으며, 그 가운데서도 그의 뛰어난 사실적인 수법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종어요(種菸謠). 작품을 보기로 한다.

 

大雨一夜川流洪 밤새도록 큰 비 내려 냇물이 불고
霮䨴三日因濛濛 사흘 내내 안개비로 눈 앞이 어둑하네..
秧務如焚村無傭 모내기에 바빠서 마을에 일꾼이 없는데
何人獨向山雲中 어떤 이가 홀로 산 속으로 가는가?
雉驚格格叢莾翻 꿩은 놀라 꺽꺽대며 덤불에 날고
蓬藟萬朶眞珠紅 넝쿨 딸기는 떨기마다 진주처럼 붉네.
一擔就安松根上 솔 등걸에 한 짐 벗어 쉬고 있노라니
猫耳戢戢靑筠籠 담배 모는 옹기종기 소쿠리에 푸르네.
石崖坡坨不辨畝 돌 벼랑이 험준하여 밭이랑은 희미하고
瓦壟千疊迷溝縫 들쭉날쭉 논두렁에 도랑물이 혼미하네.
無袖布襦半膝褌 소매 없는 삼베적삼, 반 무릎 잠방이로
嗚嗚獨自歌相舂 혼자서 즐겁게 방아타령 부르네.
心忙手嫺不用鋤 마음 바빠도 손이 익어 호미도 쓰지 않고
指夾拳築何精工 손가락으로 잡고 주먹으로 다짐이 어찌 그렇게 工巧한가?
過時寧揀根苗脆 때 지나면 약한 모야 절로 가려지리니
善生不怕沙土鬆 잘 자란 모는 거친 모래 땅 두려워하지 않는 법.
一根一手田如海 한 손에 한 뿌리씩, 밭은 바다같은데
始起杳然如難終 처음에 아득하여 못 끝낼 것 같았지.
半生蓄我爪甲 반 평생 다져놓은 내 손톱 날카로와
頃刻見此籃子空 잠깐 사이에 담배 바구니가 텅 비었구나.
蝦蟆呑月輪蝕入 두꺼비 달을 삼켜 둥근 바퀴 다 먹히듯
郭索奔泥旁行窮 진흙탕 기던 게, 게걸음이 다한 듯.
地黑葉靑靑漸多 땅은 검고 잎 푸르니 푸름 점점 더해가며
蝶翅萬片粘春叢 나비 날개 만 조각이 봄 숲에 붙어 있네.
百歲枯樹山鵲噪 백년 묵은 고목에 산까치 울어대고
午日微綻來霽風 한낮 햇살 삐져 나오며 갤바람 불어온다.
風便細喉悄欲斷 바람 결에 가는 소리는 끊길 듯 말 듯.
農謳遠近無南東 먼 듯 가까운 듯 농가(農歌)는 방향을 알 길 없네,
我亦十年爲佃客 나 또한 십년 동안 소작농 노릇 하며
秧秧麥麥人之同 남들처럼 모 심고 보리 갈았다네.
秋熟要盡公私稅 가을 농사 짓고 나면 세금과 소작료로 다 없어지고
磬室依舊豐非豐 곳간은 예와 같아 풍년에도 풍년 아니네.
自種菸艸田於山 산 속에 밭 갈아 담배 농사 지은 후론
柴門犬老氂蒙茸 사립문에 늙은 개도 꼬리털 북슬하네.
但得年年菸價翔 해마다 담배값 날개 돋듯 오르기만 한다면
肯羡三百囷廛崇 어찌 삼백석 높은 곳간 부러워하리?
痴氓免餓眞好命 어리석은 백성이야 굶주림 면하는 게 좋은 팔자니
水田莫笑山田農 논 부치는 사람들 산농사 짓는다 비웃지 마오.

 

종어요(種菸謠)는 고시(古詩)에서 특장(特長)을 보인 매천(梅泉)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민풍(民風)을 그대로 읊은 일종의 기속시(紀俗詩)이다. 몸소 농사를 짓는 고초와 여유로움을 시화(詩化)하고 있다. 산 속에서 담배 농사를 지으면서 느낀 풍요와 한가로움을 호기있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농촌의 풍경을 사실적이고 회화적으로 묘사하여 생동감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농민들이 애써 농사를 지어도 소작료와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은 조선말기 사회의 피폐함을 확인하는 관풍적(觀風的)인 성격도 함께 담고 있는 것이다.

 

 

 

박규수(朴珪壽, 1807 순조7~1877 고종14, 桓卿瓛卿鼎卿, 瓛齋桓齋桓齋居士)

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개화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그는, 북학파가 주창했던 실사구시의 학풍에 눈떠 중농주의적인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丁若鏞)과 서유구(徐有榘)를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가 일생을 통해서 배웠던 학자로는 박지원(朴趾源)정약용(丁若鏞)ㆍ서유구(徐有榘)김매순(金邁淳)ㆍ조종영(趙鐘永)홍석주(洪奭周)ㆍ윤정현(尹定鉉) 등이 있고, 남병철(南秉哲)ㆍ김영작(金永爵)ㆍ김상현(金尙鉉)ㆍ신응조(申應朝)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門下)에서 김옥균(金玉均)ㆍ박영효(朴泳孝)ㆍ김윤식(金允植)ㆍ유길준(兪吉濬) 등 개화사상의 선구자들이 배출되었다.

 

1848(헌종14)에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출사의 길에 오른 그는, 벼슬길이 비교적 순탄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ㆍ예조판서(禮曹判書)ㆍ대사간(大司諫)ㆍ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ㆍ대제학(大提學)ㆍ형조판서(刑曹判書)ㆍ우의정(右議政)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개화사상가로서 그를 거듭나게 하였던 계기는 이 시기의 개화사상가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에게도 국외 여행의 기회가 부여된 것이다. 1861년에 열하부사(熱河副使)로서 처음 중국을 여행하였을 때, 중국은 이미 1856년의 애로우호 사건에서의 패배로 인해 당시 황제인 함풍제(咸豊帝)가 열하(熱河)에 피신하고 있을 만큼 위태로운 정세에 있었으므로, 박규수(朴珪壽)는 약 6개월간의 체류기간을 통해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살필 수가 있었다. 귀국 직후 그는 1862년에 진주민란의 안핵사(按覈使)로서 현지에 파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1866년에는 평안감사로서 대동강에 불법침입한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어먼호의 격침을 직접 지휘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의 중국 여행은 1872년에 이루어졌는데, 그는 진하사(進賀使)의 정사(正使)로서 서장관 강문형(姜文馨), 수역(首譯) 오경석(吳慶錫)을 대동했다. 이때 서양의 침범에 대응하기 위하여 중국인들이 일으킨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개국, 개화에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박규수(朴珪壽)의 실천적인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체질에서 보면, 그는 마땅히 경술(經術)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의 문집도 대부분 관각문자(館閣文字)로 채워져 있다.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봉소여향절구(鳳韶餘響絶句)100수를 제작하는 등 세교(世敎)에 관계되는 것이 많다. 그밖의 시편(詩篇)에서도 그는 조식(藻飾)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오히려 질박하기만 하다.

 

예술적인 향훈(香薰)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박규수(朴珪壽)는 시작(詩作)에서도 역시 민풍(民風)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바 있어 죽지사(竹枝詞)를 제작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강양죽지사(江陽竹枝詞)13수 중 제5수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秋入江陽水不波 가을이 강물에 들어도 물결은 일어나지 않고
凌空石塔皓嵯峨 구름 뚫은 석탑은 허옇게 우뚝 섰네.
一林疎雨紅流路 온 숲에 성긴 비 내리는 홍류동(紅流洞) 길에
誰復騎牛訪脫蓑 누가 다시 소 타고 올 것이며 도롱이를 벗을까?

 

강양(江陽)은 합천(陜川)의 옛이름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가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다음 해 8월 보름에 다시 해인사(海印寺)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기약한 그 날에 연일 비가 왔지만 남명이 비를 무릅쓰고 해인사 문에 이르렀더니 동주가 이미 도착하여 막 우장을 벗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덕천사우록(德川師友錄)에 전한다. 환재 박규수(朴珪壽)는 강양(江陽) 땅에 이르렀을 때 이 미담(美談)을 상기하여 시화(詩化)한 것이다. ‘기우(騎牛)’는 남명이, ‘탈사(脫蓑)’는 동주가 찾아온 사실을 함께 말한 것이다. 전혀 다듬어져 있지 않지만 민간의 이야기나 민풍을 시로써 읊어내는 죽지사(竹枝詞)에서는 흔한 일이다

 

 

 

2. 우국(憂國)의 시인(詩人)

 

 

한말(韓末)이라는 역사 단계는 정확하게 말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성립에서부터 비롯하며, 그것은 근대화라는 시대적 임무 수행이 강조되었던 시기라는 점에서 일단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일찍이 한국사가 체험한 어떠한 역사 단계에 있어서도 서구의 근대를 스스로 시험한 일이 없는 전통사회의 보편적 질서에서 볼 때, ‘개국(開國)=개화(開化)’를 근대화의 결정론으로 파악한 인식체계는 한국의 근대사로 하여금 그 시발(始發)에서부터 망국의 민족사로 얼룩지게 한 것임에 틀림없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형식적으로는 국호가 조선(朝鮮)’에서 ()’으로 바뀌고, (제후)의 나라가 황제의 나라로 격상한 것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주도한 세력이 침략적인 제국주의 일본이기 때문에 문제의 성격은 심각하고 복잡한 것이 되었다.

 

이 이전 시기에 있어서도 외세의 도전은 부단히 있어 왔지만, 그 수단과 양상은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 이민족의 일방적인 침략에 의한 무력전쟁이었으므로, 우리 쪽에서 보면 이것은 방위전쟁이다. 때문에 국가와 민족은 반드시 수호되어야 했으며, 이를 극복하는 데 바쳐진 주체적 역량은 집약적으로 과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세기말에서부터 비롯한 서양 또는 서양화한 일본의 도전은 처음부터 전교(傳敎)나 통상(通商)의 수단으로 접근해 온 것이었으므로 이에 대응하는 반응양식도 귀일(歸一)되지 않았다. ‘척사(斥邪)’개화(開化)’가 서로 다른 역사인식의 괴리를 보이면서 두 주류의 시대의지로 대두한 것도 물론 이 때문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러 천주교가 이 땅에 잠입하기 시작하였을 때, 서양의 충격은 그것이 전교(傳敎)를 표방한 문화적인 형태의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벽위(闢衛)라는 이름으로 막아내었다. 그러나 1860년대에 이르러 서양 세력의 접근이 통상의 강요와 같은 경제적인 충격으로 변질하게 되었을 때 척사의 의지는 어양(禦洋)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양(禦洋)에서 실패한 척사의 저항은 다음 단계인 1870년대에 이르러서는, 특히 일본의 팽창주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하여 척화(斥和)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게 된다.

 

1880년대에 있어서의 척사운동은 그 저항의 방향을 대내적인 비자주적 개화에 돌리기 시작하여 그 공격은 외세의 주구가 되고 있는 당시의 집권세력에 집중되었다. 이에 이르러 척사의 의지는 위정(衛正)이라는 민족사의 자위(自衛) 임무를 보다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러한 저항형식의 전환은 1895을미사변(乙未事變)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세력이 노골적으로 국법질서를 유린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언사적(言辭的) 저항은 의병항쟁과 같은 무력행사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책동은 1897년 조선왕조를 대한제국으로 변신하게 하였으며 1905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이르러 사실상 국권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를 전후하여 다시 후기 의병항쟁이 전개되고 빗발치는 토적소(討賊疏)사림(士林)에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산림(山林)에서 몸을 일으킨 의병의 항쟁으로는 기울어진 조국의 운명을 붙들어잡는 데까지는 미칠 수 없었다. 그나마 총칼을 들고 의병항쟁에도 나아가지 못하는 이 시기의 문인들은, 또는 선비로서 또는 지사(志士)로서 스스로 그들의 변신을 강요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가능했던 일은 우국의 노래를 제조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시인들은 한말의 상황이 난망(亂亡)에 이르기 앞서부터, 공통적으로 인물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지나간 역사에 눈물 지으며 선현들의 위업을 추상(追想)했다. 가신지 200년이 넘는 충무공의 슬기를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현상이다. 이건창(李建昌)아산과이충무공묘(牙山過李忠武公墓), 황현(黃玹)충무공구선가(忠武公龜船歌)벽파진(碧波津), 그리고 이남규(李南珪)과충무공순신묘(過忠武公舜臣墓)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며, 의병항쟁에 기의(起義)김복한(金福漢)이충무공묘(李忠武公墓)도 그 성격에 있어서는 다른 것이 없다.

 

먼저 문인(文人)들의 우국시를 보이고 다음으로 사조란(詞藻欄)의 애국시(愛國詩), 의병장의 우국ㆍ절명시 등을 차례로 보이기로 한다.

 

다음은 이건창(李建昌)아산과이충무공묘(牙山過李忠武公墓)이다.

 

元帥精忠四海知 원수(元帥)의 위국충정 온 세상이 다 아나니
我來重讀墓前碑 이곳에 와 묘비문을 거듭 읽어봅니다.
西風一夕松濤冷 저녁에 서풍 불어 소나무 소리 차갑더니
猶似閒山破賊時 한산도 왜적 칠 때 그 소리와 같습니다. 明美堂集2.

 

이 시는 바로 평담(平淡)영재(寧齋) 시풍(詩風)의 단편(斷片)이다. 충무공의 묘소를 찾아든 영재(寧齋)의 감회는 그것이 단순한 회고적(懷古的)인 감상(感傷)을 노래한 것이 아니며 시인의 현실에 대한 인식 바로 그것의 발현인 것이다. 갑신(甲申)ㆍ갑오(甲午)의 두 정변을 한갓 개화꾼의 불장난으로 본 그는 이홍장(李鴻章)과 같은 위인도 큰 거간꾼으로 보고 있었다. 이러한 외세에 대처하는 그의 입장은 을미사변(乙未事變)에서 보여준 반민족적인 일본의 만행에 대하여는 장문(長文)토역소(討逆疏)를 올려 준열하게 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행(使行)의 임무가 어느 때보다도 중한 것을 갈파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이용후양(利用厚養)의 실()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곧 다른 박학(樸學)의 무리와 준별해야 할 영재(寧齋)의 시국관이며 역사인식의 태도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도 한말의 소단(騷壇)에 가장 많은 우국의 시편을 남긴 것은 역시 황현(黃玹)김택영(金澤榮)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이건창(李建昌)의 발천(發薦)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후일 세 사람은 나란히 가장 가까운 문우로서 성장하여 한문학의 종장에 섬광을 발했다. 다만 이건창(李建昌)은 광무 2년에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순국의 기회나 우국시를 제작할 결정적인 계기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김택영(金澤榮)황현(黃玹)은 오래도록 살아남아, 급변하는 역사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김택영(金澤榮)은 개성 출신이다. 때문에 중앙 정부에 대한 개성 시민의 불신 감정은 김택영(金澤榮)에게 있어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의 모화적(慕華的)인 체질도 따지고 보면 소중화(小中華)에 대한 평소의 불신이나 모멸이 낳은 당연한 결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버림받은 조국을 버리고 쉽사리 중국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눈앞에 두고 그는 망명선에 올랐다. 조국을 향하여 뜨거운 애정을 보낸 것이 이때가 처음이다. 그가 우국의 시작을 조국에 바치게 된 계기도 여기서 비롯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 대표작으로는 구일발선작(九日發船作)2수를 비롯, 추감본국시월지사(追感本國十月之事), 문의병장안중근보국수사(聞義兵將安重根報國讐事), 문황매천순신작(聞黃梅泉殉信作)등이 우국의 농도가 짙은 것들이다. 구일발선작(九日發船作)은 다음과 같다.

 

沸流城外水如藍 비류성 밖 바닷물은 쪽빛으로 푸르른데
萬里風來興正酣 만리에 바람 불어 주흥이 거나하구나.
誰謂火輪獰舶子 뉘라서 화륜선 빠른 배가
解裝文士向江南 문사(文士)를 태우고 강남으로 떠날 줄 안다고 하였던가?

 

東來殺氣肆陰奸 동으로 살기(殺氣)가 불어 음계(陰計)가 들끓는데
謀國何人濟此艱 그 누가 나라 위해 이 환난을 구할고
落日浮雲千里色 저녁놀 뜬 구름이 천리에 물드는데
幾回回首望三山 몇 번이고 머리 돌려 삼각산을 바라보네. 소호당집(韶護堂集)4

 

이는 그가 망명선에 올랐을 때의 착잡한 심정을 읊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저녁놀 뜬 구름이 곱게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뒤돌아보고는 망국의 음계(陰計)가 들끓고 있는 조국의 운명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글 읽은 선비이기 때문에 간직할 수 있었던 조국애의 마지막 보루 그것을 보인 것이다.

 

 

소중화(小中華)를 우습게 알던 창강(滄江)이긴 하였지만 이국(異國)의 하늘 아래서 뒤돌아보아지는 망향(望鄕)의 서정은 조국의 운명이 날로 급박해지자 쉽사리 우국의 충정(衷情)으로 변질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비보를 뒤늦게 전해 듣고 지은 추감본국시월지사(追感本國十月之事)의 감회가 그것이다.

 

爐底死灰心共冷 내 마음 싸늘하기 화로 밑에 죽은 재라,
天涯芳草首難回 이국 땅 하늘 아래 고국 보기 어렵도다.
蘭成識字知何用 유란성(庾蘭成)은 글을 배워 어디 쓰려 하였던고?
空賦江南一段哀 공연히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지어 슬픈 정만 더하는구나. 소호당집(韶護堂集)4

 

그 마지막 부분을 보인 것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사실상 국권은 일제의 장중(掌中)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돌아다볼 고국조차 없어진 지금에 이르러 발랄한 정열이나 낭만이 있을 리 없다. 싸늘하게 식어간 시인의 가슴은 다만 글을 읽은 선비가 된 자기의 처지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자기 처지를 양()나라 유신(庾信)의 그것에 비기어 본 것이다.

 

 

매천(梅泉)은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800년대 후반에서부터 1910년에 이르는 구한말의 격동기에 가장 많은 우국시를 남기고 간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다. 충무공구선가(忠武公龜船歌), 벽파진(碧波津), 의기논개비(義妓論介碑)를 차례로 보인다.

 

二百年來地毬綻 충무공 가신지 200년에 나라가 열리더니
輪舶東行焰韜日 화륜선이 오락가락 불꽃이 해를 가리네.
熨平震土虎入羊 조용한 양()의 나라에 호랑이가 쳐들어와
火器掀天殺機發 화기(火器)가 하늘을 찔러 살기가 등등하구나. 梅泉集1.

 

二百年來地毬綻 충무공 가신지 200년에 나라가 열리더니
輪舶東行焰韜日 화륜선이 오락가락 불꽃이 해를 가리네.
熨平震土虎入羊 조용한 양()의 나라에 호랑이가 쳐들어와
火器掀天殺機發 화기(火器)가 하늘을 찔러 살기가 등등하구나.
九原可作忠武公 구천에 계신 충무공을 모셔올 수 있다면
囊底恢奇應有術 가슴 속에 반드시 신술(神術)이 있으리라.
創智制勝如龜船 거북선의 지혜로 가는 곳마다 이길지면
倭人乞死洋人滅 왜놈은 살려달라 하고 양놈은 제풀에 물러가겠지. 梅泉集1.

 

이 작품은 1884(갑신년) 작이며 칠언고시 중 그 마지막 부분을 보인 것이다. 인용한 부분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왜적을 무찌른 거북선의 위용을 눈으로 보듯이 그린 것이다. 왜양(倭洋)의 세력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당시의 사정을 마치 16세기 말에 있었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느낀 것이다. 그러나 충무공도 없는 이때의 암담한 사정은 이 젊은 시인에게는 무척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의 기발한 발상은 시공을 초월하여 가신 지 200년이 넘는 충무공을 다시 구천에서 일으켜 모셔오고 싶은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의욕에 찬 청년 시절의 매천(梅泉) 시의 한 단편이라 하겠다.

 

 

다음은 매천(梅泉)1896년에 지은 벽파진(碧波津)의 마지막 부분이다.

 

萬死何曾戰功計 만 번을 죽은들 전공(戰功)을 생각했던가?
此心要使武臣知 충무공 이 마음 무신(武臣)들은 배워야지.
至今夷舶經行地 오랑캐 배 드나드는 지금에 와서야
咋指鳴梁指古碑 혓바닥 깨물며 명량(鳴梁)의 옛 비석 가리키네. 梅泉集2

 

벽파진은 충무공이 병사들을 조련하던 곳인데 개항을 했답시고 뻔질나게 드나드는 왜놈들 보기가 역겨웠던지 왜적을 무찌르던 그때의 감격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 것이다.

 

다음은 1898년 작 의녀논개비(義妓論介碑)이다.

 

楓川渡口水猶香 풍천의 강물이 하 그리 향기로와
濯我須眉拜義娘 내 수염 깨끗이 씻고 의낭(義娘)에게 절하노라.
蕙質何由能殺賊 연약한 여자 몸으로 왜적을 죽이다니
藁砧已自使編行 남편이 시키는 대로 군대에 들었음이라.
長溪父老誇鄕產 장수 고을 늙은이는 딸 자랑 한창이고
矗石丹靑祭國殤 촉석루 붉은 단청 가신 넋을 위로하네.
追想穆陵人物盛 돌이켜 보면 선조 때는 인물이 하도 많아
千秋妓籍一輝光 기생도 그 이름을 천추에 전하네. 梅泉集3

 

인물이 성하던 목릉(穆陵) 때에는 기적(妓籍)의 몸으로도 나라 위해 죽었는데, 이때와 같은 어려운 시국에 너무나도 인물이 없음을 통탄, 장수(長水) 출신 의기(義妓) 논개(論介)를 마음껏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논개에 대해서는 근자에 와서 그 신분이 기생이 아니라는 설이 그의 출신지인 전라도 모처에서 나온 문적을 통하여 입증되었다고 하는데 이 시에서도 그의 고향이 전라도 장수로 나타나 있으며, 남편까지 있었던 사정이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변보(變報)에 접하고 자재(自裁)한 사절(死節) 삼대신(三大臣) 이건창(李建昌)ㆍ최익현(崔益鉉)을 감모(感慕)하여 지은 오애시(五哀詩)를 비롯하여 애무장의사정시해(哀茂長義士鄭時海), 혈죽(血竹)등 많은 우국시를 남기고 있다.

 

 

 

이남규(李南珪, 1855 철종6~1907 융희1, 元八, 修堂)

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ㆍ석루(石樓) 이경전(李慶全)의 예손(裔孫)이다. 북인(北人)의 중심세력에서 일탈하여 남인(南人)으로 색목(色目)을 옮기는 동안, 그 가문은 지배벌열(支配閥閱)에서 소외되었으며, 그 뒤로 그들은 문장(文章)과 풍절(風節)을 닦는 사대부의 수업으로 일관해 왔다.

 

이러한 가학(家學)의 전통에 의해 체질화된 수당(修堂)의 사대부적 사고는 격동하는 구한말의 정치적 와중에서도 불굴의 주체적 의지를 다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28세가 되던 해,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던 해에 문과에 올라 갑오(甲午)ㆍ을미(乙未)의 격동 속에서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영흥부사(永興府使)의 벼슬을 거치기는 하였지만 갑오(甲午)ㆍ을미(乙未) 연간에 있었던 왜병의 범궐사건(犯闕事件)에 대해서는 준엄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렇듯 비타협적인 체질 때문에 당시의 개화세력에게 미움을 받아 마침내는 그의 아들과 함께 왜병의 칼날 아래 유린당했다.

 

이처럼 관인으로서의 수당(修堂)은 현달(顯達)하지 못하였지만, 타고난 문장의 솜씨는 그로 하여금 일세의 문장가로 이름을 드날리게 했다. 시보다는 특히 고문(古文)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영재(寧齋)와 더불어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을 나란히 한 사실에 대해서는 창강(滄江)독이승지소(讀李承旨疏)3수 중에서 보인 전어마산이시랑(傳語摩山李侍郞)에 그 사정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소차(疏箚)에서 문명(文名)을 얻고 있는 그의 문장 솜씨는 척동서사학소(斥東西邪學疏)를 비롯하여 논비요급왜병입도소(論匪擾及倭兵入都疏), 청절왜소(請絶倭疏), 청부왕후위호토적복수소(請復王后位號討賊復讐疏)기삼비사(記三婢事)와 같은 명문(名文)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밖에도 탁월한 그의 시국관은 영흥잡영(永興雜詠)한서문답(寒棲問答)등의 시작(詩作)에 그 진면목이 두드러지게 부각되어 있다. 또한 비운(悲運)의 역사적 사건인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되새기며 쓴 삼전도탄(三田渡嘆)에서는 그의 역사인식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이충무공(李忠武公)을 기리며 쓴 과이충무공순신묘(過李忠武公舜臣墓)는 날로 더해가는 일제의 만행을 통분해 하는 시인의 고뇌를 보여 준다.

 

 

대동시선(大東詩選)박충민서원견허비영흥(朴忠愍書院遣墟碑永興(五絶), 문영관신명유음(聞瀛館新命有吟)(七律), 증손침랑(贈孫寢郞)(七律) 등이 선발되어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삼전도탄(三田渡嘆)을 보기로 한다.

 

昔時三田渡 有碑屹如植 그 옛날 삼전도에는 비석이 심은 듯 높이 솟았었지.
今日三田渡 有碑沙中踣 오늘날 삼전도에는 비석이 모래 속에 묻혀있네..
踣豈非更快 所嗟由人逼 비석 묻힌 것은 통쾌하지만은 한스러운 것은 사람들에게 핍박받는 것이라네.
舊恨新憤難洗盡 옛날의 한과 오늘의 분함은 씻기 어렵지만
江流日夜無終極 밤낮으로 강물은 쉬임없이 흐르네.
願言執殳爲前駈 원하는 바는, 몽둥이 잡고 선구가 되어
北踏燕雲東日域 북으로 연운과 남으로 일본을 짓밟고 싶다..
歸來斲得丈餘珉 돌아와 한 길 남짓의 옥돌을 깍아
銘我萬年君王德 만년토록 우리 군왕의 덕을 새길 것이네.

 

오칠언(五七言) 고체(古體) 형식으로 구성되고 있으며, 특히 이러한 우국시는 작품의 예술성보다 지사적(志士的) 회한이 앞서고 있으므로 시작(詩作)으로서의 수준을 평가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다만, 청 태종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조선을 침략하고 항복의 징표로 세운 치욕스런 삼전도비를 모래 속에 묻어버린 일을 통쾌하게 여기면서도 지금 일본의 침탈로 백성들이 핍박받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청의 침입과 일본의 침탈로 인한 구한(舊恨)과 신분(新憤)모두 다 씻어 버릴 수야 없지만 남정북벌(南征北伐)하여 군덕과 국위를 떨쳤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하여 국치를 설욕하고자 하는 심사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기(李沂, 1848 헌종14~1909 융희3, 伯曾, 海鶴)

는 한말의 우국지사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에 진력하였으며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려다가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유형원ㆍ정약용(丁若鏞) 등의 학통을 계승하여 당시의 전제ㆍ관제 등 개혁의 필요성과 방법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우국상시(憂國傷時)로 일관한 삶처럼 이기(李沂)의 시문(詩文) 또한 시국에 대한 비분강개와 국가에 대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주조를 이루었다. 그의 우국시(憂國詩) 중에서 삼호사(三虎詞)독황성보(讀皇城報)가 특히 유명하다. 삼호사(三虎詞)는 세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는 모습을 통하여 정부가 일본과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피력하였으며, 독황성보(讀皇城報)는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실린 장지연(張志淵)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보고 당시의 정황 및 매국노의 행태를 준엄하게 꾸짖은 시()이다.

 

독황성보(讀皇城報)를 본다.

 

九年十月廿一日 구년 시월 스무 하루,
潄玉軒前黑似漆 옥헌(玉軒) 앞은 칠흙처럼 어두웠네.
客兵入衛刀槍鳴 일군(日軍)이 몰려와 둘러싸니 창과 칼 부딪는 소리 요란하고
文武百官皆股栗 문무백관은 모두 다리만 떨고 있네.
大使六十長虹來 일본대사 육십장홍(六十長虹)이 와서는
手把約文口呵叱 손에 조약문을 들고 입으로는 도장 찍으라 위협하네.
曉星明滅月慘澹 새벽별은 깜박이고 달빛까지 참담한데
此時措置非無術 이 때의 모든 조치들 음흉한 술책 아닌 것이 없네.
司外部者小才是 외부대신 박재순(朴齋純)은 원래 보잘 것 없는 재주였건만
平居讀字聲譽溢 글줄이나 읽었다고 명예가 높네.
盜名欺世何能久 이름을 도적질하고 세상을 속이는 일 어찌 오래 가리오?
本相露盡可題筆 본래 모습 모두 드러나 붓을 들어 미라고 썼네.
誰料五百年宗社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오백년 종묘사직이,
此奴手裏送交畢 이 종놈 손아귀에서 남에게 넘겨질 줄을.
權李區區何足責 권가놈과 이가놈이야 구구하게 어찌 책망하리오?
諸子不過是蟣蝨 본래 이나 서캐 같은 무리들이라네..
皇天未必容奸人 하늘은 반드시 간사한 놈 용납하지 않을 것인데
旣爲罪魁安得逸 이미 그렇게 큰 죄 짓고 어찌 편안하리오?
蓮池之水今猶在 연지(蓮池)의 물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莫待他年煩斧鑕 뒷날 도끼날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나.
可憐江石韓參政 가련하다 참정대신(參政大臣) 한규와(韓圭卨) 선생이
一聲痛哭天蕭瑟 한 번 통곡하는 소리에 하늘까지 슬퍼하네.
衆目瞿然都改觀 모든 사람들 놀라서 다시 보니
平地泰山高無匹 평지에 솟은 태산처럼 우뚝히 짝할 사람이 없네.
江戶夜深人不眠 깊은 밤 동경(東京) 거리 사람은 잠 못이루는데
四壁啁啾多蟋蟀 사방에서 귀뚜라미 소리 구슬피 들려오네.

 

이 시는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공표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가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에 머무르던 중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과 장지연(張志淵)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보고 쓴 작품이다. 일본의 협박으로 조약이 체결된 상황에서 대신들이 보여준 나약한 모습과 매국노들의 파렴치한 행위를 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동시에 이들과 한규설(韓圭卨)의 비분강개하는 충정을 대비시켜 조선인의 의기가 살아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결구(結句)에서 시인은 인물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을 뿐이다. 이 작품 역시 시대의 아픔을 직설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고유명사까지 직접 작품에 올리면서 망국의 통한을 읊조리고 있어 시작(詩作)으로서의 높낮이는 말하기 어렵다.

 

 

 

사조(詞藻)

라면 일반적으로 한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을 비롯하여 한말의 학술지에 마련된 사조란(詞藻欄) 즉 한시 발표에 제공된 문예란을 말한다.

 

학술지로는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를 비롯하여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 대한학회월보(大韓學會月報), 서우회보(西友會報),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등이 그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대한협회는 그 성격상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서우회보(西友會報)의 발행기관인 서우학회는 뒤에 서북학회로 통합되었다.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는 창간된 것이 1910년이므로 한말의 학술지로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가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서 사조란을 통하여 가장 많은 한시를 게재하고 있는 학술지는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 그리고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정도이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당시의 개화파 사람들에 의하여 부국강병론이 고조되던 18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애국계몽운동 기관이며, 1905을사늑약 이후에 등장한 이들 학술지의 설립 취지도 그 성격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국가와 민족의 자강에 있었고 그들이 실천한 사업은 산업ㆍ교육의 진흥과 민중의 계몽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전통질서를 부정하는 처지에 서고 있었기 때문에, 주권의 회복이라는 국가목적에서 보면, 이들 학회가 스스로 공격적인 대일항쟁을 수행하기에는 내포하고 있는 부정적 요소가 복잡하고 단단하다. 이렇게 보면, 전통시대의 유향(遺響)인 한시를 보급하기 위하여 사조란까지 마련하고 있는 이들 학회의 퇴행적 행위는, 학회 자체의 성격이 그렇게 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구성원의 개별적인 체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장지연(張志淵)과 같이 전통적인 학문에 조예가 깊은 명사들이 황성신문에서부터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등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특히 이들 사조(詞藻)’가 쉽사리 우국시의 발표란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도, 한시는 이미 재야 사림에게 익숙해진 문학양식이므로 이들의 시대의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는 가장 알맞은 것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성신문(皇城新聞)189911월부터 사조란을 두고 있으나 우국의 충정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는 학회의 활동범위를 기호지방으로 한정한 데도 이유가 있겠지만 사림의 우국 시편은 거의 볼 수 없고 다만 김윤식의 친일(親日) 차운시(次韻詩)가 독판을 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비교적 많은 우국시를 발표하고 있는 것이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이다.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의 사조란은 우선 문예란으로서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고 있는 느낌이다. 선현들의 시작 가운데서도 명편을 골라 수록하고 있으며 당대 명사들의 작품도 다양하게 게재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물량에 비하여 우국시가 적은 것도 사실이며, 특히 시기적으로 을사늑약이 있은 다음 해인 1906년에서부터 회보가 발행되고 있기 때문에 민충정공(閔忠正公)과 최익현(崔益鉉)의 만사(輓詞)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익명으로 된 독월남망국사유감(讀越南亡國史有感)과 같은 장편을 싣고 있는 의지는 사조(司藻)’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대한협회는, 협회의 구성원으로 보면 자강회를 계승한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지도층의 성향이 후일 대일협력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협회의 성격도 변질하게 된다. 그러나 사조(司藻)’에서 과시한 우국의 의지는 오히려 그 강도를 더하고 있다. 이것은 곧 지도부의 임원진과 구성원 사이에 개재하는 심한 괴리현상을 사실로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창작시에 못지 않게 전시대의 시작을 재현하는 데 관심을 보여 선인들의 시편 가운데서 경세(警世)의 목적에 걸맞는 작품을 대량으로 게재하고 있다. 금남(錦南) 최부(崔溥)독송사(讀宋史)를 비롯하여, 어무적(魚無迹)유민탄(流民歎), 권필(權韠)투구행(鬪狗行), 임제(林悌)고산역(高山驛), 정지윤(鄭芝潤)관왕묘(關王廟)와 같은 문제작이 눈길을 끌고 있으며, 특히 김종직(金宗直)동도악부(東都樂府)정도전(鄭道傳)오호도전횡(嗚呼島田橫)을 수록하고 있는 것은 더욱 시사적이다. 동도악부(東都樂府)의 치술령(鵄述嶺)은 바로 박제상(朴堤上)의 이야기이며 오호도전횡(嗚呼島田橫), 전횡과 그의 식객 500인이 함께 죽은 고사다. 의기가 상통하면 500의 무리도 함께 죽을 수 있었던 전범으로 널리 알려져온 이야기다.

 

황성신문사조란에 기고한 하서자(荷西子) 지창한(池昌翰)의 우국시 장충단유감(獎忠壇有感)한 수만 보인다.

 

萬死非難一死難 만 번 죽기는 어렵지 않지만 한 번 죽기가 더 어려운데
人臣大節亂時看 신하 된 자 절개는 난시에 보면 잘 알리라.
吾輩偸生生亦恨 죽어야 할 때 못 죽는 인생 살아도 또한 한이니
秋風痛哭獎忠壇 추풍에 장충단에 가 목놓아 우니노라. 황성신문(縮刷版) 3264,

 

시작의 솜씨는 진솔할 뿐이다. 죽어야 할 때인데도 죽지 못하고 거짓으로 도생(圖生)하는 인생의 비굴한 모습을 강개조로 읊은 것이다.

 

 

이상에서 창강(滄江)영재(寧齋)수당(修堂)매천(梅泉) 등 구한말의 대표적인 문인들의 우국한시와 사조(詞藻)’를 일별(一瞥)해 보았다. 여기서 이들 한시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적인 사실을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무력한 왕권에 대한 불신이다. 절대적 왕권에 대한 정면적인 항거를 피하고 있는 대신에, 역대의 위인 열사들의 추감(追感)을 통하여 문자 그대로 무인지경의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네 사람의 시인이 한결 같이 충무공을 추상한 시작을 남기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위기의식이 미만(彌滿)해 오던 구한말 사회의 불안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망국으로 줄달음질치고 있는 국가의 운명에 대하여 그들의 투철한 시대정신은 이를 담시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비평ㆍ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위대한 사의식(士意識)의 발견이 그것이다. 국가의 운명이 어렵게 되었을 때 이들 문인은 한결같이 글을 읽은 선비의 구실이 어느 때보다 도 어려워진 것을 직감, 그들이 담당해야 할 임무를 찾기에 깊은 시름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또는 사절(死節)로 또는 순국을 통하여 그들의 역사적 임무를 다한 것이다.

 

 

 

의병항쟁은 대체로 그 항쟁을 전개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에 따라 이를 전후 2차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의 반포에 반발하여 기의(起義)한 것이 그 전기의 항쟁이며, 을사늑약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수호를 위하여 거의(擧義)한 것이 그 후기의 항쟁이다.

 

그러나 의병장 중에는 초기의 의병항쟁을 주도한 척사파 지도자들과 같이 명망이 있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을사늑약 이후의 의병항쟁에 참가한 의병장들은 그 대부분이 지방의 궁유(窮儒)가 아니면 상민(常民)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적이나 시문ㆍ잡저와 같은 문학적인 업적은 그 대부분이 처음부터 없었거나 아니면 처음에 있었더라도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국의 시편이나 임절시를 전하고 있는 의병장으로는, 초기의 의병항쟁을 주도한 의암(毅巖) 유인석(柳麟錫)을 비롯하여,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ㆍ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이인영(李麟榮)ㆍ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ㆍ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은찬(李殷瓚)ㆍ동청(東廳) 정환직(鄭煥直)전해산(全海山)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전기 항쟁에 기의한 의병장이 대부분이지만,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후기 항쟁에도 참가하고 있으며, 특히 그들이 남긴 임절시는 대개 후기 항쟁 이후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함께 다룬다. 그러나 문집을 남기고 있는 유인석(柳麟錫)이나 김복한(金福漢) 등의 경우에는 그들의 문집에서 우국시를 찾아내는 것이 용이하지만, 그 밖의 의병장의 경우에는 대부분 기려수필(騎驢隨筆)이나 매천야록(梅泉野錄)등에 임절시가 전하고 있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으므로 그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최익현은 방대한 문집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우국정충(憂國精忠)은 상소문에서 발휘되고 있을 뿐, 우국의 서정을 담은 시편은 한두 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다.

 

 

유인석(柳麟錫, 1842 헌종8~1915, 汝聖, 毅庵)

은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한 초기 의병항쟁의 대표적인 지도자다. 그는 국내에서의 항쟁에서 실패하자 멀리 노령(露嶺)에까지 망명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했다. 그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있던 당시부터 위혁적으로 접근해 오는 서구의 충격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일찍이 강화양난(江華洋亂)과 같은 우국시를 쓰고 있으며 특히 의리를 무겁게 생각하는 그는 중국을 원망한 책망중화(責望中華)도 제작하고 있다. 그가 한꺼번에 여러 편의 우국시를 쏟아놓은 것은 합병을 전후한 시기다. 도왜노합방시사절제공(悼倭奴合邦時死節諸公)을 비롯하여 영오칠적(詠五七賊), 추도일국사의의사(追悼一國死義義士)등이 모두 그러한 것이며 특히 황현(黃玹)의 사절(死節)에 바친 시작은 4수나 된다.

 

강화양난(江華洋亂)은 다음과 같다.

 

昇平世久恬嬉存 태평세월 오래이매 노닐기만 하다가
報急沁城洋祲昏 강화에 급한 보고 양이(洋夷)가 쳐들어왔네.
島民鳥散震宸念 섬사람들은 흩어지고 임금도 놀랐는데
壯士雲興重國恩 장사가 구름같이 일어나 국은이 중하도다. 毅菴集1.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당하여 나라 일을 걱정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러한 뜻을 시에 남긴 일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의암은 이때부터 위혁적으로 접근해 오는 서구의 충격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보인 바 있어 이렇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중국을 원망한 유인석(柳麟錫)책망중화(責望中華)이다.

 

中華夷狄薰蕕似 중화와 이적(夷狄)은 본래 서로 다른데
開化云云合理哉 개화를 운운하여 합리화하단 말가!
如不可無開化事 어쩔 수 없이 개화를 해야 할 판국이라면
宜開吾化化他開 마땅히 내 먼저 하고 남을 개화할지니라. 毅菴集3.

 

철저한 화이사상(華夷思想)으로 무장된 도학자 의암이었지만 개화를 운위하는 중국의 처사를 그대로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대세가 개화를 하여야만 할 형편이 되더라도 내 먼저 개화를 하고 남을 개화하여야 한다는 그의 주체적인 마음 바탕이 잘 나타나 있다.

 

 

김복한(金福漢, 1860 철종11~1924, 元五, 志山)

은 홍주(洪州) 출신이다. 선원(仙源) 김상용(金尙鎔)의 후손이며, 의병장 이설(李偰)과는 내외종간(內外從間)이다. 그는 단발령이 내렸을 때에는 이설 등과 함께 기의하였으며, 1906년에는 다시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홍주에서 기의하였고, 세칭 6의사의 한 사람이다.

 

그가 남기고 간 우국시편 가운데는 이미 앞에서 보인 이충문공묘(李忠武公墓)를 비롯하여 이설(李偰)의 담자운(談字韻)에 차운(次韻)차부암이공담자운(次復菴李公談字韻)문안중근사유감(聞安重根事有感)이 특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차부암이공담자운(次復菴李公談字韻)을 아래에 보인다.

 

獨坐悄然誰公談 초연히 홀로 앉아 누구와 말을 할까?
面墻無路見終南 담벽만 보노라니 남산을 못보겠네.
報君人少堅如竹 대쪽 같은 절개로 나라 위하는 사람 적고
誤國姦多醜似藍 파랗게 된 추한 얼굴로 나라 그르치는 놈만 많구나. 志山集

 

부암(復菴)의 원운(原韻)볼 수는 없으나 이 작품은 학자로서의 면모도 함께 읽게 해준다.

 

 

 

이인영(李麟榮, 1867 고종4~1909 융희3)

은 초기의 을미거사 때 유인석(柳麟錫)이강년(李康秊) 등과 기의하였다가 후일 정미거의(丁未擧義) 때 다시 참가, 13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허위(許蔿)ㆍ민긍호(閔肯鎬)이강년(李康秊) 등과 함께 일거에 서울에까지 진공하였다가 중도에서 부친상으로 퇴거하였다.

 

기려수필(騎驢隨筆)에 옥중에서 지은 임절시 1수가 전하고 있다.

 

分明日月懸中州 밝고 밝은 해와 달 중주(中州)에 떠 있는데
四海風潮濫 온누리에 새 물결 넘쳐 흐르는구나.
蚌鷸緣何相持久 조개와 황새는 어쩌면 저렇게 붙들고만 있는가?
西洲應見漁人收 서양의 어부들이 틀림없이 쓸어 가리라.322)

 

이 시에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개재하고 있는 이질 감각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공연히 서로 싸우기만 하다가는 서양 사람들에게 어부지리를 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이다.

 

 

이강년(李康秊, 1858 철종9~1908 융희2, 樂仁樂寅, 雲崗)

역시 을미거사 때 유인석(柳麟錫)이인영(李麟榮) 등과 기의하였다가 정미의거에도 다시 참가, 호서(湖西) 창의대장(倡義大將)으로 활약하였다. 운강선생창의록(雲岡先生倡義錄)에 전하는 자탄시(自嘆詩) 한 수와 기려수필(騎驢隨筆)에 실려 있는 임절시 한 수가 있다. 특히 이 임절시에는 순국의 최후가 너무도 처절하게 새겨져 있으며, 최후의 순간에도 굴하지 않는 장부의 기개가 불타고 있다.

 

임절시(臨絶詩)는 다음과 같다.

 

五十年來辦死心 오십년을 걸려서 죽을 마음 정했지만
盟師在出終難復 어려운 일 정작 당하니 생각이 많더이다.
臨難已有區區心 맹세코 다시 나왔지만 회복하지 못하였나니
地下有餘冒劍心 저승에 가서라도 칼을 버리지 않으리라.

 

10여년에 걸쳐 천하를 주름잡던 의병장 운강도 막상 죽음에 임해서는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다. 여러 번 거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가는 안타까운 충정(衷情)이 잘 나타나 있다.

 

 

김도현(金道鉉, 1852 철종3~1914, 明玉, 碧棲)

은 영양(英陽) 출신의 유사(儒士). 병신년(丙申年)에 거의하여 여러 번 패했으나 물러나지 않았다. 을사(乙巳)ㆍ경술(庚戌) 간에도 거의(擧義)하려 했으나 90 노친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나중에 부상(父喪)을 지내고 동해(東海)에 나아가 투신자살했다. 역시 임절시 1수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이 그의 임절시(臨絶詩).

 

我生五百末 赤血滿腔腸 조선왕조 마지막에 세상에 나왔더니 붉은 피 끓어 올라 가슴에 차는구나.
中間十九歲 鬚髮老秋霜 그 사이 십구년을 헤매다 보니 머리털 희어져 서릿발이 되었구나.
國亡淚末己 親沒痛更張 나라 잃고 흘린 눈물 마르지도 않았는데 어버이마저 가시는 슬픈 마음 더욱 넓다.
獨立故山碧 百計無一方 홀로 고향산에 우뚝이 서서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이 가이 없다.
欲觀萬里海 七日當復陽 저 멀리 바닷길 보고파 했더니 칠일 만에 햇살이 돋아서 오네.
白白千丈水 足吾一身藏 천 길 만 길 저 물 속에 뛰어들며는 내 한 몸 파묻기 꼭 알맞겠구나. 민족운동사(한국문화사대계 I), p.626.

 

병신년에 거사를 해보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을사ㆍ경술 간에 죽으려고 하였지만 그것마저도 이루지 못하고 백발을 맞이하도록 살아남은 자신의 처신을 생각할 때 죽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 바닷 속에 몸을 던진 시골 유생의 가엾은 충절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물론 경술국치 이후에 씌어진 것이기는 하나 작자가 거의한 것이 초기에 속하므로 이 속에 같이 넣기로 한 것이다.

 

 

 

 

이은찬(李殷瓚, 1878 고종15~1909 융희3)

은 양평 출신의 유생이다. 홍천에서 거의한 관동의병장 이인영(李麟榮) 등과 함께 서울까지 진격하려다가 패퇴, 후일 밀정의 고발로 체포ㆍ처형되었다.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에 우국시 한 수가 전한다.

 

一枝李樹作爲船 오얏나무 한 가지로 배를 만들어
欲濟蒼生泊海邊 온 겨레 건지고자 바닷가에 이르렀네.
未得寸功身先溺 한 치 공도 못세우고 이 몸 먼저 빠졌으니
誰算東洋樂萬年 뉘라서 동양 평화 도모하리요?

 

뜻한 바 있어 거의하였다가 이루지 못하고 먼저 가게 된 안타까운 우국충정이 잘 나타나 있다

 

 

정환직(鄭煥直, 1854~1907)은 영천(永川)

출신이다. 을사늑약에 통분한 고종의 밀지를 받아 아들 용기(鏞基)와 이한구(李韓久) 등에게 거의할 것을 지시, 후일을 기약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전사하자 도찰사(都察使)로 있던 정환직이 분연히 달려와 영덕(盈德)ㆍ청송(靑松) 등지에서 혈투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동대산(東大山) 전투에서 패퇴, 고천(高川)에서 체포되었다. 영천으로 끌려가면서 지은 우국시 한 수가 전한다.

 

身亡心不變 義重死猶輕 몸은 죽어지나 마음마저 변할 건가? 의리가 중하면 죽음이야 가벼운 것,
後事憑誰託 無言坐五更 남아 있는 뒷일을 누구에게 맡기리? 말없이 오경을 앉아서 지새는구나,

 

 

전해산(全海山, ?~?)

은 임실(任實) 출신의 한학자이다. 근위병대참위(近衛兵隊參尉) 이초래(李初來)와 함께 기의하여 후기 의병항쟁에 참여하였다가 영산포(榮山浦)에서 체포되어 대구 왜옥(倭獄)에서 순절하였다. 옥중에서 지은 임절시(臨絶詩)한 수가 있다.

 

書生何事着戎衣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던고?
太息如今素志違 먹은 맘 다 틀어지니 한숨만 나오네.
痛哭朝廷臣作孽 조정 신하 하는 짓 통곡만 나오고
忍論海外賊侵圍 해외에서 쳐들어오는 적 차마 다 말하리까?
白日呑聲江水逝 백일 아래 강물은 울먹이며 흐르고
靑天咽泪雨絲飛 청천에 실비는 눈물을 날리네.
從今別却榮山路 이로부터 영산 길 영영 하직할지니
化作啼鵑帶血歸 죽어서 두견새 되어 피울음을 울리라. 매천야록, p.523.

 

유사(儒士)가 기의하게 된 마음 바탕이 잘 나타나 있다.

 

 

종언(終焉)

 

이상에서 의병장이 남기고 간 우국시를 소략하게나마 찾아보았다.

 

그러나 초기의 의병항쟁에 참여한 몇몇 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거개(擧皆)가 시문집이 전하지 않고 있어, 그들이 죽음에 임하여 남기고 간 한두 수의 임절시(臨絶詩)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몇 편밖에 안 되는 우국시이긴 하지만, 이들 시작(詩作)에서 얻어 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을 추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의병장들은 거개가 문학 수업을 전주(專主)로 한 문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 자체는 졸박(拙朴)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임절시(臨絶詩)에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는 즉현실적(卽現實的)인 사의(思意)가 그대로 표출되고 있어 언외(言外)의 언()을 찾아볼 수 있는 한시학의 오묘를 느낄 수 없다.

 

둘째, 도학자 출신의 의병장들이 남기고 간 시편 속에는 의리를 중하게 여기는 사고가 깊이 작용하고 있어 소활(疏豁)한 맛을 감()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언(餘言)

 

한말(韓末)의 사대가(四大家) 이후에도 경향(京鄕) 각지에서 시를 제작한 선비들이 끊이지 않고 있어 왔으며 지금도 취미생활로 시를 짓는 문사(文士)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편(詩篇)들을 얻어볼 수 있는 공로(公路)가 없는 현실에서는 이들의 시작(詩作)을 수습할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래서 부득이 이 책에서도 다루지 못했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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