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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4장 진짜 삼국시대, 바뀌는 대륙풍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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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4장 진짜 삼국시대, 바뀌는 대륙풍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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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는 대륙풍

 

 

만약 북위가 그 전성기에 남조까지 정복해서 대륙의 통일을 꾀했더라면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효문제(孝文帝)는 한반도에서 남진정책을 편 장수왕에게서 별로 자극을 받지 않은 듯하다. 워낙 넓은 대륙이라 한반도와는 사정이 다르다는 판단이었을까? 그러나 쇠는 뜨거울 때 두드려야만 연장을 얻을 수 있다. 효문제의 시대에 번성했던 북위는 그 이후 급격히 약화된다. 이런 북위의 쇠퇴는 중국에서는 물론이지만 한반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분열기치고는 비교적 오랜 기간 북중국을 장악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치적 구심점을 이루었기에 북위에서 불기 시작한 대륙풍의 변화는 동아시아 전체에 심상치 않은 기류를 만들어낸다.

 

우선 즉각적인 결과는 중국의 다원화다. 중국은 다시 분열기의 초기인 3세기의 상황으로 돌아간다. 대륙풍의 방향은 따뜻한 남쪽이다. 말이 북조의 왕조일 뿐 남조에게까지 조공을 받을 만큼 강성했던 북위가 힘을 잃자 남조가 살아났으며, 그에 따라 고구려에 눌려 대중국 외교를 펼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백제가 다시 전통의 우호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남중국에 접근했다.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512년 양나라에 조공하면서 웅진 천도 후 처음으로 중국과 수교한 것은 그런 국제 정세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장수왕(長壽王) 시절부터 거의 매년 북위에 꼬박꼬박 사신을 보내 조공하던 고구려도 슬슬 남조의 양나라를 챙기기 시작한다. 고구려와 돈독한 우호를 유지해 온 북위로서는 물론 심사가 뒤틀리는 일이다. 그로 인한 말기적 증상일까? 장수왕 때도 고구려와 남조 간에 이따금씩 이루어지는 사신 왕래를 저지하지 않았던 북위는 급기야 520년에 고구려 안장왕(安藏王, 재위 519~531)의 책봉 서신을 가지고 가는 양나라 사신을 수도인 뤄양으로 압송하기까지 하는 조급증을 보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위에 정나미가 떨어진(아니면 북위가 몰락하리라는 낌새를 알아차린) 고구려는 양나라에 대한 조공 횟수를 급격히 늘린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다원화의 새 시대를 맞아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신라다. 초기의 혼돈기, 그리고 북위가 가져온 안정기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도약했다면, 이제 새로 다가온 혼돈기를 맞아 그 도약의 바통은 신라가 이어받는다. 때마침 나제동맹 덕분에 신라는 꿀맛 같은 번영을 누렸을 뿐 아니라 양나라에 가는 백제 사신을 따라가서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 루트를 개척하게 되었다. 이제 신라도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대륙풍의 변화는 신라를 위한 변화다. 500년에 왕위에 오른 신라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의 생각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

 

 

 백제사의 흔적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誌石)이다. 야구장 홈플레이트보다 약간 작은 돌에 무령왕의 이름(사마왕)과 죽은 연월일, 매장된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배수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전혀 도굴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이는 그만큼 후대에 백제 역사가 관리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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