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위 속의 생존③
과연 온조는 마한의 약화가 가시화되자 곧바로 마한의 변방을 공략해서 영토를 확장한다. 마한은 반격할 힘이 없다. 마한이 최종적으로 병합되는 것은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의 일이지만 이미 온조 때부터 마한과 백제의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온조는 적극적인 팽창 정책으로 전환해서 치세 말기에는 이미 북쪽으로 임진강, 동쪽으로 오늘날 춘천에 이르는 강역을 이루게 된다. 기원후 20년, 최초로 그는 전국 순시에 나섰는데 무려 50일이나 걸릴 정도였다. 이제 백제는 신생국의 딱지를 떼고 왕국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건, 즉 일정한 강역과 백성을 얻은 것이다.
조상을 잘 둔 덕분에 온조 이후의 왕들은 바깥에 대해 어느 정도 안심하고, 주로 내치에 주력할 수 있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신생국이 법과 제도를 갖추는 지름길은 선진국의 것을 모방하는 방법이다. 게다가 백제는 고구려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고구려의 관제와 행정제도를 모방했을 것이다. 백제 초기의 세부적인 제도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구려처럼 좌보와 우보를 중심으로 편성된 관제나 죄인을 석방하고 사면해주는 제도 등은 확인되고 있다.
백제가 안정을 찾으면서 그 주변 정세도 조금씩 달라진다. 낙랑이나 마한과는 여전히 별다른 마찰이 없다. 말갈은 여전히 잊을 만하면 침략해와서 골칫거리지만 그것도 늘상 있던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달라진 것은 동쪽이다. 기원후 60년 무렵이 되자 백제의 강역은 오늘날 청주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거기서 백제는 처음 듣는 나라와 접촉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신라라는 나라였다.
이 무렵부터 2세기 말까지 100여 년 동안 백제의 대외 관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나라는 신라다. 물론 아직까지 두 나라의 관계는 분명한 색깔이 없다. 백제는 신라와 몇 차례 소규모 전쟁을 벌이는가 하면, 말갈이 신라를 침략하자 신라의 SOS를 받아들여 원군을 파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두 나라는 파트너라기보다는 라이벌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이 점에 관해 『삼국사기』에는 흥미로운 논평이 하나 있다(김부식은 연도별로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하면서도 가끔씩 구미가 당기는 대목이 나오면 論曰, 즉 ‘논하여 가로되’로 시작하는 개인적 논평을 달고 있다). 백제의 4대 왕인 개루왕 시절, 그러니까 155년에 신라의 반역자가 백제로 망명해 왔다. 신라 왕(아달라왕)이 반역자를 압송해 달라고 요청하자 백제가 단호히 거부하면서 양국 관계가 전쟁일보 직전에 이르기까지 악화된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관계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그러나 김부식(金富軾)은 춘추시대의 중국 사례까지 들먹이면서 (이건 김부식의 특기다) 백제 왕의 악덕과 무지를 탓하고 있다. 이런 김부식의 왜곡된 백제관은 백제 본기 다른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그렇게 보면 영호남 지역 감정의 뿌리는 무척 역사가 오랜 것인지도 모른다】. 건국신화 하나 남겨놓은 것 이외에는 아직 역사에 자취도 보이지 않아야 할 신라가 어떻게 해서 한반도 중남부의 패권을 놓고 백제와 다툼을 벌일 만큼 성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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